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검신의 검은 우주를 가르고-203화 (204/448)

9권-03화

저벅, 저벅······.

내딛는 조용한 보보(步步)가 무거운 중압을 낳기 시작했다. 그것이 바로 천마의 비전인 천마군림보 무현기진(踇呟跽鎭)의 한수였다.

다가오면서 켜켜이 쌓여가는 기세지도의 무게만큼이나 천화운의 절망도 짙어져갔다.

저항? 이젠 그것조차 무리였다. 그와 심령으로 이어져 있던 천룡무상이 무너진 순간, 그 반동이 되돌아오면서 극심한 내상까지 입고 말았다.

끌어올릴 수 있는 건 고작해야 한줌밖에 안 되는 내공이 전부인 상황에서 무엇을 할 수 있단 말인가?

“꽤 재미있었다. 중원무림에 너 같은 자가 있을 줄이야. 하지만 이게 전부로군.”

천화운은 말없이 천마를 노려보았다. 자신을 내려다보는 듯한 오만한 시선에 입가를 타고 흐르는 선혈을 닦을 생각조차 못했다.

“이제부터 널 시작으로 본교는 중원을 짓밟을 것이다. 그리고 이 모든 곳들을 전부 본교의 색으로 물들이겠지.”

“···그게 쉬울 것 같으냐? 중원무림의 저력은 이 정도가 아니다.”

중원 따윈 얼마든지 점령할 수 있는 듯 선언하는 천마의 오만함에, 천화운은 이를 갈며 반박했지만 천마는 오히려 이를 반기듯 말했다.

“그럴지도 모르지. 오히려 기대하고 있다. 과연 중원무림의 저력이란 게 어느 정도일지 궁금할 정도지. 너만 한 자가 또 나온다면 그건 또 다른 여흥이 되겠군.”

“······.”

역시 마교의 인물은 확실히 기본적인 성향부터가 달랐다. 천마신교는 기본적으로 투쟁을 앞세우는 약육강식 강자지존의 세계라더니, 오히려 자신과 대적할만한 강자가 나와줬으면 바란다는 말을 내뱉는 천마의 태도에 기가 막힐 지경이었다.

‘자신의 무위에 대한 자신감 때문인가? 아주 오만한 작자구나.’

그것이 천화운의 분노를 더욱 부채질했다. 하지만 능력이 뒷받침 되지 않는 분노는 아무 의미도 없었다.

“그럼 이만 그 목숨을 거두도록 하마.”

이제 끝낼 마음을 먹었음인가? 천마의 우수가 활짝 펼쳐졌다. 하지만 천마군림보의 기세에 사로잡힌 천화운은 아무런 저항도 하지 못했다.

고오오오!

막대한 거력이 집중되었다. 멀쩡할 때도 힘겨웠던 한 수가 지금 천마의 손에서 재현되고 있었다.

벼락불처럼 허공을 꿰뚫어오는 백색 장인(白色 掌印)

그것은 천마가 자랑하는 성명절기 지존천마수의 한수였다.

지존천마수(至尊天魔手) 제 1식. 백뢰파멸인(白雷破滅印)

다가오는 눈부신 강기를 눈으로 똑똑히 보면서도 피하지 못했다. 아니, 피할 수가 없었다.

‘이렇게 끝난다고?’

다가오는 절망을 앞두고 천화운은 아무 생각도 들지 않았다. 이제 죽게 된다는 사실만이 그의 머릿속을 지배하고 있었다.

헌데 그 순간!

콰아앙!

한 줄기 섬광이 다가오는 백색 장인의 궤도를 정면으로 가로막았다. 그것은 천화운에게 아주 익숙한 누군가의 뒷모습과 그가 일으킨 한 줄기 검강이었다.

“쿨럭! 크으······!?”

피를 토하며 괴로운 신음성을 내뱉는 노도인. 길게 늘어진 흰 수염과 앞섶이 피로 물들었다.

그제야 자신을 구하기 위해 뛰어든 자가 누군지 알아챈 천화운이 경악에 찬 외침을 터뜨렸다.

“스승님!”

그랬다. 그는 바로 천화운의 스승인 태원진인이었다. 제자가 죽음을 맞이할 위기에 처하자, 뒤도 돌아보지 않고 몸을 던진 것이다.

태원진인이 천마를 가로막고 선 덕분인지 천화운은 천마군림보의 기세에서 겨우 벗어날 수 있었다.

하지만 그게 무슨 소용이 있을까? 더 이상 싸울 여력은 남아있지 않았다.

그때, 스승의 목소리가 들렸다. 검을 겨눈 채 천마를 가로막고 선 태원진인이었다.

“자, 도망가라! 어서!”

