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검신의 검은 우주를 가르고-222화 (223/448)

9권-22화

그렇게 이진운의 일행과 윤재민의 만남이 성사되었다. 그 첫 대면은 어색함 그 자체였다.

“처음 뵙겠습니다. 윤재민이라고 해요.”

“저, 그러니까··· 스승님의 동생이라고요?”

공손하게 고개를 숙여 먼저 인사해온 윤재민의 모습에 아리엔과 일행이 조심스럽게 반응을 보였다. 먼저 말을 건 것은 아리엔이었다.

“예, 친동생은 아니지만요. 같은 곳에서 함께 자란 사이죠. 그래서 형하고는 거의 친형제나 다름없어요.”

자신을 그렇게 소개한 윤재민은 일행들과 빠르게 친해지기 시작했다. 보육원에서 다양한 아이들을 돌보다 보니, 처음 만난 사람들임에도 불구하고 친숙해지는 속도가 장난이 아니었다.

‘하긴 저 녀석이 어려서부터 친화력 하나는 대단하긴 했지.’

보육원에서 자랄 당시, 이진운은 늘 혼자였다. 정신연령이 맞지도 않는데다, 따로 수련할 시간이 필요했기 때문이었다.

그래서 같은 보육원 아이들과 겉돌았고, 혼자 있는 경우가 많았다. 그리고 아이들도 이진운에게 쉽게 다가오지 못했다. 전생을 자각하고 있던 이진운에게는 다른 아이들에게 없는, 일종의 위압감 비슷한 게 느껴져서였다.

헌데 그런 이진운에게 먼저 서슴없이 다가왔던 것이 바로 윤재민이었다. 처음에는 자꾸 말을 걸고 친한 척 해오는 윤재민이 귀찮았지만,

아마 윤재민이 아니었다면 이진운은 보육원에서 독립하는 그날까지 아무와도 마음을 터놓지 못한 채 지냈을 것이다.

윤재민과 아리엔들이 빠르게 친해지는 광경을 뒤에서 물끄러미 지켜보던 리스티가 이진운 옆에서 감탄사를 토했다.

“와, 신기해. 아저씨는 그냥 아싸일 줄 알았는데 동생도 다 있었네요. 심지어 무지 착해 보여.”

“이 녀석이?”

설마 이런 곳에서 이 녀석에게 아싸란 표현을 듣게 될 줄이야. 이진운은 괘씸한 마음에 꿀밤을 먹여 응징했다. 그러자 리스티가 아픔을 호소하면서 날뛰었다.

“악! 아프다고요! 폭력 반대!”

“그런데 아싸란 표현은 어디서 배웠어?”

이진운이 주먹을 든 채로 위협하듯 묻자, 리스티가 즉각 토설하였다.

“듀렌 박사님이요.”

“······.”

이진운은 잠시 어이가 없어 할 말을 잃었다.

‘그 노인네가 대체 이 녀석에게 뭘 가르쳐준 거야?’

이상한 말을 가르친 것도 골 때리는데, 이건 심지어 한국에서 쓸 법한 표현들이었다. 미국인 주제에 한국의 젊은 애들이나 쓸법한 유행어들은 또 어떻게 알고 있는 거지?

하도 기가 차서 고개를 절레절레 저은 이진운은 더 이상 묻기를 포기했다. 더 자세히 물었다가는 무슨 소리가 나올 지 짐작이 안 가서였다.

그래서 이진운은 대화의 주제를 바꿨다.

“아무튼 너도 준비하고 있어라. 지구에 간다는 건 알고 있겠지?”

“그럼요. 준비하고 있죠. 지구에서 구할 수 없는 연구기재나 재료들도 잔뜩 모아들이고 있다고요.”

고개를 끄덕이면서 자신만만하게 대답하는 리스티. 하지만 이진운이 걱정하는 건 그런 게 아니었다.

“그러면 지금 연구하고 있는 에메랄드 헤븐은 어떻게 할 거냐?”

“같이 가지고 갈 생각이에요. 지금 하고 있는 연구에도 필요하고요. 게다가 약간의 개조를 거치면 좀 더 좋게 쓸 수 있을 것 같더라고요.”

에메랄드 헤븐은 우주항행이 가능한 이동요새에 가까운 행성이었다. 무수한 세계수로부터 흘러나오는 막대한 영력은 심지어 워프 항행까지 가능하게 해준다.

그래서인지 최근 리스티는 이 에메랄드 헤븐을 이것저것 손보는 데에 정신이 팔린 상태. 뭘 어떻게 하는 건지는 모르겠지만, 그녀가 이걸 놔두고 갈 리가 없다는 건 이진운도 이미 예상하고 있었다.

그래서 포기시키는 대신 한 가지만 당부하기로 했다.

