9권-14화
연합의 대병력이 또 한 번 우주 공간을 가르며 날아가기 시작했다. 그러자 맞은편에서 마찬가지로 날아오고 있는 연베이더 함대의 모습이 보였다.
그 모습을 눈동자에 담던 연정운이 진저리난다는 듯 자신의 감상을 토로했다.
“지긋지긋하군. 저놈들과 싸운 횟수만 벌써 53차례다. 거의 일주일에 한번 꼴로 싸웠구나.”
“그래, 길기도 길었지. 특히 저 녀석은 더더욱 그렇고. 정말 끔찍할 정도의 악연이야.”
이진운도 그렇게 중얼거리면서 자신의 검을 굳게 거머쥐었다. 인베이더 함대 선두 부근에서 이쪽을 향해 맹렬하게 날아오고 있는 루클라의 모습이 눈에 들어왔기 때문이었다.
루클라와 싸운 지도 어느덧 1년에 접어들었다. 이젠 놈이 사용하는 무투기예는 물론, 가벼운 동작만 봐도 상대가 무슨 생각을 하는지 까지 훤히 알 수 있을 지경이었다.
허나 그럼에도 승패는 좀처럼 나지 않았다. 그동안 이진운도 실전과 수련을 통해 드디어 현경에 접어들었지만, 루클라도 적지 않은 성장을 이뤘기 때문이었다.
“하지만 그 녀석보다는 저게 더 문제야.”
연정운이 가리킨 곳에는 인베이더 함대 전체보다 더 거대한 고래의 형상을 한 괴물이 존재하고 있었다.
거대한 체급만큼이나 강력한데다가, 제아무리 강력한 공격을 받아도 금세 회복하는 믿기지 않는 불사성을 소유한 초월 급 인베이더 도무누스.
전쟁이 이렇게까지 지지부진해진 것도 바로 놈이 죽지 않는 존재기 때문이었다. 아마 도무누스만 없었더라도 이 전쟁, 진작에 끝낼 수 있었을 것이다.
그렇기에 오늘 이 싸움에 임하는 천외오천의 마음가짐은 남달랐다.
[이번에야말로 저 괴물의 목을 거두겠다.]
쿠구구구!
용천군의 낮은 중얼거림과 함께 그의 전신에서 폭발적인 멸사기가 번져 나오기 시작했다. 그리고 이에 뒤질세라 다른 천외오천들에게서도 무지막지한 기세가 터져 나오면서 이 일대가 더욱 강렬한 영력의 소용돌이에 휘말렸다.
그런 그들의 말이 도무누스의 귀에까지 닿은 건지, 놈이 조소하면서 살기를 내뿜었다.
[웃기는 놈들! 베네트 녀석만 아니라면 네놈들 따위가 감히 내 상대가 될 성 싶으냐!]
고오오오!
막대한 영력이 놈을 중심으로 집중되기 시작했다. 그건 마치 이 주역에 존재하는 모든 영기가 한 점으로 빨려 들어가는 듯한 느낌이었다.
허나 그 순간, 잠자코 있던 베네트 국장의 손이 허공을 내리치듯 떨어졌다.
“섭리를 대행하는 자의 이름으로 명하니, 정명하지 못한 자를 지금 이 자리에서 금하노라! [징벌자의 저울!]”
우우우!
우주 공간이 일순 무언가에 의해 일변하였다. 그것은 도무누스를 중심으로 하는 반경 수천 킬로미터에 달하는 공간 전체였다.
[크··· 또, 이 짓거리냐?]
도무누스의 모든 격이 랭크 다운 되었다. 그가 가진 모든 능력 전반이 크게 하락해버린 것이다.
그동안 싸우면서 이미 수십 차례나 겪어왔지만, 도무지 익숙해지지 않는 느낌이었다.
그래서일까? 그가 모아들이던 영력의 양도 그만큼 급강하하기 시작했다. 그리고 이때를 기다렸다는 듯 천외오천들의 공격이 시작되었다.
“산산조각 내주마!”
가장 먼저 사토 류지가 우주공간을 종횡무진으로 가로지르면서 접근해갔다. 상대의 약점과 결을 보는 감식안과 가장 쾌속한 움직임을 자랑하는 그의 전투법은 지금처럼 치고 빠지는 일격일탈의 전투에서는 그 누구보다 압도적인 실력을 자랑한다.
[이 버러지 같은 것이!]
자신의 전신을 누비면서 찌르고 베는 사토 류지의 움직임에 도무누스가 성가시다는 듯 두 눈을 부릅떴다.
사실 타격 자체는 별 거 없었지만, 바늘로 쿡쿡 찌르는 듯한 고통은 제법 짜증스러웠기 때문이었다.
그러는 사이 용천군의 한수가 도무누스의 거대한 육체를 강타해 왔다. 그것은 극도로 응축된 멸사기의 파도였다.
[멸세의 격류]
콰우우우!
