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검신의 검은 우주를 가르고-170화 (171/448)

7권-20화

“이미 너희 형제와 크리스첸 가문과 얽힌 이야기는 대충 알았어. 원수들이 전혀 예기치 못한 일로 전부 숙청된 사실도 들었지.”

“하긴 꽤 유명한 일이었으니까요.”

리클의 얼굴 위로 쓰디쓴 표정이 떠올랐다. 그럴 수밖에 없었다.

그 소식을 처음 접했을 때는 너무나도 충격적이고 믿기지가 않아서 할 말을 잃었고, 나중에는 분하고 원통해서 잠을 이루질 못했다.

대체 자신이 지금까지 살아온 목적이 무엇이었던가. 부모를 죽게 만들고 자신들을 강제로 가문에서 추방시켰던 철천지원수들에 대한 원한을 이 손으로 직접 되갚는 것이 아니던가.

헌데 오랫동안 벼려왔던 인생의 유일했던 목표가 이렇게 사라져 버리고 말다니······.

물론 원수의 불행은 기뻐해야 마땅하지만, 그게 이런 식으로 타의에 의해 이루어지길 바란 건 아니었다. 본디 복수라는 건 자신의 손으로 직접 원한을 갚아야 비로소 완성되는 것이 아니던가.

그는 결국 허무와 절망감에 빠져 허우적거렸다. 그동안 노력해온 모든 것이 허무하게만 느껴져서였다.

물론 지금에 와선 다 지나간 이야기였지만, 이따금 그때의 감정이 울컥 밀려와 견디기 어려울 경우도 적지 않았다.

그 얼굴을 잠시 물끄러미 쳐다본 이진운이 깊게 가라앉은 눈으로 말했다.

“역시··· 네 표정만 봐도 알겠어.”

“뭘 말입니까?”

“아직도 후회하고 있는 거지? 네 손으로 직접 원한을 갚지 못했던 일을 말이야.”

정곡을 찔린 사람처럼 리클은 굳어진 안색으로 입을 다물었다.

“사람의 감정이란 쉽게 해소되는 게 아니야. 특히 은원에 관계된 거라면 더더욱 그렇지.”

“······.”

“그렇다면 네 형은 어떨까? 세상에서 유일하게 남아 있는 혈육인 너마저도 내버려두고 떠날 정도면 그 원한이 골수에 차 있을 지경일 텐데, 하루아침에 원수들이 숙청당해 사라졌다? 그럼 그때까지 수십 년 동안 누적되어 쌓인 분노가 어디로 향할 것 같나?”

리클은 저도 모르게 그의 말을 따라 형이 어떤 감정을 품고 있을 지 상상해 봤다. 졸지에 원한의 대상들을 하루아침에 잃어버린 형이라면 과연 어떤 마음을 먹었을까?

그러자 형이 품고 있을 감정이 조금씩 짐작되기 시작했다.

‘···무섭군. 설마 형은 그렇게까지?’

그런 짐작을 확신이라도 시켜주듯, 이진운의 입에서 비슷한 말이 흘러나왔다.

“아마도 세상 전부를 원망하고 있을지도 모르지. 나 같으면 분명 그랬을 거야. 희망도 뭣도 아무것도 없는 세상. 심지어 원망할 대상마저 사라진 상황이야. 결국 자신의 운명을 이렇게 흘러가도록 만든 인간의 탐욕 자체를 원망하는 게 당연한 수순 아닐까?”

리클은 그 말만으로도 소름끼쳤다. 마치 자신이 형의 마음을 추측해 봤던 속내를 그대로 들여다 본 것이 아닐까 싶을 만큼 정확한 추론이었다.

“그렇군. 이렇게 상황을 늘어놓고 보니 이제야 그 행동원리를 알겠어. 인베이더 놈들과 같이 행동하는 것도 말이야.”

비로소 깨달은 듯 중얼거린 그가 곧 단언하듯 말했다.

“이제 그에겐 크리스첸 가문 따윈 이제 안중에도 없어. 원수들이 죽어 사라진 곳에 무슨 미련이 있을까? 놈이 바라는 건 이 연합의 멸망이야. 아니 인간을 비롯한 지성체 전체가 멸망하길 바라는 게 확실해.”

“···뭐라 말을 해야 할지 모르겠군요.”

잠시 침묵하던 리클이 다시 입을 뗐다.

“저도 세상을 원망 안한 건 아닙니다. 대부분의 사람들은 아무 탈 없이 살아가고 있는데, 왜 하필 우리만 이런 일을 겪어야 했는지··· 이렇게 될 수밖에 없는 이 세상이 너무도 싫었지요. 그래서 형처럼 세상 모든 것을 망가뜨리고 싶기도 했고요. 하지만······.”

