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검신의 검은 우주를 가르고-160화 (161/448)

7권-10화

대체 얼마의 시간이 지났을까. 이젠 시간의 개념조차 희박해졌다. 10년이 지났을 수도 있고, 아니면 100년의 시간이 흘러갔을 수도 있었다.

물론 실제 현실의 시간이 그만큼 흐르진 않았겠지만, 사람의 의식은 그야말로 빛과 같아서 찰나의 순간을 영원처럼 인식할 수도 있는 법.

레이첸이 겪고 있는 상황이 바로 그와 같았다. 그는 지금 끝없는 영겁의 굴레 속에서 수많은 것을 보고 있었다.

단순히 저주에 의한 고통만 받는 게 아니라, 인간이 삶을 살아가면서 경험할 수 있는 최악의 순간들을 모조리 체험하고 있었던 것이다.

이건 단순히 고통을 체험하는 것보다 더 고통스러운 경험이었다.

그럴수록 레이첸의 마음은 마모되어나갔다. 제아무리 굴강한 정신을 가진 사람이라 해도 이런 경험을 끝없이 연달아 하게 되면 버틸 수가 없었다.

그래도 아직까지 레이첸이 버틸 수 있었던 건, 지금까지 시한부 인생을 살면서 가슴 속에 품어왔던 큰 사명감 때문이었다.

하지만 그마저도 그 근간부터 흔들리기 시작했다. 단순히 인생의 쓴맛만 맛보는 게 아니라, 이젠 헤어 나올 수 없는 절망의 광경이 그의 눈앞에 펼쳐지고 있었다.

인베이더와 끝없이 싸워서 사람들을 지켜냈지만 결국에는 그들에게 배신당하거나, 그를 시기한 자들의 수작질로 뒤통수를 맞아 죽음에 이르는 광경들.

어떤 때는 사람들의 얼토당토 않는 모함으로 인해 아버지와 가문이 궁지에 몰리다가, 연합으로부터 배척당하면서 인베이더에게 몰살당하는 경우도 있었다.

처음에는 그냥 무시했지만, 그 현실감은 그냥 무시한다고 지나칠 수 있는 게 아니었다. 현실에서도 충분히 있을 법한 일이었던 데다, 모든 과정들이 앞뒤가 분명히 맞아떨어졌다.

그리고 그 과정은 다양했지만, 그것들이 가져오는 결과는 매번 같았다.

배신감과 분노, 그리고 저 나락으로 추락한 뒤에 찾아오는 끝없는 절망이었다. 그가 아무리 노력하고 희생해도, 돌아오는 것은 그게 전부였던 것이다.

그 후, 그의 가슴 속에는 짙은 회한과 절망, 분노만으로 가득 차게 되었다.

‘대체 난 무엇을 위해 싸운 거지?’

‘전부 다 쓸데없는 짓이었어. 아무리 희생하고 사람들을 위해 싸워도 그게 무슨 소용이 있는 거지? 외려 나와 가문을 음해하는 것들인데.’

‘진짜 추악스럽구나. 우리 가문은 천년 동안 수많은 희생을 치러가면서 저런 것들을 살려온 건가? 정말 시조님이 원망스럽구나.’

갈수록 인간에 대한 실망과 분노만 중첩되었다. 그리고 그것은 결국 지금까지 레이첸이 수명을 마다하고 싸울 수 있었던 원동력이었던, 인간을 수호한다는 사명감까지 흐려지게 만들었다.

이제 그의 마음을 지탱해주는 것은 아무것도 없었다.

그제야 카르테인의 영언이 들렸다.

[역시 나약하구나. 인간의 마음은···. 하긴 인간뿐만 아니라 필멸자들은 다 그러하지.]

레이첸이 흐릿한 눈으로 상대를 바라보았다. 희뿌연 영체로 보이는 카르테인의 모습은 제대로 확인할 수 없었다.

