9권-04화
[아니, 끝나지 않을 걸세. 절대로! 내 악몽은 이 정도가 아니야!]
붕괴하던 악몽의 정경이 한데 뭉치기 시작했다. 그것은 점점 강대한 형태로 응집되더니 곧 어떤 형상을 갖춰나가고 있었다.
그리고 그것은 이진운으로서는 도저히 잊을 수 없는 자의 것이었다.
[이 자가 바로, 자네가 그렇게 두려워하던 최강이자 최대의 적수!]
울브스의 목소리와 함께 놈이 만들고자 하는 악몽의 실체가 완성되었다.
전생을 통틀어 가장 강했던 숙적. 그리고 가장 최악의 악몽으로 남아 있던 존재.
그것은 천화운을 압도적으로 패배시키고, 그를 살리기 위해 몸을 던진 태원진인까지 죽음에 이르게 만든 천마였다.
“역시······.”
이진운은 눈앞에 나타난 상대를 지그시 노려보았다. 정마대전 당시의 상황을 보여줄 때부터 이렇게 될 거라 짐작하고 있었다.
[과연 자네는 이 자를 상대로 이길 수 있을까?]
자신만만해하는 울브스의 목소리처럼, 눈앞의 천마는 현실의 존재 같았다. 풍기는 기세나 존재감은 결코 거짓이 아니었다.
현경 중에서도 끝자락에 이른 천마의 무위까지 실제와 다름없었던 것이다.
고오오오!
천마의 우수 위로 강렬한 빛이 응집되기 시작했다. 그것은 강기도, 무엇도 아니었다. 그것은 기존의 섭리를 초월한 개념의 힘. 의형무광(意形武光)이었다. 검으로 친다면 의형광검과 동급으로서, 현경을 넘어 생사경에 다다라야 다룰 수 있는 무도의 극치다.
물론 천마의 경지는 생사경에 이르지 못했지만, 지존천마수의 고절한 묘리에 현경 끝자락에서 생사경을 넘보는 경지가 더해지자, 의형무광의 힘을 불완전하게나마 구현할 수 있었던 것이다.
지존천마수(至尊天魔手) 제 6식. 섬멸극광인(殲滅極光印)
백색 섬광이 번져 나온 순간 모든 게 지워졌다. 그것은 순수한 파멸 그 자체였다.
기존의 인과를 무시하고, 무조건 대상의 결과를 소멸로 확정지어버리는 초월의 무리. 그것이 의형무광에 기반을 둔 섬멸극광인의 정체였던 것이다.
그렇지만 그 무시무시한 힘의 결정체를 바라보는 이진운의 표정은 두려움도, 경계의 기색도 보이지 않았다. 그의 얼굴에 떠오른 감정은 뜻밖에도 심드렁함이었다.
“그래서 뭐?”
콰앙!
이진운의 검이 가볍게 허공을 가르는 순간, 세상을 뒤덮을 듯 번져오던 천마의 백색 광채가 그대로 둘로 쪼개지면서 흩어졌다.
막강한 위용을 드러냈던 광경에 비한다면 너무도 허망한 소멸이었다.
[뭣!?]
심지어 천마를 구현해낸 울브스조차 이 결과에 경악성을 터뜨렸다.
그럴 수밖에 없었다. 이진운의 기억 속에 존재하는 천마란 존재는 자신조차 감당할 수 없을 만큼 대단한 자였다.
헌데 그런 존재가 전력을 다한 한수를, 고작 가볍게 휘두른 일검으로 파훼한다고!?
이건 절대 있을 수 없는 일이었다. 상대가 반신 급 존재가 아니고서야 어떻게 이런 게 가능하단 말인가?
[어떻게 한 건지는 모르겠지만, 어디 다시 막아보게나!!]
자신의 한 수가 파훼된 것에 불길함을 느꼈는지, 울브스의 발악같은 외침과 함께 천마의 손에서 재차 절학이 터져나왔다.
그것은 천마가 대대로 전수받는 절학들 중 하나인 묵룡탈혼수였다.
묵룡탈혼수(墨龍奪魂手) 제 6식. 광량묵룡세(光量墨龍勢)
비의. 현광무극세(玄光無極世)
천마의 전신으로부터 뭉클 뿜어져 나온 막대한 양의 묵기(墨氣)가 거대한 묵룡의 형상이 되었다. 그것은 세상의 어둠과 마를 모두 집어삼키며 순식간에 성장하더니, 이젠 이 일대를 전부 뒤덮을 정도로 커져 있었다.
고오오오!
하지만 이건 시작에 지나지 않았다. 광량묵룡세의 비의의 현광무극세의 진가는 바로 이제부터였으니까.
