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검신의 검은 우주를 가르고-215화 (216/448)

9권-15화

도무누스는 자신의 육신이 소멸해가는 느낌에 절규를 터뜨렸다. 지금까지 받아온 데미지와는 차원이 달랐다. 이건 자신의 존재 자체를 완전하게 멸하고 있었다.

[이럴 리가 없다! 이럴 리가! 고작 나노머신 따위가 어떻게!?]

도무누스는 자신이 처한 이 상황이 도무지 믿기지 않았다.

자신의 육체를 이루는 무수한 세포들 하나하나가 독립적인 형태라는 것을 알아챘다고 해도 말이 안 되는 일이었다.

고작 나노머신 따위가 어찌 불사성을 가진 반신 급의 육체를 이토록 쉽게 소멸시킬 수 있단 말인가? 그냥 평범한 물질의 분해라면 모를까, 육체가 이미 영혼을 물질화 한 형태인 자신에게 그런 게 통할 리 없었다.

그에 대한 대답은 뜻밖에도 용성군에게서 흘러나왔다.

그는 섬뜩해 보이는 해골 가면 위로 시퍼런 안광을 띄운 채 말했다.

[무도한 자여. 그대는 무심코 지나갔을지 모르나 이 몸은 이미 그대에게 거듭 [종언의 세례]를 내렸다. 무려 1년 동안이나.]

그랬다. 지난 1년 동안 천외오천은 그냥 아무 생각 없이 싸우기만 한 게 아니었다. 도무누스를 이기기 위해 온갖 방법을 다 짜냈다.

그 결과가 바로 [종언의 세례]였다.

상대에게 극도로 압축된 죽음의 기운을 주입해 새겨 넣는 일종의 무형의 낙인.

어지간한 자라면 이 세례 한번으로 죽음의 늪에 깊게 발을 담그게 된다. 그리고 버틸 수 있다고 해도 마찬가지였다. 종언의 세례에 당한 자는 멸사기에 관련된 기술에 당할 경우 더 큰 피해를 입으며, 죽지 않는다 해도 멸사기가 계속 누적되면서 결과적으로 죽음을 향해 나아갈 수밖에 없는 용성군의 비기!

도무누스의 육체는 겉으론 멀쩡한 것 같아도 이미 1년 동안 누적된 멸사기로 가득 차 있었던 것이다. 그러니 로베르트 슈마허가 만들어낸 나노머신의 공격에도 힘없이 무너져 내리는 건 필연이었다.

[그럴 리가! 내가 모르는 새에 그런 기운이 내 몸을 잠식했다고? ]

“네놈의 몸뚱이가 거대한 만큼 세포 단위로 조금씩 흘러드는 멸사기의 양은 너무 미미해서 미처 눈치를 못 챈 거겠지. 그리고 그 결과가 바로 지금 그 꼴이고. 이제 알겠어?”

빈정대듯 말하는 연정운의 모습에 도무누스는 그제야 깨닫고 말았다.

정말로 자신이 죽음을 맞이하고 있다는 사실을.

조각난 그의 육신들은 지금도 계속해서 죽어나갔다. 아니 이건 단순히 죽는 게 아니라 소멸이라고 해야 맞을 것이다.

지금까지 한 번도 느껴보지 못했던 죽음에 대한 공포가 떠올랐다. 그리고 상반되게도 참을 수 없는 분노도 함께 치밀어 올랐다.

고작 하루살이만도 못한 필멸자 따위에게 자신이 죽게 되다니! 이 무슨 망신이란 말인가.

[이걸로 끝났다고 생각하지 마라. 나는 언제고 다시 되살아난다. 그때는··· 그때는!]

그에게서 흘러나오는 진부하기 짝이 없는 그 말에, 용성군은 더 들을 필요 없다는 듯 자신의 칠흑빛 검을 치켜 올렸다.

[삶이 있으면 죽음도 있는 법이니. 이 우주에 영원한 것은 없다. 그건 네놈 또한 마찬가지니··· 오늘 여기서 천명이 다했음을 고하노라!]

