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검신의 검은 우주를 가르고-185화 (186/448)

8권-10화

‘미친! 한순간에 기세를 이렇게까지 철저히 통제해 다룬다고!?’

단순히 잘 통제하는 정도가 아니다. 이렇게 기세를 수천 개로 응집해 나누면서도 조금도 흐트러짐이 없다. 심지어 검처럼 응집된 기세들은 마치 정밀한 계량이라도 거친 듯, 크기와 밀도까지도 정확히 일치하고 있었다.

헌데도 이걸 아주 가볍게 해냈다. 숨 쉬는 것만큼이나 자연스럽게.

하지만 이 정도로 놀라기엔 아직 일렀다. 이진운이 보여주는 실력은 이제부터가 진짜였다.

“읏!”

수많은 무형의 검림(劍林)으로 화한 이진운의 기세가 움직이기 시작한 순간, 레이첸이 일으킨 기세는 순식간에 허물어졌다.

아니 허물어졌다는 말도 맞지 않는다. 마치 수많은 개미들이 나무를 갉아먹듯 그의 격렬하면서도 단단한 기세를 완전히 분쇄해버린 것이다.

그것도 손가락 하나 까딱하지 않고, 제자리에 선 그 상태에서.

‘분명 격은 나와 비슷한데··· 이 정도의 차이라니.’

아마 차원이 다르다는 말이 바로 이럴 것이다.

자신의 기세가 이진운의 검림에 철저히 난자되어가는 광경을 바라보면서 레이첸은 그것을 깨닫고 말았다.

대체 어떤 차이가 있단 말인가? 격은 물론 기세의 수준도 크게 다를 바 없거늘, 그는 너무 여유롭게 자신을 제압했다.

그런 레이첸의 마음을 읽은 듯, 이진운이 입을 열었다.

“왜? 믿기지가 않는가 보지? 너와 나 사이에 이런 격차가 있다는 게.”

“······.”

“말하자면 간단하다. 생산직 영능력자와 전투 영능력자 정도의 차이지. 생산이나 연구, 제작계 능력자들도 깨달음에 따라 격은 얼마든지 높일 수 있지만, 그렇다고 해서 딱히 전투능력이 높은 건 아니잖아. 자신보다 훨씬 하위의 격을 가진 전투능력자에게도 죽을 수 있는 게 비전투계 능력자니까.”

“아니, 아저씨! 난 엄연히 전투능력계통인데······.”

자신이 졸지에 비전투계열 능력자로 비유되는 상황에, 레이첸이 뭐라 항변하려 했지만, 이진운은 딱 잘라 말했다.

“격은 비슷하더라도 너와 나 사이엔 그 만큼의 차이가 있다는 걸 지금 말하고 있는 거다. 너라면 그 의미를 충분히 알아들었을 텐데.”

“으음······.”

레이첸은 그 말에 낮게 침음하고 말았다.

그래. 모를 리가 없었다. 이진운의 무공이란 기술은 자신이 알고 있는 이능의 활용법보다 훨씬 고도화 된 형태라는 것을.

심지어 기세와 의념을 다루는 것까지도 이렇게까지 차이가 있다면, 더 이상 인정하지 않을 수가 없었다.

“솔직히 네 전투방식은 아마추어에 가깝지. 물론 아마추어 중에서도 제법 실력이 있는 편이긴 하겠지만, 나와 같은 진짜 고수를 만나면 그 허점이 낱낱이 드러나고 마는 거다.”

“그렇지만 아저씨, 우리 가문에서 익혀온 전투법도 나름대로 연구하고 발전된 거라고.”

“제대로 말하자면 그 힘의 근원은 너와 네 가문이 아니라 저 카르테인의 것이지. 설마 그 힘을 완전히 이해하고 다루고 있다고 생각하나?”

“······.”

되돌아온 지적에, 레이첸은 아무런 말도 하지 못했다. 솔직히 말해 지금까지 가문은 카르테인의 힘을 제대로 이해하지 못하고 있었다.

아니 카르테인으로부터 받은 힘으로 뭘 할 수 있는지는 어느 정도 알고 있었지만, 단순히 활용에 대한 것에 그쳤을 뿐이다.

“그 힘의 특성과 근본을 완전히 이해하고 체계화 시켰다면, 너희 가문은 지금처럼 수명이 줄어드는 부작용에 시달리지도 않았겠지.”

이진운은 그렇게 판단하고 있었다. 카르테인의 격은 강대하고, 그 힘은 인간을 좀먹을 만큼 엄청나지만··· 그것도 다 쓰기 나름이었다. 견딜 수 없다면 견딜 수 있는 수단을 만들어 가면 되는 것이다.

“그리고 무공은 애당초 약자가 타고난 강자를 상대하기 위해 만들어졌다. 단순히 강하기만 해서는 무공을 제대로 익힌 자를 이기기란 힘들지.”