검은 물결에 휩싸인 도무누스의 거체가 요동을 쳤다. 멸사기는 말 그대로 죽음으로 이끄는 기운. 이에 휩쓸린 부위가 풍화되듯 부서져 흩날리고 있었다.
하지만 워낙 거대한 탓인지, 멸세의 격류에 제대로 당했음에도 불구하고 그다지 큰 데미지로 보이진 않았다.
[그래봐야 헛된 짓이지!]
웅웅웅!
도무누스는 자신이 입은 데미지를 무시한 채 그 즉시 막대한 영력으로 주변에 수천수만 개의 구체를 형성시켰다. 이것들은 하나하나가 준대형 전함의 함포와 맞먹는 것으로서 천외오천이라 해도 적중되고 나면 목숨이 위험할 정도였다.
쿠아아아!
우주 공간을 가로지르는 무시무시한 빛줄기들. 그것들이 베네트 국장과 천외오천들을 향해 쏟아져 내렸다.
통천 가공한 이 공격은 공간왜곡으로 상대의 움직임을 봉쇄하기 때문에 평범한 수단으로는 피할 수조차 없었다.
연정운이 옆에 있는 자의 이름을 불렀다.
“멀린!”
“예, 준비 다 됐답니다.”
언제나 똑같게 쾌활한 목소리로 답한 멀린이 석장을 들어올렸다.
“이 모든 게 꿈이랍니다.”
그 말과 함께 지금까지 존재했던 현실은 허상이고 거짓이 되었다. 멀린은 놀랍게도 도무누스의 공격이 쏟아져오고 있는 눈앞의 현실을 환상과 거짓으로 치환해버린 것이다.
언제 그랬냐는 듯 깨끗이 지워진 우주공간의 모습에 도무누스가 눈매를 일그러뜨린다.
[이 성가신 것들! 또 이런 인과역전을!]
이것이 멀린이 가진 고유능력 환몽의현(幻夢意現). 단순히 실제와 같은 환상을 보여주는 것을 넘어서, 현실을 거짓으로 만들고, 거짓을 현실로 만들어버리는 멀린만이 가진 환상술의 극의였다.
그렇기에 도무누스는 몇 번이나 천외오천들에게 결정타를 먹일 수 있는 기회를 손에 넣었음에도 불구하고 번번이 무위로 돌아가고 말았다.
그에게 있어 멀린의 존재는 베네트 국장과 더불어 눈엣가시나 다름없었다.
‘이해할 수가 없다. 베네트 놈도 그렇지만 고작 그랜드 급에 불과한 버러지가 이런 인과역전을 다룬다고? 나조차도 제대로 다루지 못하는 능력을?’
그렇기에 더욱 분노했다. 그 분노는 곧 힘이 되었고, 전신에서 들끓던 영력이 폭발적인 형태로 치솟았다.
하지만··· 그것은 베네트 국장에 의해 무위로 돌아가고 말았다.
“갈라져라!”
지난 1년 간 도무누스를 상대로 이미 수백 수천 번도 더 전개되었던 절현금의 힘이 도무누스의 육신을 쪼개기 시작했다.
그 절삭력은 절대적이어서 도무누스라 하더라도 그냥 버틸 수가 없었다. 특히 지금처럼 징벌자의 저울에 의해 랭크 다운 된 상태라면 더더욱 그랬다.
[크읏! 그래봐야 소용없다! 나는 불사의 존재! 이런 식으로 싸움을 길게 끌어봐야 내게 더 유리하지!]
도무누스는 자신의 육신을 빠르게 회복시키면서 베네트 국장을 비웃었다.
그의 말도 틀린 바는 아니었다. 베네트 국장과 천외오천은 아직 필멸자의 영역에서 벗어나지 못했지만, 도무누스는 반신 급이긴 해도 초월의 영역에 접어든 존재다.
지친다는 개념도 없었으며, 영력이 부족하다면 주변에 가득 찬 무궁무진한 영력을 얼마든지 끌어다 쓸 수 있었다.
그 사실을 입증하듯 지난 1년 동안 지속된 싸움에서 베네트 국장과 천외오천은 지칠 대로 지친 상태. 움직임이나 다루는 힘이 예전만 못하다는 게 그 증거였다.
하지만 베네트 국장은 정곡을 찌르는 그 말에도 오히려 조소를 떠올렸다.
“뭐 어제까지는 그랬겠지. 하지만 오늘은 좀 다를 거다.”
[뭐?]
생각지도 못한 그 말에 도무누스가 의문을 떠올린 그 순간, 무시무시한 영적 칼날들이 소리 없이 나타나 그의 전신을 난자하듯 베고 지나가는 것을 느꼈다.
그것은 이미 무수히 겪어봤던 절현금의 힘이었다.
하지만 평소와는 뭔가 달랐다. 정확히 말하자면 절현금의 위력과 격이 예전과 차원이 다를 만큼 높아져 있었다.
