9권-11화
하지만 이진운은 어째서 그가 자신을 만류하는 건지 여전히 이해하지 못했다.
“그게 무슨 소리지? 저 황제가 무서워서 그냥 두고 보겠다는 거냐?”
“그런 말이 아니야. 황제는 인간이긴 하지만 동시에 새벽의 신 윌키아의 신위를 현세에 현현시키는 대리자지. 그렇기에 인과율의 간섭력에서 자유로울 수 없어.”
“···그런 이유였나?”
“그래.”
인과율에 의한 간섭력. 그것은 신으로 발돋움한 초월자라면 어느 누구든 갖고 있는 딜레마였다.
정명한 인과 없이 강력한 신적 존재가 필멸자들의 세계에 함부로 간섭하는 것을 막기 위한 섭리에 의한 제약인 것이다.
하지만 그렇기에 의문이 들었다.
“하지만 내가 알기로 황제는 인간으로 알고 있는데 어째서 그런 제약을 받는 거지? 하급신에 이른 초월자라 해도 인간으로서 부여받은 수명이 다하지 않았다면 섭리의 제약을 받지 않는 걸로 아는데.”
“일반적인 경우야 그렇겠지. 그렇지만 저 황제는 달라. 스스로 초월자가 된 게 아니라, 윌키아라는 신의 힘을 사용하고 있을 뿐이니까. 그러니 윌키아 신이 받는 제약의 상당수를 그대로 적용받을 수밖에 없는 거야.”
“그렇군.”
이진운은 그제야 알카데인 황제가 도무누스에게 순순히 길을 터줄 수밖에 없었던 이유를 알 수 있었다.
마음 같아선 당장이라도 도무누스와 인베이더 함대를 쓸어버리고 싶었지만, 그러기에는 자신의 역량부터 턱없이 부족했다. 전생의 자신이었다면 어느 정도 승산이 있을지도 모르겠지만, 지금 실력으론 오히려 덤볐다가 순식간에 당할 우려가 더 컸다.
게다가 도무누스가 보인 믿기지 않는 불사성은 실력고하를 제쳐두고서라도 상대하기 가장 까다로운 특성이라 할 수 있었다.
물론 이 세상에 완전한 건 없는 만큼 저 불사에 가까운 회복능력을 파훼할 만한 방법이 따로 있겠지만, 전투 상황에서 그걸 찾아낸다는 것도 말처럼 쉽지 않을 것이다.
‘어쩔 수 없지. 나중을 기약하는 수밖에······.’
이진운은 점점 멀어져가는 도무누스와 인베이더 함대를 바라보면서 그렇게 마음을 먹었다.
어차피 이번 전쟁이 오늘 전투만으로 끝날 리 없었다. 양측 피해가 적지 않긴 했지만, 그렇다고 해서 전쟁을 지속하지 못할 만큼 큰 피해를 입은 것도 아니었다. 아마 며칠 정도 시간을 두고 함대를 정비한 뒤 다시 맞붙을 가능성이 더 컸다.
그렇게 인베이더 함대와 도무누스를 떠나보낸 황제가 그들이 시야에 보이지 않게 되고서야 등을 돌렸다. 그리고는 베네트 국장을 향해 시선을 옮기며 입을 열었다.
“오래간만이군, 베네트 국장. 이렇게 직접 얼굴을 마주보는 건 꽤 간만인 것 같은데.”
“하긴 그때로부터 벌써 8년 만이니 그렇군요. 폐하.”
베네트 국장은 가볍게 고개를 숙여 존대해주었다. 상대는 거대한 제국을 다스리는 황제였다. 베네트 국장이 연합에서 한 손가락 내에 드는 권력자이긴 했지만, 황제의 권위와 존재감은 결코 무시할 수 없었다.
“아무튼 고생이 많았겠더군. 에메랄드 헤븐이라. 저걸 상대하느라 자네가 골치 좀 썩었겠어.”
