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검신의 검은 우주를 가르고-194화 (195/448)

8권-19화

하지만 이진운의 시선은 코어 트리보다는 다른 곳에 가 있었다. 그의 눈빛이 깊게 가라앉았다.

“역시··· 놈들도 그냥 무방비 상태로 방치해 두진 않았다는 건가?”

아리엔도 그의 읊조림을 들었는지

“그 말은 저기에 인베이더들이 있다는 소리죠?”

“그래, 단단히 작정을 한 모양이다. 제법 강한 녀석들로 보인다.”

이진운이 그렇게 말하자 일행의 얼굴 위로 긴장감이 떠올랐다.

“제법 강하다면··· 어느 정도를?”

“아마도 레이첸 너와 비슷하거나 그 이상이겠지. 그런 녀석이 무려 둘이다. 그리고 한놈이 더 있는데··· 내 짐작이 맞다면 앞선 두 녀석보다 더 강할 거라고 생각한다.”

“···이건 그냥 작정하고 판 함정이네.”

이진운에게 대답을 받아낸 레이첸은 저도 모르게 마른침을 삼켰다. 어지간한 일로는 동요하지 않는 레이첸조차 그럴 정도니 아리엔들은 두말할 것도 없었다.

그럴 수밖에 없었다. 레이첸과 동급이라면 적어도 성멸 급 이상이란 뜻이고, 그보다 더 강한 녀석은 그랜드 급과 동급이라는 신화 급의 개체일 게 틀림없었으니까.

그런 괴물들이 지금 저 코어 트리에서 자신들을 기다리고 있는 것이다.

이건 누가 봐도 함정이라고 생각할 수밖에 없었다. 연합 함대와 치열하게 싸우는 상황에서 그만한 강자들을 따로 빼서 이곳에 배치한다?

인베이더 놈들도 바보가 아니었다. 단순히 세계수 행성을 방어하기 위한 목적이었다면 차라리 대규모 병력과 함대들을 배치해 두는 것이 더 나았을 것이다.

하지만 지금으로선 선택의 여지가 없었다.

“하지만 지금 중요한 건, 우리가 저기로 갈 수밖에 없다는 거다. 이게 함정이 든 아니든 상관없이 말이야.”

“······.”

이진운의 말 대로였다. 세계수 행성을 장악하거나 망가뜨리지 않고서는 연합이 이번 전쟁에서 패할 수밖에 없는 상황.

심지어 조율이 끝나기 전까지 끝마쳐야 하는 시간 싸움이 되었다. 그러니 함정일지도 모르는 위험을 무릅쓰고서라도 나아갈 수밖에 없었다.

“그러니 너희들도 각오 단단히 하도록 해라.”

“예.”

다들 무거운 목소리로 대답했다. 하지만 어느 누구 하나 두려워하는 기색은 보이지 않았다. 애당초 이 정도로 두려워 할 녀석들이었다면 부동심결을 익히지도 못했을 것이다.

다시 코어 트리 쪽으로 접근해가기 시작한 그들은 아래를 향해 천천히 하강하기 시작했다. 그러자 좀 전까지는 보이지 않던 자들이 눈에 띄었다. 무슨 특수한 수단으로 기운과 모습을 감추고 있던 모양이었다.

“설마 했는데 정말이었잖아.”

레이첸은 그렇게 뇌아리면서 적들을 응시했다.

이진운의 말대로 코어 트리를 지키는 자들은 전부 셋이었다. 잘생긴 얼굴의 사내 하나와 불길한 기운을 풍기고 있는 마법사, 그리고 온 몸을 칠흑빛 갑주로 감싼 검사였다.

“역시 왔군.”

이진운 일행이 지면에 내려서자, 잘 생긴 얼굴의 사내가 그렇게 말했다. 이미 알고 있었다는 말투였다.

이진운은 두 눈을 가늘게 뜨며 물었다.

“역시라면··· 우리가 올 줄 알고 있었나?”

“뭐 그런 셈이지. 다른 녀석들은 몰라도 자네에 대해선 아주 잘 알고 있다네, 이진운.”

상대의 입에서 이진운의 이름이 튀어나왔다. 그것이 의미하는 바는 아주 명백했다.

