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검신의 검은 우주를 가르고-217화 (218/448)

9권-17화

지난 1년간 이진운이 봐온 루클라의 눈빛은 언제나 광포하고 호승심으로 가득 차 있었다.

하지만 지금 보여주는 눈빛은 전혀 달랐다. 눈동자에 서린 안광은 여전히 광기에 차 있었지만, 주변을 바라보는 시선은 마치 가치 없는 무생물들을 바라보는 듯했다.

언제고 이와 비슷한 시선을 느낀 적이 있었다. 마치 까마득한 하늘 위에서 저 아래 밑바닥을 하찮게 내려다보는 듯한 저 모습을.

단순히 오만이란 단어만으로 평가할 수 없는 그런 영역에 있었다.

그때 루클라의 입이 열리고 강대한 영압이 대해처럼 번져나가 이 일대를 장악하기 시작했다.

[제법들이구나. 여기까지 궁지로 몰다니··· 버러지들 치고는 제법이더군.]

“이··· 미친!?”

연정운이 소스라치게 놀라며 반응했다.

그럴 수밖에 없었다. 영언에 실린 거대한 존재감, 그리고 이 주역을 잠식해나가는 초월적인 격은 결코 신화 급 수준이 아니었으니까.

이건 반신 급마저 뛰어넘은, 진정한 신의 반열에 오른 초월자들이나 가질 법한 존재감이었다.

‘아니, 단순히 그런 수준이 아니야! 평범한 초월자를 넘어섰어. 이건 설마 신좌 급!?’

이진운의 두 눈이 무겁게 변했다. 이전에 단말에 불과했던 카룬다임에게서 얼핏 엿보았던 그런 존재감이 지금 루클라에 깃들어 있었다.

다른 사람들은 몰라도 이진운에게는 그것이 분명하게 느껴졌다. 지금 현재 경지는 현경에 불과했지만, 생사경에 다다른 그의 영혼은 루클라에게 강림한 존재의 격을 여실히 느낄 수 있었다.

쿠구구구구!

우주공간이 이지러지며 크게 흔들렸다. 그것은 루클라에게서 시작된 거대한 존재감을 감당치 못하고 일어난 물리적 괴리 현상이었다.

[미친!, 뭐야 이건!?]

[우주가 요동하고 있다고?]

[어어! 대체 뭐야 시공좌표가 일그러지잖아!]

여기저기서 난리가 벌어졌다. 거대한 힘의 강림으로 인해 우주공간에 격변이 일어나면서 혼란이 빚어진 것이다.

베네트 국장은 통신회선에서 들려오는 소리를 차단하고는 루클라가 서 있는 곳을 응시했다. 놈을 중심으로 휘몰아치고 있는 영기는 그야말로 무시무시할 지경이었다.

그래서일까, 연합 함대의 승무원들 중 상당수가 영적 압력을 견디지 못하고 실신하거나 까무러치는 자들이 속출했다. 그만큼 신적 존재가 흩뿌리는 위압감이 거대했던 것이다.

“하필 이럴 때에······.”

그는 한탄하듯 중얼거렸다. 도무누스를 쓰러뜨리고 이제 루클라만 처리하면 끝나는 상황이었다. 그런데 이 순간에 강림이라니······.

루클라를 중심으로 반투명한 거대한 형상이 덧씌워진다. 그것은 모두가 알아볼 수 있는 형태로 가공되고 있었다.

“···역시 저 작자였나?”

베네트 국장은 보자마자 상대의 정체를 눈치 챌 수 있었다. 아니 애당초 루클라의 몸을 빌려 강림할 수 있는 성좌라면 그 자밖에 없었으니까.

[오래간만이라고 해야겠지. 베네트.]

“그렇군요. 설마 당신 같은 분이 이런 곳까지 직접 납실 거라고는 상상도 못했습니다. 투쟁의 좌 오르쿤.”

거대한 형상으로부터 울려온 영언에, 베네트 국장은 굳어진 안색으로 고개를 숙여 예를 표했다.

그랬다. 상대는 루클라가 섬기는 투쟁의 좌 오르쿤. 거칠고 난폭하기로 유명한 신격이었다. 루클라가 가진 호전적인 성향도 바로 그를 닮아서였던 것이다.

[솔직히 말해 나도 강림까지 할 생각은 없었다. 하지만 사태가 이러니 가만히 있을 수가 없더구나. 너희의 분전은 우리의 예상을 훨씬 뛰어넘었다. 설마 도무누스까지 쓰러뜨릴 줄은.]

결국 인베이더들의 전멸을 두고 볼 수가 없어서 끼어들었다는 말이었다. 그리고 그 선택의 계기는 도무누스의 소멸로 시작되었을 것이다.

‘놈들을 전멸 시킬 수 있는 좋은 기회였는데······.’

베네트 국장은 놈들의 전력을 대폭 깎아낼 수 있는 기회를 놓친 것 같아, 화가 머리끝까지 치밀었지만 애써 참아냈다.

