8권-09화
“부동심결도 익힌 주제에 이제 와서 배울 수 있을지를 의심하면 그게 더 이상하지 않나?”
이진운이 그렇게 말했지만, 레이첸은 그래도 쉽게 납득이 가질 않는다는 얼굴이었다.
“그거야 그런데··· 아저씨가 가르쳐준 부동심결은 그 무공이란 것들과는 좀 많이 다른 느낌이던걸? 카테고리 자체가 전혀 다른 그런 종류인 것 같았어.”
“물론 다르기야 하겠지. 부동심결은 정신무공이고, 지금 배우는 것들은 영력과 육체에 관한 것들이니까.”
“그럼 아저씨가 말한 무공이란 것도 종류가 꽤 많은가봐?”
“그런 편이긴 하지. 하지만 달라 보여도 모든 무공은 결국 하나의 이치에 근간을 두고 있지. 그게 바로 정기신이다.”
“정기신?”
낯선 용어에 레이첸이 고개를 갸웃하자, 이진운이 간략히 풀어서 설명해주었다.
“이쪽 식으로 말하자면, 육체(精), 영력(氣), 정신(神)을 뜻한다고 보면 된다.”
“아하, 무공이란 것도 그런 식이었군.”
그건 무공이란 카테고리뿐만 아니라 다른 영능학들도 대체적으로 비슷한 형태라 할 수 있었다. 단지 무공은 육체를 움직이는 것에 대해 비중이 좀 더 높다는 것일 뿐, 마법이나 정령술 등의 술법에 관련한 영능학들도 육체에 관한 것을 아주 배제하진 못했다.
결국 술법을 구사하고 다루는 것도 결국 사람의 육체이기 때문이다.
그렇기에 모든 영능학은 정신과 육체 영력이 서로 복잡하게 얽힌 형태를 벗어나지 못했다. 그런 레이첸 정도의 실력자라면 결코 모를 수 없는 이치였다.
“대충은 알아듣는 것 같으니 다행이군.”
그런 레이첸을 힐끗 바라 본 이진운은 계속 말을 이어나갔다.
“아무튼 네가 내 제자들의 무공을 보고 느낀 차이점도 바로 그래서지. 부동심결이 신(神)이라면 다른 무공들은 정(精)과 기(氣)를 중점적으로 다루고 있으니까.”
“그럼 이제부터는 나도 그 정과 기를 다루는 무공도 배워야 한다는 거야?”
“그래. 지금 네 상태는 네가 아는 것 이상으로 많이 불안정해. 부동심결을 익히긴 했지만, 그걸 높은 수준까지 터득하지 않는 한 그 문제를 완전히 해소하긴 어렵거든.”
사실 이진운이 레이첸에게 부동심결을 전수한 것은 임시방편이었다. 물론 지금도 충분히 높은 성취긴 하지만, 그 정도론 부족했다.
그래서 생각한 게 바로 제대로 된 무공 전수였다.
그렇지만 레이첸은 쉬이 납득하질 못했다.
“하지만 그건 정신적인 문제였잖아. 카르테인의 격이 내 정신을 짓누르면서 생긴 문제인데, 육체를 단련한다고 해서 그게 무슨 의미인데?”
“너도 조금은 알겠지만 정기신의 관계는 생각 이상으로 서로 복잡하게 얽혀 있다. 단순히 정신만 강해진다고 해서 될 게 아니야. 정신이 육체를 초월할 정도라면 모르겠지만, 그 정도의 경지에 다다른 자는 많지 않지.”
그 말에 잠시 고개를 갸웃한 레이첸이 설마 하는 표정으로 질문해왔다.
“아저씨, 정신이 육체를 초월한다는 지금 그 말 말이야. 혹시 탈진한 상태에서도 억지로 몸을 움직일 수 있는 그런 정신론을 뜻하는 말은 아니겠지?”
이진운은 잠시 한숨을 내쉬고는 녀석에게 한심하다는 시선을 던져주었다. 이런 상황에서 자신이 고작 일반적인 정신론을 이야기할 리가 없지 않은가.
“그건 정신력이라기보단 그냥 미련한 거지. 지금 내가 말하는 건 영혼의 격이 극에 달해서 육신을 대신할 수 있는 경지를 말하는 거다. 육체의 경계를 넘어 영과 혼 그 자체가 물질화 되는 수준.”
“미친! 그게 바로 초월지경이잖아?”
그제야 알아들은 레이첸이 깜짝 놀라 소리 질렀다.
필멸자일 때는 피륙으로 된 육신을 입고 있지만, 진정으로 초월하게 되면 태생의 한계를 넘어서게 된다. 바로 육체 자체가 영혼이고, 영력이며, 정신이 되는 것이다.
그것이 바로 진정한 의미에서의 정기신의 합일! 무공에서 흔히 말하는 원영신이라 할 수 있었다.
