8권-11화
“이건 말 그대로 사기로군.”
이번 싸움은 이진운 자신이 붙인 거긴 했지만, 사실 아리엔이 이길 확률은 거의 없었다.
레이첸이 무공에 익숙하지 않은 만큼 어느 정도 선전은 할 수 있었겠지만, 그것도 다 녀석이 수련장이라는 제한된 장소 때문이었다.
대인 공격이 아닌 이 일대 공간을 통째로 쓸어버리는 광역 공격을 사용했더라면 아리엔은 지금과 같은 방식으로 레이첸의 공격을 해소하진 못했을 것이다.
헌데, 이런 상황에서 고유스킬의 각성이라니.
아마 지금이라면 레이첸이 광역 공격을 퍼붓는다 하더라도 통하지 않을 터. 현재 상태의 아리엔은 그만큼 강했다.
고오오!
“이야아아!”
더 이상 참을 수가 없었던지, 레이첸의 공격도 더 강력하고 맹렬해졌다. 좀 전까지는 전력이 아니었다는 듯, 무시무시한 위세로 그녀를 향해 밀려들고 있었다.
그렇지만 그에 맞서는 아리엔의 검은 계속해서 변화했다. 때에 따라 상황에 맞춰 그녀가 지금까지 배운 검공들이 쏟아져 나오고 있었다.
분광검은 기봉검이 되고, 기봉검은 삼절검이 되었다가, 혹은 사일검이 되고 또는 급풍쾌검이 되기도 했다.
그건 마치 점창의 수많은 검식들이 하나로 엮여가는 듯한 느낌이었다.
“······!”
아리엔은 자신을 이끌고 있는 흐름을 따라 계속해서 움직였다. 수없이 변화하는 검초, 그리고 무한하게 이어지는 투로가 레이첸의 모든 공격을 끊어내고 흘리고 있었다.
이 모든 게 꿈만 같았다. 그동안 머리로는 알면서도 깨닫지 못했던 수많은 무리와 이치들이 자신의 움직임 속에 그대로 녹아나고 있었다.
그 고양감은 세상의 어떤 쾌감보다도 크고 강렬했다. 모든 게 뜻대로, 생각한 바 그대로 이루어지는 듯한 느낌이었다.
‘말도 안 돼! 분명 힘의 총량은 내가 더 압도적이야. 내 1/10도 안되는 웰라우드 가의 차녀가 내 공격을 이런 식으로 받아친다고?’
물론 레이첸도 그녀가 어떤 방법으로 자신의 공격을 흘리고 끊어내며 해소하는지는 대충 알고 있었다. 하지만 그것도 어느 정도지, 이렇게까지 압도적인 차이의 힘을 받아낸다는 게 과연 가능하기나 할까?
끝없이 퍼붓는 공격을 계속 그런 식으로 받아내는 건 나노 단위보다 더 작은 단위를 베는 것 이상의 정밀함을 요구했다. 이건 도저히 인간이 해낼 수 있는 기교가 아니었다.
‘이게 바로 무공이라는 건가? 이런 말도 안 되는 걸 가능하게 해주는 기교라고!?’
어느덧 아리엔은 레이첸의 지척까지 다가왔다. 그는 거듭해서 공격을 퍼부었지만, 아리엔이 그 모든 것을 피하고 베고 끊어내면서 여기까지 온 것이다.
그리고 그녀의 검은 바로 레이첸의 목덜미에 드리워졌다. 그의 움직임 속에 있던 허점을 정확히 찔러온 터라 피할 수조차 없었다.
“······.”
수련장 내로 잠시 묵직한 침묵이 감돌았다. 그만큼 이번 대련의 결과가 충격적이기 때문이었다.
도저히 승산이 보이지 않던 아리엔이 승리할 거라곤 어느 누구도 예상 못했던 것이다. 어느 정도 분전할 수 있을 거라 생각은 했지만, 이건 상상을 뛰어넘어도 너무 뛰어넘지 않았는가.
“···젠장! 그래··· 내가 졌다, 졌다고!”
레이첸은 신경질적으로 내뱉었다. 검까지 목에 닿은 시점에서 패배를 자인하지 않을 수가 없었다.
그제야 정신이 들었는지, 아리엔이 화들짝 놀라면서 즉시 검을 회수했다. 그동안 그녀의 정신은 황홀경에 빠져 있던 터라, 지금 상황에 대한 인지가 조금 늦었던 것이다.
“아!”
아리엔은 자신이 레이첸에게 승리했음을 비로소 깨달았다. 지금 현재로선 이길 수 없을 거라 여겼던 상대가 자신 앞에서 패배를 선언하고 있었다.
하지만 조금도 기쁘거나 들뜨지 않았다. 오히려 안타까울 지경이었다.
