8권-06화
‘하지만 의심은 의심일 뿐이니 이게 문제군. 증명할 만한 단서가 없어.’
마음 같아선 지금이라도 공화국으로 직접 가서 조사해보고 싶지만, 전쟁이 끝나기 전까진 어림도 없었다.
“대체 놈들이 무슨 수작을 꾸미고 있는 거지?”
가면인, 즉 리겔이 몸담은 의문의 세력이 납치했던 사람이나 아인종들의 숫자는 광범위하고 많았다. 이진운이 오베른 행성에서 확보한 장부 데이터에서 확인했던 숫자만 해도 무려 수십만 명에 달할 지경이었다.
하지만 이마저도 극히 일부분에 지나지 않을 것이다. 놈들이 보유한 비밀 시설이 오베른 행성에서 발견한 곳 하나뿐이라고 장담할 수 없으니까.
‘그렇게 많은 사람들을 납치해서 뭘 하고 있던 거지? 인체실험? 아니 단순히 인체 실험 치고는 납치한 대상이 너무 많아.’
물론 실험체란 많으면 많을수록 좋다지만, 그것도 어느 정도인 법이다. 수십 수백만에 이르는 사람을 납치한다고 해서 인체실험의 효율이 크게 높아지는 것도 아니었다.
납치된 사람들의 특성이나 여러 가지를 살펴보면 실험에 필요한 어떤 조건을 충족할 수 있을만한 공통점이 있는 것도 아니고, 거의 무작위로 납치한 것처럼 보였다.
‘아니, 내가 모르는 뭔가가 있어. 이들을 납치해야 할 만한 이유가. 그게 뭔지 감이 안 잡히는군.’
머릿속에 안개가 낀 것처럼 답답한 나머지 작게 한숨을 내쉬던 그때, 어떤 기척이 느껴졌다. 그가 걸어가고 있는 복도 맞은편에서 누군가가 다가오고 있었다.
이진운은 상대의 이름을 저도 모르게 되뇌었다.
“제이나?”
“아, 여기 계셨네요.”
엘프 여성, 제이나가 이진운을 발견하고는 반가운 얼굴로 다가왔다. 그냥 우연히 마주친 게 아니라 이진운을 찾고 있었던 모양이었다.
“이진운 씨를 만나려고 여기저기 돌아다니고 있었어요. 역시 이 근처에 있었네요.”
“절 찾았다고요?”
“예, 꼭 말해야 할 게 좀 있어서요.”
이진운은 조금 의아하단 얼굴이 되었다. 기억도 대부분 잃고 식당에서 평범하게 잡일과 배식을 맡고 있는 제이나였다. 그런 그녀가 이진운에게 무슨 용무가 생겼단 말인가.
‘혹시 기억이 되돌아오기라도 한 건가?’
이진운은 문득 그런 생각이 들었지만, 그걸 이런 공개적인 장소에서 물을 건 아니었다.
“중요한 이야깁니까?”
“음, 중요하다면 중요할 수도 있겠죠.”
좀 애매한 말이었다. 어쨌든 제이나는 오베른 행성에서 발견한 비밀 시설에서 유일하게 살아서 발견된 엘프였다. 뭔가를 알게 되었을지도 모르는데, 이를 무시하기도 어려웠다.
듣는 사람이 없나 주변을 한 차례 살펴본 이진운은 그녀에게 말했다.
“일단 장소를 옮기지요.”
“예, 그러세요.”
제이나는 상관없다는 듯 고개를 끄덕이고는 이진운의 뒤를 따라왔다.
* * *
이진운이 향한 장소는 모든 도감청이 불가능한 방이었다. 이곳에서라면 어떤 이야기를 해도 바깥으로 새나가진 않을 것이다.
“일단 말해보시죠. 중요하다는 게 뭡니까?”
그곳에 있던 의자에 앉은 뒤 이진운이 조용히 물었다. 그러자 제이나가 잠시 머뭇거리다가 입을 열었다.
“이걸 뭐라 설명해야 할지 모르겠네요. 요즘 들어서 뭔가 자꾸 이상한 느낌이 들어서요.”
“이상한 느낌?”
“전에 한번 말씀 드린 적이 있을 거예요. 제가 정령을 다룰 수 있다고.”
“예, 그때 직접 봤었죠.”
제이나는 기억을 잃고도 정령을 다룰 수 있었다. 전에 한번 그 앞에서 보여준 적 있었기 때문에 잘 알고 있었다.
“그런데 정령과 관련된 그런 힘이 최근 광범위하게 느껴지고 있어요.”
정령에 관계된 기운이란 말에 이진운은 혹시나 하는 얼굴로 물었다.
“혹시 그게··· 위상전환 그것 때문입니까?”
