9권-20화
지구의 상황을 머릿속으로 그려본 아르페인은 조금 심각한 얼굴이 되었다.
“음, 그렇다면 큰 문제군요. 영능이 없던 곳이라면 아마 사회적으로 큰 혼란이 빚어질 겁니다.”
“그래서 그에 대한 대비책도 필요한 거다. 지구권 통합을 서둘러야 하는 것도 바로 그래서고.”
이쯤 되니 이진운이 생각하고 있는 바가 구체적으로 어떤 것인지 대충 짐작이 갔다. 아르페인은 고개를 끄덕거렸다.
“흐음, 그렇다면 통합을 좀 더 서둘러야 할 필요가 있겠군요. 적어도 시스템에 의한 각성이 시작되기 전에 영능력자들에 대한 법과 제도를 정착시키려면 지구권을 하나로 묶는 게 보다 효율적이고 효과적일 테니 말입니다.”
“그렇지. 단지 연합에 가입하는 필요조건이 아니더라도 지구권 통합은 필수 불가결할 수밖에 없어.”
이제부터 지구는 수많은 영능력자들이 탄생할 것이다. 그리고 그들을 일괄적이고 체계적으로 관리할 시스템이 필요했다.
만일 지구권 통합 없이 이들의 관리를 각 국의 재량에 맡겨둔다면 앞으로 어떤 일이 발생할 것인가?
상상할 수 없는 혼란이 빚어질 것이다. 영능력자들을 이용한 온갖 불법적인 일들이 횡행하고, 무수한 범죄가 발생할 테니까.
그나마 체계가 잘 잡힌 선진국에서는 어느 정도 통제가 되겠지만, 치안이 불안정한 후진국에서는 마피아나 갱단들이 활개를 칠 게 분명했다.
특히 중동의 테러리스트들은 그런 영능력자들의 힘을 이용해 그동안 시도해보지 못했던 온갖 다양한 방식으로 테러를 시도할 터. 전 세계를 삽시간에 공포로 몰아넣고도 남을 것이다.
하지만 선진국이라고 해서 마냥 안심할 순 없었다. 겉으로는 점잖은 척 해도, 보이지 않는 곳에서는 무슨 짓이든 할 수 있는 게 바로 선진국들이니까.
그들은 국가를 위한다는 명목 하에 영능력자들의 능력과 힘의 구현원리를 해명하기 위해 수단과 방법을 가리지 않을 것이다. 그리고 가혹한 인체실험도 비일비재하게 벌어지겠지.
그런 것들을 일괄적으로 확실히 통제하기 위해서라도 지구권의 단일화가 필요한 것이다.
하지만 지구권을 통합한다고 해서 그걸로 끝나는 게 아니었다. 이렇게 각성한 영능력자들을 어떻게 관리하고 육성하는지도 중요했다.
아리엔도 거기에 생각이 미쳤는지 그 점을 지적하고 나왔다.
“스승님, 그러면 막 각성한 영능력자들의 관리는 어떻게 하죠? 법과 제도야 그렇다 쳐도, 그 사람들은 영능에 대헤 아무것도 모르잖아요. 금제가 해제된다 해도, 지구에는 영능을 다루는 학문이나 운용법이 없는 걸로 아는데요. 물론 스승님은 예외지만요.”
그랬다. 그녀의 말처럼 지구에는 영능을 다룰 수 있는 지식이 전무한 상황이었다. 제아무리 시스템이 각 사람들의 각성을 촉발시켜준다 하더라도, 그게 전부일 뿐이다.
제대로 능력을 개화시키려면 그만한 이론과 체계, 그리고 점진적인 학습이 필요했다.
그리고 그에 대해선 이진운도 이미 생각해 둔 바가 있었다.
“그래서 너희들의 도움이 필요한 거다.”
“예?”
도움이 필요하다는 말에 다들 의아한 표정을 짓는 일행들. 하지만 아리엔만큼은 그가 무슨 말을 할 지 이미 알아챈 눈치였다.
“설마 저희들에게 그 사람들 교육을 맡기시려는 건가요?”
“그래, 앞으로 무예에 관한 부분은 너희에게 맡길 거다. 즉, 너희들이 교관이 되는 거지.”
그 말에 다들 어안이 벙벙한 표정이 되었다. 아리엔이야 가문에서도 종종 사범 역할을 해봤으니 크게 대수로울 것 없다는 반응이었지만, 나머지 일행들은 그렇지 못했다.
지금도 한창 배우고 있는 처지인 상황이니, 누굴 가르친 경험이 있을 리가 없었다.
엘레나가 손으로 자신들을 가리키며 물었다.
“···저희가요?”
“왜? 어려울 것 같아?”
