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검신의 검은 우주를 가르고-161화 (162/448)

7권-11화

[[내 한 몸으로 말미암아 사마(邪魔)를 불사르도다.]]

부동심결(不動心結) 제2법. 일기멸사(一己滅邪)

그 순간, 레이첸이란 존재를 이루던 의식이 크게 확장되었다. 카르테인의 압도적인 영압에 짓눌려 위축되어가고 있던 자의식이 꼿꼿하게 섰고, 영성은 전에 없이 크게 타오르면서 강대한 영기를 내뿜어냈다.

부동심의 요체를 깨달은 순간, 부동심결의 성취가 오르면서 그의 정신과 영혼의 격도 같이 상승한 것이다.

그래서일까? 이제야 조금 실감할 수 있었다. 자신의 자아와 영혼이 얼마나 짓눌려 살아왔는지를.

‘이게 일반 사람들이 평소에 누리는 기분인가.’

마치 창공을 나는 새와 같은 자유로움에 온 몸이 붕 뜬 것 같았다. 그동안 자신을 옥죄어오던 무언가로부터 해방된 듯한 기분이었다.

하지만 레이첸은 들뜬 기분을 가라앉혔다.

이미 부동심결 2법에 달한 상황이었다. 언제든 마음만 먹는다면 감정을 누르고 평상심을 유지하는 것도 가능해진 것이다.

그리고 2법이 어떤 공능을 가졌는지도 깨달았다.

정하고 곧은 마음은 흔들리지 않으니, 그것을 바탕으로 영적 힘을 발현하여 부정한 것을 사르는 것이 바로 2법 일기멸사의 힘이었다.

그래서일까? 카르테인의 저주는 더 이상 느껴지지 않았다. 아니 아직 존재하고 있긴 하지만, 그의 정신과 영혼을 짓누르지 못하고 밀려나고 있는 것이 느껴졌다.

그때, 카르테인의 영언이 들려왔다.

[···결국 시련을 통과했구나. 실패할 거라 생각했거늘.]

‘운이 좋았다고 해야겠지? 하마터면 마지막 순간에 주저앉을 뻔했어.’

솔직히 말해 깊은 절망에 파묻혀서 더 이상 일어설 수 없을 줄 알았다. 하지만 마지막 순간 떠올린 아버지와의 기억이 자신을 일어서게 해 주었다.

그때의 그 일은 아직도 머릿속에 생생해서 도저히 잊을 수가 없었다.

[어쨌든 너는 내 시련을 훌륭히 극복하였다. 지금의 성취는 그 대가라고 보면 되겠지. 그리고 앞으로 너는 나의 사도로서 강력한 힘을 갖게 될 것이다. 지금은 네 수준이 부족해서 지금보다 조금 더 나은 정도에 불과하겠지만, 네 아비 수준만 되더라도 그 몇 배 이상의 힘을 다룰 수 있게 되겠지.]

레이첸은 카르테인으로부터 들려온 그 말에 깜짝 놀라고 말았다.

부동심결의 성취야 시련 속에서 얻은 깨달음 때문이니 그렇다 쳐도, 설마 자신을 사도로 삼겠다고 말할 줄이야.

그건 단순히 계약 관계로 힘을 빌려주는 정도가 아니라, 자신을 대리인으로 삼겠다는 말이나 다름없었다.

하지만 놀람도 잠시 뿐, 레이첸은 문득 의문이 들었다. 그래서 조심스럽게 물었다.

‘카르테인 당신은 대체 바라는 게 뭐지?’

[무슨 말을 하고 싶은 거냐? 시련을 극복한 널 사도로 삼은 게 의외라 ]

‘전부터 느끼고 있었어. 당신이 인간을 증오하는 감정을 품고 있다는 걸 말이야. 물론 인간을 싫어하거나 적대하는 자들은 많이 있어. 특히 인베이더의 성좌 같은 존재들이 그런 존재들이고. 하지만 그들과 당신이 갖는 인간에 대한 적의는 그 종류부터가 전혀 달라. 성좌들은 필요에 의해 인간을 적대한다면, 당신에게서 느껴지는 감정은 지극히 개인적인 원념에 가까워. 내말이 틀렸어?’

[······.]

마치 허를 찔리기라도 한 듯, 카르테인은 잠시간 아무런 대꾸도 하지 못했다.

하지만 이내 그 사실을 인정해 보였다.

[그래, 나는 인간을 미워하고 있다. 증오한다는 말이 더 옳겠지.]

‘그렇다면 왜지? 왜 인간인 내게 이런 기회를 주는 건데? 인간은 당신에게 있어 증오의 대상인데 왜 나는 예외인 거지?’

[그건··· 단지 우주를 혼란케 하는 인베이더의 행보가 더 마음에 들지 않아서였을 뿐이다. 그 밖에 다른 이유는 없다.]