“이 제자가 어떻게 스승님을 두고 도망간단 말입니까?”

이곳을 벗어날 것을 종용하는 그 목소리에 고개를 가로젓는 천화운. 그것을 들은 천마가 그제야 노도인의 정체를 깨닫고는 고개를 주억거렸다.

“그렇군. 당신이 태원진인이었나?”

사일검제 태원진인. 천화운이 현경에 오르기 전까지 점창제일검이자 천하제일검으로서 천하에 명성을 날렸던 절대고수였다.

그동안 은거했다고 알려졌었는데, 그가 오늘 자신의 제자를 구하기 위해 목숨을 걸고 나선 것이다.

“태원진인, 당신의 경지를 폄하할 생각은 아니지만, 나는 천마다. 이 정도로 날 가로막을 수 있을 거라 생각하나?”

천마의 낮은 목소리와 함께 무시무시한 기운이 이 일대를 장악하기 시작했다. 그것은 소름끼치도록 끔찍해서, 태원진인이 현경을 목전에 둔 화경의 고수라 해도 감당하기 어려울 지경이었다.

하지만 태원진인도 가만있지 않았다. 자신이 천마의 상대가 안 될 거라는 건 이미 잘 알고 있었다.

그래서 선택했다. 자신의 모든 것을 불태우기로!

혈맥을 따라 휘도는 진기가 기존의 경로를 역행하기 시작했다. 그것은 파천이고 역천이었다. 본연의 흐름을 거스르는 형태로 흐르는 진기가 눈덩이처럼 불어나면서 폭증해가고 있었다.

고오오!

무려 10갑자에 이르는 내공이 크게 증폭되면서 이젠 갑자로 환산할 수 없는 지경에 이르렀다. 어찌나 강대하던지 기운을 끌어 올린 것만으로도, 이 일대의 대기와 땅이 크게 흔들릴 지경이었다.

스승이 무슨 짓을 한 건지 알아챈 천화운이 부르짖었다.

“역기충혈대법이라니··· 아아···!”

역기충혈대법은 자신의 잠력을 불태워 진기를 폭증시키는 수법이다. 물론 적절히 사용할 경우 몸조리만 잘 한다면 별 후유증 없이 회복할 수 있겠지만, 태원진인이 사용하고 있는 운용방식은 한번 시작하면 다시 돌이킬 수 없었다.

천마도 그 정체를 알아봤던지, 조금 반응을 보였다.

“···진원과 선천까지 불태우다니. 확실히 각오가 된 모양이군.”

이쯤 되면 제아무리 천마라 해도 경시할 수 없었다. 화경 끝자락에 올라선 절대고수가 진원과 선천을 불태울 경우, 현경에 버금가는 힘을 발휘할 수 있게 된다.

물론 그 정도로 위협이 되진 않겠지만, 그래도 방심했다간 호된 꼴을 당하게 될 것이다.

쿠구구구!

천마와 태원진인의 기세가 둘 사이에서 서로 맹렬하게 충돌하기 시작했다. 마치 공간을 이분하기라도 한 듯, 치열하게 밀고 당기기를 반복하고 있었다.

경지 자체는 천마가 비교할 수 없이 높긴 했지만, 역기충혈대법을 발동한 지금 태원진인이 가진 내공의 규모는 그를 크게 웃돌았다.

하지만 이것도 시간문제였다. 진원과 선천지기가 다 소모되고 나면 이런 무위는 다시 발휘할 수 없게 될 테니까.

그래서일까. 천마와 대치하는 상황에서도 태원진인은 천화운에게 부르짖듯 외쳤다.

“이 스승의 말을 들어라! 어서 도망치라고! 내 목숨을 헛되이 할 생각이냐?”

“크흑··· 젠장!”

스승의 간곡한 목소리에 천화운은 결국 좀체 떨어지지 않는 발을 억지로 뗐다. 그리고는 이를 악물더니 뒤도 돌아보지 않고 신법을 펼쳐 그곳으로부터 달아났다.

단지 죽는 게 두려워서가 아니었다. 자신을 구하기 위해 스승님이 목숨을 던져가면서 벌어준 이 시간을 그냥 날려버릴 수 없어서였다.

그래서 너무도 원통하고 분한 마음이 들었다. 이 모든 게 다 자신의 힘이 부족하기 때문이었다.

자신이 좀 더 강했더라면, 스승님이 목숨을 던져가며 희생할 이유가 없는데··· 자신의 부족함이 결국 스승님이 희생하도록 만든 것이다.

“화운아. 너만큼은 살아야 한다.”

점점 멀어져가는 제자의 기척을 느낀 태원진인으로부터 흘러나온 희미한 목소리가 울려왔다. 천화운은 신법을 펼쳐 달아나는 와중에도 저도 모르게 뒤를 돌아보았다.

