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검신의 검은 우주를 가르고-182화 (183/448)

8권-07화

“오오, 밑천! 꼭꼭 감춰두고 있던 걸 이제야 보여주신다 이거네요.”

기대에 찬 표정으로 이진운에게 달라붙는 리스티. 그동안 여러모로 떼를 써도 먹히질 않았는데, 이제야 기회가 온 것이다.

그런 리스티의 속셈을 잘 아는 이진운은 그녀를 지그시 노려보며 말했다.

“어지간해서는 가르쳐주지 않으려 했는데 상황이 이러니 어쩔 수 없지. 그 대신 너 외에 다른 사람은 절대 알면 안 된다.”

“물론이죠. 비밀은 준수할게요.”

리스티가 가볍고, 연구 중독자이긴 해도 한 입으로 두말하는 성격은 아니었다. 비밀을 준수한다고 했으니 확실히 지킬 것이다.

이진운은 그때부터 그녀에게 자신이 알고 있던 지식 일부를 전해주기 시작했다. 리스티가 지식을 빨리 이해할수록 이것을 활용해서 자신이 구상하고 있는 바를 결과물로 내놓을 수 있을 테니까.

역시 연합 내에서도 이름 높은 천재라 그런지 리스티는 금세 이해했다. 물론 전부 이해한 건 아니지만, 이진운에게 배운 새로운 개념에 대한 핵심을 꿰뚫어보게 된 것이다.

“흐음, 이런 것도 다 있었군요. 참 우주가 넓긴 넓어요. 이렇게 하는 방법이 있었다니······,”

고개를 주억거리며 감탄하는 그녀에게 이진운이 물었다.

“어때?”

“아저씨가 고안한 그 방법 말이죠?”

“그래.”

“충분히 가능할 것 같아요. 딱히 함선을 개조할 필요도 없어서 적용하는 건 비교적 간단할거고요.”

그 대답에 이진운은 내심 혀를 내둘렀다. 언제나 그랬지만, 리스티의 습득력과 분석력은 가히 사기적이었다. 배운 걸 금세 이해하는 건 물론, 이걸 활용할 수 있을지의 여부까지 판단할 수 있다니.

이런 천재를 서출이라고 차별해서 내쫓은 프론사이드 가 대체 무슨 생각을 하고 있었던 건지 궁금할 정도다.

“그럼 이걸 적용하려면 얼마나 걸리지?”

“음··· 일단 프로그래밍을 다시 짜야 하니까 완성까진 이틀 정도 걸릴 테고, 설치하는 것까지 포함하면 한 사흘 정도요?”

소요기간이 사흘이라면 크게 나쁘지 않았다. 어차피 파손된 전함들을 복구하는 데에도 시간이 필요하니까. 적어도 일주일 정도의 시간은 남아 있다고 보면 된다.

“그럼 충분하겠군. 적어도 정비를 마칠 때까지 일주일 정도의 여유는 있을 테니까.”

“아저씨, 그럼 그때까지는 끝마칠게요. 기대해도 좋아요.”

“그래, 믿고 맡기마.”

이진운은 그 말을 끝으로 리스티의 공방을 나섰다.

어차피 필요한 지식을 가르쳐 준 것만으로도 할 수 있는 일은 다 한 셈이었다.

나머지는 리스티가 알아서 할 터. 자신이 옆에 있어봐야 방해만 될 뿐이다.

* * *

인베이더 측도 연합처럼 바쁘긴 마찬가지였다. 위상공간이 해제된 상태에서 날아든 소행성의 돌진에 충돌한 함대들 중 상당수가 생각 이상으로 큰 타격을 입었다.

침몰한 전함은 물론, 어떻게든 버텨낸 전함들도 상태가 정상이 아니었다. 그래서 가진 여력 모두를 함대의 복구에 쏟고 있었다.

그리고 수뇌부들도 정신없긴 마찬가지다. 라인트라에 있는 인베이더 함대들을 총괄하고 있는 기함 가이릭스에서도 앞으로에 대해 논의가 한참 진행되고 있었다.

루클라는 아직도 분한지 씨근덕거리며 중얼거렸다.

“치잇, 이젠 우리도 더 이상 여유가 없게 되었어. 제대로 허를 찔린 셈이군.”

이번에 입은 타격이 상당해서 그동안 이뤄냈던 전력적 우위는 이제 없다고 봐도 무방할 지경이었다.

이번에는 울브스가 입을 열었다.

“지금 중요한 건 허를 찔렸느냐가 아니네. 바로 어떻게 허를 찔리게 되었느냐지.”

루클라가 거칠고 폭급한 편이긴 했지만 그렇다고 해서 앞뒤 분간 못할 만큼 어리석은 건 아니었다.

울브스의 말을 듣자마자 바로 핵심을 짚어냈다.