“휴, 그래? 가져갈 생각이라면 광학 스텔스 기능은 철저히 해 놔라. 그거 그냥 끌고 갔다간 지구인들이 죄다 패닉을 일으킬 거다.”

“하긴 함대에 행성에··· 놀라 까무러칠 만도 하겠네요. 문명 레벨도 고작 4레벨 수준이라고 했으니······.”

리스티도 납득했다는 듯 고개를 끄덕거렸다.

우주진출도 제대로 못한 문명이라면, 너무 과도한 오버 테크놀러지를 동반한 함대나 행성요새를 노출시키는 일은 최대한 자제해야 했다.

물론 지구도 앞으로는 자체적으로 전함을 제작해야 하겠지만, 현재 지구가 처한 입장이 어떤지 지구인들 스스로가 알기 전까지는 노출을 피할 생각이었다.

그래서 엘레나의 가문을 통해 각 국의 정상들과 따로 회담을 하려 했던 것이다.

“그건 그렇고··· 리클, 자네는 어떻게 할 거지?”

“저는 아무래도 이곳에 남아 있어야 할 것 같군요. 해야 할 일이 많아서 말이죠.”

리클은 대답하면서 쓴웃음을 흘렸다.

그럴 수밖에 없었다. 그동안 비축해왔던 막대한 양의 디멘션 쿼츠를 라인트라 대전에서 대부분 소모해버렸기 때문이었다.

그 결과, 운송 사업에 차질을 빚을 수밖에 없었던 것이다. 리스티가 이걸 양산할 방법을 찾아냈다곤 하지만, 이걸 도입하려면 조금 시간이 필요했다.

그때까진 어떻게든 디멘션 쿼츠를 최대한 만들어서 버티는 수밖에 없었다.

“사정이 그렇다니 어쩔 수 없지. 그럼 리클은 이곳에 남아서 사업에 집중하는 게 좋겠군.”

이진운은 리클의 뜻을 존중해주기로 했다.

당장 인베이더가 쳐들어온다면 모를까, 놈들이 지구에 손길을 뻗을 때까지는 아직 3년이란 시간이 남았다.

솔직히 지금 현재 상황에서 리클을 데려간다 해도 그가 지구에서 마땅히 할 만한 일이 없었다.

“참 회사에 말을 해뒀으니, 도움이 필요하면 언제든 말만 하면 되요.”

“예, 그러도록 하죠. 리스티 양.”

애당초 디멘션 쿼츠를 제공해줄 때부터 약조했던 사항이었다. 사업에 관한 문제나 재력적인 문제를 리스티가 해결해주기로 말이다.

디멘션 쿼츠의 재고 부족으로 당분간 어렵긴 하겠지만, 지금의 위기만 넘기면 리클의 사업은 전보다 더 크게 번창하게 될 것이다.

하지만 그런 이유만으로 리클을 이곳에 남겨두는 건 아니었다.

“그리고 말인데, 나중에 여유가 된다면 공화국 쪽을 예의주시해서 살폈으면 해.”

“공화국을 말입니까?”

이진운의 던진 그 말에 리클의 두 눈이 깊게 가라앉는다.

“그래, 전에 들었었겠지만 그쪽이 여러모로 수상하지. 전쟁이 끝난 후에 조사를 해볼 생각이었는데, 하필 지구가 위험하게 되어서 내가 조사할 여유가 없군.”

만일 지구 문제만 아니었다면 이진운은 직접 공화국으로 찾아가 조사부터 시작했을 것이다. 하지만 지구의 침공 가시권 진입이 3년밖에 안 남은 지금은 지구행이 우선이었다.

“관리국은 어떻답니까?”

“관리국도 지금 전쟁을 치른 뒷수습에 여념이 없어. 가장 큰 전쟁터가 라인트라였을 뿐, 다른 곳에서도 벌어지는 인베이더의 침공은 아직도 현재진행형이니까.”

“그렇군요.”

베네트 국장에게도 말을 해 봤지만, 그도 난감하다는 기색이 역력했다. 공화국은 엄연히 연합과 비견되는 외부의 거대 세력이었다. 평상시라도 조사하는 게 쉽지 않은데, 라인트라 대전으로 남아있던 여력까지 소모한 지금 조사하는 게 쉬울 리 없었다.

리클은 납득했다는 듯 고개를 끄덕이며 말했다.

“알겠습니다. 제가 나름대로 공화국 내부를 조사해보죠. 저희 형이 연관되어 있다고 하니 안 맡을 수가 없군요.”

“그래도 조사보다는 네 안전이 우선이니, 최대한 조심해서 접근해야 할 거다.”

“물론이지요. 형을 다시 만나기 전까지는 제 안전만큼은 철저히 지킬 겁니다.”

공화국의 조사 문제도 이렇게 리클에게 맡긴 이진운은 조용히 한숨을 내쉬었다.

‘왠지 놈들의 수작에 놀아나고 있는 느낌이군.’