“예, 여러모로 까다롭긴 하더군요. 인베이더 놈들이 그동안 만만치 않게 준비를 해 왔는지, 점점 희한한 것들을 들고 나옵니다.”
“앞으로가 문제겠군. 놈들이 먼저 전쟁을 걸어왔다면 그만한 자신이 있어서 일 텐데, 이대로 물러나진 않을 거다.”
“그렇겠지요. 그래서 좀 더 철저히 대비해야 할 듯합니다.”
베네트 국장은 황제와 서로 가까운 사이인 마냥 대화를 주고받았지만, 분위기는 어색하기만 했다. 마치 그 둘 사이에 어떤 냉기어린 기류가 감도는 듯한 느낌이었다.
그렇게 대화를 주고받던 황제의 시선이 이번에는 천외오천들을 향했다.
“그건 그렇고, 이젠 천외오천이라 불린다지? 확실히 실력들이 많이 늘었어. 그때의 애송이 같던 모습은 더 이상 보이질 않는군.”
그의 시선이 닿는 순간, 묵직한 존재감이 이 일대에 깔린다. 그것은 마치 상대를 위압하기 위한 기세처럼 느껴졌다.
그래서인지 다들 안색이 굳어졌지만, 유독 멀린만 능청스럽게 화답했다.
“칭찬해주시니 몸 둘 바를 모르겠군요.”
“칭찬이 아니라 사실을 말했을 뿐이다.”
“그때로부터 꽤 많은 시간이 흘렀으니까요. 사람은 세월에 따라 다 변하는 법이죠.”
하지만 황제의 눈은 전혀 납득한 얼굴이 아니었다. 천외오천의 발전 속도를 의심하고 있는 눈초리였다.
마치 그들의 폐부를 꿰뚫어 볼 것처럼 주시하던 황제는 곧 시선을 거두고 말았다.
“그래도 너희들이 이룬 강함에 비한다면 그 10년 세월은 아무것도 아니지. 뭐, 됐다. 네 녀석들의 재능이 탁월한 것으로 해두마.”
하지만 천외오천에게서 시선을 거뒀다고 해서 끝난 게 아니었다. 그의 관심은 이제 연정운 옆에 서 있던 이진운에게로 옮겨졌다.
“그리고 그 옆에 있는 녀석은 처음 보는데··· 그래, 네가 그 이진운인가?”
“······.”
이진운은 말없이 고개만 끄덕였다.
대답 대신 고개만 끄덕인 건 그와 말을 섞기 싫어서 일부러 안한 게 아니었다. 황제의 시선이 자신을 향한 순간, 전신을 옭아매는 듯한 기세가 동시에 밀려들었기 때문이었다.
‘이 작자, 무슨 생각인 거지?’
황제는 천외오천은 물론, 자신에게도 호의보다는 적의에 가까운 분위기를 보여주었다. 마치 경계하는 듯한 느낌이었다.
이진운은 자연스럽게 무형지기를 일으켜 그 기세를 밀어냈다. 그러자 황제의 두 눈이 의외라는 듯 이채를 발했다.
“호오?”
짧은 감탄사와 함께 황제의 기세가 한층 더 강해졌다. 헌데 문제는 그 기세가 유독 이진운에게만 집중되고 있다는 것이었다.
‘큭······.’
마치 공간 자체가 그의 전신을 찌부러뜨리는 것 같았다. 그만큼 막대한 압력이 그를 옥죄어오고 있었다.
이건 평범한 무형지기 따위로 버틸만한 수준이 아니었다. 그래서 급히 호신강기까지 끌어올렸지만, 버티기 어려운 건 크게 달라지지 않았다.
‘이 작자가 날 죽일 생각인가?’
처음에는 단순히 실력을 시험해보는 게 아닌가 했지만, 이건 정도를 넘어섰다. 이진운이 무공을 알지 못하는 평범한 마이스터 최상급의 실력자였다면 피를 토하고 거꾸러져도 이상할 게 없는 수준이었다.