너무도 어설픈 변명이었다. 레이첸도 딱히 눈치가 빠른 편은 아니었지만, 이건 누가 들어도 급조해서 내놓은 대답이라고밖에 생각할 수 없는 대답이었다.

레이첸은 가볍게 한숨지으며 말했다.

‘대충 알만하군. 당신 스스로도 자신의 마음을 이해 못하고 있거나, 아니면 알면서도 외면하고 싶은 모양이지?’

[······.]

이번에도 답할 말이 궁한 듯 침묵을 고수하는 카르테인. 그게 아니면 자신의 심중을 정확히 찌른 그 말에 놀라 할 말을 잃었던 걸지도 모른다.

레이첸은 계속 말을 이어나갔다.

‘당신은 인간을 미워하면서도 한편으론 사랑하고 있어. 어쩌면 애증에 가까운 걸지도 모르지. 당신은 뭐라 할지 모르겠지만 난 그렇게 생각해.’

[나는 인간을······.]

지금도 그랬다. 애증이라는 말에 제대로 된 반박조차 하지 못하는 걸 보면 분명히 알 수 있었다. 카르테인은 분명 인간을 미워하면서도 한편으론 아꼈다.

대체 어떤 계기가 있었기에 이런 비틀린 형태의 감정을 품게 되었는지는 모르겠지만, 레이첸은 지금 그 반응에서 자신의 추측이 확실하다는 것을 깨달았다.

잠시 뒤, 감정을 추스른 카르테인이 무겁게 영언을 발했다.

[됐다. 그에 대해선 더 이상 말하고 싶지 않구나.]

‘······.’

[아무튼 넌 이제부터 나의 사도다. 내 힘과 뜻을 대행하는 자이니, 앞으로는 하찮은 것들에게 패하는 못난 꼴을 보여서는 안 된다.]

그것을 끝으로 카르테인의 존재감은 다시금 멀어지기 시작했다. 더 이상의 용무는 없다

는 의미였다.

다시 눈을 뜬 레이첸은 작게 한숨짓고 말았다.

원하던 대로 성취도 얻고, 예상치 못했던 힘까지 얻었다. 하지만 카르테인의 반응을 생각하면 그 성취감도 그다지 기쁜 마음이 들지 않았다.

“초월자의 심경도 인간들과 마찬가지로 꽤나 복잡하구나.”

인간을 미워하면서도 사랑하는, 애증에 찬 초월자라니. 생각하는 것만으로도 머릿속이 복잡해졌다. 더군다나 그 존재가 자신에게 직접적으로 힘을 주는 존재라는 점에서 더더욱 마음에 걸렸다.

“그 문제는 나중에 생각해 보기로 하고······.”

레이첸은 자리에서 일어섰다. 새롭게 얻은 힘과 능력을 시험해볼 때였다. 그는 곧바로 숙소를 떠나 수련장으로 발걸음을 옮겼다.

* * *

아득히 먼 이름 없는 성계. 그곳에 자리 잡고 있던 카룬다임은 조용히 눈을 떴다. 자신이 정신의 일부를 떼어내 만든 단말이 보내온 정보가 이제야 도달했기 때문이었다.

그는 본디 아카식 레코드마저 엿볼 수 있는 초월적 존재였지만, 그렇다고 해서 전지하진 못했다. 물질계에 꽤나 많은 간섭을 하면서 열람 레벨이 많이 낮아졌기 때문이었다.

그렇기에 볼 수 있는 것도 꽤나 제한된 상태였고, 그나마 보이는 것도 단편적인 것에 불과했다.

본체인 그마저도 그럴 지경이니, 일개 단말이야 말할 것도 없었다.

[이진운이라. 이건 상상 이상이군. 어떻게 이런 인간이 아직 필멸자로 남아 있을 수 있는 거지?]

그로서는 이해 불가능한 상황이었다.

단말이 본 것이 잘못된 게 아니라면, 이진운은 이미 초월의 단계에 도달한 반신이다. 그런데도 필멸자와 다를 바 없는 신세라니 이게 어떻게 된 거란 말인가?

게다가 그가 보여준 실력도 그랬다. 분명 그랜드 급에도 못 미치는 수준이었는데도 불구하고 그의 무위는 상상을 뛰어넘었다. 그랜드 급에 버금가는, 아니 어떤 면에서 본다면 그 이상이었다.

[그리고 녀석은 무공뿐만 아니라, 마법과 정령술, 그리고 각종 이능을 사용하기까지 했다. 그것도 아주 높은 수준으로 말이야. 제한된 수명을 가진 인간이 그 많은 것들을 그만한 수준까지 체득하는 게 가능하긴 한가?]