애당초 놈들이 전쟁을 시작한 타이밍부터가 수상스러웠다. 공화국을 조사하려던 시점에 전쟁이 터지다니. 게다가 이번에는 인베이더의 침략 가시권이 확대된 문제로, 지구의 일을 서두를 수밖에 없게 되기까지 했다.

이건 마치 일부러 공화국의 조사를 방해하는 것 같지 않은가? 우연이라 하기엔 모든 정황이 그렇게 보였다.

‘괜한 기우인가?’

이진운은 고개를 설레설레 저었다. 심증은 있어도 뚜렷한 증거는 없는 상황이었다.

물론 그때 봤던 비밀시설에 대한 흔적이 공화국 내부와 이어져 있다곤 하지만, 그것만으로 인베이더와 리겔이 자신의 조사를 방해하기 위해 이토록 일을 복잡하게 꾸몄다고 확신하긴 어려웠던 것이다.

“조사해보면 뭔가 나오긴 나오겠지.”

이진운도 그냥 리클에게만 조사를 맡길 생각은 없었다. 리스티가 가진 기업들도 우주 각지의 정보를 입수하기 위해 상당한 규모의 조사단체를 보유하고 있는 만큼, 그들을 통해서도 조사를 진행할 생각이었다.

* * *

어느덧 시간이 흘러 드디어 인피니티 킹덤이 지구로 향하는 날이 되었다.

준비를 마치자, 베네트 국장은 물론 천외오천들까지 함대가 있는 곳까지 배웅을 나와 주었다.

먼저 말을 건네온 것은 연정운이었다.

“그래, 잘 갔다 와라. 내 몫까지 편히 쉬다 와.”

“이봐, 지금 놀러 가는 거 아니다. 일하러 가는 거야.”

이진운이 설핏 노려보자, 연정운이 너스레를 떨었다.

“그래도 인베이더 놈들과 싸우는 것보단 낫잖아. 그 정도면 휴가지, 휴가.”

“휴가는 무슨, 벌써부터 골머리가 다 아파온다. 지구의 정치인 놈들도 어지간히 머리가 굳어서 말을 들어 처먹지를 않을 텐데, 온건하게 일을 처리하려니 여러모로 골치가 아파.”

“힘을 보여 줘. 그런 놈들에겐 그게 제격이니까. 압도적인 힘만 보여주면 설설 기는 것들이니, 그 이후에는 아주 쉬울 걸?”

“네 말처럼 쉬웠으면 얼마나 좋을까?”

대수롭지 않게 말하는 연정운의 태도에, 이진운은 한숨을 내쉬었다. 싸움은 잘해도 이런 쪽으로는 도무지 도움이 되질 않는 녀석이었다.

연정운 다음에는 베네트 국장이 말을 걸어왔다.

“아무튼 지구의 문제는 자네에게 일임하지. 그럼 잘 다녀오게.”

“믿고 맡겨주셔서 감사합니다.”

“별 말을.”

베네트 국장은 피식 웃고는 그 자리를 떠나갔다. 라인트라 대전 이후 그만큼 시간이 부족할 만큼 바빴기 때문이었다. 그가 배웅을 나온 것도 없는 시간을 애써 쪼개고 쪼갠 결과물이었다.

그가 가고 나자, 이번에는 천외오천 중 로베르트 슈마허와 사토 류지가 달라붙었다. 그들은 지구로 떠나는 이진운에게 배웅인사 대신 어떤 데이터를 모듈밴더를 통해 건네 왔다.

“이진운, 부탁하겠네. 부디 이것을!”

“이봐, 나도 좀 부탁 좀 하겠어. 여기선 견딜 수가 없다고!”

‘뭐지?’

이진운은 뭔가 싶어 그 자리에서 데이터를 열어보았다. 그것은 어떤 목록이었다. 그것을 읽어 내려가던 이진운은 곧 황당한 표정이 되었다.

“······.”

그것은 다름 아닌 서브컬처들 목록이었다. 그들이 지구에서 즐겨보던 애니나, 만화, 그리고 소설에 대한 목록과 프라모델이나 피규어 같은 여러 가지 다양한 품목에 대한 내용이었던 것이다.

그걸 지금 이진운보고 대신 구입해 가져와 주었으면 하는 것이다.

이진운은 하도 기가 차서 물었다.

“···지금 이걸 나보고 사다 달라 이거냐?”

“그게 우리의 유일한 삶의 낙이다. 이 기회를 포기할 순 없잖냐? 그렇다고 직접 갈 수도 없고!”

“우리도 휴가 갈 수 있었으면 이런 부탁 하지도 않았어! 그러니까 제발!”

처절하기까지 한 그 모습에 이진운은 아무 말도 하지 못했다. 들어주지 않는다고 하면 절대 그냥 보내주지 않을 기세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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