9권-18화
“3년!?”
3년이라면 짧아도 너무 짧았다. 전함은커녕 제대로 된 이능조차 발휘하지 못하는 그곳에서 고작 3년이란 시간밖에 주어지지 않는다니.
이건 뭘 해볼 수도 없지 않은가?
본래 계획대로라면 연합 내에서 어느 정도 기반을 다진 후 지구로 돌아갈 생각이었다. 대충 3-4년 정도 연합에서 활동한 뒤, 지구로 돌아가 인베이더의 침공에 대비해 준비를 갖출 생각이었거늘··· 모든 계획이 틀어져버렸다.
‘소환된 지 이제 겨우 2년 조금 더 지났어. 앞으로 2년 더 있다가 돌아갈 생각이었는데······.’
머릿속이 복잡해졌다. 상황이 이래서야 뭘 어떻게 해야 할지 감도 잡히지 않을 지경이었다.
“그래서 말인데······.”
충격을 떨치지 못하고 있는 그에게, 베네트 국장이 불쑥 생각지도 못한 제안을 던져왔다.
“자네가 지구로 좀 가 줘야겠어.”
“지구로 말입니까?”
자신을 지구로 보냈으면 하는 그 말에 이진운이 의아해 하자, 베네트가 차분히 설명을 덧붙이기 시작했다.
“그래. 지금 지구의 문명 수준은 너무도 낮지. 영능은 고사하고 그나마 내세울 수 있는 과학수준도 열악해. 우주진출도 제대로 못하고 있는 상황이니 인베이더들이 들이닥치면 아마 몇 시간도 못 돼서 점령당하고 말겠지.”
냉정하기까지 한 그 말에 이진운은 쓰게 웃으며 수긍했다.
“틀린 말은 아니군요. 국장님 말처럼 될 가능성이 99%에 가깝겠지요. 하지만 제가 간다고 해서 사정이 크게 달라질 것 같지도 않군요.”
지난 1년에 걸친 전쟁 속에서 이진운은 천외오천과 동급이라 할 수 있는 현경의 단계에 올라섰다. 이 정도면 온자서도 어지간한 함대 하나를 상대하고도 남음이 있었다.
하지만··· 그런 강함으로도 지구를 지켜낸다는 건 어려웠다. 이진운이 제아무리 강하다 하더라도 그의 몸은 하나밖에 없기 때문이었다. 특정 지역 하나만을 지켜낸다면 모를까, 그 혼자 지구 전역을 지켜낸다는 건 불가능한 일이다.
베네트 국장도 이진운이 우려하던 점을 나름 고려하고 있었던 건지, 그에 대한 합리적 해결방안을 내놓았다.
“물론 그냥 보낼 순 없지. 함대는 물론 어느 정도 기술 지원도 해줄 생각이니까. 맨손으로 지구를 지킨다는 게 가당키나 한 일인가?”
“정말입니까?”
“그럼 정말이지. 적어도 중형 전함에 대한 기초기술 수준까지는 지구에 넘겨줄 수 있네. 물론 좀 구시대 중형 전함 기술이긴 하지만 그래도 그 정도는 해줘야 뭘 싸워볼 수 있겠지.”
가히 파격적인 지원이었다. 구식 중형전함 기술이라 해도 지구 입장에서는 상상할 수 없는 수준의 오버 테크놀러지다. 그 정도면 우주로 진출하는 수준을 넘어서 단숨에 태양계 바깥의 외우주로 진출하고도 남는다.
제아무리 아르탈 행성 연합이라 하더라도 연합의 가입행성조차 아닌 지구에 이런 기술들을 지원한다는 건 결코 쉽지 않은 일이었다.
아니나 다를까. 베네트 국장이 곧바로 조건을 덧붙였다.
“물론 공짜는 아니네. 조건은 지구가 아르탈 행성 연합의 일원으로 가입하는 것이지.”
“···쉽지는 않겠군요.”
“그렇겠지. 자네들 지구는 국가들이 하나로 통합되지 않았으니까.”
아르탈 행성 연합은 무수히 많은 행성들로 구성된 거대 연합체였다. 각 행성들은 저마다 하나의 행성정부를 갖추고 있으며, 아르탈 행성 연합에 있는 통합정부가 그것을 아우르고 있는 형태였다.
그러니 연합에 가입하려면 지구도 현재의 국가 체계들을 어느 정도 일원화시켜야 했다. 지금처럼 무수한 국가들이 난립한 채 의견통합이 이루어지지 않는 상황이라면 연합의 체계에 제대로 적응할 수 있을 리 없으니까.