거기서 잠시 말을 멈춘 그는 착잡한 목소리로 다시 말을 이어나갔다.

“···그래도 그건 아니란 생각이 들었습니다. 어느 날 길거리를 돌아다니다가 우연히 봤었죠. 어떤 부모 밑에서 꼬물거리며 웃던 아기의 모습을요.”

그 광경을 본 순간 깨달았다. 자신이 지금 무슨 끔찍한 생각을 하고 있었는지.

그렇게 원수들을 미워하고 있으면서도 그와 똑같은 행동을 할 뻔했던 것이다.

만일 자신이 세상에 대한 증오심만으로 저 부모를 해친다면, 저 천진난만한 아기는 앞으로 자라서 무슨 생각을 할 것인가?

그것을 생각하니 더 이상 세상만 원망할 수도 없었다. 무엇을 하든 결국 자신과 마찬가지인 피해자들을 양산할 뿐이었으니까.

“그래서 깔끔히 포기했습니다. 그 뒤에 돈을 벌어서 세운 게 지금의 운송업체였고요. 하지만 형은 끝내 그런 계기를 만나지 못한 모양이군요.”

“그래. 네 형은 이미 돌이킬 수 없는 지경에 이르렀어. 너처럼 단순히 세상을 미워할 뻔했던 것과 달리, 가슴 깊이 품고 있는 증오 자체를 차근차근 행동으로 옮기고 있지.”

“알고 있습니다. 예, 저도 알고 있어요. 한번 시작하고 나면 멈출 수도 없다는 걸요.”

한번 떠난 폭주기관차는 멈출 수 없다. 어둠에 한 번 발을 들이면 벗어나기 힘든 것처럼, 이미 세상을 향한 증오로 손에 피를 묻힌 사람은 더 이상 구제의 여지가 없었다.

그래서 이진운은 리클에게 그 의중을 물었다.

“그렇다면 너는 어떤 선택을 할 생각이지?”

“···어떻게든 막아야지요. 설령 제 형이라 하더라도요.”

핏발이 설 정도로 주먹을 굳게 쥔 리클이 이를 악물며 말했다. 그것은 그저 하는 말이 아니었다. 스스로에게 하는 다짐이자 각오이기도 했다.

* * *

[변동중력장 오차 예측 범위입니다. 필드 유지 정상!]

[워프 아웃까지 남은 시간은 앞으로 59초. 57, 56······.]

일주일간의 항행 끝에, 드디어 울레이브 주역 인근에 가까워졌다. 슬슬 웜 홀의 바깥으로 이어지는 출구의 모습이 보이고 있었다.

“이제야 끝이 보이는구나.”

아르페인은 가볍게 한숨을 내쉬며 함장석에 몸을 깊이 묻었다. 정말이지 이번 항행은 여러모로 험난하기 그지없었다.

그래도 이렇게 무사히 도착할 수 있다니, 이제야 조금은 긴장이 풀렸다. 하지만 그렇다고 해서 방심하긴 일렀다.

라인트라에서도 울레이브 일대는 엄연히 인베이더와 연합이 현재진행형으로 맞붙고 있는 격전지였다. 이대로 워프 아웃하게 되면 그곳이 곧 전장이나 마찬가지인 것이다.

그는 느슨해지는 감정을 추스르면서 승무원들을 독려했다.

“자, 목적지에 가까워졌다고 방심은 금물이다. 디스토션 필드 출력 유지하고, 센서 범위를 항상 체크해라. 지금 우리가 가고 있는 곳은 곧 전장이다. 언제 어디서든 무슨 일이 벌어질 수 있으니 항상 주시하도록!”

[예, 함장님.]

인피니티 킹덤이 드디어 워프 아웃에 들어갔다. 웜 홀의 출구를 통해 빠져나간 함대가 보게 된 것은 언제나 봤던 드넓은 우주의 정경이었다.

하지만 그 광경을 평안하게 바라볼 시간은 없었다. 갑자기 저 멀리서 강렬한 광원이 날아들었으니까.

[저··· 전방에 열원 포착! 포격입니다! 그것도 중형 함대 이상의 출력!]

“필드 출력을 끌어올려! 즉시 방어한다!”

그 말이 떨어지기 무섭게 디스토션 필드의 내구출력이 급격히 올라갔다. 혹시 몰라서 제네레이터의 출력을 미리 끌어올려놓았던 것이 천만 다행이었다.

콰아아앙!

성대한 굉음과 함께 진동이 함체를 뒤흔들었다.

“적은 뭐지? 즉시 파악해봐!”

[인베이더입니다! 인베이더 함대가 급속 접근 중! 가루다 급을 중심으로 한 한개 함대입니다!]

