8권-20화
하지만 그런 말을 듣고도 울브스는 딱히 반응을 보이지 않았다. 어지간한 자라면 도발로 받아들여 격분했을 테지만, 그는 오히려 재미있다는 듯 웃고 있었다.
“그런 말 참으로 오래간만에 듣는군. 하긴 날 적대했던 자들도 하나같이 그러했었지.”
옛 기억을 회상하듯 되뇐 그가 이진운을 응시하며 말했다.
“하지만 가능성 없는 말을 입에 담아봤자 공허할 뿐이라네. 승자는 언제나 나였지. 어느 누구 하나 자기가 내뱉은 말을 지킨 이가 없었어. 헌데 자네가 내 종말이 되겠다고?”
말투는 이전과 다름없었지만, 그 안에 담긴 뜻은 비웃음에 가까웠다. 한 마디로 말하자면 자신보다 명백한 하수인 이진운의 도발 따윈 우스갯소리로 치부하고 있다는 뜻이었다.
그렇지만 이진운은 조금도 감정의 변화를 보이지 않았다. 애당초 자신이 먼저 던진 도발이었다. 이 정도에 발끈하기에는 그가 보낸 세월들도 그리 호락호락하진 않았다.
“그럼 나도 같은 말로 되돌려주지. 지금까지 날 죽이겠다고 했던 녀석들은 꽤 많았다. 하지만 난 지금도 여전히 멀쩡히 살아있지. 네놈들이 떠받드는 카룬다임도 내게 망신만 당했는데, 네놈이라고 다를까?”
“말버릇이 고약하구나.”
그제야 도발이 먹힌 듯 살며시 눈살을 찌푸리는 울브스. 역시 인베이더들에게 있어 성좌는 역린이나 다름없었다.
“카룬다임이 날 죽이고 싶어서 네놈을 보냈다고 하니, 나도 그에 상응하는 보답을 해야겠지.”
이진운은 천천히 검을 뽑아들었다. 그리곤 울브스를 향해 겨누며 재차 입을 열었다.
“다시 한 번 확실히 말해두마. 네놈은 여기서 죽는다. 그리고 네 죽음은 네 주인과 카룬다임의 자존심을 짓뭉개주겠지.”
“건방지구나!”
쿠구구구!
지금까지 냉정함을 유지하고 있던 울브스가 격노한 얼굴로 기세를 폭출하기 시작했다. 어찌나 강력하던지 그 압도적인 영력의 흐름에 이진운조차 일순 눈썹을 꿈틀거렸을 정도였다.
‘예상했던 것보다 영력의 총량이 훨씬 거대하군. 역시··· 연정운의 말 대로인가?’
천외오천과 루클라가 충돌한 직후, 연정운이 자신에게 짧게 통신을 보내왔었다. 전투가 벌어진 와중에 보낸 짧은 내용이었지만 의미를 파악하기엔 충분했다.
<신화 급 인베이더 세계수 출력공유 가능. 추정 오버 그랜드 급.>
이진운은 그때 봤던 전문을 곱씹었다.
‘오버 그랜드 급이라.’
이곳 식으로 말한다면 반신의 단계였고, 중원 식으로 표현한다면 생사경의 경지다. 지금의 이진운으로서는 거의 대적 불가나 다름없었다.
하지만 그래도 이진운은 자신이 진다고 생각하지 않았다. 애당초 깨달음이야 생사경의 영역에 있었고, 울브스보다 못한 것은 영력의 규모 뿐이다.
‘게다가 놈은 완전치 않아. 그저 막대한 영력으로 부풀려놓은 풍선 같은 상태니까.’
다루는 힘의 규모가 오버 그랜드 급이라는 뜻이지, 실제 경지는 그보다 크게 못 미쳤다. 루클라가 막대한 힘을 휘두르면서도 그랜드 급에 지나지 않는 천외오천을 상대로 압도하지 못하는 게 바로 그 증거였다.
제아무리 큰 힘을 지녔다 하더라도, 그걸 활용할 수 있는 역량과 깨달음이 없다면 그것은 반쪽짜리만도 못했다.
그것이 울브스를 앞에 두고도 패배를 생각하지 않는 이유였다.
“그럼 화만 낼게 아니라 한번 직접 덤벼 봐. 내 말이 무슨 뜻인지 확실히 가르쳐줄 테니까.”
그것이 결국 발화점이 된 것일까? 서슬 퍼렇게 변한 울브스의 손이 이쪽을 향해 펼쳐졌다. 그리고 맺혀드는 막대한 영력!
그것은 마치 전함의 주포마냥 성대한 기세로 뿜어져 날아왔다.
쿠콰콰콰!
확실히 출력 하나는 압도적이었다. 일개 개인이 이만한 힘을 휘두를 수 있다니!
하지만 놀람도 잠시 뿐, 이진운의 두 눈은 심유하게 가라앉았다. 막대한 힘이라고 해서 못 막을 이유는 없었다.