“내 이름까지 정확히 아는 걸 보면 여기가 날 잡기 위한 함정인 건 맞나 보군.”

“아니, 자네를 잡기 위해 나선 건 나뿐일세. 여기 있는 둘은 [에메랄드 헤븐]을 지키기 위한 가디언으로 파견된 친구들이지.”

“에메랄드 헤븐? 그게 너희들이 부르는 세계수 행성의 명칭인가?”

생소한 명칭에 이진운이 그렇게 묻자, 상대가 고개를 끄덕거린다.

“흐음, 연합에서는 그렇게 부르는군? 맞네, 에메랄드 헤븐이 정식 명칭이지.”

“그래, 명칭이야 어쨌든··· 너 정도 되는 자가 과분하게도 날 잡기 위해 나섰다니, 그 말은 누가 네게 지시를 내렸다는 말이겠군.”

이진운이 본 눈앞의 사내는 상당히 강했다. 정확히 말하자면 격 자체로 본다면 천외오천과 동급이었다. 이 정도의 강자가 유독 이진운 하나만을 노리고 나섰다면, 그건 보다 상위에서 내려온 명령이 있다고 생각할 수밖에 없었다.

상대도 그 사실을 순순히 인정했다.

“그래, 그 말대로일세. 자네를 없애야 한다고 카룬다임께서 말씀하셨지.”

“역시 카룬다임이었나? 그때의 일로 내게 경각심이라도 가진 모양이지.”

어느 정도 예상하던 바였다. 제아무리 단말이라 할지라도 초월자를 상대해 이긴 이진운은 그쪽에서는 무척이나 거슬릴 수밖에 없었을 테니까.

그렇지만 하필이면 이런 상황에서 그랜드 급의 강자를 보내올 줄이야. 물론 상대 못할 바는 아니지만, 한시가 급한 때에 만나다니.

이진운은 내심 곤혹스러우면서도 그것을 내색하진 않았다. 놈도 이점을 노렸을 게 틀림없었다.

“그래서 네놈은 누구지?”

“아, 그렇군. 조금 늦긴 했지만 내 소개를 하겠네. 나는 울브스, 꿈의 주인이라네.”

그 소개를 들은 일행이 크게 놀란 얼굴이 되었다.

“울브스!?”

“악몽의 주인!”

그랬다. 울브스는 연합 내에서도 꽤 널리 알려진 존재였다. 꿈과 악몽을 주관하는 성좌 오르비나의 휘하의 강자 중 하나로서, 상대에게 악몽을 선사해 파멸시킨다고 했다.

하지만 꿈을 다루는 만큼 정해진 모습이 없다고 했는데, 오늘은 잘생긴 사내의 얼굴을 자신의 모습으로 삼은 모양이었다.

“꽤 대단한 거물이셨군. 매번 모습이 다르다고 해서 미처 몰라봤어.”

“뭐, 여기저기 좀 유명한 편이라네.”

“하지만 유명한 건 나뿐만이 아니지. 내 옆의 두 녀석도 제법 하거든.”

그렇게 말하면서 울브스가 옆에 있던 두 인베이더들을 응시하자, 그들이 드디어 입을 열었다.

[흐흐흐··· 그래. 이 몸도 제법 유명한 편이지. 네놈들도 들어는 봤겠지? 나 데이모스의 이름을.]

“데이모스라면······?”

“죽음의 인도자 데이모스라고? 어떻게······!”

이름을 듣자마자 일행의 얼굴이 급격히 경색되었다.

이진운도 교육받을 때 한번쯤 들어본 이름이었다. 마찬가지로 신화 급 인베이더 중 하나로서 죽음의 성좌 모스르가의 휘하에 있는 강자였다.

강력한 흑마법과 네크로맨시 마법을 주력으로 사용하는 데이모스는 연합에서도 경계하는 자들 중 하나인데, 설마 이런 곳에서 가디언을 자처하고 있을 줄이야.

“그리고 그 옆에 있는 친구도 소개하겠네. 사혼검 카르발타라면 자네들도 잘 알겠군.”

“···이건, 산 넘어 산이군.”

레이첸조차 이젠 질린다는 얼굴이 되었다.

