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검신의 검은 우주를 가르고-205화 (206/448)

9권-05화

주변을 가득 채웠던 황금빛이 사그라진 이후, 울브스는 말 그대로 흔적조차 남기지 않고 소멸되었다. 이 일대에 가득 차 있던 악몽의 안개도 이젠 씻은 듯 사라져 있었다.

이진운이 작게 감상을 내뱉었다.

“제법 까다로운 작자였어.”

겉보기엔 쉽게 이긴 것처럼 보일지 몰라도, 생각만큼 호락호락한 상대는 아니었다. 사실 부동심결이 아니었다면 이진운도 상당히 애를 먹었을 것이다.

안개가 걷힌 뒤 먼저 주변부터 살폈다. 데이모스와 카르발타를 상대하던 제자들의 안위가 걱정되어서였다.

그렇지만 짐작했던 것과 달리 제자들은 무사했다. 물론 이곳저곳 상처 입은 곳은 많았지만, 적당히 치료하면 금세 회복될 수 있는 수준의 부상이었다.

“스승님!”

제자들도 이진운이 무사한 모습을 발견하고는 허겁지겁 달려왔다.

“어떻게 된 거죠? 울브스는요?”

가장 먼저 질문을 던진 건 아리엔이었다. 이진운은 씨익 웃으며 말했다.

“그 자는 완전히 소멸되었다. 앞으로 다신 볼일이 없겠지.”

“역시!”

안개가 걷히고 이진운이 무사히 나올 때부터 짐작하고 있던 사실이었다. 허나 그의 입을 통해 직접 듣고 나니 그제야 실감이 났다.

특히 레이첸은 입을 다물지 못할 만큼 놀란 얼굴을 하고 있었다.

“와, 미쳤네. 신화급 인베이더를 단독으로?”

도무지 믿기지가 않았다. 카룬다임의 단말을 쓰러뜨릴 때부터 이진운이 강하다는 것은 확실히 체감하고 있었다.

허나 이번 경우는 차원이 달랐다. 울브스는 신화 급 인베이더 중에서도 상위에 랭크되는 강자였다. 단순히 강함만 따져 본다면 카룬다임의 단말보다 훨씬 강했다.

헌데 그런 강자를 상대로 우위를 점하거나 격퇴한 것도 아니고, 아예 완전히 소멸시켰다고?

지금까지 수백 년 동안 그 어떤 오버러들도 해내지 못한 위업을 달성한 거나 마찬가지였다. 이 사실이 후에 널리 알려진다면 아마 연합 전체가 발칵 뒤집힐지도 모른다. 어쩌면 이진운의 이름이 정말로 천외오천과 동급의 반열에 오를 수도 있었다.

‘진짜 어디까지 강해지려는 거지? 이젠 정말로 아버지보다 더 강할지도 몰라.’

레이첸에게 있어 기준이 되는 최대의 강자는 바로 자신의 아버지였다. 물론 객관적으로 보면 관리국장인 베네트 등 그를 넘어서는 강자들이 연합 내에 여럿 존재했지만, 아버지 이상으로 인상 깊게 남아있는 사람은 없었다.

헌데, 이제 그 생각이 조금씩 바뀔 것 같았다.

“그건 그렇고 참으로 대단한 일을 해냈구나. 분신이라곤 해도 너희가 상대하기 벅찬 자들이었는데 말이야. 내가 올 때까지 버텨주기만 하면 다행이라고 생각했는데, 내 기대 이상을 해줬구나.”

“솔직히 말해 운이 많이 따라줬다고 생각하고 있어요. 이길 거라고는 도저히 생각할 수 없는 상대였거든요.”

이진운의 칭찬에 겸양하는 아리엔. 하지만 이진운은 고개를 가로저으며 말했다.

“그건 운이 아니다. 순수한 너희 실력 덕분이지. 그만한 상대로 운이라는 게 통할 거라 생각했냐?”

비록 분신이긴 해도 그들은 그랜드 급과 맞먹는, 신화 급의 인베이더들이다. 고작 운 따위로 이길 수 있는 자들이었다면 수백 년 이상 연합의 강력한 적수로 존재해 왔을 리 없었다.

“너희는 그자들과 당당하게 싸워서 승리를 거머쥐었어. 그건 그 무엇으로도 폄하할 수 있는 게 아니야.”

하지만 그 말에 오히려 무거운 표정을 짓는 사람도 있었다. 바로 클레브였다.

“솔직히 말해 이번 싸움에서 전 거의 한 게 없습니다. 사매 홀로 처치한 거나 다름없었죠. 지금 제 실력으론 아무런 도움도 못되더군요. 처음에만 조금 싸워봤을 뿐, 나중에는 끼어들 틈조차 없어 그냥 지켜보기만 했습니다.”