그의 검이 전면 허공에 한 줄기 선(線)을 그려내었다. 지워지지 않을 것 같은 선명하고도, 강력한 궤적!
그 안에는 무려 세 가지의 무리가 하나로 녹아들어 있었다. 그 무엇보다 빠르고, 그 어떤 것보다 예리하며, 이 세상보다 더 무겁다는 쾌(快) 절(切) 중(重)의 이치가!
그렇게 해서 재탄생된 초유의 일식(一式)은 모든 것을 가로고 끊어낸다.
삼절검(三絶劍)
합식 광절단혼섬(光切斷魂閃)
피이잉!
희미하게 울리는 옅은 파공성! 그리고 그 순간, 믿기지 않는 광경이 펼쳐졌다.
밀려오던 영력의 기둥이 마치 모세의 기적마냥 양쪽으로 갈라지면서 이진운이 있던 자리를 비켜 지나가고 있었다.
쿠구구!
압도적인 영력이 지나간 후, 이진운은 옷자락 하나 상하지 않고 멀쩡한 모습으로 서 있었다. 그것을 본 울브스의 얼굴에 잔 경련이 일었다.
“그걸··· 막아?”
도무지 믿기지가 않았다. 분명 상대는 그랜드 급도 못되는 작자였다. 그런 인간이 어떻게 이 일격을 막을 수 있단 말인가.
제아무리 전력을 다하지 않았다 하더라도 마이스터 수준의 오버러 쯤은 가볍게 없앨 수 있는 힘이었는데 대체 놈은···!?
하지만 제아무리 믿기지 않아도 눈앞의 결과를 의심해선 안 된다. 놈은 자신이 예상했던 바를 훨씬 초월하고 있었다.
‘카룬다임께서 신산당부를 하실만한 인간이라 이건가?’
그제야 울브스도 경각심을 일으켰다. 이만한 힘을 받아낼 수 있는 자라면 여태까지 상대했던 자들처럼 적당하게 할 순 없었다.
그때, 이진운이 던진 목소리가 그의 귓전에 들려왔다.
“영력의 규모만큼이나 위력은 제법 있었지만, 운용 쪽은 엉망이군. 힘을 응집하는 방식이 이런 주먹구구식이라니. 그랜드 급이라고 보기엔 너무 허접한데?”
“······.”
울브스는 입을 굳게 다물었다. 상대가 일부러 도발하기 위해 던진 말이라는 건 알고 있지만 도무지 참기가 힘들었기 때문이었다.
그렇다고 해서 도발에 넘어가는 모습을 보여주기도 싫은 그는 입을 다무는 길을 선택한 것이다.
대답 대신, 그의 양 손에 막대한 영력이 응집되기 시작했다. 그것을 기점으로 울브스와 이진운 사이에서 본격적인 전투가 그 막을 올렸다.
* * *
격렬한 폭발과 여파가 지축을 진동시켰다. 이진운과 울브스 사이에서 벌어진 전투의 여파 때문이었다.
레이첸이 질린다는 얼굴로 혀를 내둘렀다.
“저 쪽은 벌써부터 장난이 아니네. 행성 자체가 흔들리는 것 같아.”
애당초 스케일부터가 차원이 달랐다. 그동안 나름대로 강해졌다고 생각했는데, 저들의 싸움과 비교하면 새 발의 피도 안 될 것 같았다.
전투가 벌어지는 방향을 잠시 흘깃 쳐다본 데이모스가 입을 열었다.
[이거 벌써 시작됐나 보군. 울브스 녀석 꽤 열 받은 모양인데? 평소답지 않게 저렇게 성급하게 진행하다니 말이야.]
[우리 쪽도 슬슬 시작하는 게 좋을 것 같군.]
카르발타가 그렇게 화답한 이후, 그들 둘에게서 막대한 살기가 일어나기 시작했다. 그 살기는 레이첸과 아리엔들을 향하고 있었다.
“웃!”
질식할 듯한 살기 앞에, 아리엔이 낮게 신음을 토해냈다. 가장 선두에 있던 탓에 살기에 먼저 노출된 탓이었다.
하지만 곧바로 진기를 운용해서 그것을 떨쳐냈다. 다른 이들도 마찬가지였다.
그나마 아리엔이 선두에서 살기를 밀어낸 탓에, 일행 중에서 가장 약했던 엘레나도 별 어려움 없이 살기를 떨쳐낼 수 있었다.
조금 뜻밖인 일이 있다면 그것은 바로 제이나었다. 기억을 잃고, 싸우는 방법조차 알지 못할 텐데도, 그녀는 살기를 아무렇지도 않게 버텨내고 있었다.
‘정말 알 수 없는 사람이야. 엘프들은 다들 그런가?’
문득 그런 의문이 떠올랐지만, 지금은 그걸 생각하고 있을 때가 아니었다.
[역시 여기까지 올만한 최저 수준은 된다 이건가? 이 기세를 버텨내다니, 제법이군.]