상대의 죽음을 고함과 동시에 그의 검이 사정없이 내리쳐졌다. 그것은 그 어떤 대상을 베기 위함이 아니었다.

그 행동은 단지 상대의 죽음을 알리는 선고에 지나지 않는다.

[레퀴엠(종언의 끝)]

그 순간 도무누스를 이루던 모든 조각들이 파열하면서 소멸하기 시작했다. 나노머신에게 집어삼켜지던 것들도 마찬가지였다.

이미 나약해질 대로 나약해진 도무누스에게 저항할 힘 따윈 존재하지 않았던 것이다.

이것이 바로 용천군의 최후 비기인 [레퀴엠]. 죽음의 세례 등으로 상대에게 누적된 멸사기를 폭발시켜서 한순간에 죽음으로 이끈다. 그가 휘두른 검세는 일종의 방아쇠처럼 작용해 상대의 죽음 자체를 확정시키는 역할을 한다 말할 수 있었다.

완전히 소멸된 도무누스의 마지막 흔적을 바라보면서 연정운이 숨을 몰아쉬었다.

“지긋지긋한 놈이 드디어 죽었네. 휴··· 진짜 진저리난다. 이젠 더 볼 일 없겠지?”

“세포 단위까지 완전히 소멸했으니 그렇겠지. 이번엔 진짜로 끝났어.”

사토 류지도 질린 얼굴로 중얼거렸다. 지난 1년간 도무누스와 얼마나 혹독하게 싸웠는지 알 수 있는 모습이었다.

하지만 그때, 베네트 국장의 목소리가 그들에게 찬물을 끼얹듯 들려왔다.

“이걸로 놈이 완전히 끝났다고 생각하면 오산이다. 도무누스는 언제고 다시 부활하게 될 거다.”

“뭐라고요?

“그 놈이 다시 되살아난다는 그 말 정말입니까?”

둘이 깜짝 놀라 되묻자, 베네트 국장이 고개를 끄덕이며 말해주었다.

“그게 필멸자와 초월자를 가늠하는 차이지. 필멸자는 죽으면 그냥 모든 기억과 자아를 잃고 윤회전생을 거듭할 뿐이지만, 신적 존재는 그게 아니야. 언제고 다시 본래의 모습으로 되살아나게 되지. 그래서 신은 영원한 거다.”

“그럼 지금까지 우리가 한 짓은 죄다 헛수고란 말 아닙니까. 1년 동안 이놈 하나 없애려고 미친 듯이 싸웠는데.”

지금까지 필사적으로 싸운 게 억울하다는 듯 항변하는 사토 류지의 그 말에 베네트 국장은 고개를 가로저으며 대답했다.

“헛수고는 아니니 너무 흥분하지 마라. 부활이란 게 그렇게 쉬웠다면 도무누스가 소멸되는 순간에 그렇게 분통을 터뜨리지도 않았겠지.”

“그럼 어떻게 되는 겁니까?”

“놈이 부활하려면 적어도 수백에서 수천 년 후가 되겠지. 확실한 건 아니지만 제법 긴 시간이 필요할 거다.”

수백에서 수천 년이라는 그 말에 천외오천들은 그제야 도무누스에 대한 우려를 깔끔히 떨쳐내 버렸다.

“에이, 그럼 됐네요. 당장 내일도 어떻게 될지 모르는 판국인데 수백 년 뒤의 일까지 우리가 신경 쓸 건 아니니까. 놈이 완전히 소멸된 게 아니라는 게 좀 아쉽긴 하지만, 우리가 살아 있는 동안만 보지 않으면 됩니다.”

“훗날 일은 후손들이 어떻게든 해 주겠죠. 거기까지 우리가 일일이 어떻게 신경 쓰나요? 그때까지 살아 있을지 어떨지도 모르는데.”

그들의 태연스런 반응에 베네트 국장은 가볍게 실소를 짓고 말았다. 하긴 그러니 배짱 좋게 도무누스와 싸울 수 있었던 거겠지.

그는 시선을 움직여 우주 저편을 향했다. 그곳에서는 싸움의 빛이 맹렬하게 번뜩이고 있었다.

