8권-05화
“오, 다들 무사했군.”
베네트 국장은 아크라이터로 건너온 이진운과 연정운, 멀린을 보자마자 반갑다는 얼굴로 다가왔다.
그럴 수밖에 없었다. 베네트 국장이 이곳에 도착하자마자 들은 보고의 내용대로라면 상황이 참으로 심각했다.
설마 인베이더 놈들이 그런 수단과 전략으로 아군 함대들을 뿔뿔이 흩어서 각개격파를 시도할 줄 누가 짐작이나 했겠는가.
대략적으로 파악된 것만 해도 피해가 말도 못할 정도로 컸다. 라인트라에 파견한 전력 중 2/5 정도가 이번 사태로 날아간 셈이니, 그럴 수밖에 없었다.
그나마 연합의 핵심 전력이라 할 수 있는 천외오천이 무사하다는 사실을 눈으로 직접 확인하고 나니 기쁘지 않을 수가 없었다.
“정말이지 이번엔 겨우겨우 살았습니다. 하마터면 국장님 얼굴 다시는 못 볼 뻔 했죠. 이 친구가 때마침 안 왔으면 아마 지금쯤 제 시체를 보셨을지도 모르겠군요.”
그렇게 말하면서 이진운의 어깨에 손을 올리는 연정운.
베네트 국장도 이진운에게 시선을 옮기고는 고개를 끄덕이면서 말했다.
“들어서 알고 있다. 자네 공이 무척 크더군. 전멸 위기에 놓였던 아군 함대들을 구출한 작전을 주도한 것도 자네라지?”
“여러모로 운이 좋았지요.”
겸양하는 말 같았지만 사실이 그러했다. 여러모로 운이 작용한 결과물이었다. 특히 리클의 능력과 디멘션 쿼츠가 없었다면 이번 작전은 애당초 성립되지도 못했을 것이다.
“운도 실력이지. 이번 공은 나중에 몇 배로 쳐서 돌려주지. 그런데 나머지 천외오천은?”
이진운의 공에 대해선 나중에 보답하기로 해둔 베네트 국장은 연정운에게 물었다.
“다들 휴식 중이죠. 꽤나 고생들 좀 했거든요. 잠도 못 자가며 싸웠으니 그럴 수밖에요. 그래도 별다른 부상은 없으니 걱정 안하셔도 됩니다.”
연정운처럼 지독한 내상과 저주에 당한 건 아니지만, 다들 흩어진 함대를 잠도 못자가면서 사흘 동안 보호하느라 어지간히 소모한 상태였다.
지쳐서 탈진한 정도는 아니지만, 다음에 있을 전투에서 제대로 싸우려면 어느 정도 휴식이 필요했다.
“부상이 없다면 됐다. 뭐 쉰다는 녀석들을 지금 굳이 볼 필요도 없고. 앞으로가 문제지.”
“옳으신 말씀입니다.”
“일단 자리를 옮기지. 여기서 앞으로에 대해 논하긴 그렇군.”
베네트 국장 말대로 장소가 좋지 못했다. 현재 그들이 서 있는 곳은 이진운 일행이 타고 온 소형정을 정박시킨 격납고였다.
정비사들과 그밖에 여러 관련자들이 있는 이곳에서 기밀이나 다름없는 작전을 논하는 것은 맞지 않았다.
그래서 옮긴 장소는 아크라이더 내에 있는 베네트 국장의 집무실이었다.
워낙 거대한 함이라 그런지, 국장의 집무실도 아르탈 행성에 있던 크고 화려했던 집무실과 비교해 봐도 뒤떨어지지 않았다.
고풍스러운 테이블 하나를 앞에 두고 모두가 둘러앉자, 부관인 필리스가 차를 내왔다.
이진운과 연정운, 멀린은 그가 건네준 차를 받아 마시면서 잠시 기다렸다. 조금 뒤, 베네트 국장이 무거운 얼굴로 나타났다. 이곳에 오기 직전에 이진운이 건네준 데이터에는 몇 시간 전에 있었던 작전 내용과 그동안 있었던 연합함대의 상황이 구체적으로 기입되어 있었다.
“이진운, 자네가 준 내용은 확인했네. 급히 받은 보고보다는 확실히 상세하더군.”
“그럼 상황 파악은 끝나셨겠군요.”
“그래, 아주 참담하더군.”
베네트 국장이 무겁게 한숨을 내쉬었다.
“인베이더 놈들이 이렇게까지 철두철미할 줄은 몰랐네. 아마 자네가 아니었다면, 라인트라 주역에 파견된 연합 함대는 물론 천외오천까지 잃을 뻔했어.”