“그래, 네놈 말이 맞군. 대체 놈들이 무슨 수로 위상공간을 해제했던 거지?”

“아무래도 우리의 위상전환 기술이 놈들에게 분석됐다고 보는 게 맞겠군. 무슨 파훼법이라도 찾아낸 것이 옳겠지.”

“이해가 안 가는군. 위상전환 기술은 이번 전쟁에서 처음 사용되었는데, 그걸 놈들이 어떻게 알고 분석을 해?”

위상공간기술은 인베이더 쪽에서도 꽤 오랫동안 연구해온 결실이었다. 물론 연합의 마도공학의 수준을 얕볼 순 없겠지만 그렇다고 해서 고작 하루아침에 분석될만한 기술도 아니었다.

“그거야 알 수 없는 일이지. 우주는 넓고 인재는 수없이 많으니까.”

“제길, 일이 꼬이는군. 쉬운 전쟁이 될 줄 알았더니, 잘못하면 우리 목숨까지 내놓게 생겼군.”

그들이 신화 급의 인베이더라 하더라도 불사의 존재인 건 아니었다. 초월에 다다르지 못한 이상 한번 죽음을 당하면 부활하는 건 불가능에 가까웠다. 물론 그들이 무생이나 기계, 언데드 계열이었다면 이야기가 다르지만, 그들은 그런 계열에도 해당되지 못했다.

“어쨌든 앞으로 위상전환기술 하나만 믿고 밀어붙이는 건 불가능하겠어. 이래선 놈들을 이기기 어려운데 말이야.”

그동안 인베이더 함대가 연합을 상대로 확실히 우위를 점할 수 있던 건 위상전환 덕분이었다. 하지만 그 이점이 사라진 이상, 이제 남은 건 정면으로 부딪치는 길 뿐이다.

그렇지만 객관적으로 보면 인베이더 함대의 전력은 연합에 비해 우위라 볼 수도 없었다. 강자들의 면모만 본다면 오히려 천외오천이 전부 나와 있는 연합 쪽이 더 유리했다.

이쪽은 그와 맞먹는 강자라고 해 봐야 루클라와 울브스가 전부였다.

그동안은 연합 함대가 위상전환기술을 뚫을 수 없어 천외오천이 자신들의 함대를 보호하느라 수세적으로 나왔기에 유리한 국면을 유지할 수 있었지만, 이제 놈들도 더는 참지 않을 것이다.

“위에서 따로 지원은 없나?”

“일단 연락은 해놨네. 조만간 도착하기로 되어 있지?”

“온다고?”

울브스의 대답에 루클라가 기대어린 표정으로 물었다.

“그동안 준비하고 있던 게 완성됐다고 하더군. 그게 실전테스트 겸 지원으로 와준다고 했네.”

“그렇군. 이제 겨우 완성됐나?”

인베이더 쪽에서도 꽤 오랫동안 심혈을 기울여 만든 것이었다. 물론 개발 자체는 오래 전에 됐지만 규모가 규모인 만큼 원하는 형태로 조성하는 게 쉽지 않았다.

그래서 이제야 겨우 결실을 보게 된 것이다.

“정말로 그게 온다면 이번에야말로 확실히 놈들을 쓸어버릴 수 있겠군.”

루클라는 이를 드러내면서 살기를 일으켰다.

아직도 잊지 못하고 있었다. 자신을 멀리서 저격해오던 그 짜증스런 마탄의 사수를! 공간분단으로 연합 함대를 사방으로 흩어버릴 때 놈을 기습해서 허를 찌르긴 했지만, 그 정도로 죽진 않았을 것이다.

이번에야말로 놈을 자신의 손으로 없애고 싶었다.

그렇지만 울브스는 살기를 주체 못하는 루클라를 향해 다그치듯 말했다.

“착각하지 말게. 우리 목적은 어디까지나 이 전쟁을 오래 끌어서 놈들이 이곳에 여력을 쏟게 하는 걸세. 놈들을 쓸어버리는 게 아니야. 목적을 착각해서는 안 되네.”

“그랬었지. 하지만 그게 말처럼 쉽지 않단 말이야. 죽이고 싶어서 계속 근질거려.”

“흥분은 자제하게. 자칫 계획을 망쳤다간 자네라 해도 그분들의 분노를 피할 수 없을 테니까.”

제아무리 제멋대로인 루클라라 해도 성좌까지 언급된 상황에서, 더는 삐딱하게 굴 수 없었다. 흠칫 놀라며 울브스의 눈치를 살핀 그가 작게 사과했다.

“미안··· 내가 실수했군.”

“나한테 미안할 건 없지. 하지만 지난 번 전투로 한 가지 의심되는 게 있군.”

“의심?”

