8권-23화
쉐에엑!
대기를 관통하는 옅은 파공성과 함께 화살이 마치 한 줄이 섬광이 된 것처럼 뻗어나갔다. 보이기에는 대수롭지 않게 보일지 몰라도, 그 위력은 어지간한 레일건 이상이었다.
[성가시구나!]
하지만 제아무리 빠르고 강한 공격이라 하더라도, 카르발타의 인지범위를 넘어서긴 어려웠다. 비록 이곳에 있는 것이 본체가 아닌 분신이라 하더라도, 그는 엄청난 실전 경험을 쌓아온 신화 급의 인베이더였다.
기본적인 역량 자체부터가 다른데, 이런 식의 뻔한 협공을 막지 못할 이유가 없었다.
쾅!
“큭!”
주먹을 내뻗기 무섭게 튕겨져 나오는 클레브. 그리고 매섭게 쏘아지던 엘레나의 화살도 튕겨 나오긴 마찬가지였다.
튕겨진 반동으로 진기가 흔들린 클레브가 질린 듯한 얼굴로 내기를 추슬렀다.
‘···괴물은 괴물이군. 나름 자신 있는 일격이었는데.’
단 한 번의 휘두름이었다. 검을 풍차처럼 휘돌리자, 거기서 발생된 막대한 경력의 힘이 반탄(反彈)의 성질을 가진 역장이 되어 클레브의 권격과 엘레나의 화살을 간단히 튕겨냈던 것이다.
허나 그들의 협공이 실패했다고 해서 그냥 헛된 짓만은 아니었다.
그 덕분에 생긴 아주 자그마한 빈틈. 아리엔은 그 즉시 빈틈을 찔러 들어갔다.
급풍쾌검(急風快劍) 1식. 풍령추인섬(風靈追認閃)
소리조차 들리지 않는 한 줄기 궤적!
그것은 점창의 절학 중 하나인 급풍쾌검의 1식 풍령추인섬이었다. 검풍을 제어해 대기와 부딪치는 마찰력을 최소화하는 한편 그 힘을 추진력으로 삼아 속도를 극대화하는 쾌검.
그것이 카르발타를 상대로 전개된 것이다.
허나 카르발타도 이런 상황을 예측 못한 건 아니었다. 그는 두 눈을 똑바로 뜬 채 자신의 목을 정확하게 찔러 들어온 아리엔의 쾌검을 가볍게 피해냈다.
헌데 피했다 싶었던 순간, 쾌검의 궤적이 변화했다. 그의 목을 찔러 들어왔던 일직선 찌르기가 돌연 꺾이면서 크게 베어오는 것이 아닌가.
[음!?]
매섭게 파고들어오는 극쾌의 참격에 카르발타조차 조금 놀란 표정이 되었다. 하지만 그는 수백 년 동안 수많은 오버러들과 싸워온 인베이더였다.
별의별 특이한 이능을 가진 자들과도 싸워 이긴 그가 이 정도 변화에 무너질 리 없었다.
그는 가볍게 허리를 뒤로 젖히며 그 일격을 피해냈다. 누군가 옆에서 이 광경을 봤다면 서로 짜고 쳤다고 해도 믿을 만큼 정교한 공방이었다.
허리를 젖힌 채 살짝 지면을 차는 것만으로도 무려 수십 미터를 미끄러져 날아간 카르발타는 다시 자세를 바로잡은 뒤 고개를 끄덕거렸다.
[대충은 알 것 같군. 검으로 일으킨 영력의 바람으로 검의 궤도를 수정해서 그런 변화를 일으킨 건가?]
“······.”
아리엔은 아무 말도 하지 않았지만, 내심 깜짝 놀랐다. 공방을 주고받은 것은 아주 잠시인데도 급풍쾌검의 기본 원리를 꿰뚫어보다니.
[확실히 검을 다루는 방식이 많이 다르긴 하군. 바람으로 속도와 검의 궤도를 제어하고, 힘의 방향성을 뒤틀어 내 공격을 흘린다라······. 그게 무공이란 건가?]
“그래요. 그게 바로 무공이죠.”
[상당히 재밌는 방식이야. 무예는 빠르고 강하면 될 줄 알았는데, 이런 식의 응용이 있을 줄은. 하지만 이 정도 완성도면 그냥 하루 이틀 사이에 이루어진 게 아니군. 이 정도면 거의 천년, 아니 그 이상의 세월 속에서 정립된 게 틀림없어.]
그렇게 말하면서 카르발타는 그 자리에서 이리저리 검을 휘둘렀다. 그 형태는 조금 전 아리엔이 그를 상대로 펼쳤던 검술과 거의 흡사했다.
그렇지만 카르발타는 이내 눈살을 찌푸렸다.
[생각보다 쉽지 않군. 그냥 겉모습만 따라 해봐야 흉내일 뿐이라 이건가?]