“하지만 문제는 지금부터지요. 이번에 아군 함대를 구출하면서 놈들에게 한방 먹이긴 했지만, 그래도 우리가 입은 피해에 비할 바는 아닙니다.”
“그래서 지금 가져온 물자를 전부 풀어서 파손된 전함들을 수리 중에 있네. 수리가 끝나면 전력도 어느 정도 복구되겠지.”
베네트 국장은 아크라이더와 갈라르 호른 함대만 끌고 온 게 아니었다. 수십 척의 수송함까지 대동하고 온 상황이었다.
거기에는 전함에 사용될 부품과 물자들로 가득 채워져 있는 만큼, 현재 파손된 전함들을 수리하는 데엔 부족함이 없을 것이다.
그렇지만 이진운은 전력이 회복된다고 해도, 이 상황이 낙관적으로 흘러갈 거라 보지 않았다.
“허나 망가진 함을 수리한다고 해도 열세인 건 변함없지요. 심지어 아군 함대를 구출하느라 비장의 무기인 SB탄도 놈들에게 알려진 마당이고요. 이걸로 놈들의 허를 찔러 전세를 뒤엎을 생각이었는데, 이젠 다 틀린 이야기가 됐군요.”
“그래도 놈들의 위상전환기술을 무력화할 수 있는 SB탄의 가치는 여전히 유효한 것 아닌가?”
“놈들도 바보는 아닙니다. 위상전환이 무력화 된다 해도, 배리어를 치면 그만이지요. 이번에는 위상전환기술에 너무 의지한 터라 배리어를 칠 겨를조차 없었지만, 놈들도 SB탄의 존재를 알게 된 이상 철저히 대비할 겁니다.”
이진운의 말대로였다. 인베이더들은 교활하면서도 악랄했다. 지금까지 연합을 이렇게까지 몰아붙인 것만 봐도 알 수 있었다.
그런데 그런 인베이더들이 SB탄의 존재를 확인하고도, 그에 대한 대처를 하지 않을 거라 생각한다면 큰 오산이었다.
“하지만 갈라르 호른과 아크라이더가 이곳에 온 것은 모르고 있지. 그 점을 노려서 놈들의 허를 찌르는 건 어떤가?”
베네트 국장이 자신의 의견을 내놨지만, 이진운은 그마저도 부정적이었다.
“소용없는 방법입니다. 인베이더 함대에 라인트라 전역의 변화를 감지할 수 있는 공간능력자가 존재하고 있습니다. 아마 갈라르 호른이 이곳에 온 것도 이미 파악하고 있을 겁니다.”
그 말에는 조금도 과장이 없었다.
리클과 대등한, 아니 그 이상일지도 모르는 가면인-리겔이라면 연합의 지원함대가 도착했다는 것쯤은 공간의 변화를 감지하자마자 진즉 파악하고 있을 터였다.
“그 가면인 말이지? 골치 아프군. 하필이면······.”
베네트 국장도 가면인-리겔에 대해 알고 있었다. 이진운이 건네준 데이터에 리클과 리겔에 대한 내용도 기입되어 있었기 때문이었다.
“이거 곤란하군. 그렇다고 다른 전선에서 활동 중인 행성요새를 이곳까지 끌고 오기엔 너무 늦었고.”
앞으로 어떻게 대응해야 할지를 두고 그가 고민에 찬 표정을 짓던 그때, 이진운이 다시 입을 열었다.
“하지만 아주 방법이 없는 건 아니지요.”
“그 말은··· 뭔가 좋은 수가 있나?”
베네트 국장이 솔깃한 얼굴로 물었다.
“좋은 수라기보다는, 이미 갖고 있는 걸 활용할 생각입니다. 지금까지 외부에 공개 안했던 걸 사용하면 어떻게든 되겠지요.”
외부에 공개하지 않았던 거라면 딱 한 가지 있었다. 듣자마자 그것이 무엇을 가리키는지 알아챈 베네트 국장이 살짝 놀란 얼굴이 되었다.
“설마 그걸? 나중을 위해 아껴둘 생각이었는데, 그걸 지금 사용하자고?”
“비장의 수단을 만들어두는 건 다 필요할 때 쓰기 위해서지, 마냥 아껴둔다면 그게 무슨 소용입니까? 이러다가 라인트라의 전력이 전멸하기라도 하면 그게 더 치명적입니다.”
“그거야 그렇지.”
이진운이 그렇게 설득하자, 베네트 국장도 그제야 납득한 듯 고개를 끄덕였다. 상황이 상황인 만큼 더 이상 숨겨뒀던 패를 계속 아낄 수 없다는 것을 그도 비로소 인정한 것이다.
그리곤 연정운과 멀린을 돌아보며 그들에게 물었다.