무공이란 본디 맹수보다 나약한 인간의 궁리에서 탄생되었다. 약자의 입장에서 강자를 이기기 위한 발버둥. 그것이 바로 무공인 것이다.

“그래서 나더러 웰라우드 가의 차녀하고 싸우라고 했던 거야?”

“그게 너에겐 체감이 더 잘 될 테니까. 너보다 확실한 약자. 그런 사람과의 대련에서 조금 고생해보면 내 말이 무슨 뜻인지 더 확실히 알겠지.”

이전이라면 그냥 무시했겠지만, 지금은 달랐다. 무공이란 것이 얼마나 격차를 만들어줄 수 있는지를 체감한 지금이라면 한번 확인해 보고 싶었다.

“좋아. 아저씨가 그렇게 말한다면 한 번 해보겠어.”

레이첸이 응락하자, 이번에는 이진운의 시선이 아리엔을 향했다.

“아리엔 너는?”

“···좋아요.”

조금 긴장된 표정이지만, 그녀의 목소리는 경직되지 않았다. 상대가 강하긴 해도 두렵지는 않다는 뜻이었다.

아리엔과 레이첸은 서로 마주보는 상태로 수련장 중앙에 섰다. 그들 둘 사이에 거리는 3미터 남짓.

공격을 펼치면 얼마든지 닿을 수 있는 간격이었다.

“자, 그럼 시작!”

이진운의 말이 떨어지기 무섭게 그 둘이 격돌을 시작했다.

콰아앙!

무시무시한 열파가 먼저 아리엔을 향해 뻗어나갔다. 그것은 조금도 사정을 봐주지 않는 무자비한 공격이었다.

벼락보다도 더 빠른 그 일격에, 아리엔은 즉시 일보섬영의 한 수로 왼쪽으로 움직였다.

단 일보였지만, 그것만으로 충분했다. 상대의 공격은 빠르고 강렬했지만, 예측할 수만 있다면 못 피할 것도 없었다.

그녀의 눈은 이미 레이첸의 모든 것을 읽기 시작했다. 그의 호흡, 눈동자의 움직임, 그리고 힘을 구사하고자 하는 육체와 근골이 어떻게 움직이는지를. 그리고 그가 어떤 방식으로 공격을 시도할지 그 심리상태도 나름대로 읽어낼 수 있었다.

위력과 반응속도는 마이스터 최상급에 달한 레이첸이 압도적이었지만, 그게 전부라면 굳이 두려워 할 이유가 있을까.

“음!?”

공격을 퍼붓던 레이첸의 두 눈이 살짝 찌푸려졌다. 전투 자체는 자신이 압도하고 있었다. 웰라우드 가의 차녀는 제대로 된 공격조차 못하고 이리저리 피하고 있는 상황. 아마 제대로 한방 맞기만 해도 목숨이 위험할 것이다.

그런데도 그녀는 종잇장 하나 차이로 공격을 모두 피해냈다. 목숨을 건 아슬아슬한 곡예를 거듭하면서도 그 눈에는 조금도 두려움이 없었다.

바아앙!

레이첸은 짜증스런 얼굴로 손을 뿌렸다. 그러자 차가우면서도 맹렬하게 타오르는 모순된 빙염의 힘이 빛이 산란하듯 흩어지면서 아리엔을 둘러쌌다.

더 이상 피하지 못하도록 수많은 공격으로 둘러싸 공격할 생각이었다.

그렇지만 자신의 움직임을 봉쇄하려는 그 시도를 보고도, 아리엔은 여전히 침착했다.

‘강해. 하지만 흐름이 보여!’

아마 레이첸이 발휘하는 힘 하나하나는 아리엔이 전력으로 펼치는 검강보다도 더 강할 것이다. 그게 그녀와 레이첸 사이에 존재하는 격차였다.

그렇지만 그게 뭐 어쨌다는 것인가?

빠르고 강하다고 무조건 이길 수 있다면, 이미 인간과 그 외의 수많은 지성체들은 인베이더에게 패망해 사라졌을 것이다.

현재 자신이 가진 것을 궁구해서 보다 강자를 상대할 수 있는 것이 바로 지혜인 것이다.

피피피핑!

그녀의 손에서 터져 나온 분광십팔검이 허공을 관통했다. 무수한 섬광을 뿌리는 듯한 일수에 사방을 둘러싼 수많은 빛줄기들이 허무하게 흩어져 사라졌다.

“뭣!?”

레이첸의 두 눈이 크게 떠졌다. 자신이 본 것을 믿을 수가 없었다.

분명 자신의 공격은 그 하나하나가 레이첸의 공격력을 훨씬 앞섰다. 고작 검질 만으로 소실될만한 게 아니었다.

검강이라는 요상한 힘이 서려 있긴 했지만, 그걸로 어떻게 될 정도로 영력의 양이나 응집력이 작지 않은데, 대체 어떻게 소멸시킨 거란 말인가?

