8권-12화
‘일주일이라는 쿨타임이 좀 아쉽긴 하지만, 스킬의 공능을 생각하면 그 정도 리스크는 없는 거나 마찬가지지.’
하지만 그렇기에 아쉬웠다. 스킬 성능은 좋은데, 쿨타임이 있어 함부로 사용하기 어렵다는 것이었다.
수련용으로 적합하긴 했지만, 실전용으로도 강력한 위력을 발휘할 수 있는 스킬. 그 점은 레이첸을 상대로 펼친 대련에서 그 효과가 입증되었다.
‘지금 같은 전쟁 상황에서는 수련용으로는 못쓰겠군.’
실전에서 어떤 일이 벌어질 지 알 수 없는 상황에서, 비장의 패를 소모하는 짓을 할 수 있을 리 없었다. 그것이 초절정 고수를 단 1분뿐이긴 해도 무려 화경의 절대고수 급으로 끌어올려줄 수 있는 수단이라면 더더욱!
아리엔은 아직도 그때의 감각의 여운 때문인지 멍한 모습이었다. 손끝에 아련히 남은 그때의 그 느낌을 잊지 못하고 붙잡고 싶은 듯 보였다. 가만히 서서 계속 검을 이리저리 휘둘러보는 모습만 봐도 알 수 있었다.
그래서일까? 패배를 자인했던 레이첸이 불퉁한 얼굴로 내뱉었다. 명색이 대련 상대였던 자신은 안중에도 없다는 듯 보였기 때문이었다.
“젠장, 패배자는 신경도 쓰지 않겠다는 거냐?”
“녀석, 심술은.”
이진운은 피식 웃으며 레이첸을 향했다. 고유스킬을 일깨운 것은 물론 경지까지 한층 발돋움한 아리엔은 일단 혼자 놔둘 필요가 있었다. 자신이 깨달은 바를 소화할 시간이 필요하기 때문이다.
그러니 지금은 레이첸을 돌봐줄 때다.
“뭐야, 아저씨? 왜 그런 눈으로 날 봐?”
이진운의 시선을 느낀 듯, 레이첸이 흠칫 놀라며 한 발 물러섰다. 그런 녀석에게 이진운이 결정을 촉구했다.
“이제 슬슬 마음의 결정은 내렸을 텐데.”
“······.”
“네가 이룬 격이나 힘은 확실히 강력한 편이지. 그걸 좀 더 효율적으로 다룰 수 있는 법을 배운다면 지금보다 훨씬 더 강해질 거다.”
주저하고 있긴 하지만 녀석도 확실하게 깨닫고 있을 것이다. 자신이 무공을 배운다면 더 강해질 수 있다는 사실을.
무공은 단순히 몸을 움직이는 기교라는 개념을 넘어, 힘과 영력을 가장 효율적이면서 강력하게 발휘할 수 있는 하나의 이치임을 이젠 모를 수가 없었다.
이진운이 시선을 주면서 계속 대답을 요구하자, 결국 견디다 못한 레이첸이 그 답을 내놓고 말았다.
“알았어. 배울게, 배운다고!”
무공을 배운다고 말한 이상 이제 레이첸은 이진운의 제자나 다름없었다. 물론 중원에서라면 여러 가지 절차나 허례허식을 거처야 했겠지만, 이미 현대문명에 익숙해진 이진운은 그 절차들을 모두 무시해 버렸다.
그리고 그 대신 주먹을 들어올렸다.
딱!
“존댓말! 이제부터 난 네 스승이다. 스승은 제자의 어버이와 같지. 너는 네 아버지에게도 그런 식으로 말했더냐?”
졸지에 꿀밤 한 대를 얻어맞은 레이첸이 어리벙벙한 얼굴이 되었다. 맞은 게 아파서가 아니라, 갑자기 돌변한 이진운의 태도가 당황스러워서였다.
“아니, 그런 건 아닌데······.”
“아닌데?”
“···아닌데요.”
이진운이 노려보자 레이첸이 찔끔 놀라면서 말끝을 정정했다. 제 입으로 무공을 배우겠다고 했으니, 스승으로 대접해달라는 이진운의 요구를 무시할 수 없게 된 것이다.
“이제부터 스승님이라 부르고, 항상 존댓말을 쓰도록. 스승으로서 내리는 첫 명령이다.”
“···예.”
레이첸이 이내 시무룩한 목소리로 고개를 끄덕였다.
하지만 이진운에게 기어오를 마음은 들지 않았다. 그의 무공이란 지식에 감탄하기도 했지만, 방금 전 보여준 실력행사 때문이기도 했다.
‘젠장, 어떻게 된 거지? 피할 수가 없었어!’
자신에게 꿀밤을 먹일 때 주먹이 다가오는 걸 알아챘음에도 불구하고 미처 피하지 못했다. 그 순간, 무형의 기세가 자신을 움직이지 못하도록 옭아맸기 때문이었다.