[결국 포기한 거냐? 하긴 그렇겠지. 인간은 보호해줄 가치가 없는 생명이다. 악랄하고 졸렬하며 추악하지. 누군가가 잘되면 시기하고, 그것을 음해하는 것을 즐기는 족속들. 네가 목숨을 다해가며 지켜줘도 고마워하는 것은 잠깐 뿐이다. 금세 잊혀지고 말지. 그리고 언제 구함을 받았냐는 듯, 자기에게 이득이 된다면 너에게도 칼을 들이밀 수 있는 게 바로 인간이다.]

‘······’

레이첸도 그걸 모르지는 않았다. 예전부터 잘 알고 있었다.

하지만 머리로만 알 뿐, 그것을 실제로 체감해보진 못했다. 바이우드 가문의 힘은 강성했으며, 그 영향력은 연합에서도 손에 꼽는 수준.

그런 가문의 장자로서 철저히 보호를 받아온 레이첸이 인간의 악의를 직접 체험해 볼 일이 얼마나 있겠는가.

그래서 더 고통스럽고 절망스러웠다. 카르테인이 보여준 인간의 악의는 끝이 없었으니까. 설마 저렇게까지 악랄하고 저열할 거라곤 상상도 못했다.

그래서일까? 속삭이듯 보내오는 카르테인의 영언은 마치 악마의 속삭임 같이 들렸다.

[그래도 인간에게 손을 내밀 셈이냐? 싸우면 싸울수록 네 수명은 줄어만 갈 거다. 그런 희생을 감수하면서 그들에게 그만한 가치가 있다고 생각하는 거냐?]

수명을 대가로 싸울 때는 망설임이 없었다. 하지만 이제 와서 돌아보니 조금씩 그때의 결단이 후회되었다.

[너도 봐서 알 것이다. 그리고 너와 네 가문이 다다르게 될 종착지는 거의 비슷하겠지. 세상 모든 것이 흥할 때가 있으면 언젠가 쇠퇴하기 마련인 것처럼··· 너희 가문도 그렇게 될 거다. 다만 자연의 섭리와 같이 자연스럽진 않겠지. 그게 누군가의 질시나 모함이든, 악의적인 음해나 음모든 너희 가문도 결국 그런 식으로 무너지고 말 테니까. 내가 보여준 것들은 결코 과장도 거짓도 아니다. 얼마든지 너와 네 가문에게 닥쳐올 수 있는 현실이지. 그래도 지금의 신념을 고집할 셈이냐?]

지금까지 가문은 레이첸의 전부였다. 인베이더들로부터 사람들을 구하겠다는 그 사명감도 가문의 근간에 기인하고 있었다.

가문을 연 시조는 인베이더에 대한 끝없는 원한으로 시작했다면, 지금의 바이우드는 기나긴 세월을 거치면서 인베이더들로부터 사람을 구제하겠다는 뜻으로 바뀌었다.

그 자부심과 사명감이 천년의 바이우드 가를 지탱해오고 있었다.

하지만 그마저도 결국 끝없는 인간의 악의를 넘어서지 못하는가!

레이첸의 마음이 점점 절망과 회환으로 검게 물들어가던 그때, 불현듯 어릴 적의 기억이 떠올라 버렸다.

아버지를 따라 어떤 행성에 다다랐을 때였다. 어릴 적이라 어떤 행성인지 잘 기억나지 않았지만, 그때 겪었던 일은 아직도 생생했다.

상황은 말 그대로 절망스러웠다. 대체 어떻게 행성을 빠르게 장악한 건지, 인베이더들은 행성 대부분은 자기 색으로 물들였다. 하이브의 규모는 이미 한계 레벨 단계에 가까울 만큼 커지는 바람에 진멸 급은 이미 셀 수조차 없었고, 심지어 성멸 급조차 거의 수백 단위로 널려 있던 위기의 순간이었다.