하나같이 무시할 수 없는 존재들이었다. 마찬가지로 죽음의 성좌 모스르가 휘하의 강자로서 무려 성좌 급의 데스 나이트로 유명했다. 근 수백 년 동안 놈의 검에 죽어나간 오버러들은 헤아릴 수 없을 만큼 많았다.

무거운 긴장감이 주변을 잠식해 나갔다. 그럴 수밖에 없었다. 하나도 아니고 무려 셋이나 되는 성좌 급 강자들이었다.

이진운과 그 일행의 전력이 나름 강하긴 했지만, 그들 셋을 전부 감당하기에는 턱없이 부족했다.

두렵거나 당황할 법도 했지만, 이진운은 외려 냉정한 얼굴로 물었다.

“하나같이 유명인사들 뿐이군. 하지만 뭔가 이상한데?”

“뭘 말인가?”

“울브스 네놈은 그렇다 쳐도, 옆에 둘은 신화 급이라고 보기엔 급이 너무 떨어져. 기껏 해야 성멸 급 최상위 수준? 뭐 그 정도도 대단하긴 하지만, 그래도 신화 급이라 하긴 턱없이 모자라지.”

이진운의 지적에 울브스는 조금 놀란 얼굴이 되었다. 이진운이 그 차이를 단번에 알아볼 줄 몰랐던 모양이었다.

그리고 그에 대한 대답은 데이모스의 입에서 흘러나왔다.

[제법 예리한 놈이군. 그랜드 급도 아닌 녀석이 그걸 알아봤나? 그래 맞다. 네놈 말대로 우린 신화 급이라 보긴 어렵지. 본체가 아니거든.]

“일종의 아바타인가?”

본체가 아니라는 말을 듣는 순간, 머릿속으로 어떤 광경이 퍼뜩 떠올랐다. 리클의 형이라는 리겔도 이와 비슷한 수를 사용했었다.

인위적으로 제작한 육신을 분신으로 삼아 아주 먼 곳에서 조종하는 수법. 아마도 그것과 동일한 방법을 데이모스와 카르발타가 사용하고 있음이 틀림없었다.

‘하긴 신화 급이나 되는 녀석들이니 그렇게 쉽게 바깥에 나돌 순 없었겠지.’

연합과 인베이더의 최전선은 라인트라였지만, 그렇다고 전쟁터가 이곳만 있는 건 아니었다. 놈들이 적대하는 세력은 공화국과 제국도 있었고, 그들과도 매일같이 연전을 벌이고 있는 중이다.

신화 급이나 되는 절대강자를 움직이는 건 인베이더 쪽에서도 쉽지 않다는 의미였다.

‘그렇다면 어떻게든 되겠군.’

이 상황을 극복할 수 있는 가장 최선의 대응책은 아주 간단했다. 레이첸과 제자들이 데이모스와 카르발타를 상대로 버티는 동안, 자신이 먼저 울브스를 쓰러뜨리는 수밖에 없었다.

문제는 울브스의 특성이었다. 연합에서 교육받은 내용에 따르면 악몽을 다룬다고 했는데, 그게 구체적으로 어떤 것인지는 나와 있지 않았다는 것이었다.

아마도 놈과 싸운 자들 중 제대로 살아남은 자가 거의 없어서인 듯싶었다. 운 좋게 살아남은 사람들도 다들 제정신이 아니게 된 바람에, 대체 무슨 일을 겪었는지 알아낼 수가 없었다.

그렇지만 이진운은 이길 거라 자신했다. 이때까지 갈고 닦아온 무공을 신뢰했고, 전생에 이뤘었던 경지를 믿고 있었다. 비록 지금은 그때에 못 미치긴 하지만, 당시의 깨달음은 지금도 변함이 없었다.

결심이 선 이진운이 제자들을 향해 말했다.

“다들 잘 들어. 내가 울브스를 상대한다.”

“스승님?”

갑자기 던져진 그 말에 제자들이 놀란 얼굴로 바라봤지만, 이진운은 그대로 계속 말을 이어나갔다.

“최대한 빨리 놈을 쓰러뜨릴 테니까. 너희들은 어떻게든 버티도록 해라. 이길 필요까진 없다. 아무도 죽지 않고 그때까지 버텨주기만 하면 돼. 알겠지?”