거센 강기를 두른 채 손을 내뻗는 천마와, 거대한 검강을 일으켜 대적하는 태원진인!

그것이 천화운이 본 스승의 마지막 뒷모습이었다.

* * *

“······.”

이진운은 말없이 그 광경을 바라보았다. 그가 살았던 전생의 시간 중에서도 가장 참혹하고 끔찍했던 기억이었다.

스승을 버려두고 도망갈 수밖에 없던, 비참함과 무력함. 그 때문에 얼마나 악몽으로 밤을 설쳤던가.

헌데 그것이 다시 눈앞에서 생생히 펼쳐지다니······.

그는 슬프면서도 한편으로는 더없이 불쾌했다.

“울브스! 고작 이따위 광경을 내게 보여주다니······!”

그는 으르렁대듯 중얼거렸다. 이미 까마득한 세월이 지났지만, 그때의 절망감은 가슴 한편에 여전히 남아 있었다.

그런데 그때의 상처를 다시 들쑤실 줄이야.

‘이게 놈이 다루는 악몽이라 이건가?’

대충 알 것 같았다. 이런 식으로 상대의 자아를 붕괴시키거나, 동요를 일으켜서 스스로 무너지게 만드는 게 악몽이란 능력의 핵심인 모양이었다.

[이게 바로 자네가 가장 기억하고 싶지 않던 과거더군. 적을 앞둔 상태로 도망친 자네의 과거. 그리고 이 때 자네는 스승을 잃었지. 확실히 잊고 싶을 만하구나.]

대체 어디에 존재하는 것일까? 이진운에게 들려오는 울브스의 영언은 그 종적을 알 수 없을 만큼 교묘했다.

이진운은 허공을 노려보며 끓어오르는 듯한 목소리로 내뱉었다.

“···자, 나와라. 이런 쓸데없는 걸 보여주면서 내 성질 건들지 말고. 확실히 박살내 줄 테니까.”

[생각 이상이군. 그냥 옛 기억을 회상하는 정도가 아니라, 다시 똑같이 체감하는 것과 마찬가지일 텐데도 그 정도로 이성을 유지하고 있다니······.]

그랬다. 지금 보여준 악몽은 그저 기억을 되풀이한 정도가 아니었다. 옆에서 지켜보기만 한 것 같아도, 이진운은 전생 시절 천화운이 겪었던 이때의 일을 똑같이 체감하고 있었다.

당시의 분노와, 절망, 그리고 슬픔! 그 모든 게 그때와 똑같았다. 흘러넘치는 감정들이 무엇 하나 다를 게 없었다.

[허나 제아무리 자아가 건실하다 해도, 이 반복되는 기억들을 필멸자인 자네가 언제까지 버틸 수 있을까?]

그 영언이 끝나기 무섭게, 이 당시의 기억이 몇 번이고 되풀이되면서 반복되었다. 계속 반복적으로 체감하면서도 그 당시 느꼈던 감정은 조금도 변함이 없었다. 오히려 누적되면서 더욱더 깊게 차오르는 것 같았다.

하지만 자신 안에서 차오르는 분노와 슬픔 속에서도, 이진운은 차갑게 웃었다.

“그토록 자랑해대던 악몽이··· 고작 이 정도였나?”

[우웃! 이건?]

그 순간, 주변 공간이 변화하기 시작했다. 이진운을 중심으로 반복적으로 펼쳐져 있던 1차 정마대전 당시의 풍경이 지우개로 지우듯 완전히 지워져가고 있었다.

그것이 무엇을 뜻하는 건지 깨달은 울브스가 믿기지 않는다는 듯 부르짖었다.

[이건 말도 안 된다! 필멸자에 지나지 않는 자아가 이토록 확고하다고!?]

악몽은 악몽일 뿐이었다. 자기 자신의 자아만 확실히 확정할 수 있다면, 고작 옛 기억과 감정에 휘둘릴 이유가 없는 것이다.

이진운 또한 그러했다. 스승님이 돌아가셨던 그때의 과거는 슬프고도 분했지만, 이미 지나간 옛 일이었다. 그 감정에 휘둘릴 시기는 아주 한참 전에 지났다.

때론 그 당시를 회상하면서 스승님의 죽음을 애도하기도 하지만, 이미 반선지경까지 오른 이진운의 자아는 현실과 과거를 분명히 직시하고 있었다.

환상인지 악몽인지가 무너져 내리는 광경 속에서 이진운이 섬뜩하게 내뱉었다.

“정말 재미없는 장난이군. 고작 이게 네 악몽의 전부라면, 슬슬 끝낼 때도 되었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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