당시 이 정도로 상황이 악화된 줄 몰랐던, 아버지와 가문의 사람들은 필사적으로 싸우면서 살아남은 사람들을 지켜냈다.

하지만 그 대가를 너무도 값비싸게 치렀다. 그 과정 중에 너무 무리한 힘을 쓴 아버지가 결국 피를 토하며 쓰러지고 말았기 때문이었다.

그의 아버지는 세상 그 누구보다 강했지만, 결국 바이우드 혈족에게 내려오는 저주의 굴레를 견디지 못한 것이다.

그때 아버지를 진단한 의료관계자가 말했다.

‘더 이상 무리하시면 안 됩니다. 생명력은 물론이고 영혼과 정신이 많이 축났어요. 여기서 더 무리하신다면 적어도 10년 이상의 수명이 줄어들 겁니다.’

이미 많은 수명을 힘을 사용한 대가로 바친 상황이었다. 지금의 바이첸에게 10년의 수명감소는 너무나도 타격이 컸다.

‘지금이라도 후퇴하셔야 합니다. 이미 이 행성은 끝났어요. 가주님이 이곳에서 수명을 쏟을 가치가 없습니다. 차라리 훗날을 기약하시는 게······.’

주변에서 이렇게 설득해 왔지만, 그래도 그는 웃어보였다.

‘아직 구하지 못한 사람들이 있고, 이곳은 아직 폐기되지 않았어. 그 정도면 싸울 이유로는 충분하지 않나?’

‘워낙 사방에 흩어져 있어서 난민들을 일일이 찾아 구한다는 건 거의 불가능합니다. 그리고 그 숫자도 많지 않은데 가주님이 굳이 수명을 소모할 것까지는······. 그리고 주변의 여론도 그리 좋지 못한 상탭니다. 굳이 우리가 비난 받아가며 싸울 필요가 있을까요?’

당시에도 말들이 참 많았다. 바이우드 가가 진작 폐기해도 모자랄 행성에서 쓸데없이 아까운 전력만 허비하고 있다는 비난도 빗발치고 있던 때였다.

오죽하면 당시 어렸던 레이첸조차 사람들의 모습에 불신감을 품게 될 정도였으니, 말 다한 셈이다.

그래서 가문 내에서도 의견이 분분했었다.

하지만 그런 현실적 상황도, 아버지의 결심을 되돌리진 못했다.

‘그러니 더 싸워야지. 이 행성을 인베이더로부터 탈환한다면 사방에 숨어 있는 난민들의 목숨도 구제되는 것 아닌가.’

‘······.’

‘그리고 인명의 가치는 그 숫자로 저울질 할 수 있는 게 아니지. 지금까지 바이우드 가는 한 사람의 생명을 위해서라도 싸워왔다. 누가 뭐라 한다 해도, 그런 것에 연연할 이유가 없지. 우리는 우리의 법대로 싸운다.’

그리곤 옆에서 울먹이고 있던 자신을 향해 손을 뻗어보였다. 머리를 쓰다듬던 아버지의 손길이 그렇게 굳건하고 따스할 수가 없었다.

‘레이첸, 잘 들어라. 사람은 불완전하고 나약해서, 곧잘 잘못된 길로 흘러가곤 한다. 우리를 비난하는 자들이 바로 그런 경우지.’

‘아버지는 그들이 밉지도 않나요? 우린 사람들을 구하기 위해 노력했는데, 이상한 소리로 우릴 욕하잖아요!’

억울하고 분하다는 듯 외친 그 말에, 아버지는 웃으며 말했다. 조금도 그들에 대한 미움이 엿보이지 않는 미소였다.

‘그래, 알고 있다. 하지만 그렇다고 해서 그들을 미워하진 말아라. 그런 악의를 품을 수밖에 없는 그들의 나약함을 이해해라. 약하기에 타인의 것을 탐내고, 누군가를 배척해서 이득을 얻고자 하는 성향을 갖고 있지. 하지만 모두가 그런 건 아니야. 누군가를 배려하고 올바른 마음으로 살아가는 사람들도 얼마든지 있다.’