“자네들 생각은 어때?”
“저야 이 친구의 생각에 찬성이죠. 이미 갈 데까지 간 상황인데, 더 뭔가를 감추고 할 것도 없지요. 어떻게든 이 전쟁을 이겨야 합니다.”
“저도 별 이견은 없군요. 저분 말씀대로 지금은 패를 숨길 때가 아니라고 봅니다.”
연정운은 물론, 멀린까지 이렇게 찬동하자 베네트 국장도 더 망설일 이유가 없었다.
“그럼 다들 찬성하는 걸로 알고, 그것을 사용하기로 하겠네.”
* * *
카멜롯으로 돌아온 이진운은 곧바로 리스티의 공방에 들렀다. 이번에 내려진 결정사항을 그녀도 알아야 하기 때문이었다.
“아, 그래서 이번에 그걸 사용하겠다고요?
“그래, 그렇게 결정이 났지.”
“뭐, 실전 데이터가 생기는 일이니 저야 나쁠 것 없죠. 하지만 그래도 괜찮겠어요? 꽤 아껴두려 했던 거잖아요.”
지금까지 그것을 공개하지 않았던 것도, 인베이더들에게 확실한 타격을 입힐 기회가 있을 때 사용하기 위함이었다.
그래서 리스티도 그에 대한 대가를 당장 받지 못하면서도, 서슴없이 관라국에게 제공해준 것이다.
“이젠 더 아껴둘 수 없는 상황이니까. 이대로 가다간 결국 라인트라를 놈들에게 내줄 수밖에 없거든.”
“하긴 그렇겠네요.”
리스티도 전술전략에 대해선 그리 해박하지 못했지만, 그래도 지금 상황이 좋지 않다는 건 인지하고 있었다.
“뭐, 그럼 지금부터 사용할 수 있도록 조정을 좀 해야겠네요.”
“그래서 너에게 이렇게 알려주러 온 거다. 네 힘이 필요해.”
그 말에 잠시 고민하던 리스티가 곧 입을 열었다.
“알았어요. 며칠 만 좀 기다려줘요. 서둘러 끝내놓을 테니까. 안 그래도 지금 함대 전체가 정비 중인 상황인데, 겸사겸사 하면 제가 그걸 조정하려는 것도 대충 외부에 알려지는 걸 최대한 감출 수 있을 거예요.”
“그렇다면 더 좋지. 일단 놈들에게 제대로 한방 먹이려면 최대한 기밀을 유지할 필요가 있으니까.”
오히려 그렇게 할 수만 있다면 그렇게 하는 게 더 좋을 것이다. 그것에 대해 인베이더들이 눈치 채지 않을수록 확실하게 허를 찌를 수 있을 테니까.
그렇지만 결정을 내린 상황에서도 리스티의 얼굴은 그다지 밝지 못했다. 아니 정확히 말하자면 뭔가 걸린다는 표정을 하고 있었다.
“하지만 전 조금 찜찜하네요.”
“왜?”
“지금까지 인베이더의 행보를 보면 항상 뭔가 새로운 것을 계속 내놨잖아요. 그런데 그들이 지금 가진 게 위상전환기술이 끝일까요?”
“······.”
이진운도 그 물음에 대해선 뭐라 답하지 못했다. 그녀의 말처럼 인베이더들은 항상 새로운 걸 들고 나타나 연합을 궁지로 몰았기 때문이었다.
세계수의 건도 그렇고, 위상전환도 그렇고··· 이번 라인트라에서 리겔의 능력으로 워프 항로를 차단한 것도 항상 이쪽의 허를 찌르는 패들을 가지고 있었다.
이번이라고 해서 그러지 말란 법은 없었다.
“제 개인적인 생각이지만··· 뭔가 다른 걸 숨길 가능성도 염두에 두는 게 좋을 것 같아요.”
“···그래, 나도 그 점에 대해 나름 염두에 두마.”
리스티의 말에 무겁게 고개를 끄덕인 이진운은 조용히 그녀의 공방을 나섰다. 인베이더가 또 뭔가 다른 수단을 갖고 있을지도 모른다는 그녀의 말이 발걸음을 옮기는 중에도 뇌리를 떠나지 않고 있었다.
‘아주 틀린 말은 아니야. 놈들은 그러고도 남음이 있지.’
애당초 라인트라에서 전쟁이 벌어진 계기도 여러모로 의심스러운 점이 있었다.
공교롭게도 공화국 쪽으로 이어진 가면인의 세력 라인을 추적하려는 타이밍에 이런 큰 전쟁이라니.
일부러 이 전쟁을 일으켜 놈들이 뭔가를 감추려고 했다는 의심을 좀체 지울 수가 없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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