그렇게 말하면서 아리엔을 응시하는 클레브. 그 눈에는 자기 자신의 무력함에 대한 분노와 한탄이 묻어나오고 있었다.

“벌써부터 낙심할 것 없다, 클레브. 너는 이제 막 새로운 무공에 입문한 상태지. 여기서 그 이상 뭔가 더 할 수 있었다면 그게 더 이상한 일이다,”

그랬다. 제아무리 환상공간에서 실전과 같은 수련을 거쳤다 해도, 새로운 무공으로 진짜 실전을 치른 건 이번이 처음이었다. 심지어 지금까지 평생을 수련해오던 검을 포기하고 선택한 길인데, 그게 단번에 성과를 보일 리 만무하지 않은가.

“그래도 넌 내가 생각한 것 이상으로 빠르게 성장하고 있어. 지금처럼만 계속 해준다면 너도 언젠가는 원하는 수준의 경지에 올라서게 될 거다.”

“예.”

이진운의 조용한 다독임에, 클레브도 납득했다는 표정이 되었다. 이제 겨우 새 무공의 기반을 닦은 상황에서 그 이상을 기대하는 건 무리임을 스스로도 알기 때문이었다.

그는 저도 모르게 주먹을 굳게 거머쥐었다.

‘앞으로 더 노력해야겠지. 지금보다 훨씬 더.’

강해지고자 하는 클레브의 열망은 상상 이상으로 컸다. 그동안 부족한 재능이 발목을 잡아온 탓에 크게 드러나지 않았었지만, 이진운의 제자가 되면서 그 열망을 본격적으로 피워 올리기 시작한 것이다.

이번에는 이진운의 시선이 엘레나에게로 향했다.

“그리고 엘레나 너도 수고 많았다. 위험한 일인데도 잘해 주었어.”

“그냥 전 옆에서 약간 거들기만 했어요. 아리엔 언니가 사실상 다 한 거죠.”

쑥스럽다는 표정으로 말하는 엘레나가 이진운은 기특하기만 했다. 이런 싸움보다는 또래와 어울려 노는 게 더 잘 어울리는 아이였다. 그런 아이가 이렇게 싸워야 한다는 현실이 안타깝기만 했다.

“그래도 실력이 많이 늘었다. 지금처럼만 하면 얼마든지 강해질 거다.”

엘레나의 머리를 쓰다듬어주며 칭찬과 격려를 건네고 있을 때, 옆에 있던 레이첸이 불퉁한 표정을 드러냈다.

“아저씨, 나한테는 뭐 할 말 없어?”

“할말? 그래, 아주 잘 싸웠다. 끝.”

“······.”

다른 사람들에 비해 너무 성의 없는 대답을 들은 레이첸의 얼굴이 불편하게 구겨졌다. 다들 칭찬과 격려의 말을 들었는데, 자신만 괜히 차별대우 받는 것 같아서였다.

헌데 이게 끝이 아니었던 모양이었다.

“잘 싸운 건 싸운 거고, 야단은 맞아야겠지?”

“뭐? 야단이라니!?”

뜬금없는 그 말에 두 눈을 휘둥그레 뜨는 레이첸. 칭찬을 받아도 부족할 판국에 야단이라니?

하지만 그가 판단하는 것보다 먼저 이진운의 주먹이 날아왔다.

레이첸은 재빨리 그 움직임을 감지하고는 그에게 배운 보법을 펼쳐 피하려 했지만, 이진운의 주먹은 상상을 초월했다.

대체 몇 번을 변화한 것일까? 아니 저게 변화가 맞긴 맞는 건가? 마치 공간이 휘어지듯 궤도를 제멋대로 바꾼 이진운의 주먹이 레이첸의 머리 위로 떨어졌다.

쾅!

“컥!”

격렬한 통증에 레이첸이 자신의 머리를 부여잡고 끙끙거렸다. 이렇게까지 지독한 꿀밤은 난생 처음이었다. 호신진기를 일으켜 보호했는데도 격통이 머리부터 발끝까지 관통하는 느낌이었다.

데이모스의 공격에 맞았을 때도 이렇게까지 아프진 않았는데, 지금은 눈물이 찔끔 나올 것 같았다.

“몇 번이나 말했는데도 아직도 아저씨냐? 그 입버릇은 아직도 고쳐지질 않는구나.”

“아저··· 아니 스승님.”

다시 저도 모르게 아저씨란 단어가 입에서 튀어나올 뻔했던 레이첸은 간신히 스승이라고 바꿔 불렀다.

이진운은 그런 레이첸을 슬며시 흘기면서 작게 혀를 찼다.

“쯧쯧. 그놈의 호칭은 언제나 제대로 자릴 잡을 지, 원······. 뭐, 이야기는 이쯤 해두고 바로 다음으로 넘어가야겠다. 제이나”

“예. 기다리고 있었어요.”