“그 정도로 너나 너희 가문 사람들의 상태가 심각하다는 말이다. 너희 가문과 계약을 맺은 카르테인의 존재는 네가 상상하는 것 이상으로 거물이야. 어쩌면 지난번 봤던 카룬다임은 따위로 취급할 만큼 급이 높을지도 모르지.”
“설마 그 정도였어?”
“아마도 내가 볼 땐 우주적인 수준의 거물일 거다. 어쩌면 제 1성좌라는 그룬베일과 거의 동급일지도 모르지.”
특히 이진운의 영혼은 이미 반신격의 위치에 있기 때문에 더 분명하게 느낄 수 있었다.
레이첸이라는 계약자를 통해 간접적으로 접하는데도 불구하고 느껴지는 엄청난 존재감. 카룬다임의 단말과 싸워보기까지 했기 때문에 그 격차를 더 분명하게 알게 된 것이다.
이진운이 허튼 소리를 하지 않는다는 걸 아는 레이첸은 낮게 신음했다.
“으, 그 정도면 거의 상위신 급 이상이란 건데···. 아니 그런 거물이 왜 우리 가문과 계약을 했데? 뭐가 아쉬워서······.”
“신들 간에도 다 알력이 있는 법이지. 내 생각이지만 카르테인은 그룬베일이나 인베이더 무리의 행동방식 자체를 혐오하는 걸지도 모르겠어.”
“음, 확실히 그런 것 같긴 한데······.”
그 말을 듣고 보니 레이첸도 대충 짚이는 바가 있었다. 그때 카르테인에게 시련을 받을 때도 그러했다. 그녀의 감정은 기본적으로 원념에 가깝되, 거기에 여러모로 복잡한 심경이 담겨 있었다.
‘그래, 애증에 가까운 감정이었지. 스스로의 행동에 대해서도 이해 못하는 것 같았고. 그래서 인간인 우리 가문과 계약을 맺었다는 건 더 아이러니하지만.’
어쨌든 카르테인이 인베이더들을 적대한다는 건 나쁘지 않은 일이었다. 치러야 할 대가가 좀 뼈아프긴 했지만, 이만한 존재와 계약한 이상 그건 어쩔 수 없는 문제일 것이다.
그리고 그에 대한 대안이 아주 없는 것도 아니었다. 지금 이진운이 그에 대해 설명해주고 있었다.
“그런 존재에게서 자신의 영혼과 정신을 보호하자면 너도 무공을 배워야 해. 너도 들어봤겠지만 건강한 육체에 건강한 정신이 깃든다고 하지.”
“그게 뭔 뜬금없는 말이야? 건강진흥 캠페인에서나 나올 법한 문구잖아.”
레이첸이 조금 황당하다는 얼굴이 되었다.
그렇지만 이진운은 그렇지 않다며 말을 이어나갔다.
“그만큼 육체와 정신이 서로 밀접한 상관관계가 있다는 말이지. 지금은 너에겐 더 절실할 소리고.”
그리고는 레이첸을 분명히 응시하며 단언했다.
“그리고 지금 넌 그 문제가 아니더라도 무공을 반드시 배워야 해.”
“왜? 다른 이유가 또 있는 거야?”
되묻는 그 말에 이진운은 간단히 말해주었다.
“카르테인에게 전해 받는 그 힘을 넌 너무 무분별하게 사용하고 있어. 네 몸과 영혼에 그렇게 무리를 주는데도 말이야.”
“나름 잘 사용하고 있다고 생각했는데?”
“그래, 수준은 높지. 강력하기도 하고. 그건 나도 인정한다. 하지만 효율은 높지 않아. 쓸데없이 허비되는 힘이 상당히 되더군.”
레이첸의 수준은 상당히 높았다. 이젠 그랜드 마스터를 넘보는, 실질적인 마이스터의 최고점에 도달해 있었다.
하지만 격이 높다고 해서 그게 반드시 전투력으로 이어진다는 건 아니었다. 물론 다룰 수 있는 힘의 수준이 높아진 만큼 어느 정도 강해지긴 했지만, 그걸 효율적으로 다룰 수 있느냐의 여부는 또 다른 이야기이니까.
“나와 클레브가 대련하는 모습에서 뭘 느꼈지.”
“꽤 꼼꼼하게 수 싸움을 하던데? 상대방의 조그마한 빈틈을 찌른다고 꽤 복잡하더라고.”
서로 검을 주고받는 그 모습은 레이첸에게 꽤 색다른 느낌을 주었다. 물론 오버러들 사이에서도 저런 방식의 냉병기를 사용하는 자들이 꽤 있긴 하지만, 이들만큼 순수한 병기술로 싸움을 하는 경우는 극히 드물었다.
서로 간격을 재고, 상대의 검로를 예측하고, 호흡과 근육의 움직임 등을 통해 다음 대응을 예측해 움직이는 방식의 싸움은 처음이었다.