‘정말 터무니없네. 이 아저씨, 우리 아버지와 정말로 맞먹는 거 아니야?’
믿기지 않았지만 눈앞의 현실이 그랬다. 겉으로 드러난 격은 분명 자신과 비슷한 수준인데, 어째서 이런 압도적인 차이가 존재한단 말인가?
‘무공이란 걸 배우면 진짜 저렇게 될 수가 있는 건가?’
그래도 확신이 들진 않았지만, 이미 결정을 내린 마당이었다. 다시 무를 수 없다면, 철저히 배워서 저 아저씨에게 언젠가 호된 맛을 보여줄 것이다.
허나 그런 낌새를 눈치 챈 건지, 이진운이 묘한 눈초리로 레이첸을 내려다보았다.
“눈빛이 꽤 불손해 보이는군.”
“윽······.”
자신의 폐부 깊은 곳까지 꿰뚫어보는 듯한 그 눈빛에 레이첸이 움찔 몸을 떨었다.
하지만 이진운은 오히려 재미있다는 듯 웃었다.
“무슨 생각을 하고 있는지 뻔히 보인다. 하지만 뭐 상관없지. 그렇지만 지금처럼 대놓고 건방진 태도를 보이면 언제든 따가운 맛을 보여줄 것이니 명심해라.”
따악!
경고삼아 녀석에게 다시 한 번 꿀밤을 먹이는 이진운. 또다시 정수리를 강타당한 레이첸이 맞은 부위를 매만지며 억울하다는 표정을 지었다.
“아, 진짜! 아버지한테도 이렇게 맞아본 적 없는데······.”
어디선가 들어본 듯한 진부한 대사가 들려왔지만, 이진운은 모른 척했다. 조금 말투가 거칠긴 해도 성품은 나쁘지 않은 녀석이었다. 이 정도 불평이야 그냥 웃어넘겨도 무방했다.
* * *
며칠 뒤, 연합 함대는 드디어 출정 준비에 들어갔다. 파손된 전함을 수리하고, 몇 가지를 업그레이드 하는 작업을 대부분 끝냈기 때문이었다.
“이제 슬슬 움직일 때가 되었군.”
함대들의 상황을 보고받은 베네트 국장은 고개를 끄덕거렸다. 마음 같아선 더 철저히 준비하고 싶지만, 마냥 시간을 길게 잡는다고 해서 아군에게 유리하단 법은 없었다.
그렇다면 어느 정도 준비된 상태에서 들이치는 것이 더 낫다. 지금이라면 놈들이 소행성에 의해 입었던 타격도 완전히 회복하지 못했을 가능성이 높았기 때문이었다.
연합 함대가 출정 준비에 들어간 순간, 인피니티 킹덤도 그에 맞춰 준비에 들어갔다.
그동안 수련에 전념해 왔던 이진운과 일행들도 마찬가지였다.
수련을 마치고 나온 레이첸이 진저리난다는 듯 투덜거렸다.
“아, 힘드네. 힘들어. 이래선 제 컨디션이나 나올지 모르겠네.”
그럴 수밖에 없었다. 요 며칠 간 레이첸은 이진운에게 환상공간 속에서 혹독한 수련을 받아왔다. 하루가 무려 1년씩이나 되는 곳이니, 무려 3년이란 시간을 그곳에서 보낸 셈이다.
하지만 이진운은 그조차도 용납 못한다는 듯 다그쳤다.
“운기조식만 잠깐 하면 금방 회복될 것 가지고 투덜대지 마라. 이제부터가 진짜 전쟁이니까.”
“그 정도는 잘 알고 있습죠, 스승님.”
입을 삐죽이면서 대답한 레이첸은 곧바로 운기조식에 들어갔다. 그동안 배운 게 쓸데없진 않았는지, 아주 자연스러워 보였다.
그리고 그 옆으로 아리엔들도 마찬가지로 운기 조식에 들어갔다. 전투에 들어가기 전에 최상의 컨디션으로 임하기 위해서였다.
그에 반해 이진운은 그들을 위해 호법을 섰다. 이미 진기 자체가 자연적으로 상시 운기조식되는 거나 마찬가지인 만큼 따로 운공을 행할 필요가 없었던 것이다.
그때 홀로그램 창이 떠올랐다. 메인 브릿지에서 날아온 영상통신이었다.
[드디어 출관하셨군요.]
“때가 됐으니 나와야지. 출정까지 얼마나 남았지?”
[3시간 정돕니다.]
“정말로 얼마 남지 않았군.”
3시간이 긴 것 같아도, 사실 얼마 안 되는 시간이었다. 몇 가지 장비 좀 갖추고 하다 보면 금세 지나갈 것이다.
운기조식만 끝나고 나면 바로 장비부터 챙겨야 할 듯싶었다.