그랬다. 무공이란 그저 외형을 따라한다고 해서 그 묘리를 체득할 수 있는 게 아니었다. 그 안에 담긴 이치와, 깨달음. 그리고 진기의 운용 방식까지 꿰뚫어볼 수 있어야 비로소 체득이 가능해지는 것이다.
물론 카르발타 정도라면 오랜 시간을 두고 고찰할 경우 나름 얻는 바가 있을 테지만, 무공에 문외한이던 그가 이 자리에서 쉽게 무공의 원리를 체득한다는 건 있을 수 없었다.
결국 포기했는지, 카르발타가 고개를 절레절레 저으며 검을 거둬들였다.
[아쉽지만 나중에 시간이 나면 더 고민해봐야겠어. 지금은 네 녀석들부터 처리해야 할 때니 말이야.]
“그게 과연 쉬울까요?”
[꽤 자신만만하구나. 이 몸이 비록 본신이 아니라 해도 나는 카르발타다. 무공이란 게 제법이긴 하다만, 그 정도로 날 어찌하기엔 하찮구나.]
“물론 알고 있어요. 지금 보인 게 전부라면 말이죠.”
[음?]
카르발타는 조금 뜻밖이란 표정이 되었다. 객관적으로 봐도 이들 셋에겐 승산이 없었다. 지금 잠시 공방을 주고받았던 것도, 그 솜씨를 확인하기 위한 탐색전이기 때문이다.
본격적으로 싸운다면 언제든 끝장낼 자신이 있었다.
그렇지만 그런 차이를 모를 리 없을 텐데도 불구하고, 아리엔의 표정은 자신만만했다.
“그럼 저도 한 가지 말해두죠.”
[말해 봐라.]
“이 싸움 제가 이길 겁니다. 아니 우리가!”
승리를 단언하는 그 말에, 카르발타는 분노하기는커녕 오히려 재미있다는 감정을 떠올렸다.
[후후, 좋은 자신감이다. 하지만 그게 결과로 이어지지 못한다면 허세와 자만에 불과하지. 난 지금까지 그런 자들을 수없이 많이 봐 왔다. 이 몸을 처단할 것처럼 들먹거리던 놈들도 전부 시체가 되었지. 과연 너와 네 동료들은 어떨까?]
그의 검신 위로 전과 비교할 수 없는 기운이 응집되었다. 이젠 본격적으로 전력을 다할 작정인지, 강기라고 말할 수도 없는 수준의 힘이 운용되고 있었다.
그를 중심으로 수십 미터까지 활활 타오르듯 치솟는 강기의 불꽃 속에서 카르발타가 외쳤다.
[자, 네 자신감에 맞는 실력을 보여 봐라!]
쿠웅!
내딛는 일보와 함께 거대한 강기의 기둥이 공간을 내려찍어온다. 이건 전함마저도 두 쪽 낼 만큼 거대한 검이 지상을 쪼개는 것과 다름없었다.
하지만 아리엔은 두려워하지 않았다. 검의 묘리에서 뒤지지도 않았을 뿐더러, 그녀의 검은 저런 거대한 힘에 의존하는 게 아니었으니까.
그녀가 바라는 것은 바로 검천(劍天).
말 그대로 검의 이치로 하늘에 닿는 것이었다.
자신을 뭉개기 위해 떨어져 내리는 강기의 기둥을 응시하면서 그녀는 차분하게 한 가지 단어를 떠올렸다.
그것은 이 우주에서 오로지 그녀만을 위한 것! 그녀가 가진 고유한 능력의 이름이었다.
만상개화 의검천추(萬象開化 意劍天墜).
단지 떠올리는 것만으로도 스킬은 발동되었다.
그것은 애당초 그녀가 소유한, 그녀 영혼에 새겨진 힘. 바라는 것만으로도 이루어지는 권능이었다.
스킬이 발동된 순간, 그녀를 이루는 모든 것이 확장되기 시작했다. 그녀가 평소 느끼고 감지하던 것들이 하찮게 느껴졌고, 머릿속으로 상상하던 모든 게 바라는 대로 이루어질 것만 같았다.
하지만 그 전능감 속에서도 그녀는 자신의 목적을 상기했다. 지금 자신이 상대해야 할 적은 바로 눈앞에 있었으니까.
사혼검 카르발타. 지금 모든 힘을 끌어낸 자신이 최선을 다해야 할 생사대적의 이름이었다.
우우우웅!
그녀의 검 끝에 실린 진기의 힘이 그 어느 때보다도 더 짙고 선명한 검강을 이루어냈다. 경지가 이전보다 더 높아져서인지, 검강의 길이만 해도 무려 6미터에 가까웠다.
하지만 그 정도로는 카르발타에 비할 순 없었다. 그가 끌어낸 강기는 수백 미터를 넘어가는 규격 외의 것이었으니까.
하지만 아리엔의 눈엔 분명하게 보였다. 저 압도적이고 거대한 검강 안에는 수없이 많은 빈틈이 존재하고 있다는 것을.