그리곤 이번에는 자신에게 물었다.

‘너도 여기 와서 봤겠지? 전쟁에 휘말려 비참하게 죽어가는 사람들을.’

‘······.’

말없이 고개를 끄덕이자, 아버지는 계속해서 말을 이어나갔다.

‘힘이 없다는 건 비참한 거다. 그런 일을 당해도 저항할 수조차 없지. 그저 울부짖으면서 운명을 원망할 따름이고. 그에 반해 우린 시조에 의해 큰 힘을 갖게 되었다. 그리고 큰 힘에는 그만한 의무가 따르는 법이지.’

‘그래도 이 힘이 거저는 아니잖아요. 목숨을 깎아야 하는 힘인데··· 왜 우리가 그런 희생을 해야 하죠?’

억울한 마음에 그렇게 외쳤다. 누군가를 위해 자신을 희생해야 발휘할 수 있는 힘 따윈 없느니만 못하다고 생각했으니까.

그러자 아버지가 쓰게 웃으며 말했다.

‘그래, 네 말처럼 희생해야 쓸 수 있는 힘이지. 게다가 시조 이후로 계속 핏줄을 타고 전승되는 것이라 달리 선택의 여지도 없었고. 우리 아들이 그런 마음을 갖고 있다 해도 무리는 아니야. 하지만 이렇게 생각해 봤니? 저 사람들이 앞으로 어떻게 될지 말이야.’

그게 무슨 뜻인지 몰라 고개를 갸웃하자, 아버지가 난민들을 가리키며 말했다.

‘저 사람들은 그 수만큼 무한한 가능성을 품고 있단다.’

‘가능성이요?’

‘그래, 무엇이든 될 수 있는 가능성. 사람은 누구나 그런 가능성을 품고 있지. 누군가는 우주를 뒤흔들만한 과학자가 될 수도 있고, 우리만큼 대단한 강자가 돼서 사람들을 지켜줄 수도 있겠지. 그래서 난 그 가능성을 지켜주고 싶구나.’

그리고 아버지는 그 말을 지켰다. 성공적으로 행성을 탈환했으며, 살아남아서 뿔뿔이 흩어져 있던 사람들을 구해낼 수 있었다.

무려 10년이 넘는 수명을 소모하게 되었지만, 아버지는 그 선택을 결코 후회하지 않았다.

그래서일까? 그때의 그 일이 자신이 어떤 일생을 살아갈지에 대한 계기가 되었다.

사람들을 위해 싸우기로 마음먹었으며, 수명이 줄어드는 것도 마다하고 강해지기 위해 노력할 수 있었다.

그때의 일을 떠올리자, 어둡게 물들던 마음에서 작은 등불이 타오르기 시작했다. 그것은 작고 미약했지만, 절망이라는 나락으로 떨어져 내리던 그의 마음에 작은 희망이란 형태로 자리하고 있었다.

‘그랬지. 그런 일이 있었어. 그래서 나는······.’

그제야 알 수 있었다. 무언가를 위해 희생한다는 의미를. 그리고 아버지가 그런 마음을 품게 된 이유도.

이미 오래 전에 경험하고 들었던 그때의 일을 다시금 되새길 수 있었다.

그제야 머릿속으로 한 구절이 떠올랐다. 그것은 이진운이 전수해준 부동심결의 구결이었다.

세상 풍파에 흔들릴지언정, 나 홀로 불타오르리니··· 험악한 인간의 악의가 다 무슨 소용인가.

모든 것은 마음먹기에 달렸나니, 그것이 곧 부동이니라. 홀로 굳건하다면, 마음은 금강석보다도 더 단단해지리라.

[[내 한 몸으로 말미암아 사마(邪魔)를 불사르도다.]]

부동심결(不動心結) 제2법. 일기멸사(一己滅邪)

#


0