물론 오버러들 간의 싸움에서도 그런 부분들을 읽지 않는 건 아니지만, 저렇게까지 철저하진 못했다. 이진운이 말한 무공이란 건 그런 부분들을 철저히 계산하고 이론화 한 형태인 듯싶었다.
“지금 네게 필요한 게 바로 그런 싸움법이다.”
“음.”
“필요할 때만 힘을 쓰고, 그 외엔 허비하지 않는 절도 있는 완급조절과 변화를 갖출 필요가 있어. 지금의 너는.”
“······.”
“하긴 이렇게 말만 하면 너도 쉽게 납득하긴 어렵겠지. 지금까지 하던 방식으로도 얼마든지 이겨왔을 테니 말이야.”
레이첸은 지금만으로도 충분히 강했다. 좀 더 정확히 말하지만, 지금 방식의 싸움을 고집해도 어려움을 느끼지 못했다는 뜻이었다.
물론 카룬다임과의 싸움에서는 고전을 면치 못했지만, 그건 상대방이 워낙 규격 외였을 따름이다. 그러니 굳이 무리해가면서 지금의 싸움 방식을 바꿀 필요성을 느낄 이유가 없었다.
그래서 이진운은 방법을 달리하기로 했다.
“아리엔.”
“예?”
이진운의 부름에, 저 뒤에서 지켜보고 있던 아리엔이 반사적으로 화답했다.
“네가 상대해줘라. 레이첸하고 대련해보는 거다.”
“제가요?”
“그래.”
상황이 이렇게 돌아가자 듣고 있던 레이첸이 눈살을 찌푸렸다.
“이봐, 아저씨! 지금 나더러 웰라우드가의 차녀를 상대하라고?”
“왜, 그게 문제가 되나?”
이진운이 오히려 그렇게 되묻자, 레이첸은 짜증어린 투로 내뱉었다.
“나하고 너무 수준차이가 나잖아. 아직 마이스터 급도 못한 녀석을 날더러 상대하라니. 아저씨 제자가 내게 일방적으로 당하는 꼴을 보고 싶은 거야?”
헌데 그 말이 조금 거슬렸던 것일까? 이진운의 두 눈썹이 일순 꿈틀거렸다.
“물론 아리엔의 격은 아직 네게 많이 미치지 못하지. 하지만 너한테 그렇게 무시당할 실력도 아니다.”
그 말이 끝나기 무섭게 무거운 기세가 공간을 장악해왔다. 그것은 마치 중력 그 자체가 수십, 수백 배로 가중되는 듯한 느낌이었다.
레이첸은 황급히 기운을 끌어올려 대항했다. 너무 갑작스런 기세의 압박이라서 충격이 적지 않았던 것이다.
“큭! 이게 무슨 짓이야!?”
레이첸이 화가 난 듯 외쳤지만, 이진운은 거기에 대꾸해주지 않고 일방적으로 말했다.
“딱 네 수준에 맞출 거다. 잘 받아내 봐.”
그때부터 이진운의 기세가 기이한 형태로 레이첸을 옭아매기 시작했다. 그것은 너무 교묘해서 그냥 방어하는 것만으론 막을 수가 없었다.
첨예한 칼날 같은 기세! 그것이 레이첸이 펼친 기세의 장벽을 가르고 있었다.
“이런!?
레이첸은 두 눈을 크게 뜨며 뒤로 물러섰다. 물러서지 않았더라면 막지 못한 이진운의 무형지기가 그의 급소를 파고들었을 것이다.
목덜미를 따라 차가운 오한이 느껴졌다. 그만큼 섬뜩했던 것이다.
하지만 레이첸이 피할 수 있었던 건, 그의 실력 때문이 아니었다. 바로 이진운이 그렇게 피할 수 있도록 약간의 여유를 주었기 때문이었다.
“이게 바로 힘의 집중이지. 같은 힘이라도 활용만 잘 한다면 이렇게 달라질 수 있는 거다.”
“웃기지마! 그 정도는 나도 한다고!”
훈계하듯 들려온 그 목소리에 레이첸이 발끈하며 기세를 집중시켰다. 그러자 이진운과 마찬가지로, 날카롭게 벼려진 기세가 상대를 향해 날아갔다.
눈에 보이지는 않는 그 섬뜩한 기세에 훈련장 곳곳이 여파로 파여 나갈 지경이었다.
“힘의 절제도 많이 부족하군. 제대로 제어된 힘은 이런 여파 따윈 뿌리지도 않지. 바로 이처럼 말이야.”
레이첸의 한 수를 비웃듯, 이진운의 기세가 순식간에 수백 수천의 형태로 분화되었다.
그건 수많은 검들이 레이첸 하나를 겨눈 듯한 느낌이었다.
‘미친! 한순간에 기세를 이렇게까지 철저히 통제해 다룬다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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