적들의 모습이 홀로그램 스크린 위에 포착되었다. 그것을 본 아르페인이 자연스럽게 이맛살을 찌푸렸다.

“나오자마자 격전이라니! 저놈들이 우리가 이곳으로 올 줄 어떻게 안 거지?”

혹시나 내부 사정을 유출하는 첩자라도 있는 것 아닌가 의심하고 있던 그때, 오퍼레이터의 목소리가 그의 착각을 정정해 주었다.

[아닙니다! 놈들의 타깃 목표는 우리가 아닙니다. 본 함의 5시 방향에 함대 포착! 아군입니다! 저희 연합 소속의 함대로 추측됩니다.]

“그럼 우린 아군을 추격하고 있던 인베이더 함대의 사정거리 내에 워프 아웃을 했다는 건가? 공교로운 일이군.”

상황이 어떻게 돌아가는지는 대충 알 것 같았다. 인피니티 킹덤이 의도적으로 노려진 것은 아니라니 그 점에 대해선 다행이지만, 이 상황 자체가 그에게는 너무도 불길하게 느껴졌다.

지금 또 다른 홀로그램 스크린 위에 뜬 아군 함대의 모습은 처참했다. 패잔병이라 말해도 부족함이 없을 만큼 피해가 막심해 보였다.

그 말은 아군이 큰 타격을 입고 패퇴했다는 말과 다름이 없었다.

‘어떻게 된 거지? 설마 우리가 도착하기도 전에 연합 함대들이 더 버티지 못하고 패했다는 건가?’

온갖 불길한 상상이 떠올랐지만, 지금은 그런 생각에 잠겨 있을 때가 아니었다. 아군의 잔존 함대를 추격하고 있는 인베이더 함대를 격퇴하는 게 급선무였다.

“대응 준비! 아군을 추격하고 있는 인베이더 함대를 공격한다!”

[쉽지 않습니다. 인베이더 함대에게서 위상전환 반응을 포착! 본 함의 무장으론 타격이 불가능합니다!]

“안다. 그렇기에 이번에 준비한 것을 쓰기로 한다. 자, 사일로 전개. 그리고 탄은 SB탄을 사용한다! 그걸로 놈들의 보호막을 확실히 벗겨줘라!”

[알겠습니다. 사일로 전개. 탄종은 SB탄!]

“아껴 쓰도록 해. 어차피 위상전환을 해제하는 데는 몇 발만으로 충분하다. 더미를 뿌려서 SB미사일들이 대공방어에 격추되지 않도록 해라!”

[물론입니다!]

지금까지 철저히 비밀로 붙여온 SB미사일이지만, 그렇다고 해서 이런 상황에 되어서까지 감출 생각은 없었다.

위상전환을 두른 적에게 유효한 타격을 줄 수 있는 수단이 없는 만큼, 어쩔 수 없는 선택이기도 했다.

“하지만 그렇다고 해서 놈들의 본대에게 쉽게 알려줄 수는 없지. 재밍 전개! 본 함의 출력 중 상당수를 이쪽으로 돌리는 한이 있더라도, 이곳에서 있던 일이 외부에 퍼져나가지 않도록 해라! 그리고 놈들을 전멸시켜! SB탄에 대한 비밀은 최대한 지켜내야 해!”

[예!]

오퍼레이터는 즉시 타깃팅을 설정했다. 설정 자체는 쉬웠다. 인베이더의 위상전환은 어떤 특정 부위만 두른 게 아니라, 함대 전체를 보호하는 형태였으니까.

어느 곳이든 적중만 하면 문제없었다.

[SB탄 발사!]

큥큥큥!

사일로를 떠난 수천 발의 미사일들이 일제히 인베이더 함대를 향해 쏟아졌다. 물론 그 대부분은 더미였다. 정확히 말하자면 그냥 더미는 아닌, 일반 미사일이었고 그 중에 SB탄이 극소수 섞여 있었던 것이다.

인베이더 쪽에서도 즉각 대응에 나섰다. 형식적으로 엉성한 대공화망을 구성한 것이다. 아무래도 지금까지 무적을 자랑해온 위상전환 공간 자체를 절대적으로 믿고 있는 듯 보였다.

그것을 눈치 챈 아르페인이 인베이더 함대 쪽을 응시하면서 차갑게 웃었다.

“그 정도로 전부 다 격추할 수 있을 것 같으냐?”

쏘아진 미사일들 중 격추된 것이 반절을 훨씬 넘었지만, 멀쩡한 것만 해도 무려 1/3이나 되었다. 그리고 그 중 SB탄은 고작 세발 정도였다.

하지만 그것만으로도 충분했다. 놈들이 자랑하는 무적의 공간을 깨부수기에는.

쾅! 콰아앙!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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