[하지만 과연 얼마나 승산이 있을지 모르겠군요. 이번 전투에서 확실히 승리하지 못하면 예전과 같은 지지부진한 상황으로 치닫게 될 겁니다.]
아르페인은 조금 회의적인 반응이었다. 하긴 그럴 만도 했다. 지금까지 연합과 인베이더들이 싸워 온 세월을 보면 명백했으니까.
서로 밀리고 미는 싸움이 수없이 반복해 왔으니, 이번이라고 해서 크게 다를 것 없었다. 상대를 완전히 전멸시킬 수 없는 이상 전황은 다시 고착화 될 것이다.
그건 이진운도 비슷했다.
“아마 쉽진 않을 거라고 본다. 인베이더들도 바보가 아닌데, 쉬이 당해줄 리가 없지.”
[그렇겠지요.]
“그래도 싸울 수밖에 없겠지. 그래야 현상유지라도 할 테니까.”
최선을 다해 싸운 결과가 고작 현상유지라는 건 조금 안타깝지만, 그게 작금의 현실이기도 했다. 압도적인 힘이 없는 이상 그건 필연이었다.
“아무튼 준비는 어떻게 됐지? 리스티는?”
[이미 완료했습니다. 리스티 양도 벌써 다 끝내고 휴식 중이고요.]
“하긴, 그 녀석 실력이야 내가 더 잘 알고 있지. 아무튼 수고했네.”
[별 말씀을. 그럼 조금 있다가 뵙겠습니다.]
그걸로 아르페인과의 통신은 끊어졌다. 그도 전투를 앞둔 상황이니 이진운과의 통신에 계속 매달려 있을 시간이 없었던 것이다.
‘준비하던 게 완료가 됐다면··· 그래도 최소한의 보험은 만들었다 이거겠지.’
이걸로 과연 최악의 경우를 대비할 수 있을지는 모르겠지만, 없는 것보다는 나았다. 지금으로선 그게 이진운이 할 수 있는 최선이었다.
그는 제자들이 눈뜨길 기다라면서 다시 시간을 보내기 시작했다.
* * *
어느덧 3시간이란 시간이 훌쩍 지나가 버렸다. 그동안 전투를 준비하고 있던 연합 함대들은 일제히 움직이기 시작했다.
목적지는 현재 인베이더 함대가 머물고 있는 주역이었다.
놈들이 그곳에서 함대를 정비하면서 조금도 움직이지 않고 있다는 게 파악된 상황.
그래서 전격적으로 치고 나가 공격을 퍼붓기로 했다.
고오오오!
수천, 수만 척에 이르는 전함들이 일제히 전진하기 시작했다. 그 광경은 말 그대로 장관이었다. 우주에 수많은 별무리들이 존재한다고 하지만, 수많은 전함들이 한 곳에 밀집해 있는 광경은 그 이상으로 더 위압적으로 보였다.
그러자 인베이더 측에서도 즉각 반응이 나타났다. 놈들도 항상 경계를 하고 있는 만큼, 이쪽의 움직임을 대번에 파악한 것이다.
[인베이더 전 함대, 대열을 갖추기 시작했습니다.]
“뭐, 그렇겠지. 그냥 기습당해주면 좋았을 텐데, 그건 어려울 테고.”
오퍼레이터의 목소리에 베네트 국장은 심드렁히 중얼거렸다. 애당초 이만한 규모의 함대들이 움직이는 상황이니 기습 같은 작전은 기대할 수도 없는 일이다.
그렇지만 그 이상의 것을 준비해뒀다.
아마 놈들도 당하고 난 뒤엔 깜짝 놀라리라.
“자, 그럼 놈들의 눈부터 속이기로 하지. 자, SB탄 준비!”
베네트 국장의 명령이 떨어지자 무수한 전함들이 사일로를 일제 개방하였다. 일단은 놈들이 가진 패 중 하나인 위상전환 자체를 먼저 무력화시킬 생각이었다.
“발사!”
명령이 떨어지기 무섭게 수만 척의 함선에서 치솟은 미사일들이 일제히 폭우처럼 퍼부어지기 시작했다.
인베이더 측에서도 즉각 대공사격에 나섰지만, 이렇게 많은 미사일들을 전부 격추할 수는 없었다. 특히 미사일은 SB탄과 일반 탄이 서로 뒤섞여있는 만큼 SB탄만 골라서 격추한다는 건 더더욱 무리였다.
쾅! 콰콰콰콰!
미처 격추시키지 못한 미사일 스프레드가 인베이더 함대를 불구덩이로 만들었다. 인베이더 함대의 규모는 상상 이상이었지만, 연합 함대가 쏟아낸 미사일들은 놈들 전체를 타격하고도 남을 만큼 충분했다.
미사일들이 작열하고 난 뒤, 예상했던 대로 위상공간이 해제되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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