그동안 그녀가 잠시 동안 누리고 있던 수많은 이치에 대한 이해와 깨달음들이 빠르게 증발해 사라지기 시작했다. 마치 지난 밤 즐거웠던 꿈에서 깨어나기라도 한 듯한 기분이었다.
어떻게든 지금 맛봤던 경지와 깨달음을 붙잡아두고 싶었지만, 그것은 손에 쥔 모래처럼 올올이 빠져나가버렸다. 그녀로서는 할 수 있는 게 아무것도 없었다.
“왜···?”
그녀는 안타까운 나머지 그렇게 외쳤다. 방금 전에 느꼈던 전능감이 더 거짓말인 것처럼 사라진 것이다.
마치 천상에 올랐다가, 다시 평범한 인간으로 추락해버린 기분이었다.
그녀의 그런 상태를 짐작한 이진운이 옆으로 다가왔다. 그리곤 그녀의 어깨에 손을 올리며 말했다.
“그렇게 아쉬워할 것 없다. 아직 네 것이 될 때가 아니었으니까.”
“예, 스승님 말씀대로 그런가 봐요.”
아리엔은 착잡한 목소리로 그렇게 화답했다. 그녀도 자신의 상태가 어떤지 대충 짐작하고 있었다.
무인이 깨달음을 얻는 경우 벌어질 수 있는 상황에 대해서 이진운에게 몇 번이나 들어 왔었기 때문이었다. 그것을 소화한다면 바로 다음 단계로 넘어가지만, 그렇지 못하면 거의 남지 않고 깨끗하게 증발한 것도 배웠던 것이다.
하지만 이진운은 그게 아니라며 덧붙여 말해주었다.
“그리고 지금 네가 느낀 건 깨달음이 아니다. 바로 네 고유스킬의 효과지.”
“에? 고유스킬이요?”
갑자기 튀어나온 고유스킬 이야기에 아리엔이 화들짝 놀라 되물었다.
“그래. 방금 전 네 상태는 정상적인 상황에서라면 절대 있을 수 없는 일이었어. 잠시 뿐이라곤 하지만 그냥 한두 단계도 아니고 무려 화경의 막바지를 엿보다니. 네 수준에선 곧바로 주화입마로 죽어도 이상하지 않았었다.”
“그 정도였나요?”
“그래. 그런데도 넌 지금 무사했지. 지금까지 정체를 알 수 없었던 그 고유스킬이 아니라면 방금 전 네 상태를 설명할 길이 없어.”
“화··· 확인해 볼게요.”
아리엔은 다급히 시스템 창을 열었다. 그러자 그녀가 매일 보던 고유스킬 이름 옆에 전에 보지 못했던 설명들이 간략하게 추가되어 있었다.
*만상개화 의검천추(萬象開化 意劍天墜)(S급-성장형) : 상성불리를 뒤집는 환상의 검리. 자신이 상상하는 개념과 검리를 그대로 구현한다. 자신의 재능이나 경지로 닿을 수 없는 경지나 검초를 체현하는 능력이라 해야 할 것이다. 하지만 지나치게 능력 이상의 것을 흉내 내려 하면 영맥이 파열하거나 주화입마, 혹은 뇌가 과열되어 죽을 수 있으니 사용에 주의해야 한다.
아리엔 웰라우드가 손에 넣은 이능으로, 가문의 검술의 한계를 넘어 자신이 상상할 수 있는 절대의 검술을 손에 넣고자 하는 갈망이 현실화 된 형태의 이능이라 하겠다.
-쿨타임 : 1회 사용 후 1주일.
-유지시간 : 1분.
“······.”
아리엔은 넋 나간 듯 자신의 스킬 창만 바라보았다. 자신이 그토록 바랐던 갈망이 이런 형태로 나타나게 될 줄이야.
하지만 한편으론 원망스러웠다. 그동안 애타게 찾아도 답해주지 않던 고유스킬이 왜 이제야 화답해줬단 말인가.
이진운도 옆에서 아리엔의 스킬창을 보게 되었다. 그도 볼 수 있도록 아리엔이 미리 설정해 뒀기 때문이었다.
내용을 확인한 이진운이 고개를 주억거렸다.
“그랬군. 역시였나.”
예상했던 것이 그대로 맞았다. 깨달음치곤 아리엔의 상태나 수준이 너무 이질적이었다.
이것도 고유 스킬의 효과라니. 그동안 무공 때문에 신경 끄고 살았던 오로라 시스템이 주는 특혜도 그냥 무시할 것만도 아니라는 생각이 들었다.
그때, 잠자코 있던 아리엔의 입술이 열렸다.
