소설리스트

검신의 검은 우주를 가르고-223화 (224/448)

9권-23화

이진운은 이들의 부탁을 받아들여줬을 경우를 생각해 보았다.

아키하바라를 찾아가 각종 서브컬처의 동인지와 피규어, 프라모델 등을 잔뜩 사들이는 자신의 모습을.

“······.”

더 이상 상상하고 싶지도 않았다.

조만간 지구로 귀환한 다음 전 세계 각국의 정상들과 회담을 가질 생각이었다. 그리고 협상이 성사된 뒤엔 연합의 존재와 인베이더의 침략에 대한 정보도 차차 단계적으로 대중들에게 공개할 예정이었는데, 그때 연합의 대표로 나서게 될 사람이 바로 자신이었다.

헌데 대중들에게 얼굴이 공개된 상태에서 오타쿠들의 성지 이키하바라를 방문한다?

‘안 돼! 절대 안 돼!’

이진운은 고개를 절레절레 가로저었다.

어지간한 일로는 흔들리지 않는 심기를 가진 자신이지만, 저 녀석들 부탁을 들어주다가 전 세계 사람들에게 오타쿠로 낙인찍히기라도 하면 그날로 수치사 할지도 몰랐다.

딱 잘라 거절하려고 입을 열려던 그때였다. 지금까지 말없이 서 있기만 하던 용천군이 다가왔다. 그리고는 로베르트 슈마허와 사토 류지에게 손을 뻗어 그들을 뒤로 밀어내었다.

“뭔가, 자네?”

“왜 막고 그래? 아직 부탁 끝나지 않았단 말이야!”

두 사람이 항의했지만, 용천군은 들은 척도 하지 않았다. 오히려 더 멀찌감치 밀어낼 뿐이었다.

‘그래도 조금은 상식 있는 녀석이 있었군.’

두 녀석을 떼어내 준 용천군에게 고맙다는 말을 하려던 그때, 용천군이 말없이 무언가를 내밀었다. 이진운은 그게 뭔가 싶어서 받아보자, 그건 어떤 구매목록이었다.

그 내용은 앞선 두 녀석과 크게 다르지 않았다.

“용천군 너마저······!”

이진운은 끝내 부루투스에게 배신당했던 카이사르와 같은 얼굴로 그 한마디를 내뱉고 말았다.

* * *

이진운으로서는 다시 생각하고 싶지도 않은 배웅이 끝난 뒤, 모함인 카멜롯에 올랐다.

그때, 누군가가 그의 뒤에 따라붙었다.

혹시나 싶어 돌아보자, 거기에는 멀린이 서 있었다.

이진운은 한발 물러서면서 께름칙하다는 얼굴로 물었다.

“설마 너도?”

“에이, 그런 거 아니니까 얼굴 좀 펴시죠. 녀석들에게 시달린 건 알겠는데, 전 그런 부탁 하러 온 게 아나니 말입니다.”

“그럼 무슨 일이지?”

앞서 찾아왔던 녀석들과 다른 용건이라는 말에 이진운은 내심 안도하면서 물었다. 하지만 방심할 순 없었다.

속내를 알 수 없는 이 작자도 무슨 골 때린 부탁을 해올지 모르는 일이었으니까.

“지구로 돌아가신다고 하니 한 가지 말을 해둘 게 있어서요.”

“뭔데? 말해 봐. 하지만 이상한 이야기라면 들어줄 생각 없으니 돌아가고.”

이진운은 멀린을 노려보듯 응시하며 경고했지만, 그는 아랑곳하지 않고 말했다.

“언젠가 시간이 나시면 이진운 씨께서 직접 스톤헨지에 한번 방문해주셨으면 좋겠군요.”

“스톤헨지?”

“영국에 있는 솔즈베리 평원에 있는 그 스톤헨지 말입니다.”

이진운도 스톤헨지가 무엇인지는 대충 알고 있었다. 영국에 있는 아주 오래된 돌무더기 아닌가. 그것이 무덤인지 무슨 종교에 관련된 것인지 지금도 의견이 분분한 유적인데 거길 방문해 달라고?

“왜지? 내가 왜 가야 하는데?”

“그건 가보시면 압니다. 그곳은 지구에 있어 아주 중요한 곳이거든요. 이제는 아는 사람들도 없지만요.”

“수수께끼 같은 말만 하는군. 더 자세히 말해줄 생각은 없나 보지?”

이진운은 멀린이 이런 부탁을 하는 것 자체가 수상스러웠다. 하필이면 왜 자신더러 스톤헨지를 가보라는 것일까?

그러면서도 제대로 된 이유조차 설명해주지 않는 것 자체가 마음에 안 들었다.

그런 이진운의 거부감을 읽은 멀린이 전혀 생각지도 못한 말을 꺼내놓았다.