물론 UN이라는 세계국제기구가 존재하긴 했지만, 강제성이 크지 않다 보니 지구권 국가들의 뜻을 확실히 대변한다고 보긴 어려운 게 현실이었다. 특히 미국이나 중국, 러시아 같은 상임이사국들은 막강한 국력을 자랑하는 강대국들인만큼 UN조차 무시하고 제멋대로 행동할 때가 더 많았다.
즉 현재의 UN 체제로는 제제할 수 없다는 뜻이었다.
이진운이 조금 난감하다는 기색을 보였지만, 베네트 국장은 이것만큼은 양보할 수 없다는 듯 단호히 말했다.
“그래도 이것만큼은 어쩔 수 없네. 연합의 최소 가입 자격은 정부의 단일화니까. 이 정도 기본적인 전제 조건조차 맞추지 못하는 행성이라면 굳이 지켜줄 이유가 없지. 좁아터진 행성 내에서 자기들끼리 분쟁을 계속하겠다는 건데 우리가 뭐하러 피 흘리고 지원까지 해줘가면서 지켜주겠나?”
“······.”
지극히 옳은 말이었기에, 이진운도 별달리 뭐라 항변하지도 못했다.
인베이더라는 항거할 수 없는 적이 바로 코앞까지 다가와 있는 판국인데, 그래도 지구의 모든 국가들이 하나로 뜻을 합치지 못한다고 한다면··· 스스로 멸망을 자초하는 거나 다름없었다.
“그러니 자네 역할이 매우 중요하네. 우린 자네를 아르탈 행성 연합의 대표로 보낼 생각이니까. 처음에는 외교관 중 하나를 보낼까 생각도 해 봤지만 그래도 지구 출신이 좀 더 나을 것 같더군. 지구 쪽에서도 받는 거부감이 덜할 테고 말이야. 특히 자네는 지구출신들 중 손에 꼽히는 강자가 됐으니 더할 나위가 없지.”
“다른 천외오천들은 어떻습니까? 그들도 있을 텐데요.”
이진운이 천외오천들을 슬쩍 언급하자, 베네트 국장이 피식 웃더니 가당치도 않다는 듯 손사래를 쳤다.
“솔직히 말해 그 녀석들은 좀 나사 빠진 것들이라서 대표로 보내기가 그렇더군. 자네도 봐서 잘 알잖나? 서브컬쳐에 심취한 것들부터 시작해서, 무슨 생각을 하는지 모르는 멀린 같은 녀석까지. 중요한 협상 자리에 보내기에는 적당치 않은 인선들이지.”
“그건 그렇군요.”
이진운도 그 말엔 동감을 표했다. 확실히 천외오천들은 협상 같은 자리를 맡기엔 그 성향이 맞지 않았다. 그들이 획득한 고유스킬이나 사상기만 봐도 알 수 있는 문제였다.
하지만 그렇다고 해서 자신이 대표로 선정된 것을 납득했다는 건 아니었다.
“솔직히 말해 전 일개 무부입니다. 그냥 싸울 줄이나 알죠. 이런 중요한 일을 맡기에는 어울리지 않는 것 같습니다만······.”
그래도 이진운은 부담스럽다는 기색을 내비쳤지만, 베네트 국장은
“어울리지 않긴. 자네는 지금까지 사령관으로서의 역할을 아주 잘 해내고 있었어. 물론 아르페인이 업무 중 상당수를 도맡고 있긴 하지만, 그래도 정식으로 사령관 교육을 받지 않은 처지에 그만하면 훌륭한 편이지.”
“하지만 지구와의 협상은 경우가 전혀 다르지 않습니까?”
“그렇게 어렵게 생각할 것 없어. 자네는 상식대로 생각하고 상식에 맞춰 판단해주면 충분하네. 머리를 쓰고 고민하는 것은 밑에 있는 녀석들 몫이지. 나도 그렇잖나. 실제 업무는 부관인 필리스가 도맡아서 하고 있지. 나는 필리스가 내놓는 것들 중 합당하다 싶은 것을 골라서 결제만 해주는 게 고작이야. 그런데도 그럭저럭 잘 굴러가고 있잖나.”
“······.”
자신의 직무 유기를 자랑스럽게 말하고 있는 그 모습에 이진운은 조금 기가 막혔지만, 그렇다고 그 심정을 입 밖으로 낼 순 없었다.
하지만 옆에 있던 당사자는 그렇지 못했다. 베네트 국장 옆에서 그를 보좌하던 필리스가 주먹을 부르르 떨면서 입을 열었다. 당장이라도 주먹을 날리고 싶은 기분을 애써 참는 듯한 모습이었다.