“정말 모르겠어요. 제가 원할 때는 답해주지 않더니, 어째서 이제 와서 발현된 거죠? 제가 갈망해서 생긴 스킬이라고 하면서··· 왜?”
그것은 원망이자 탄식이었다. 지금은 이진운을 만나면서 가문의 비전을 복원하고, 무공을 익히기까지 했지만, 그때는 너무도 힘들고 고통스러웠었다.
그런데도 화답해주지 않던 고유스킬이 뜬금없이 이제와 반응해주다니. 기쁘기는커녕 눈물이 나올 정도로 화가 나고 원망스러웠다.
그에 대해 잠시 생각해보던 이진운이 입을 열었다.
“그건 아마도 네가 준비되지 않아서일 거다.”
“준비요?”
“그래. 그동안은 네 실력이나 무에 대한 이해도가 그 스킬을 발동할만한 여건에 못 미쳤다는 거겠지.”
스킬의 내용만 봐도 명확했다. 상성불리를 뒤집는 상상 속 개념의 검리. 그걸 몸으로 체현하고자 하면 얼마나 대단한 수준이어야 가능할까?
물론 깨달음과 무리에 대한 이해는 스킬 효과에 의해 저절로 이루어진다고 하지만, 그것도 어느 정도 기초가 된 상태여야 받아들일 수 있는 것이다.
‘아리엔은 이제야 겨우 초절정이 되었지. 이게 스킬 발동의 최소한의 조건이라는 의미겠군.’
그런 이진운의 짐작 섞인 설명을 듣고 난 아리엔은 비로소 고개를 끄덕거렸다.
“그랬군요. 결국 제 실력 탓이었네요. 제 실력이 부족해서 사용하지 못했던 걸 괜히 원망했군요.”
아리엔은 그렇게 중얼거리면서 검을 쥐고 있는 자신의 오른손을 내려다보았다. 깨달음과 무에 대한 이해는 전부 사라졌지만, 좀 전까지 레이첸의 공격을 베고 끊어내던 그때의 감각만큼은 아직도 어렴풋이 남아 잊혀지지 않고 있었다.
덕분에 앞으로 어떻게 나아가야 할지 알 것 같았다. 그때의 감각을 다시 자신의 것으로 만든다면, 자신은 지금보다 한 단계 이상 더 전진할 수 있으리라.
“이제야 조금 알 것 같아요.”
“음?”
“검을 어떻게 휘둘러야 하는지 말이에요.”
그렇게 말한 아리엔이 느닷없이 허공을 향해 검을 휘둘렀다. 그러자 무려 2m를 넘는 검강이 치솟더니 그대로 공간을 갈랐다.
피이잉!
수직으로 그어지는 눈부신 궤적과 함께 대기가 파열음을 토해내었다. 이전과는 비교도 할 수 없는 위력이었다.
그 여파만으로도 수련장 내에 경기의 폭풍이 밀어닥쳤다. 클레브와 엘레나는 경기의 여파를 감당하기 위해 호신진기까지 끌어 올려야만 했다.
클레브는 진정으로 허탈하다는 얼굴로 중얼거렸다.
“그새 또 강해지다니······.”
죽어라 노력해서 겨우 그 발끝에 닿는가 싶으면 그새 또 멀어져 버렸다. 물론 아리엔은 웰라우드 가의 무예를 자신에게 가르쳐준 교관이었지만, 이젠 이진운의 제자가 되어 동등한 위치에 섰다고 생각했는데 여전히 따라잡을 수가 없었다.
“깨달음이 다 날아간 줄 알았는데, 조금은 기억하는 게 있던 모양이지?”
이진운의 물음에, 아리엔은 고개를 가로저어보였다.
“그런 건 아니에요. 머릿속에 남은 건 전혀 없어요. 다만 그때 느꼈던 감각이 조금 남아 있는 게 전부에요.”
“그런데도 이 정도라니······.”
지금 보인 무위만 해도 초절정의 진경은 넘어섰다. 잠시 스킬이 발동되었을 때의 느낌을 되살린 것만으로도 무위가 한 단계 이상 진전된 것이다.
지금 현재보다 상위의 경지를 체험한 것이 그만큼 도움이 되었다는 말이었다.
“단순히 경지를 일시적으로 높여주는 게 전부가 아니었군. 잘만 사용하면 윗 단계의 깨달음을 엿보는 방식으로 활용해도 되겠어.”
물론 스킬 효과가 끝나면 깨달음은 금세 증발되겠지만, 여운처럼 남는 것만으로도 충분했다. 아무 단서도 없이 상위의 경지를 향해 수련하는 것보다는, 확실한 길잡이가 되어 줄 것이다.
아리엔에게 있어 이보다 더 좋은 스킬은 없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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