“재주도 좋군. 정말로 이것까지 그대로 재현해낼 줄이야······.”
묵룡탈혼수는 천화운이었던 시절, 천마와 부딪치면서 여러 차례 경험해 봤던 절기였다. 그중에서도 특히 현광무극세는 그가 상대했던 것들 중에서도 상당히 까다로운 편이어서 절대 잊을 수가 없었다.
의형광검에 근간을 둔 묵룡으로부터 시작된 어둠이 사방을 잠식하면서, 독자적인 절대우위의 공간을 창출하는 비기인 현광무극세.
이 공간이 완성된 순간, 천마는 본신의 실력보다 더 압도적인 무위를 발휘할 수 있게 된다. 그 덕분에 이진운도 꽤 곤욕을 치렀었다.
“하지만 그래봤자지.”
옛 기억을 떠올려 본 것도 잠시 뿐. 이진운은 무심한 투로 중얼거리며 다시 한 번 허공을 갈랐다.
어떠한 기세도, 오묘함도 담기지 않은 우직하면서도 평이한 일도양단의 한수.
그것이 온 세상을 덧칠해버린 어둠을 쪼개버린 것이다.
촤아악!
비단폭이 찢기는 듯한 소성과 함께 어둠의 공간이 무너지자, 천마의 형상을 하고 있던 울브스가 경악과 불신에 찬 어조로 외쳤다.
[뭔가, 이건! 대체 자네 무슨 수를 쓴 겐가!? 어떻게 이게 이렇게 쉽게 무너져?]
무공에 대해 자세한 건 알지 못했지만, 악몽을 통해 천마의 형상을 하게 된 울브스는 지금 이 힘이 얼마나 대단한 건지 직감적으로 이해하고 있었다.
하물며 고작 성의 없이 휘두른 칼질 한 번에 무너질 것은 더더욱 아니었다.
처음에는 이진운이 휘두른 검로에 자신이 알지 못하는 어떤 비밀이나, 혹은 초월적인 섭리에 다다른 무리가 더해진 게 아닌가 싶었지만··· 같은 일이 두 번씩이나 반복되면서 이젠 확신할 수 있었다.
저것은 그냥 평범하게 검을 휘둘러 내리그었을 뿐인 행동. 거기에는 어떤 비밀이나 오묘함도 담기지 않았다.
그런데도 그런 하찮은 한수가 세상을 뒤엎을 수 있는 절학들을 모조리 베어 소멸시키고 있었다.
혼란스런 얼굴을 하고 있는 그에게, 이진운이 당연하다는 듯 말했다.
“아무리 실제 같아도 이건 결국 다 허상이지. 악몽이라 했던가? 물론 환상도 완벽하다면 실제와 다름없다지만, 그 본질은 결국 거짓일 뿐이다. 허상에 흔들리지 않는 부동심을 갖춘다면 이런 미몽 따윈 다 쓰잘데 없는 잡술에 불과해.”
[그럴 리가···. 모든 지성체는 악몽을 꾸게 되어 있어. 그걸 피할 수도 없고. 악몽이란 건 두려워 할 수밖에 없는 것인데, 실체화까지 거친 악몽을 아무렇지도 않게 무시한다고? 자네, 정녕 인간인가!?]
그랬다. 모든 지성체들은 악몽을 꾸고, 그것을 두려워할 수밖에 없었다. 그렇기에 자다가 악몽을 꾸게 되면 자연히 가위에 눌리게 되는 것이 아니던가.
그렇기에 울브스는 지금까지 지성체들을 상대로 거의 무적에 가까운 존재로 군림할 수 있었던 것이다.
그런데 그 악몽의 힘을 무시하는 존재라니! 이건 자신의 천적 아니던가!
심지어 신으로부터 부여받는 신성력도 없는 주제에, 어떻게 그게 가능하단 건지 도무지 이해할 수가 없었다.
“나는 인간이지. 다만 무공을 익힌 인간인 게 조금 다를 뿐.”
그렇게 말하면서 이진운은 조용히 자신의 내면으로 침잠해 들어갔다.
무공이란 카테고리에 속한 것들 대부분은 육체와 내공에 관련되어 있지만, 전부 그런 건 아니었다. 그 중에선 마음을 다스리고, 정신을 지배하며, 영혼을 단련시켜 거듭나게 하는 심공 또한 존재했다.
과거 고행을 거치고 업을 쌓아 자신 안에 무한의 진리를 연 붓다가 발휘했다고 전해지는 눈부신 황금빛 광휘! 그것을 체계적으로 정립시킨, 깨달음의 결정체인 심결이 지금 이 자리에서 이진운을 통해 재현되었다.