자신의 두 눈으로 상황을 확인한 그가 낮게 중얼거렸다.

“그건 그렇고, 저쪽 싸움도 슬슬 끝나가는군.”

* * *

베네트 국장의 시선이 향한 그곳에서는 지금 이진운과 루클라가 치열하게 맞붙고 있었다. 힘과 힘, 기술과 기술의 격돌에 둘은 거의 한치도 밀리지 않는 형태로 충돌했다 떨어졌다를 반복했다.

얼마나 흉험하던지, 그들이 싸우는 구역에는 어떤 전함도 접근하지 않을 지경이었다.

아랑조(餓狼爪)

월령기(月靈氣) 은광명동(銀光鳴動)

멸인광(滅刃光)

수도 형상을 한 루클라의 오른손에서 뻗친 영기가 다섯 손톱을 따라 무시무시한 은광 형태로 뻗어 나왔다. 그것은 궤적 안에 든 모든 것을 베어버리는 단절의 칼날이었다.

하지만 이진운은 이에 정면으로 맞서지 않았다. 애당초 영력의 규모는 루클라가 압도적인 상황에서 정면으로 맞부딪치는 건 손해였다.

그는 조용히 일보를 내딛었다. 발 디딜 곳 없는 텅 빈 우주공간이었지만, 이미 그런 환경적인 영향에서 초월한 단계에 이른 이진운의 보보는 단 한번 내딛는 것만으로도 거리의 개념을 초월하는 지경에 이르렀다.

이미 그의 신형은 은빛 궤적으로부터 멀리 떨어진 곳으로 이동해 있었다.

하지만 루클라도 그걸 모를 리 없었다.

[흥, 벗어날 수 있을 것 같으냐?]

지금까지 수십 번 이상 반복해서 싸워온 상대였다. 이진운의 이런 움직임을 이미 여러 차례 경험해 온 루클라가 곧바로 대응에 나섰다.

그의 양 손톱에 맺힌 은광이 맹렬하게 진동하더니 어느새 무수한 변화를 낳고 있었다.

아랑조(餓狼爪)

현란무조(眩亂舞爪)

열 개의 손톱에서 시작된 궤적들이 공간상에 어지럽게 난립하기 시작하였다.

이것이야 말로 실체와 허상을 구분할 수 없는 환(幻)의 극치.

궤적에 닿는 우주공간이 찢어발겨지면서 날카로운 이명을 만들어냈다.

키이이잉!

무시무시한 궤적들의 향연! 그에 휘말린 모든 게 쪼개지고 갈라지면서 흩어졌다. 심지어 그 근처에 있던 전함 몇 척까지 수백 수천 조각으로 흩어져 진홍빛 화구를 만들어내고 있었다.

하지만 정작 공격의 대상인 이진운은 거기에 존재하지 않았다. 그가 남긴 것은 진기로 만들어낸 잔상 뿐.

실체는 이미 그곳을 떠난 뒤였던 것이다.

그것이 점창의 보법절기인 분광착영(分光捉影)의 비의 광영(光影). 단순한 이형환위를 넘어 실제와 다름없는 분신을 만들어낼 수 있는 보법의 오의였다.

[이놈이!]

어느새 코앞까지 다가온 이진운! 그는 축지에 다다른 일보섬영으로 공간을 초월해 루클라의 앞으로 다가왔던 것이다.

쾅!

이진운이 내뻗은 주먹이 공간을 관통하듯 날아와 루클라의 가슴팍을 두들겼다. 점창의 권장지공 중 하나인 항마불인의 한수였다.

[커으······!]

무시무시한 타격에 루클라가 뒤로 물러섰다. 하지만 이진운은 그를 놔주지 않았다.

지금까지 가볍기만 했던 것과 달리 묵직하게 내딛는 일보, 그리고 강철처럼 단단해지는 호흡의 결! 그러자 지금까지 운용하던 천룡무상신공과는 전혀 다른 경로로 진기가 휘돌기 시작했다.

그것은 그가 클레브에게 전수했던 천중무한신공이었다.