“이진운 씨께서는 아시는지 모르겠지만··· 오래 전에 우리 지구에도 분명 영능이 존재했습니다. 하지만 지금은 어느 누구도 영능에 대해 알지 못하고 있죠. 그리고 영능을 각성할 수조차 없고요. 허면 왜 그럴까요?”

“···너, 설마 그 이유를 아는 거냐?”

이진운은 크게 놀란 얼굴로 멀린을 노려보았다. 예전부터 속을 알 수 없는 녀석이라 생각해 왔는데, 뭔가 비밀이 있었다는 건가?

게다가 지구의 영능이 금제된 이유라니! 심지어 오래 전에 지구에도 영능이 실존했었다는 것까지 확신하는 걸 보면 놈도 보통 인물은 아니었다.

“자세한 건 비밀입니다.”

입술 앞에 오른손 검지를 세워 보이며 장난스럽게 웃는 멀린. 녀석은 그 이상 알려주지 않았다.

“후우······.”

이진운은 가볍게 한숨을 내쉬었다. 마음 같아선 주리를 틀어서라도 자세한 이야기를 듣고 싶었지만, 멀린은 그렇게 호락호락한 인물이 아니었다.

솔직히 말해 그의 능력인 환몽의현은 울브스보다 몇 차원 위의 것이다. 이진운을 어쩌진 못해도 그의 공격을 피해 도망치는 것은 얼마든지 간단히 할 수 있었다.

“좋아. 한번 찾아가 보지. 하지만 내가 다시 돌아왔을 때도 또 한 번 비밀 운운한다면 참고 있지만은 안겠다는 걸 알아두는 게 좋을 거다.”

“때가 되면 이진운 씨도 다 알게 될 겁니다. 자연스럽게 말이죠. 그럼 나중에 다시 뵙죠.”

이진운의 엄포에도 그렇게 천연덕스럽게 대꾸한 멀린은 언제나처럼 홀연히 사라졌다. 존재 자체가 이곳에서 완벽하게 소실된 것이다.

“스톤헨지라. 거기에 뭔가 비밀이 있다 이건가.”

안 그래도 지구의 각국 정상들과 회담할 일로 골머리가 아플 지경이었던 상황에서, 또 하나의 고민거리가 던져졌다.

그것도 보통 고민거리가 아닐 듯싶었다. 반신 격까지 다다랐던 그의 예감이 그렇게 부르짖고 있었다.

하지만 지금은 이걸 고민하고 있을 때가 아니다. 카멜롯의 메인 브릿지에 도착한 이진운은 곧바로 출발 명령을 내렸다.

“지금 즉시 지구를 향해 출발한다. 아르페인 함장은 나를 대신해 본 함대를 통솔하도록.”

“예! 알겠습니다. 사령관님.”

그 말이 끝나기 무섭게 인피니티 킹덤 전체와 관리국에서 지원해준 공업함과 수송함이 동시에 추진부스터를 점화했다.

그들은 얼마 지나지 않아 아르탈 행성의 대기권을 벗어났고, 금세 우주 공간에 진입하였다.

하지만 우주진입은 시작에 지나지 않는다. 이곳에서 지구까지 빠른 시간 안에 도달하려면 평범한 항행으론 절대 불가능한 일이니까. 이곳에서 지구까진 무려 3만 광년이나 떨어져 있었다. 그나마 지구에서 가장 가까운, 연합 중에서 변두리에 속한 행성도 300광년 정도의 거리가 있으니 얼마나 멀리 떨어져 있는지 알 수 있을 것이다.

“이제부터 워프 항행에 들어간다. 목표는 지구! 그곳까지 이어지는 웜 홀을 연다!”

[워프 항행 경로 탐색! 최단 경로 지정!]

[함대 전면에 대형 변동중력원 형성합니다! 웜 홀 게이트 개방!]

우우웅!

우주공간이 이지러짐이 생겨나면서 함대 전면에 커다란 구멍이 형성되었다. 변동 중력원으로 뚫어낸 시공간의 터널 웜 홀이었다.

[웜 홀 게이트 유지 안정적인 수준 유지!]

[돌입합니다! 워프 인.]

웜 홀 게이트의 안정성이 확인되자마자 인피니티 킹덤 함대는 그 안으로 진입했다. 그리고 함대 전체가 안으로 진입한 뒤, 웜 홀은 언제 존재했냐는 듯 감쪽같이 사라졌다.

헌데 함대가 사라진 직후, 그곳으로 누군가가 슬며시 모습을 드러내었다. 그는 예전과 마찬가지로 가면을 쓰고 있는 리겔이었다.

좀 전까지 모습과 기척을 감추고 있다가 이제야 드러낸 것이다.

[역시 지구로 떠났군. 계획했던 대로다.]

이진운과 인피니티 킹덤의 움직임은 진작부터 파악하고 있었다. 최근 연합과 관리국이 정보유출 문제로 꽤 이곳저곳 들쑤시는 바람에 예전보다 기밀을 접하는 게 쉽지 않았지만, 인피니티 킹덤의 지구행에 대해선 큰 비밀도 아니라서 쉽게 알아낼 수 있었다.