[컥, 커으으···! 대체 이 위력은? 네놈 대체!? 설마 초월에 이른 거냐?]
도무누스는 전신을 저며 오는 고통에 경악과 불신에 찬 외침을 터뜨렸다.
예전에도 베네트 국장의 절현금은 그에게 영적 타격까지 입히긴 했었지만, 그 정도는 견딜만한 수준이었다.
하지만 지금은 달랐다. 자칫 잘못하면 자신이 어떻게 될지도 모른다는 위기감까지 느낄 정도였다.
허나 베네트 국장은 계속 절현금을 펼치면서 도무누스의 추측을 부정해주었다.
“아니, 나는 여전히 그랜드 급이지. 뭐 반신 급까지 이제 한 걸음 정도 남긴 했지만 아직 벽을 넘진 못했지.”
[그럴 리가 없다! 이런 위력인데 그랜드 급이라고? 말도 안 되는 소리를!]
“네놈과 싸우기 시작한 지 벌써 1년이다. 그 긴 시간동안 싸우면서 우리가 아무런 대책도 없이 지금까지 계속 시간만 허비하고 있었다고 생각했나?”
[뭣이!?]
도무누스의 육신이 계속해서 쪼개지고 쪼개지고 거듭 쪼개져갔다. 이젠 그 수를 셀 수 없을 만큼 쪼개져 우주 공간이 도무누스의 파편으로 가득 찰 지경이었다.
그럼에도 멈추지 않았다. 베네트 국장의 절현금은 이제 우주 공간마저 빈틈없이 채울 만큼 그물처럼 펼쳐지면서 그 조각들을 더욱 잘게 가르고 쪼개나가고 있었다.
[이··· 이놈! 대체 무슨 짓을!?]
제아무리 도무누스라 하더라도 이렇게까지 쪼개지면 육신을 단숨에 복원시키기 어려워진다. 당장 죽지야 않겠지만, 랭크 다운까지 겹친 이 상황에서는 더더욱 그럴 수밖에 없었다.
간혹 조각 중에서 큰 조각들이 꿈틀대면서 나머지 조각들을 이어붙이려 했지만, 그럴 때마다 사토 류지가 우주 공간을 뛰어다니면서 그것들을 수백 수천 조각으로 베어넘겼다.
“이미 네놈의 약점은 내 감식안에 간파되었다. 이제 죽어줄 차례야!”
그랬다. 지금까지 1년 동안 사토 류지는 도무누스와 수십 차례 이상 싸우면서 놈을 깊게 주시하고 있었다.
그가 가진 고유능력인 감식안은 상대의 정보와 약점, 결을 읽어내는 만큼 도무누스의 약점도 간파해 낼 수 있었던 것이다.
물론 도무누스의 격이 그보다 월등히 높다 보니 결코 쉽지 않았지만, 그래도 1년 동안 수십 차례 이상 싸우다 보니 자연스럽게 간파할 수 있게 되었다.
도무누스의 본질은 무수한 세포들. 그것들이 독립적으로 활동하면서 물질계에 간섭할 수 있는 육체를 이루는 것이다.
그렇기에 세포 하나만 남아도 얼마든지 본 모습을 되찾을 수 있으며, 제아무리 큰 데미지를 입어도 금세 회복하는 모습을 보여 왔던 것이다.
좀 더 쉽게 과학적으로 비유한다면 놈은 하나하나가 독립적인 형태인 나노머신의 집합체나 다름없었다.
“그럼 이제 이 몸 차례군! 하하하!”
이 순간만을 기다리고 있었다는 듯 로베르트 슈마허 위로 거대한 형상이 덧씌워지기 시작했다. 지금 그가 구현하고자 하는 건 도무누스와 같은 상대의 천적이라 할 수 있는 최강의 머신!
그것은 설정상으론 한때 우주의 문명을 무로 되돌렸다는 흑역사의 상징이었다.
“자, 턴에이 납신다!”
고오오!
크고 둔중한 거체! 그리고 등 뒤로 활짝 펼쳐지는 한 쌍의 날개! 그것은 마치 오로라와 같은 화려한 빛을 띄고 있었다.
“이것이 월광접(月光蝶)이니라!”
그리고 그 한 쌍의 날개로부터 무수한 오로라 빛이 퍼져나갔다. 그것은 평범한 빛무리가 아니었다. 셀 수 없을 정도로 넘쳐나는 나노머신의 집합체.
그것들이 무수히 퍼져나가면서 마치 오로라가 번져나가는 듯한 모습으로 비친 것이다.
그리고 그것들은 이 일대로 널리 퍼져나가 사방에 흩뿌려진 도무누스의 육신을 파괴하기 시작했다. 그건 도무누스에게 있어서 세상 그 어떤 경험보다도 끔찍할 수밖에 없었다.
[오오오오! 이런! 말도 안 되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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