천중칠절예(天重七絶藝)

제 1절. 연환천중인(連環天重印)

비의 칠보광연격(七步光連擊)

한 걸음을 내디딜 때마다 폭우처럼 퍼붓는 연격이 거세게 공간을 수놓았다.

총 일곱 걸음 동안 퍼부어지는 이 연계식은 일보일보가 진행될수록 기하급수적으로 강력해지기에 초기에 차단하지 못하면 걷잡을 수 없게 되는 절초였다.

루클라도 그 사실을 깨닫고는 필사적으로 방어에 나섰지만, 이진운의 공세는 방어 자체를 무너뜨리는 해일이나 다름없었다.

점점 가중되는 공세 속에 결국 루클라는 공격에 노출되고 말았다.

콰앙! 콰아아앙!

마치 포탄이라도 터진 듯한 충격이 루클라를 뒤흔들었다. 그만큼 엄청난 위력이었다.

[이 자식이!]

놔주지 않겠다는 듯 끝까지 물고 늘어지는 공세 앞에 루클라는 필사적으로 맞섰다. 일단 우세를 내준 상황에서 근접박투로 버티기 어렵다는 사실을 깨닫자마자, 막대한 영력을 앞세워 방출해버린 것이다.

명동하는 은빛 광채! 그것은 곧 폭발적인 해일이 되어 이진운의 바로 앞에서 터져 나왔다.

아랑조(餓狼爪)

월령기(月靈氣) 은광명동(銀光鳴動)

멸류광(滅流光)

하지만 지척에서 터진 공세를 마주하고도 이진운은 조금도 놀라거나 당황해하지 않았다. 이미 이런 결과가 나올 거라고 짐작이라도 했다는 표정이었다.

그가 가만히 손을 뻗었다. 그의 손에서 일어난 기이한 힘이 뭉치더니 곧 회백색 장막이 구현되었다.

천중칠절예(天重七絶藝)

제 2절. 둔중뢰벽인(鈍重雷壁印)

비의. 절곡부(折曲敷) 역반탄조(逆反彈肇)

척력의 힘을 구현화시켜 완성한 역중력장(逆重力場) 앞에선 그 어떠한 은빛 해일도 닿지 못했다.

절곡부란 바로 밀어내고 튕겨내는 척력(斥力)의 집합체. 자신에게 다가오는 루클라의 멸류광에 실린 운동에너지 자체를 뒤틀어, 모조리 튕겨내고 굴절시켜 버렸다.

물론 상대의 공격을 무조건적으로 튕기거나 굴절시킬 수 있는 건 아니어서 결코 쉬운 것만은 아니었다.

다가오는 공격에 담긴 운동에너지의 크기와 방향성을 정확하게 파악하고 흐름을 읽어야 가능하기에 그만큼 기법의 난이도가 높다고 할 수 있었다.

[이건!?]

자신의 멸류광 일부 자신에게 되돌아오거나 엉뚱한 방향으로 굴절되는 광경에 루클라는 아연한 얼굴이 되었다.

물론 이와 비슷한 수법을 보지 못했던 건 아니었다. 놈은 힘의 방향을 뒤트는 기이한 수로 자신의 공격이나 충격을 흘러낼 때가 종종 있었으니까.

하지만 이건 그런 차원을 넘어섰다. 아예 공격이 닿는 공간 자체를 왜곡하는 그런 부류의 척력이 작용하고 있었다.

[우욱!]

되돌아온 자신의 공격을 받아내면서 무려 수십 킬로미터 거리를 날아갔다. 어떻게든 힘을 써서 멈추어 섰지만, 루클라가 받은 타격은 이미 심대한 지경에 이르러 있었다.

‘대체 이 수법은 뭐지? 지금까지 본적도 없는 그런 건데?’

지난 1년간 루클라는 이진운의 수많은 수법들을 눈에 익혀 왔었다. 그래서 작은 호흡만 봐도 뭘 할지, 어떤 수를 써올 지 훤히 다 파악했다고 생각해왔다.

그런데 지금 놈이 지난 1년간 써온 것들과는 전혀 다른 생소한 무공을 들고 나온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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