데이모스는 작게 감탄한 뒤, 전신에서 칠흑빛 기운을 뭉클 일으키기 시작했다. 네크로맨서 특유의 사기(邪氣)였다.
[허나 참으로 안됐구나. 다들 쓸 만한 새싹인 것 같은데, 이런 곳에서 죽어야 한다니 말이야.]
“그건 네놈의 망상이지!”
콰릉!
푸른 업화가 데이모스를 향해 떨어져 내렸다. 어찌나 빠른지 갑자기 내리친 벼락이나 다름없을 지경이었다.
그 공격의 출처는 바로 레이첸이었다. 아리엔이 놀란 눈으로 그를 돌아보았다.
“레이첸!”
“이놈은 내가 맡지. 그러니 카르발타는 너희들이 맡아!”
그렇게 말하면서 레이첸은 데이모스가 있는 쪽을 향했다. 마침 데이모스가 멀쩡한 모습으로 레이첸을 노려보고 있었다.
[그렇군. 네 녀석이 바로 천방지축이라던 레이첸이구나! 바이우드 가문 출신이라더니 어린 나이 치고는 제법이다만, 이런 기습이 통할 줄 알았냐?]
쿠구구!
그가 든 석장을 중심으로 검은 기류가 확장하기 시작했다. 이게 바로 망자에게는 버프를, 산 자에게는 디버프를 선사한다고 하는 디스피어드 오라였다.
하지만 레이첸은 그것을 가볍게 떨쳐냈다. 그의 전신에서 끓어오른 푸른 업화가 자신에게 다가오는 검은 기류를 그대로 태우기 시작한 것이다.
데이모스가 짜증스런 목소리로 내뱉었다.
[칫, 역시 카르테인의 힘이군. 그걸 그 정도 수준까지 다루게 되면 디스피어드 오라 따윈 먹히지 않는다는 건가?]
그렇지만 레이첸은 그의 넋두리 같은 중얼거림에 대꾸하지 않았다. 그 대신 몸을 활처럼 휘더니 곧 한 줄기 화살처럼 쏘아져 나갔다..
바로 분광착영(分光捉影)의 한 수인 섬화탄신(閃化彈身)이었다.
게다가 그의 섬화탄신은 단순히 전개되는 것에 그치지 않았다. 여기에 카르테인의 힘까지 더함으로서 마찰력과, 관성, 그리고 대기의 흐름마저 제어하여 그 속도를 극대화하고 있었다.
말 그대로 눈이 비치지 않을 정도의 움직임! 데이모스조차 일순 레이첸의 모습을 놓쳤을 정도였다.
콰아앙!
[크윽!]
궁신탄형을 극대화한 섬화탄신의 막대한 속도와 운동력에, 극히 패도적인 자업인 항마불인(降魔佛印)이 더해졌다.
제아무리 데이모스라 하더라도 타격이 아주 없을 리가 없었다. 가까스로 배리어를 전개해 방어하긴 했지만, 내부까지 울리는 경력의 힘을 모두 해소하진 못한 것이다.
하지만 상대는 무려 신화 급 인베이더였다. 여기 있는 게 비록 분신이라 할지라도 수백
년 이상 쌓은 경험과 실력이 어디 가는 건 아니었다.
[어린놈이 제법이구나!]
순식간에 술식이 완성되었다. 그것은 고위 흑마법 중 하나인 렉시온 카이더였다.
쿠르릉!
최상계 흑마법. 렉시온 카이더<천중천압파天重舛壓波>
무시무시한 어둠이 닥쳐들었다. 보기에는 어둠을 뿌리는 것 같지만, 이건 전함조차 우그러뜨릴 수 있을 만큼 막강한 중력파였다.
하지만 그것을 보고서도 레이첸은 물러서지 않았다. 오히려 이를 드러내며 자신만만하게 전진해 나갔다.
“이까짓 것!”
구우웅
그의 두 주먹에 더없이 무거운 기운이 맺혔다. 이것은 이진운에게 배운 무공에 카르테인의 힘을 더한 그만의 독자적인 수법이었다.
패천권(覇天拳)
천중무뢰(天重武雷)
카르테인의 힘은 음과 양, 불과 냉기, 플러스와 마이너스 등 모든 상극된 성질을 다룬다. 그것은 응용하기에 따라선 무거움과 가벼움도 제어할 수 있었다.
그것 중 하나가 바로 이것이었다.
최근 클레브는 이진운에게 새로운 무공을 전수받았는데, 그것은 무거움과 가벼움을 다루는 새로운 형태의 것이었다.
그것을 본 순간 레이첸은 거기에 빠져들었다. 물론 수련 방법 자체가 너무 극악해서 자신이 직접 배우지는 못했지만, 자신이 가진 카르테인의 힘이라면 비슷하게 흉내낼 수는 있다고 여긴 것이다.
그것이 지금 이 자리에서 첫 선을 보이게 된 패천권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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