“국장님··· 지금 그걸··· 말이라고 하십니까? 수하에게 일을 떠맡기고 태만을 일삼는 일상이··· 뭐 그리 자랑스러우시다고요.”
“자랑은 무슨? 듬직한 수하가 항상 날 뒷받침해주고 있어 아주 든든하다는 말을 했을 뿐인데 말이야.”
“둘러대기도 잘 둘러대시는군요. 제게 그만 떠맡기고 일 좀 하시죠. 자꾸 이러시면 사표 씁니다.”
“크흠··· 그래.”
필리스가 화가 난 듯 보이자, 베네트 국장은 곧바로 꼬리를 말았다. 직책상으로는 엄연히 부관에 지나지 않았지만, 필리스는 그와 함께 수십 년을 함께 해온 사이였다. 이 정도 불만을 받아주는 것은 별 것 아니었다.
몇 번의 헛기침으로 어색한 분위기를 떨쳐낸 베네트 국장은 다시 이진운 쪽으로 시선을 향했다.
“아무튼 이번 지구가입 문제에 대해선 자넬 책임자로 선정할 걸세. 그러니까 그때까지 준비하면서 기다리게. 대략적인 인선은 자네가 알아서 고르고. 정 뭐하면 자네 함대를 끌고 가도 되니까 알아서 자유롭게 선택해도 좋네. 아, 그리고 준대형급 수송함과 공업함도 따로 지원을 하지. 현재 지구의 문명 수준의 설비로는 뭘 제대로 만들어 볼 수도 없을 테니 말이야.”
“···꽤 통이 크시군요.”
이진운은 놀라다 못해 질린 얼굴이 되었다. 자신에게 어느 정도 재량을 허락해 줄 거라 생각은 했지만, 이건 너무 과하지 않은가. 이 정도 지원이라면 무인 행성을 테라포밍해 개척해도 부족하지 않을 지원이었다.
“그만큼 자넬 믿는다는 말이지.”
“감사합니다.”
정말로 믿어서 그런 건지, 아니면 귀찮아서 떠맡기는 건지 알 수 없었지만··· 이진운은 일단 고맙게 받아들이기로 했다.
현재 지구가 처한 입장에선 무엇 하나라도 아쉬운 상황이었다. 그의 의도가 어떻든 간에 이렇게 지원해준다면 두말하지 않고 받아들이는 게 현명했다.
‘문제는 지구인데······.’
국장실을 나선 이진운은 앞으로 어떻게 해야 할지 머리가 절로 지끈지끈해지는 것을 느꼈다. 문명이 발달하고 이념과 사상도 다양해졌지만, 인류의 대립과 갈등은 옛날과 크게 변함이 없었다.
인권이 중요해진 시대긴 했지만, 그것도 국가의 이익 앞에선 무의미했다. 미국이나 중국 같은 강대국이 횡포를 부리는 것만 봐도 그렇지 않은가.
헌데 그런 놈들을 타협시켜서 지구권 전체를 하나로 통합한다고? 물론 불가능하진 않겠지만, 그 과정이 결코 쉽진 않을 것이다.
함대도 끌고 갈 수 있도록 허락도 받았으니, 일단 힘으로 밀어붙여도 상관은 없었지만 그건 그거대로 문제를 야기할 가능성이 컸다. 힘을 사용하는 건 최대한 자제하면서 불협화음이 안 나도록 잘 타협시키고 조율하는 방식으로 나가야 할 듯싶었다.
‘그러고 보니 엘레나가 로스차일드 가문 출신이라고 했지?’
로스차일드. 음모론에 자주 등장하는 유대계 출신의 가문 중 하나였다. 거대한 재력을 갖고 있으며 그 영향력은 미국을 비롯한 여러 국가들을 좌지우지할 정도로 강력했다.
심지어 세계의 정세도 그들이 쥐락펴락한다는 소문까지 떠돌 정도니 그 권세는 말할 필요조차 없었다.
‘도움을 받을 수만 있다면 지구권 통합도 좀 더 수월해질 텐데··· 문제는 그 인간들이 과연 속이 어떤 작자들인지 알 수가 없단 말이야.’
솔직히 말해 로스차일드에 대한 소문 중에서 좋은 소문은 찾아보려야 찾아 볼 수가 없었다. 대부분의 음모론에서는 항상 악의 축으로 등장하며, 온갖 탐욕으로 똘똘 뭉친 인간 군상들로 표현되었다.
과연 그들을 끌어들이는 게 현명한 일일지 고민될 수밖에 없었다.
‘일단 엘레나와 이야기를 해 봐야겠군. 그 뒤에 계획을 짜야겠어.’
그렇게 생각을 정리한 이진운은 그 즉시 발걸음을 재촉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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