“조금요. 솔직히 말해 저흰 누굴 가르칠 입장이 아니잖아요. 아직 배워야 할 것도 많고요.”
그 말에도 일리는 있었다. 그동안 혹독한 지도를 받으면서 실력을 급격히 끌어올리긴 했지만, 그게 전부일 뿐이다. 이론이나 기초적인 부분에 대해선 조금 미흡한 것도 사실이었다.
“그럴지도 모르지. 하지만 내가 너희에게 바라는 건 그리 큰 게 아니다. 무예를 선택한 사람들에게 아주 기본적인 것만 알려주면 충분해. 너희들이 처음 배웠던 그런 것들 말이다.”
“으음··· 그 정도라면야.”
처음에 배웠던 것들을 조용히 떠올려보던 클레브가 고개를 주억거렸다. 절학도 아니고 기초적인 무공과 그 개념을 가르치는 정도라면 크게 어려울 것 없다고 생각한 것이다.
그건 다른 이들도 마찬가지였다. 물론 가장 늦게 무공을 익히기 시작한 레이첸은 그래도 난감하다는 표정이었지만, 막상 닥치면 나름 잘 해낼 녀석이었다.
하지만 아리엔은 손을 들어 이의를 제기했다.
“저, 무공의 기초는 그렇다 치는데요? 그럼 다른 것들은요? 이능도 종류가 엄청 많잖아요. 특히 마법이라든가······.”
“물론 그 점도 고려를 했다. 마법은 내가 가르칠 거다.”
“스승님이요? 마법을요?”
“그래, 나도 나름 마법에 대한 지식이 있다. 사용도 할 줄 알지. 그 정도면 되잖아.”
뜻밖이란 표정으로 묻는 아리엔의 물음에 그렇게 대답하면서 이진운은 잠시 떠올렸다.
아르탈 행성에 소환된 이후, 자신의 머릿속엔 영문 모를 지식들이 계속해서 떠오르고 있었다. 그 중에는 마법도 있었고, 과학기술도 있었으며, 그 외에 다양한 영능학에 대한 지식들로 가득했다.
물론 무조건적으로 떠오르는 건 아니었다. 그에 해당하는 지식을 접할 때마다 그것이 일종의 방아쇠로 작용하면서 연쇄적으로 떠오르는 식이었다.
덕분에 지금 이진운은 전생에 익혔던 무공 외에도 마법을 사용할 줄 알았다. 그리고 정령술을 비롯한 다양한 이능들도 다룰 수 있었다.
‘대체 뭐가 어떻게 되가는 건지······.’
자기 자신조차 영문 모를 이 지식들 때문에 이진운은 내내 의문을 지울 수가 없었지만, 그렇다고 해서 이것들을 최대한 활용하지 않을 이유는 없었다.
그동안 무공이나 진법, 술법에 관한 이론들을 리스티와 함께 마도공학 기술로 재창조 할 수 있었던 것도 바로 이런 지식들이 있었기에 가능했던 것이다.
그가 마법 교육을 맡겠다고 자신 있게 말할 수 있었던 것도 바로 이런 지식들 때문이었다.
“뭐, 그렇기야 한데···. 솔직히 말해 리스티가 맡을 줄 알았어요. 리스티가 마법 실력도 대단하잖아요.”
“하지만 그 녀석은 바빠. 연구하는 것만 해도 시간이 부족할 지경인데, 누굴 가르칠 시간은 더더욱 없지. 그래서 내가 맡기로 한 거다.”
이진운도 마법을 가르칠 교관으로 리스티를 생각해 보지 않은 건 아니지만, 녀석은 지금도 한창 바빴다. 특히 이번에 에메랄드 헤븐 하나를 통째로 손에 넣으면서, 그것을 가지고 이것저것 시도해보느라 정신이 없었다.
이진운의 호출을 받았음에도 불구하고 지금 이 자리에 출석하지 않은 것만 봐도 얼마나 시간 가는 줄 모르고 지내는지를 알 수 있었다.
“그리고 마법 외에 다른 영능에 대해선 따로 섭외를 할 거다.”
“섭외요?”
“그래. 지난 12년 동안 지구에서 불려온 소환자들은 꽤 많지. 그 중에서 초심자들을 잘 가르칠 수 있는 사람들만 섭외할 생각이다.”
현재 연합 내에 자리를 잡은 지구 출신의 실력자는 상당히 많았다. 천외오천처럼 절대강자는 없었지만, 그래도 초심자들을 가르치기에는 부족하지 않을 수준이었다.
하긴 지구인들이 소환되기 시작한 것도 벌써 12년이나 흘렀으니, 그동안 꾸준히 실력만 가다듬어 왔다면 교관으로 섭외해도 괜찮을 것이다.