‘이럴 리가 없다!’

물론 이진운이 말한 무공에 대해서는 인정하지만, 그것도 정도가 있는 법이다. 고작 마이스터의 문턱조차 밟지 못한 녀석에게 자신의 공격이 무력화 될 수 있다니 이게 말이나 되는 일인가!

격동한 레이첸이 거듭 공격을 퍼부었다. 이번에는 음과 양, 플러스와 마이너스를 지배하는 그 힘으로 자신이 뿌리던 공격의 속도를 더욱 높여버렸다.

쉽게 말하자면 공격에 가해지는 물리법칙의 제약을 약간 해제한 것이다. 그 결과, 그가 뿌리는 빛들은 말 그대로 빛을 초월한 속도로 뻗어나갔다.

콰콰콰콰!

무시무시한 공격이 수련장을 강타했다. 이곳이 멀린의 환상과 이진운의 진법에 의해 강화되지 않았다면 붕괴되어도 이상할 것이 없을 지경이었다.

그렇지만 그런 폭격 속에서 아리엔은 멈추지 않고 끝없이 나아갔다. 피할 수 있는 것은 피하고, 자신에게 다가오는 공격을 흘리고 베면서 전진하고 있었다.

레이첸의 공격은 압도적이었지만, 제아무리 강한 공격이라도 흐름을 끊으면 유지되지 못하는 법이다.

지금 그녀는 레이첸이 뿌리는 빛의 궤도를 읽고, 그것을 유지하는 힘의 흐름 자체를 베어내고 있었다.

‘아, 그렇구나. 이게 바로···.’

그녀는 레이첸의 공격을 흘리고 베고, 피하면서 자신의 무(武)가 점점 변해가는 것을 느꼈다. 아니 정확히 말하자면, 이전에 이진운이 말했던 경지가 무엇인지 조금 알 것도 같았다.

알아서 흐름을 읽고 몸이 반응하고 있었다. 고된 수련으로 무의식에 각인된 무예가 상대의 움직임과 변화에 반응해 저절로 대응해 나갔다.

그 속에서 느껴지는 일체감! 검과 자신이 어느새 하나가 되었고, 그것은 자신이 익힌 무리의 근간을 담아내면서 더욱 강렬해졌다.

검신을 감싸는 게 고작이었던 검강도 이젠 무려 1장(3m)이나 치솟아 있었다.

그것을 목도한 이진운의 눈이 크게 부릅떠졌다.

‘깨달음!? 아니야! 그럴 리가 없어!’

물론 아리엔이 쌓은 수련양이 보통이 아닌 건 알았다. 게다가 무에 대한 재능은 천재적이었다. 하지만 아직 깨달음으로 다음 단계로 넘어가긴 일렀다.

지금 그녀가 보여주고 있는 무위는 바로 화경, 마이스터의 경지였다. 이제 겨우 초절정의 초입을 넘어서는 수준에서 단숨에 발돋움하기에는 말도 안 되는 경지인 것이다.

그렇지만 그 불가능한 일이 지금 눈앞에서 현실로 벌어지고 있었다.

‘그렇다면 뭐지? 깨달음이라기엔 뭔가 이상해.’

중원에서도 이런 경우는 보지 못했다. 경지를 단숨에 몇 단계나 초월하다간 주화입마에 빠질 수밖에 없었다. 하지만 지금 아리엔에게서는 그런 조짐은 전혀 보이지 않았다.

그때, 이진운의 머릿속으로 뭔가가 퍼뜩 떠올랐다.

‘설마··· 이건!?’

그동안 잊고 있던 아리엔의 고유스킬이 떠올랐다. 지금 이 불가해의 현상을 설명할 수 있는 것은 그것밖에 없었다.

만상개화 의검천추(萬象開化 意劍天墜)

아무 설명조차 붙지 않았던, 아리엔만의 고유스킬이었다. 심지어 발동조차 할 수 없었던 그 스킬이, 지금 그 진면목을 드러내기 시작한 것이다.

그 사실을 인지한 순간, 이진운의 눈에 비로소 그 스킬의 정체가 보였다. 이미 반신지경까지 도달해 봤던 그의 안목은 그 정도는 금세 꿰뚫어 볼 수 있었다.

‘그냥 경지를 높여주는 게 아니야. 아직 아리엔에게 닿지 못하는 고도의 무리를 일시적으로 재현해주고 있는 건가?’

그것도 단순히 경지를 뛰어넘는 무리만 체현하게 해 주는 게 아니다.

상성불리를 뒤집는 환상의 검리. 자신이 상상하는 개념과 검리를 그대로 구현하는 것이 바로 이 능력의 정체였다. 정확히 말한다면 자신의 재능이나 경지로 닿을 수 없는 경지나 검초를 체현하는 능력이라 해야 할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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