깊고 깊은 내면으로 침잠해 들어간 내 자아와 마음이 다르마(Dharma-달마達磨:법法)의 의식영역에 닿는 순간!
[[마음을 굳게 다잡나니, 어떠한 망념에도 흔들림이 없노라.]]
부동심결(不動心結)
제3법. 금정무해(金晶無害)
이진운의 정수리로부터 시작된 황금빛 광채가 둥근 광휘의 륜을 그려나갔다.
화아악!
눈부실 것 같이 강렬하면서도, 그 어떤 것도 자극하지 않는 온화한 황금빛 광휘!
그 앞에서 모든 것이 스러져 녹아내려가고 있었다.
[아니, 이 빛은!? 악몽이··· 내 힘이······!]
악몽의 공간이 붕괴하기 시작했다. 그리고 그를 이루던 천마의 형상도 지워지고 있었다.
그럴 수밖에 없었다.
이것은 바로 전설로만 전해 내려온 대일여래(大日如來)의 광휘, 부동휘광(不動輝光)! 모든 존재들의 내면 깊은 곳에 감추어져 있는 무한한 진리와 지혜 그 자체였고, 원리의 무한한 구상화(具象化)로써 어떠한 번뇌도 용납지 않는, 흔히 후광(後光)이라 일컫는 깨달음과 자아성찰의 빛이다.
고작 미몽의 일부인 악몽 따위의 힘이 범접할 수 있는 게 아닌 것이다.
[이럴 순 없네! 이럴 수는···!]
울브스는 세계수로부터 공급받는 힘까지 더해 필사적으로 악몽을 유지하려 했지만, 오히려 붕괴는 가속화하고 있었다.
울브스가 이진운을 향해 경악으로 부르짖었다.
[대체 이게 무엇이더냐? 어떻게 이런 빛이!?]
이진운은 본래의 형상대로 돌아온 울브스를 똑똑히 바라보며 말했다.
“부동심결이란 것이다. 내가 가진 영혼과 정신 그리고 깨달음을 구체화하는, 모든 번뇌와 욕망을 초월케 해주는 심결이지. 여기에 너의 악몽 따위가 낄 자리는 없다.”
[그럴 리가! 권능도 아니고, 신성력도 아닌 그런 허황된 것으로 내 악몽을 무너뜨린다고! 그럴 리가 없어! 악몽은 계속 유지되어야만 해!]
하지만 제아무리 발악한다 해도, 이미 정해진 눈앞의 현실이 바뀔 리 없었다.
“아니, 네 악몽은 이걸로 끝이야.”
이진운은 그 말을 단호히 부정해주며 심결을 완성해나갔다.
그것은 최근 이진운이 다다른, 부동심결의 새로운 경지였다. 전생을 경험하고 현생을 거치면서 깨달은 바가 바로 여기에 담겨 있었던 것이다.
[[곧게 정립된 의식이 거세게 타오르리니, 그것이 삿된 세상을 고루 밝히노라.]]
부동심결(不動心結)
제4법. 광극사멸(光極邪滅)
극고한 깨달음은 모든 것을 초월했다. 그것은 인간이나 지성체들이 품을 수밖에 없는 악몽도 마찬가지였다.
결국 실체 없는 미망에서 시작된 악몽 따윈, 그 앞에선 무의미했다. 휘황찬란한 후광은 더욱 강렬해지며 온통 황금빛 광휘로 가득 채우고, 그것은 악몽 그 자체를 씻은 듯이 지워내렸다.
그 속에서 울브스가 강하게 울부짖었다. 그것은 절망 그 자체였다.
[이럴 순 없다! 이럴 순······!]
울브스는 저 황금빛 광채 속에서 자신의 존재가 지워지고 있다는 것을 깨달았다. 어떠한 물리력으로도 타격을 줄 수 없는, 악몽이란 개념으로 이루어진 자신의 존재가 소멸하고 있었다.
도저히 있을 수 없는 일이다. 저 자도 인간일진대··· 분명 번뇌와 미망, 그리고 악몽을 품고 있을 텐데도 어떻게 자신의 존재를 이토록 완벽히 부정할 수 있단 말인가?
그건 모든 것을 초월한 신이 아니고서야 도저히 불가능한 일이었다.
[아아··· 오르비나 님···.]
자신의 소멸을 직감하면서 그는 자신의 주인의 이름을 부르짖었다. 허나 그것도 잠시 뿐, 이진운에게서 발해지는 구상화의 황금빛 속에서 울브스는 천년을 이어온 그 삶에 종지부를 맺고 말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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