‘벤다!’
그녀가 마음먹는 순간, 모든 게 이루어졌다. 진기가 저절로 호응해 움직이는 것은 물론, 그와 동시에 그녀의 몸도 동시에 초식을 전개하고 있었다.
이것이 바로 심즉행(心卽行)의 경지. 마음먹은 대로 그 즉시 이루어진다는 현경을 상징하는 여의신행(如意身行)의 초입 단계인 것이다.
검강은 더욱더 예리해졌으며, 그 기세는 저 하늘마저 벨 듯 충천했다. 그리고 그녀의 검이 수직으로 떨어진 순간, 그 궤적을 따라 공간마저 쪼개졌다.
삼절검(三絶劍) 제 2식. 낙인참(落刃斬)
연식(連式). 참공일섬(斬空一閃)
검이 그려낸 궤적이 공간을 긋는 그 순간, 시야에 비친 모든 게 어긋난 듯 보였다. 그럴 수밖에 없었다.
그녀의 참공일섬은 말 그대로 공간 자체를 베어냈으니까.
그리고 그 궤적의 범위 안에 드는 것은 그 무엇이라 해도 예외는 없었다.
끄그그긋!
공간이 비틀리는 듯한 소성과 함께 단면이 어긋나 보였던 모든 것이 쪼개지기 시작했다. 그 근처에 있던 세계수의 줄기는 물론, 저 먼 상공의 구름마저 길게 베어져 그 흔적을 나타내고 있었다.
[크읏!]
카르발타의 입에서도 신음이 터져 나왔다. 믿기지 않는 아리엔의 검식에 그가 끌어올린 검강이 두 갈래로 쪼개진 것은 물론, 자신까지 상체가 길게 베어지는 상처를 입고 만 것이다.
아마 검강이 쪼개지던 찰나의 순간, 몸을 멀리 빼내지 않았더라면 치명상을 입었을지도 모른다.
그가 혼란에 찬 얼굴로 중얼거렸다.
[이해할 수가 없다. 어떻게··· 분명 네가 가진 힘은 이 정도가 아닐진대, 어떻게 이만한 결과를!?]
“이게 바로 무공이랍니다. 약자가 강자를 상대하기 위한 약자들의 비전이죠.”
[고작 그런 잡스런 묘리를 궁구한 것만으로 이런 위력을···?]
아리엔의 답변에 더더욱 알 수 없다는 표정이 된 카르발타.
하긴 그럴 수밖에 없을 것이다. 인베이더로서 압도적인 힘을 다룰 수 있었던 그로서는 무공이 가진 이치란 그저 잔재주처럼 보였을 테니까.
물론 자신의 공세 속에서 끈질기게 버티는 아리엔의 모습을 조금 인상 깊게 보긴 했을 테지만, 설마 이런 초월적인 결과물이 나올 거라곤 상상도 못했을 것이다.
“그럼 이 싸움 끝내겠습니다.”
더 말할 필요 없다는 듯 내뱉은 그녀의 신형이 한 줄기 화살이 되어 쏘아졌다. 하지만 카르발타는 그녀의 위치를 파악할 수가 없었다.
눈에 보이는 것은 대부분 잔상일 뿐. 실체를 분간할 수가 없었다.
‘뭐지, 이건!?’
이건 단순히 빠르다고 해서 보일 수 있는 광경이 아니었다. 그가 알지 못하는 변화와, 묘리가 숨어 있기에 가능한 무위였다.
[우웃!?]
어느새 측면을 파고들어온 건지, 검 끝이 카르발타의 왼쪽 허리어림을 베고 지나갔다. 비록 깊진 않았지만, 자신의 인지를 넘어섰다는 것 자체가 충격적이었다.
[감히!]
카르발타는 위기감과 함께 분노를 느꼈다. 자신은 신화급에 도달한 인베이더였다. 고작 마이스터조차 되지 못한 애송이들에게 당할 순 없는 일 아닌가!
분신인 탓에 제 실력을 다 발휘 못했다 하더라도, 이런 놈들에게 당한다면 그 치욕을 어떻게 감당할 수 있을까?
그래서 더욱 거칠고 흉험한 움직임으로 대항했지만, 아리엔의 검술은 말 그대로 교묘했다.
직접 부딪치는 것은 최소화 하면서 그의 빈틈만 집요하게 파고들고 있었다.
[어떻게 이런!?]
검을 마주 대할수록 카르발타의 머리는 복잡하다 못해 혼란해졌다.
어떻게 검 하나로 이런 변화를 보일 수 있단 말인가?
빠르다가도 느려지고, 무겁다가도 가벼워지며, 부드럽다가도 돌연 강해지는 변화무쌍한 검로.
종잡을 수 없는 그 변화의 총합은, 단순히 빠르고 강할 뿐인 그의 검을 완전히 압도하고 있었던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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