“아니요. 그건 아니에요. 저도 인베이더들의 위상전환이 어떤 식으로 이루어진 건지 잘 알고 있어요. 하지만 그런 정도가 아니에요. 이건 그보다 더 원류의······.”
“으음······.”
인베이더의 위상전환은 세계수의 일부를 이용해 일정 공간을 유사 정령계로 만들어 현실과 동떨어진 위상으로 만들어버리는 기술이다. 그렇기에 정령계의 힘이 작용할 수밖에 없는데, 그보다 더 근원적인 기운이라면 대체 뭐란 말인가?
“혹시 세계수라도 동원되는 건가?”
원류라 한다면 그것밖에 없었다. 놈들의 유사 위상전환 자체가 세계수의 일부인 가지를 응용해서 발동되는 식이었으니까.
이진운의 중얼거림을 들었는지, 제이나가 뭔가 아련하다는 표정으로 말했다.
“글쎄요. 세계수라··· 어쩐지 그리워지는 느낌의 이름이네요.”
“아직 기억이 돌아온 건 아니군요.”
“예, 기억은 여전해요. 제가 과거에 어땠는지도 전혀 떠오르질 않아요.”
조금 아쉬워하는 얼굴이지만, 기억에 대한 미련은 크게 없어 보였다. 하긴, 기억이 일부 남아 있는 것도 아니고, 아주 까맣게 지워졌으니 잃어버린 기억을 아쉬워할 이유가 없었다.
‘그리움이나 미련도 기억이 조금이라도 남아 있을 때 이야기지. 그녀에겐 지금의 삶이 현재이니 과거의 기억에 대한 미련도 없을 수밖에.’
그렇지만 아쉬워졌다. 그녀가 기억을 되찾게 되면 뭔가 놈들에 대한 단서를 얻을 것 같았는데, 그렇지 못해서였다.
그래도 한 가지는 분명해졌다.
‘놈들은 분명 뭔가를 준비하고 있어. 그게 세계수와 관련되어 있다는 거고.’
제이나가 원류라고까지 이야기할 정도면 그것밖에 없을 거다. 단지, 이 우주공간에서 세계수를 가지고 뭘 어떻게 할 것이냐가 문제였다.
‘좀체 상상이 안 가는군. 그걸로 뭘 어쩔 생각이지?’
세계수는 행성의 기운을 빨아들여서 막대한 출력을 아군에게 제공하는 인베이더의 신 유닛이라 할 수 있었다.
하지만 이 우주공간 한 복판에서 싸우는 상황에서 그런 게 과연 가능할까?
행성 내에서의 싸움이라면 모를까, 지금 현재와 같은 함대전 상황에서는 별 의미 없는 유닛이었다.
하지만 이진운은 이 문제를 가볍게 넘기지 않았다.
‘그래도 제이나가 허튼 소릴 할 리가 없으니, 사실이긴 할 텐데 일단 베네트 국장들하고 의논을 해봐야겠군.’
세계수가 동원될 수 있다면, 이건 자신만 알아서 될 일이 아니었다. 일단 베네트 국장과 천외오천 정도는 알고 있어야 했다. 그래야 무슨 일이 생겨도 대처할 수 있을 테니까.
제이나를 돌려보낸 뒤, 이진운은 따로 연락을 취했다.
그가 가장 먼저 연락을 취한 상대는 베네트 국장이었다.
[···그렇군. 세계수라. 어쩌면 놈들도 우리와 비슷한 생각을 하고 있는지도 모르겠군.]
“하지만 우주공간에서 세계수라니··· 어쩐지 상상이 안 갑니다.”
이진운이 이해할 수 없다는 듯 그리 말하자, 베네트 국장이 자신의 생각을 말해왔다.
[아주 방법이 없는 것도 아니지. 소행성 같은 데에 세계수를 심어놓으면 에너지를 공유하는 송전탑 역할은 할 수 있을 테니까.]
“하지만 일개 소행성 정도로는 그다지 전황에 큰 영향을 줄 수 없을 텐데요.”
소행성이라고 해 봐야 품고 있는 에너지는 그다지 많지 않았다. 세계수를 심는다 해도 과연 얼마나 많은 에너지를 퍼 올릴 수 있을까?
[그래도 한번 쓰고 버리는 식이라면 그럭저럭 나쁘진 않겠지. 아직도 지구에서 사용된다는 원시적인 건전지처럼 말이야.]
“그도 그렇겠군요.”
그런 식이라면 납득이 간다. 적어도 전투 한번 벌일 때 필요한 에너지는 충분하고도 넘치게 충당할 수 있을 테니까.
[그렇지만 그걸로는 전황에 큰 변화를 주지 못할 텐데··· 뭔가 노리는 게 따로 있는지도 모르겠군.]