‘그렇다면 나도 가만있을 순 없지.’
이진운은 오른손으로 허공을 거머쥐었다. 그러자 그곳에 찬란한 검의 형상이 나타나 쥐어졌다.
이것이 바로 의기검형(意氣劍形). 본디 형태가 존재하지 않는 심검을 완벽하게 검의 형태로 형상화하는 경지였다.
그리고 그의 손에 쥐어진 검형이 궤적을 그려냈다. 그것은 한 줄기 궤적처럼 보였지만, 그 안에는 수천수만에 이르는 수많은 궤적들이 하나로 고스란히 녹아 있었다.
천룡무상검법(天龍無上劍法) 제 2식. 천룡쇄공조(天龍碎空爪)
비의. 단천일섬(斷天一閃)
촤아악!
일순 이진운을 압박해오던 기세의 해일이 파열음과 함께 갈라지기 시작했다. 일단 베어지기 시작한 기세는 끝없이 갈라져나가 황제가 있는 곳까지 닿고 있었다.
하지만 뻗어나가는 궤적의 예기는 점차 누그러지기 시작했다. 황제가 이미 손을 쓴 것이다.
“제법 당돌하군. 이런 식으로 받아치다니 말이야. 하긴 그런 실력이 있으니 가능했겠지.”
“무슨 짓입니까, 이게!?”
이진운이 짜증과 분노를 담아 그렇게 내뱉었다. 잘 알지도 못하는 작자에게 돌연 이런 위협을 받다니!
제아무리 상대가 우주를 주름잡는 제국의 황제라 해도 납득할 수 없는 행위였다.
그러자 황제가 꽤나 의뭉스런 표정으로 대답해주었다.
“최근 들어 네 이름이 자주 들리더군. 소환된 지 2년도 채 되지 않았다지? 그런데도 천외오천에 거의 버금간다고 들었다. 그래서 호기심에 조금 시험을 해 본 거다.”
“시험? 이게 시험입니까? 상대의 목숨을 위협할 수도 있는 이런 게 시험이라니.”
이진운도 더 이상 참기 어려워졌다. 그는 한때 중원무림의 최강자로 군림했던 천룡검신이었다. 어느 누구도 자신 앞에 서지 못했고, 그와 대등히 설 수 있는 자는 오직 천마 한 사람 뿐이었다.
그런데 고작 신에게 빌붙어 그 힘을 다룰 뿐인 작자가 자신을 시험한다고?
‘그럼 이번에는 네놈이 그럴 자격이 있는지를 시험하지.’
결단을 내린 순간, 뜻이 일고 기운이 움직였다.
마음이 가는 대로 자연스럽게 기운이 따르니, 이것이 바로 심검의 이치인 것이다.
심어검(心御劍)의 의(意).
절위제현(切僞霽現).
마음과 기운이 조화된 순간, 그것은 보이지 않는 한 줄기 검이 되어 시공을 갈라갔다.
소리도, 흔적도, 흔들림도 없었다.
그가 이끌어낸 것은 한줄기 의념 뿐. 흔적 따윌 남길 리 없는 것은 당연했다.
“음!?”
그 순간, 황제의 안색이 차갑게 굳어졌다. 그도 일순 느낀 것이다. 자신을 베고 지나가는 한 줄기 예기를.
그것은 분명 감각에도 제대로 걸려들지 않았지만, 분명 존재하고 있었다.
황제는 곧 깨닫게 되었다. 자신의 목덜미에 난 아주 희미한 상흔을.
그리고 그게 지금 이진운이 자신에게 던진 대답임을 깨달았다.
“그렇군. 이건 더 이상 시험할 경우 나를 베겠다는 말인가?”
“당신이 무례하게 군다면 그 이상의 짓도 할 수 있지.”
그 말을 언제든 행동으로 보여줄 수 있다는 듯, 이진운의 주변으로 기운이 넘실거렸다. 그것은 마치 폭풍우를 연상케 하고 있었다.