마음 같아선 아카식 레코드를 통해 그 이유를 파헤치고 싶었지만 그것조차 여의치 않았다. 어째선지 놈이 그렇게 다양한 능력과 힘을 갖게 된 이유를 볼 수가 없어서였다.

마치 무언가에 의해 열람 자체가 금지된 것처럼.

[뭘까? 누군가가 손을 쓴 건가? 아니면 내 물질계에 간섭이 잦아서 열람 자체가 불가능해진 건가? 알 수가 없군.]

간혹 그런 경우가 있었다. 열람 레벨에 문제가 없다 하더라도, 열람 불가능한 경우가.

그것은 바로 자신과 비슷하거나 그보다 더 격이 높은 초월자가 특정 부분에 대해 열람을 제한해 둘 경우였다.

하지만 이 경우가 둘 중 어느 쪽인지는 잘 감이 오지 않았다.

단지 분명한 것은 이진운이란 녀석이 자신들이 추진하고 있는 계획에 큰 방해가 된다는 사실이었다.

[그렇다면 더 커지기 전에 제거하는 수밖에.]

하지만 마음을 먹었다고 해서 직접 나설 생각은 없었다. 그의 본신은 너무도 강대해서, 수많은 제약이 그를 옭아매고 있는 상황.

물론 무리를 한다면 움직일 수도 있겠지만, 그만큼 큰 대가를 치러야 할 것이다. 제아무리 이진운이 반신 급의 격을 가졌다 해더라도, 고작 필멸자에 불과한 지금은 그런 무리를 할 필요는 없었다.

[좋아. 그렇다면 골리아스를 보내야겠군. 그 정도면 이진운 정도는 처리할 수 있겠지.]

현재 라인트라에는 투쟁의 좌 오르쿤의 수하인 루클라가 있었다. 놈과 골리아스가 힘을 쓴다면 이번 전쟁은 충분히 압도하고도 남을 것이다.

[그러면 일단은 오르쿤과 논의를 해 봐야겠군.]

이번 전쟁은 오르쿤이 그 대부분을 전담하고 있었다. 그러므로 자신의 수하를 보내려면 일단 그에게 먼저 양해를 구해야 했다.

[되도록이면 먼저 아쉬운 소리 하지 않으려 했지만, 이번만큼은 어쩔 수 없지.]

인베이더의 9대 성좌들은 필요에 따라 서로 연계하면서도 경쟁하고 있는 관계였다. 그래서 어지간한 일이 아니면 서로를 돕거나 도움을 요청 하지도 않았다.

그런 마당에 자신이 먼저 다른 성좌에게 협조를 요청해야 한다니, 이건 자존심이 상하는 일이었다. 그래서 더 짜증이 치솟았다.

[필멸자 놈! 이 대가는 톡톡히 치르게 해주겠다.]

* * *

3일째 생산을 마친 이진운은 약속한 시간이 되자마자 레이첸을 가르치기 위해 그의 숙소로 발걸음을 옮겼다.

‘생각보다 진도가 빨라. 이 정도면 금세 진경에 도달하겠어.’

요 며칠 간 이진운은 부동심결에 대한 핵심을 설명하고, 그것을 앞으로 어떻게 익혀나가야 할지를 풀이해주고 있었다.

그 요체를 제대로 받아들이기만 한다면 앞으로는 별다른 도움 없이 스스로 수련하는 게 가능하기 때문이었다.

그런데 불과 3일 만에 레이첸은 그 단계에 도달했다. 이젠 이 상태로 놔둬도 알아서 수련하는 게 가능할 것이다.

그래도 이진운은 나머지 4일 동안 더 가르침을 주기로 했다. 부동심결의 성취에 따라 단명하느냐, 아니냐가 달린 만큼 조금이라도 성취를 더 끌어올려주기 위해서였다.

하지만 숙소로 들어선 순간, 이진운은 깜짝 놀랄 수밖에 없었다.

자신의 눈앞에 있는 레이첸에게서 전과 전혀 다른 존재감이 느껴졌기 때문이다.

“레이첸, 너···!?”

“역시 아저씨는 대단해. 보자마자 금방 알아챈 눈치네.”

“벌써 2법이라니! 일기멸사의 단계까지 올라섰다고?”

능글맞게 웃는 레이첸의 얼굴을 바라보면서 이진운이 믿기지 않는다는 듯 중얼거렸다.

아리엔들이 도달한 1법과는 차원부터가 달랐다. 1법은 고작 어떠한 상황이 닥쳐도 동요하지 않는 침착함을 유지시켜 준다면, 2법은 말 그대로 부동심의 근본을 잡는 단계였다.

수많은 경험을 쌓고 그걸 바탕으로 자기 안에 확고한 주심(主心)을 완성하지 않으면 절대로 다가설 수 없는 영역이니까.

중원무림에서도 상당한 수양을 쌓은 고승이 아니면 쉬이 다가서기 힘든 단계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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