지금은 자신의 성질대로 할 상황이 아니었다. 상대는 무려 신적 존재다. 제아무리 베네트 국장이라 하더라도 감히 대적할 도리가 없었다.

자칫 오르쿤의 심기라도 거슬렸다간 라인트라 주역에 있는 연합 함대 전체가 한순간에 전멸당할 수도 있었다.

[그래서 선택의 기회를 주겠다.]

“······.”

[싸움을 물리겠느냐? 아니면 이대로 끝까지 싸울 테냐? 선택은 너희 하기 나름이다.]

선택의 기회를 주겠다는 그 말에 베네트가 조심스럽게 물었다.

“그 말씀은··· 휴전을 뜻하는 겁니까?”

[휴전이라··· 그렇게 되겠지. 언제까지 유지될 지는 확실한 기약이 없겠지만, 적어도 당분간은 네놈들 연합과 전쟁을 할 생각이 없으니까.]

“으음······.”

베네트 국장의 얼굴 위로 갈등의 감정이 떠올랐다. 연합의 입장에서는 크게 나쁘지 않은 제안이었다. 안 그래도 인베이더와 전쟁이 벌어진 탓에 전력 손실도 적지 않은 편이었다.

오르쿤의 말대로 휴전할 수만 있다면 당분간은 숨을 돌릴 수 있게 될 것이다. 하지만 그래서 의문이 들었다.

“선택하기 전에 한 가지만 여쭙고 싶군요. 어째서 이런 제안을 하시는 겁니까. 당신이라면 얼마든지 우릴 전멸시킬 수 있을 텐데요.”

[마음 같아선 나도 네놈들을 쓸어버리고 싶다. 하지만 그럴 순 없지. 고작 버러지에 불과한 네놈들을 쓸어버려봐야 괜한 간섭력만 소모할 테니까. 그래서 이렇게 제안하는 거다.]

흉포한 살기가 묻어나오는 그 화답에, 베네트 국장은 납득한 표정이 되었다.

신들은 함부로 물질계에 간섭할 수 없었다. 그것은 섭리가 정한 규율로서 상위신들이라 해도 이를 어길 수가 없었다.

하지만 그 규율이 무조건적인 건 아니었다. 신적 존재라 하더라도 그에 합당한 인과율과 간섭력을 소모할 경우에 한해 물질계에 관여하는 게 가능했다.

하지만 간섭력은 쉽게 손에 넣을 수 없는 만큼, 될 수 있는 한 최대한 아낄 수밖에 없었다.

그래서 오르쿤이 연합 함대를 쓸어버리고 싶어도, 애써 참아내면서 이런 제안을 해온 것이다.

‘어쩔 수 없지. 이 제안을 거절하면 간섭력을 소모하는 한이 있더라도 우릴 공격할 게 뻔하니 말이야.’

결국 베네트 국장은 쓴물을 삼킨 표정으로 그 제안을 받아들이고 말았다.

“제안을 받아들이겠습니다.”

그것을 끝으로 인베이더 함대는 아무런 공격도 받지 않은 채 안전하게 후퇴하기 시작했다. 연합 함대는 그 광경을 멍하니 지켜볼 수밖에 없었다.

다 잡은 적을 놔 줄 수밖에 없는 현실에 울분을 터뜨리는 사람도 종종 있었지만, 그들도 어쩔 수 없다는 건 잘 알고 있었다.

상대는 무려 성좌의 일좌를 차지하고 있는 오르쿤. 이곳에 있는 그 누구도 대적할 수 없는 초월적인 존재였으니까.

다들 무력함을 절감하고 있던 그때, 베네트 국장이 한숨 섞인 목소리로 말했다.

“···우리도 이만 돌아간다.”

그렇게 무려 1년이란 시간을 끈 라인트라 대전이 종지부를 맺고 말았다. 처음 시작에 비한다면 너무도 허망한 종결이었다.

* * *

카멜롯으로 돌아온 이진운은 자신의 숙소에 틀어박힌 채 생각에 잠겼다. 그만큼 루클라의 몸에 강림했던 오르쿤의 존재가 충격적이어서였다. 고작 단말에 불과했던 카룬다임 때와는 느낀 바가 차원이 달랐다.

‘정말 믿기지 않는 존재감이었지. 그게 바로 생사경 너머의 경지인가?’

중원에 있을 적에도 경험해 보지 못한 압도적인 존재감이었다. 하긴 현경의 고수조차 찾기 드문 그 세상에서 생사경을 초월한 존재를 어디서 경험이나 해 볼 수 있을 리가 있겠는가.

그보다 더 오랜 옛적에는 생사경을 넘어선 선인들이 지상을 활보했다곤 하지만, 천화운 시절에는 더 이상 선인은 존재하지 않았다.

‘정말이지··· 아직도 멀었군, 멀었어.’