의심이란 말에 루클라가 무슨 소리냐는 듯 반응했다. 그래서 울브스가 그에게 물었다.

“소행성과 미사일이 출현했던 상황 기억하나?”

“물론.”

“그때, 소행성과 미사일은 함대의 센서에도 걸리지 않고 아주 가까운 근거리에서 포착되었었네. 이건 결코 정상인 일이 아니야. 내가 볼 땐 분명 워프와 같은 공간계통의 수법이 사용된 게 틀림없다고 생각하네.”

그 말에 루클라도 자신의 지난 기억을 다시 되새겨봤다. 울브스의 말대로 그때 그런 정황이 있었다.

“음, 가능성이 있군. 그러고 보니 우리가 흩어놓은 채로 각개격파 하던 연합의 함대들도 갑자기 공간이동 되어 사라졌었지?”

“하지만 납득이 되질 않더군. 어느 누가 그만한 대규모 공간이동을 시행할 수 있었는지. 심지어 함 자체가 이동한 것도 아니고 외부의 간섭에 의해 이동되었어.”

“혹시, 연합 놈들이 이번에 내놓은 신기술인가?”

연합이라고 해서 신기술을 개발하지 말란 법은 없었다. 루클라가 그렇게 추정하자, 울브스는 고개를 가로저으며 말했다.

“글쎄, 그럴 수도 있겠지만. 난 아니라고 생각하네.”

“어째서지?”

“만일 그게 연합의 신기술이라면 놈들은 왜 지금까지 사용하지 않고 계속 궁지에 몰리고 있었던 걸까?”

“그건······.”

되돌아온 물음에 루클라는 말문이 막혔다. 그게 연합의 신기술이라 한다면 그 의문에 대해선 도무지 대답할 길이 없었기 때문이었다.

“우린 디멘션 쿼츠로 워프 항로 자체를 틀어막음으로서 놈들의 지원과 보급을 끊어버렸지. 그런 상황에서도 그런 신기술을 감춘 채로 마냥 버틸 이유가 있을까? 함대 전체가 울레이브 곳곳에 뿔뿔이 흩어져 각개격파당하는 그 상황까지?”

“······.”

“나는 뭔가가 개입한 게 틀림없다고 생각하네. 우리가 알지 못하는 어떤 변수가.”

하지만 여기까지 추측해낸 울브스도 그 변수에 대해선 확실히 말하기 어려웠다. 주어진 단서가 너무 적었기 때문이었다.

루클라는 그 말에 반신반의한 표정으로 말했다.

“네 녀석 말이 일리는 있지만, 믿기지가 않는군. 그만한 규모로 공간을 주물럭거릴 수 있는 능력자가 과연 있을까? 초월이나 신좌 급이 아니고서야 어떻게······.”

“그거야 모르지. 하지만 부족한 역량을 보충할 수단이 따로 있을 수도 있으니 아주 가능성이 없다고 생각되진 않네. 우리 쪽에도 그와 비슷한 사례가 있지 않은가.”

그렇게 말하면서 울브스는 메인 브릿지 한쪽에 자리를 잡고 있는 가면인을 고갯짓으로 가리켰다.

가면인도 그와 비슷한 경우였다. 역량 자체는 마이스터 상위 수준에 불과했지만, 그가 다루는 공간 제어력은 이를 훨씬 넘어섰다. 특히 대량의 디멘션 쿼츠를 사용할 때는 거의 초월에 준했다.

물론 그것 자체를 공격 수단으로 사용하진 못한다는 건 조금 아쉽지만, 워프 항로 자체를 봉쇄하고, 공간과 차원에 여러모로 간섭할 수 있다는 것만으로도 큰 전력이라 할 수 있었다.

하지만 그런 가면인의 경우를 보고도 루클라는 다른 가능성을 염려했다.

“초월이나 신좌 급의 존재가 나섰을 가능성은?”

“그럴 리는 없겠지. 그만한 존재가 나섰다면, 우리가 지금 무사할 이유가 없잖은가.”

“···하긴 그렇겠지.”

만일 반신이나 초월적인 존재가 나섰었다면, 연합 함대를 구출하는 정도에서 그치지 않았을 것이다. 소행성에 타격을 입은 인베이더 함대들은 말 그대로 무방비 상태였으니까.

“그나마 다행이긴 한데··· 앞으로 그 변수도 감안해서 대책을 세워야겠군.”

“그래야 할 것일세. 그래야 더는 뒤통수를 맞지 않을 테니까.”

하지만 그 변수라는 것을 어느 수준으로 측정해야 하는 것일까? 별다른 단서가 없으니 이걸 계산에 두고 작전을 짠다는 것도 쉬운 일이 아니었다.

루클라가 깊게 한숨을 내쉬었다.

“휴··· 골치 아프군. 이런 쪽은 내 전문이 아닌데.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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