그제야 이진운 앞에 그 모습을 드러낸 제이나. 기억을 잃은 탓에 제대로 된 전투를 벌일 수가 없어 그동안 정령의 힘으로 기척과 모습을 감추고 있었던 것이다.

“이제야 제가 나설 때군요.”

“부탁드리죠.”

이진운의 말에 제이나는 코어 트리 앞으로 나섰다. 코어 트리는 상상을 초월할 만큼 거대했다. 세계수들도 엄청나가 거대했지만, 이건 그런 수준을 한참 넘어섰다.

제이나는 아련한 눈으로 코어 트리 앞에 다가섰다. 그리고는 그 거대한 밑동 앞에 서더니, 조용히 손을 내밀었다.

우우웅!

코어 트리의 표피에 그녀의 손이 닿는 순간. 연녹색 광채가 번져나가기 시작했다. 그것은 상상을 초월할 만큼 강대한 영력의 흐름이었다.

어찌나 막대하던지 세상 전체가 뒤흔들리는 것 같았다.

‘하이 엘프의 피가 격세유전됐다더니··· 이건 그보다 더하군.’

아마 진짜 하이 엘프가 이 자리에 왔다 하더라도 이보다는 못했을 것이다.

다른 이들은 몰라도 이진운의 눈에는 분명하게 보였다. 코어 트리를 중심으로 일어난 거대한 영력이 그녀를 중심으로 휘돌고 있었다.

‘기억을 잃기 전엔 대체 어떤 존재였던 거지?’

하이엘프를 초월한 그녀의 통제력이 이진운은 그런 의문이 들었지만, 지금은 그것을 생각하고 있을 때가 아니었다.

제이나가 마침 세계수로부터 손을 떼고 있었다.

“간신히 연결되었어요.”

“그럼 통제가 가능하다는 말입니까?”

이진운이 기대를 담아 물었다. 세계수만 제어해 전력으로 삼을 수만 있다면 연합 함대 입장에서는 최상이라 할 수 있었다.

하지만 안타깝게도 제이나는 고개를 가로저었다.

“거기까진 어려워요. 그냥 세계수가 아니라 이건 의도적으로 변질된 거라서요. 쉽게 제 뜻을 따라주진 않네요.”

“그래도 인베이더 쪽으로 향하는 제어와 공급을 멈출 순 있어요. 사실상 기능정지죠.”

“아깝지만 그 정도로 만족해야겠지요. 그래도 혹시 모르니 나중을 위해 에메랄드 헤븐은 잘 놔두는 게 좋겠군요.”

당장은 이 행성을 활용할 수 없을지 몰라도, 리스티라면 방법이 있을지 모른다. 물론 어느 정도 연구를 해 봐야 알 수 있겠지만, 그녀의 천재성을 생각한다면 충분히 가능성이 있었다.

‘그래도 이걸로 이번 전쟁은 우리 연합이 우위를 차지할 수 있겠지.’

에메랄드 헤븐의 지원만 없다면 전력은 연합이 한참 앞서고 있는 상황.

지금 한창 저 우주공간에서 전투를 벌이고 있을 천외오천과 루클라 간의 전투도 슬슬 마무리 될 것이다.

* * *

[큭!]

생각지도 못한 상황에 루클라가 신음을 토하며 물러섰다. 상대의 공격을 감당하지 못해서가 아니었다. 갑자기 자신에게서 벌어진 이변 때문이었다.

‘공급받던 영력이 감소하고 있어!? 어떻게 된 거지?’

지금까지 그가 천외오천 전체를 상대로 그럭저럭 싸울 수 있었던 것은 에메랄드 헤븐으로부터 공급받던 방대한 영력 때문이었다.

그 덕분에 거의 오버 그랜드 급에 가까운 힘을 발휘할 수 있었는데, 지금 그 힘의 공급이 급격히 줄어들기 시작한 것이다.

그렇다면 그건 즉, 힘을 제공해주는 에메랄드 헤븐에 문제가 생겼다는 뜻이었다.

‘설마··· 그럴 리가 없다! 거기엔 울브스를 비롯해서 데이모스와 카르발타의 분신까지 있었는데, 그 녀석들을 쓰러뜨렸다고?’

도저히 믿을 수 없는 일이었다. 울브스도 에메랄드 헤븐의 방대한 영력 공급으로 오버 그랜드 급에 가까운 힘을 발휘할 수 있었다.

그런 녀석을 쓰러뜨린다고? 그것도 지금까지 이름도 몇 번 들어보지 못했던 이진운이란 녀석이?

‘이해할 수가 없다. 연합에서 정보에 없던 어떤 강자가 나선건가? 아니면 신적 존재거나?’

그렇지 않고서야 이 상황을 도무지 납득할 수가 없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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