이진운은 쓰게 웃고 말았다. 그동안 피나는 노력 끝에 겨우 현경의 경지까지 올라섰는데, 그런 성취를 이루고도 손 하나 까딱 할 수 없을 만큼 강대한 초월자들이 적이라니!

전생 시절의 실력들 다 되찾는다 해도 과연 얼마나 대적할 수 있을지 의문일 정도였다.

솔직히 말해 자신이 생사경의 문턱을 넘어섰던 것도 거의 운에 가까웠다. 죽는 순간 얻게 된 깨달음이 아니었다면, 그보다 훨씬 더 오랜 세월이 흐른 뒤에야 간신히 발을 들였을 것이다.

‘그렇다고 해서 그냥 당해줄 수는 없지. 어떻게든 지금보다 더 강해져야 해. 전생시절보다도 더!’

이대로 계속해 나간다면 생사경의 경지까지 되찾는 건 시간문제였다. 하지만 그 이후부터는 이진운에게도 미지 그 자체였다.

중원에서도 생사경을 인간이 상상할 수 있는 최대의 경지라고 여기는데, 그마저 뛰어넘는다? 아마도 쉽지 않을 것이다. 솔직히 말하자면 불가능에 가깝다고 할 수 있었다.

그 경지에 오르려면 뭘 어떻게 해야 할지 제대로 감도 잡히지 않는다.

‘그래도 해 내야겠지.’

무거운 중압감에 어깨가 무거워진 느낌이지만, 그래도 포기하기엔 일렀다. 전생과 현생을 통틀어 무(武)는 그에게 있어 모든 것이었다.

이 정도로 포기할 것 같았으면, 생사경까지 오르지도 못했을 것이다.

* * *

라인트라 대전이 끝난 뒤, 연합 함대 중 상당수가 아르탈 행성으로 귀환했다. 물론 일부 함대는 예전처럼 라인트라 주역을 지키기 위해 남겨둔 상태였다.

아르탈 행성으로 돌아온 베네트 국장은 뒷마무리로 바쁜 나날을 보내다가 이진운을 호출했다. 그에게 따로 해야 할 말이 있어서였다.

제자들과 한창 수련 중이던 이진운은 무슨 일인가 싶어 바로 국장실로 찾아왔다.

먼저 베네트 국장이 그에게 건네 온 것은 감사 인사였다.

“그동안 수고 많았네. 자네 덕분에 이번 전쟁에서 지지 않고 싸울 수 있었어. 아마 자네 아니었다면 초전부터 큰 피해를 봤을 거야.”

“말씀은 감사합니다만 저보다는 리스티의 공이 더 컸습니다. 그 녀석을 치하해 주시는 게 더 좋을 것 같군요.”

단순한 겸양이 아니라 솔직한 심정이었다. 이번 전쟁에서 이진운이 세운 공이 크긴 했지만, 전황 그 자체로 본다면 리스티의 공이 가장 컸다. 위상전환을 파훼하는 SB탄에, 공수 양 방면으로 에너지를 공유해 성능을 증폭하는 아르마다 시스템까지.

만일 그녀가 이런 신기술들을 개발해내지 못했더라면 개전 초기부터 연합 함대는 초전부터 전멸했을지도 모른다.

“뭐, 그렇군. 리스티에게는 따로 답례를 하도록 하지.”

베네트 국장도 그 사실을 인정하는 듯 고개를 주억거렸다. 하지만 더 할말이 남은 듯 베네트 국장이 다른 쪽으로 화제를 꺼냈다.

“하지만 자네를 부른 건 다른 문제 때문일세.”

“또 무슨 전쟁이라도?”

“딱히 전쟁이 벌어진 건 아니지만 상황이 별로 좋지 못한 건 사실이지. 그리고 그건 자네의 고향과도 관련이 있어.”

“고향이라면··· 지구 말입니까?”

고향이란 말에 바로 안색을 굳힌 이진운. 베네트 국장은 고개를 주억거리면서 말을 이어나갔다.

“그래, 지구 말이지. 별로 상황이 좋지 못한 상황이야.”

“어떻게 말입니까?”

“본래 전략실의 예측대로라면 인베이더의 침략권에 들기까지 대략 10년 쯤 걸릴 거라고 했었네. 하지만 이번 라인트라 대전으로 인해 그 시간이 크게 단축되어버렸어. 우리가 라인트라에 집중하고 있는 사이 여기저기서 인베이더의 세력권이 확장된 탓이지.”

“으음······.”

지구가 인베이더의 침략에 놓이기까지 10년 정도 걸릴 거라는 건 이미 알고 있던 사실이었다. 헌데 그 기간이 하필 이번 전쟁으로 줄어들었다니.

어지간해서는 동요하지 않는 이진운이라 해도 절로 침음성을 삼킬 수밖에 없었다.

“줄어들었다면 얼마나 줄어든 겁니까?”

“최장 5년, 짧게는 3년 정도로 보고 있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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