[적어도 수개월 내로 돌아오진 못하겠지.]

가장 짧게 잡은 게 수개월이지, 사실 1-2년 안에 돌아온다고 말하기도 어려웠다. 단순히 지구를 연합에 가입시키는 게 아니라, 그들의 뒤떨어진 과학기술을 최저 수준까지 끌어올려야 하기 때문이었다.

그건 단순히 지식만 제공한다고 해결될 문제가 아닌 만큼, 단기간에 돌아오긴 어려울 게 분명했다.

[성가신 놈들이 떠났으니, 예정대로 계획을 진행해 나가야겠지.]

솔직히 말해 이진운과 그 일행은 리겔에게 있어 무척이나 껄끄러운 존재였다. 자신의 동생인 리클 때문이기도 했지만, 그들이 얽힐 때마다 이쪽이 추진해왔던 계획들이 매번 파탄했기 때문이었다.

마음 같아선 제거하고 싶지만, 이젠 그것조차 쉽지 않게 되었다. 불과 2년 사이에 이진운은 천외오천과 동급이 되었고, 그 일행들도 만만찮은 실력자가 되어버렸으니까.

놈들을 확실히 제거하고자 전력을 동원하려면 적어도 도무누스와 동급인 반신 급이 나서야 된다는 말이었다.

안 그래도 움직일 전력이 마땅치 않은 지금으로선 불가능한 일이다. 자칫 연합을 자극해 전면전이 벌어질 수도 있는 데다, 진행하던 계획에 또 다른 통제 불능의 변수를 낳을 수 있기 때문이었다.

그래서 일부러 지구가 존재하는 방면으로 인베이더의 침략권을 확장함으로서, 이진운과 인피니티 킹덤을 그곳으로 보내버린 것이다.

[지금은 어쩔 수 없이 이렇게 보내지만 네놈들이 돌아올 땐 사정이 좀 다를 거다.]

그렇게 중얼거린 리겔은 이곳에 나타날 때처럼 홀연히 모습을 감추었다.

* * *

워프 항행에 들어간 지 보름 뒤, 인피니티 킹덤은 드디어 태양계 인근에 도달했다. 그들이 워프 아웃 한 지점은 태양계에서 천왕성이 자리하고 있는 근처 주역이었다.

함선 바깥으로 보이는 우주의 정경을 확인한 지구 출신의 오버러들이 감회롭다는 듯 중얼거렸다.

“와, 진짜 천왕성이잖아!”

“설마 우주에 나와서 천왕성을 내 눈으로 직접 보게 될 줄이야. 참 세상 일이란 알 수가 없다니까.”

하지만 그들과 달리 함대를 통제하는 오퍼레이터들은 정신이 없었다. 지구인들이 놀라지 않게 하려면 함대의 모습을 철저히 은폐해야 했기 때문이었다.

물론 우주를 관측하는 지구의 기술은 대단치 않았지만, 그래도 완벽을 기할 필요가 있었다.

[감속을 통해 함대의 항행 속도 최저로 유지.]

[광학 스텔스 작동! 지금부터 지구의 모든 관측에서 벗어납니다.]

그렇게 함대의 은폐 작업이 끝난 뒤에야 오퍼레이터들은 그제야 한숨을 돌릴 수 있었다.

함대의 전진 속도가 생각보다 많이 늦어지자, 이진운이 아르페인에게 그 이유를 물었다.

“속도를 꽤 많이 늦췄군. 이제 거의 다 왔는데 그럴 필요가 있나?”

“태양계라고 해 봐야 거리는 얼마 안 됩니다. 여기서 지구까지 순식간이지요. 하지만 그런 식으로 고속으로 움직이면 흔적이 남습니다. 그리고 지구에 어떤 영향이 미칠지 모르고요. 그래서 신중하게 다가가고자 하는 겁니다.”

“그렇군.”

물론 함대가 빠르게 접근한다고 해서 자연재해 같은 게 지구에서 발생할 리는 없겠지만, 지구에서 쏘아올린 위성 같은 것들은 큰 문제를 일으킬 것이다. 연합의 기준으로 본다면 워낙 원시적인 수준이기 때문이었다.

하긴 우주에서 날아드는 운석 파편이나 데브리 따위로부터 스스로를 보호 할 수도 없는 위성들이니 더 말할 것도 없었다.

“그래봤자 하루면 도착할 겁니다. 느긋하게 기다리시지요.”

“음.”

이진운도 자신의 조급한 마음 때문에 멀쩡한 위성들을 추락시켜서 지구에 재앙을 불러일으키고 싶은 마음은 없었다. 그래서 잠자코 기다리기로 했다.

그리고 조금씩 시간이 지나, 드디어 지구 주변을 도는 달의 모습이 비쳐지기 시작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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