그러자 황제 주변에 있던 자들이 분노에 찬 얼굴로 으르렁거렸다.
“이놈이 감히!”
“됐다. 가만 있거라. 너희들은 나서지 마라.”
“폐하.”
흥분한 신하들을 억눌러둔 황제는 이진운을 똑똑히 바라보았다.
좀 과하게 상대를 시험한 건 본인도 인정하고 있었다. 하지만 이런 식으로 응수해올 줄이야.
‘역시 심상치 않은 놈이군.’
방금 전 자신의 목을 가볍게 벤 한 수가 무엇인지를 황제도 대충 알아보았다.
의념을 통해 주변의 기운을 감응시켜 시간과 공간을 초월해 베는 사상의 검. 그것이 이진운이 사용한 보이지 않는 한수의 정체였다.
물론 막고자 한다면 막지 못할 건 없었지만, 그래도 놈의 실력이 상상 이상으로 대단하단 것은 인정하지 않을 수 없었다.
‘이래서 그놈들이 거듭 실패를 한 거였군.’
그렇게 속으로 되뇐 황제는 태연스럽게 입을 열었다.
“이 몸에 상처를 낸 네 무례는 용서하도록 하지. 일단 내가 먼저 시작한 일이니······.”
“용서? 웃기는군.”
이진운은 사과는커녕 용서를 운운하는 그 대답에 냉소를 토해냈지만, 그 이상 행동으로 옮기진 않았다.
상대는 신의 권능을 휘두르는 황제였다. 여기서 더 부딪쳐봐야 자신에게도 크게 좋을 것 없었다.
“아무튼 그 실력은 놀랍군. 무공이라고 했던가? 그게 네 능력의 기반인 모양이군. 앞으로 좀 더 널 주시해서 보겠다.”
그 말을 끝으로 황제는 신하들을 거느린 채 자신의 기함으로 되돌아갔다.
그 뒷모습을 잠시 노려보던 이진운에게, 베네트 국장이 다가와 말을 걸어왔다.
“잘 참았다. 괜히 시비 붙을 필요 없어. 저자는 본래 그런 자니까.”
“동맹이라고 했는데 느낌이 별로 좋지 않군요.”
여전히 불쾌함을 드러내는 그 말에, 베네트 국장은 동감을 표했다.
“동맹이면서도 동맹답지 않은 세력이지. 특히 당대의 황제는 패도적이면서도 음흉한 자다. 그 속내는 누구도 알지 못하지. 그래서 여러모로 껄끄러웠다.”
베네트 국장의 그 마음을 이진운도 어느 정도는 이해할 것 같았다. 저런 자가 다스리는 제국이라면 동맹이라 해도 도움을 청하고 싶지 않을 것이다.
‘게다가 방금 그건 날 시험한 게 아니었어.’
다른 사람은 몰라도 기세와 직접 맞닥뜨렸던 이진운은 분명히 확신하고 있었다. 황제가 자신에게 살의를 품고 있음을.
제아무리 감추려 해도 기세 속에 아주 희미하게 묻어나오는 살기까지는 완전히 감추지 못했던 것이다.
아마 이진운이 평범한 마이스터 급의 실력자였다면, 느끼지도 못했을 그런 희미한 살기였다.
‘알카데인 황제라. 대체 무슨 생각인 거지? 그리고 왜 날 적대하는 거고?’
오늘 처음 만나봤을 뿐인 황제의 의문스런 적대감에, 이진운은 경각심이 들었다.
‘앞으로 조금 더 관심을 갖고 주시해 살펴야겠어. 나에게 살기를 품었다면 뭔가 이유가 있을 테니 말이야.’
이 세상에 우연이란 건 없었다. 우연처럼 보여도 나중에 지나고 보면, 다 그럴 만한 이유가 존재했다. 전생과 현생을 살면서 이진운은 그런 경우를 수차례 경험해 봤고, 뭔가 낌새가 좋지 않을 경우 반드시 의심하고 생각하게 되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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