“뭐, 쓰러뜨려야 하는 것도 아니고 그냥 버티는 정도라면······.”

레이첸이 씨익 웃으며 그렇게 말했다. 상대가 제아무리 유명한 강자라 해도 단지 버티는 거라면 자신 있다는 태도였다.

아리엔도 결언한 얼굴로 대답했다.

“예, 꼭 버텨낼게요.”

그리고 클레브와 엘레나도 이어서 입을 열었다.

“저희보다는 스승님이 걱정이군요. 부디 무사하시길.”

“꼭 이기세요.”

오히려 제자들에게 격려를 받게 된 이진운은 고개를 끄덕이고는 울브스 앞으로 나섰다.

이제부터는 놈과 자신만의 싸움이 될 것이다.

그런 이진운의 모습을 본 울브스가 부드러운 목소리로 말했다.

“좋은 제자들을 두었군. 하지만 마지막 인사 치고는 너무 간단한 것 같은데. 원한다면 내 자네에게 시간을 조금 더 줄 수도 있네만.”

어떻게 보면 상대에 대한 배려 같았지만, 이진운은 고개를 저으며 거절해 버렸다.

“필요 없어. 어차피 네놈을 이기는 건 나일 테니까.”

단호한 그 태도에 울브스는 피식 웃어보였다.

“하긴 그런 자신감도 나쁘진 않지. 하지만 그 자신감이 현실로 이어진다고는 생각하지 말게. 많은 강자들이 내 앞에서 그럴듯한 말로 자신했지만, 살아 돌아간 자는 그리 많지 않네. 자네도 그럴 것이고.”

아주 확신에 찬 목소리였다. 하긴 그럴 수밖에 없었다. 지금까지 수백 년 동안 울브스를 상대로 싸워서 무사한 자는 없었으니까.

하지만 이진운은 그 말을 듣는 순간, 차갑게 냉소를 지어보였다.

“그건 내가 하고 싶은 말이군. 네놈이 지금까지 남들과 싸워 무사히 이길 수 있었다고 해서 앞으로도 계속 그럴 수 있다는 보장이 있나?”

“내 입으로 이런 말 하긴 뭐하지만, 내 상대가 될 만한 자는 거의 없다네. 그랜드 급도 못 되는 자네라면 더더욱 그렇고.”

“그렇게 자신만만해 하니 한 가지만 묻지. 네놈은 초월자들을 상대로 싸워 봤나?”

“······.”

이진운이 던진 그 질문에 울브스의 말문이 일순 막혀버렸다. 그 긴 세월동안 울브스도 초월자를 상대로 싸워 본 적은 없었기 때문이었다.

아니, 그런 존재들을 상대로 감히 대항한다는 생각조차 못했다.

그것을 눈치 챈 이진운이 비죽 웃었다. 그것은 그를 향한 조소였다.

“하긴 그렇겠지. 네놈이 초월자를 상대로 싸워 봤다면 그런 말을 할 수도 없을 테니까. 네놈은 진정한 강자와는 싸워보지도 않고, 자신보다 약한 자만 찾아 싸운 졸렬한 녀석에 불과해. 고작 그래놓고는 날 상대로 승리를 장담해?”

이진운은 곧 입가에서 미소를 지웠다. 그의 차가운 시선이 울브스의 두 눈을 꿰뚫듯 향하고 있었다.

“이 우주에 영원한 승자는 없다. 신화 급인 너도 초월자에게는 못 미치는 것처럼 결국 불완전하지.”

울브스는 그 순간 섬뜩한 느낌을 받았다. 마치 자신의 내면을 꿰뚫어보는 듯한 시선이었다. 지금까지 많은 자들을 상대해 봤지만 이런 경우는 처음이었다.

카룬다임에게 지시를 받을 때는 별 것 아니라 여겼는데, 저 눈빛을 보고 나니 갑자기 경각심이 치솟았다.

이진운은 슬슬 검 자루를 향해 손을 가져갔다. 그리곤 감정 하나 묻어나오지 않는 목소리로 조용히 고했다.

“잘 봐둬라. 네 앞에 서 있는 내가 바로 네놈의 종말이 될 자니까.”

#


0