“음, 그것도 나쁘지 않겠네요. 지구 출신인 만큼 배우는 사람들도 거부감이 적을 테고요.”
“휴가를 겸할 수 있다는 말까지 더한다면 거절하진 않을 거다.”
그동안 지구 출신 소환자들 중 지구로 귀환할 수 있었던 자는 아주 극소수였다. 개인적으로 소유한 전함이 있거나, 혹은 그만큼 높은 직책에 오르지 못하는 이상 지구 귀환은 꿈도 꿀 수 없었기 때문이다.
하지만 이 기회에 인피니티 킹덤과 함께 지구로 휴가 삼아 귀환할 수 있다고 한다면, 아마 서로들 못가 안달을 낼 게 분명했다.
그리고 이진운은 그런 자들 중에서 유능한 자들만 선택해 데려갈 생각이었다.
* * *
그렇게 일행들에게 설명을 끝낸 이진운은 그 뒤 연정운을 찾아갔다. 그에게 부탁할 게 있어서였다.
“지구로 귀환한다니··· 부러워 죽겠다.”
이야기를 다 듣고 난 연정운은 이진운에게 부러움에 가득 찬 목소리로 그렇게 말했다.
“부럽기는, 쉬러 가는 것도 아니고 일 때문에 가는 건데. 지구권 통합 문제도 있어서 여러모로 골치를 썩고 있는 판이다.”
아르페인에게 일정 부분 맡기긴 했지만, 그래도 대략적인 큰 그림은 이진운이 그려줘야 했다. 지구에 있는 미국을 비롯한 강대국들, 그리고 분쟁이 많은 지역의 국가들까지 포함하만 이들을 어떻게 아울러야 할지 머리가 빠질 지경이었다.
하지만 그래도 연정운은 부럽다는 표정을 지우지 못했다.
“그래도 부러운 건 부러운 거지. 지금까지 난 12년 동안 단 한 번도 돌아가 본 적도 없었는데 말이야.”
“뭐? 어째서? 너 정도면 충분히 휴가 얻어서 돌아갈 수도 있었을 텐데.”
“워낙 바빠야 말이지. 인베이더 놈들은 쉬지도 않고 쳐들어오고, 우린 그걸 막느라 정신없고. 뭐 그렇게 된 거지. 우릴 대신할 만한 녀석들이 많다면 모르겠지만··· 너도 알잖아. 우리 정도 되는 실력자들이 많지 않다는 걸.”
연정운의 푸념은 사실이었다. 천외오천 급의 실력자는 연합 내에서도 그리 많지 않았다. 그들을 대신할만한 실력자가 없으니, 자연히 휴가를 쓸 시간조차 부족할 수밖에.
“그런데, 날 찾아온 이유는 뭐냐? 이런 소식을 알려주려고 온 건 아닐 테고 말이야.”
“이번에 지구로 돌아가는 김에 지구 출신 소환자들을 좀 데려가려 하는데, 네가 가장 잘 안다고 해서 찾아왔다.”
“베네트 국장님에게 받지 않았어?”
“그건 연합에서 보는 관점이지. 지구인 관점에서는 아니잖아.”
연합에서도 지구인 출신 소환자들을 관리하고 있지만, 연정운 만큼 자세히 일고 있진 않았다. 현재 연정운은 지구인 출신 소환자들의 모임인 [향우회(鄕友會)]의 회장이었으며, 향우회를 설립한 창시자였다.
지구 출신의 소환자들에 대한 명단과 내역은 전부 그의 손에 의해 관리되고 있다고 봐도 좋았다.
이진운이 원하는 바를 들은 연정운은 고개를 끄덕이면서 자신이 보관하고 있던 데이터를 건네주었다.
“자, 일단 명단은 줄게. 이중에서 잘 찾아봐. 원하는 녀석들을 골라서 나한테 이야기하고.”
그렇게 연정운에게 명단 데이터를 받은 이진운은 돌아와 일일이 확인에 들어갔다.
지금까지 소환된 지구 출신 소환자들의 수만 해도 수십만 명에 이른다. 그들 수준이나 특기, 성향 등을 일일이 확인하는 것도 보통 일이 아니었다.
자신의 숙소에서 홀로그램 창을 열어둔 채, 한참 내용을 살펴나가던 이진운은 어떤 부분에 가서 멈칫하고 말았다.
그곳에는 너무도 뜻밖의 인물에 대한 내용이 존재하고 있었다.
그 인물의 사진과 이름을 몇 번이나 다시 확인한 이진운은 충격에 잠긴 표정으로 중얼거렸다.
“윤재민··· 네가 어떻게 여기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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