“그걸 알 수 없으니 답답하군요.”
[일단은 최선을 다해 대비할 수밖에. 놈들이 숨기고 있는 수를 모른다면 그것밖에는 없지.]
베네트 국장은 담담하기까지 한 어조로 그렇게 결론지었다.
하긴 그는 이런 최악의 상황을 여러 번 경험해 봤을 것이다. 상대의 흉계가 뭔지 알 수 없을 땐 최대한 철저히 준비하는 수밖에 없었다.
이진운은 베네트 국장과의 통신을 끊었다. 그리곤 그 자리에서 곰곰이 생각했다.
‘하지만 그렇다고 해서 가만히 앉아 놈들의 흉계도 알지 못한 채 그냥 당할 순 없지.’
놈들이 어떤 패를 감추고 있던, 그건 연합 함대에게 치명적인 타격을 입히기 위한 것일 터. 놈들이 무얼 준비하든 막을 수 있는 수단을 준비한다면 별 문제될 게 없었다.
그때 문득 그의 머릿속이 뭔가가 떠올랐다.
“그래, 아주 방법이 없진 않겠어.”
한순간에 떠오른 발상이었지만, 충분히 써먹을 만했다. 그리고 여러 가지 가설과 이론을 덧붙여보니 충분히 실현 가능해 보였다.
“리스티와 다시 의논해 봐야겠군.”
안 그래도 한창 바쁜데 또 다른 일거리를 줘야 한다는 게 마음에 걸리긴 했지만, 리스티라면 오히려 환영할 것이다.
자신의 연구욕망을 불태울만한 이론과 소재를 준다는 데 마다할 이유가 없었다.
‘말 그대로 매드 사이언티스트지.’
이진운은 머릿속으로 자연히 상상되는 리스티의 반응에 쓴웃음을 지으며 그녀의 공방을 향해 걸음을 옮겼다.
인베이더 놈들이 태세를 정비하고 다시 공격에 나설 거라 예상되는 시간도 그리 많이 남지 않은 상황이었다. 한시라도 더 서둘러야 했다.
* * *
“호오, 그런 일이 있었군요.”
자초지종을 다 듣고 난 리스티는 흥미가 생겼다는 듯 그렇게 중얼거렸다.
“네 생각은 어떠냐?”
“저라고 알 수가 있나요? 인베이더 놈들의 속을 들여다 본 것도 아닌데.”
“하긴 그렇겠지.”
리스티는 천재이긴 해도 탁월한 전술전략가는 아니었다. 이진운도 역시나 하는 표정을 지었다.
그렇지만 리스티의 말은 다 끝나지 않았다.
“그래도 한 가지는 분명하네요. 지난번에 소행성 돌진에 입은 타격이 생각보다 크다는 거잖아요.
“왜 그렇게 생각하지?”
“세계수를 동원한다는 건 에너지를 더 충당하겠다는 건데, 결국 넘치는 에너지는 곧 화력으로 이어지죠. 아니면 확실하게 화력을 키워서 우위를 차지하겠다는 뜻이거나.”
“어느 쪽이든 우리에겐 좋은 일이 아니군.”
“뭐, 그렇죠. 배리어로 버티는 데에도 한계가 있으니까요.”
물론 연합 함대의 화력도 만만한 건 아니지만, 그렇다고 세계수의 보조를 받는 인베이더의 함대를 한참 뛰어 넘을 정도는 더더욱 아니었다.
성능에서 압도할 수 없는 이상 결국 세계수의 보조를 받는 인베이더 쪽이 더 유리해질 건 불 보듯 뻔했다.
“이번엔 쉽지 않을 것 같네요. 제가 고안한 그걸 동원한다 해도 비등한 수준에서 그치는 게 전부겠는데요.”
리스티가 그리 긍정적이지 못한 결론을 내놓자. 이진운은 슬쩍 자신이 조금 전에 떠올린 발상을 꺼내놓았다.
“그래서 혹시나 하는 생각에 이런 방법을 찾아봤다.”
이진운은 전면에 홀로그램 창을 띄웠다. 그리곤 그 창을 메모장처럼 활용해 손가락으로 무언가를 그려냈다. 그것은 일종의 도면이었다.
특정 공간을 아우르는 여러 가지 복합술식과, 어떤 원리에 입각한 기묘한 배치들!
리스티는 그것을 보자마자 탄성을 내질렀다. 한 눈에 봐도 심오한 이치가 담긴 영능학 중 하나임을 알 수가 있었다.
“와, 그거 뭐죠? 지금까지 배운 것들과는 전혀 다른데요?”
“그럴 수밖에. 이건 내 밑천들 중 하나니까.”
이진운은 아쉬움 어린 표정으로 그렇게 말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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