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검신의 검은 우주를 가르고-159화 (160/448)

7권-09화

이진운과 리스티가 미사일을 생산하는 데 여념이 없는 동안, 인피니티 킹덤도 마지막 정비를 하느라 바쁜 시간들을 보내고 있었다.

“이봐 V-405 수량이 맞는지 다시 한 번 확인해 봐. 나중에 부족하단 소리 나오면 큰일 난다고.”

“어이, 사일로의 사출구에 문제가 생겼어. 지난 번 전투에서 마모가 너무 심했었나봐. 이래선 미사일이 나가다가 멈춘다고!”

“그보다는 내 게 더 시급해! 기체의 관절이 뻑뻑하다고! 이런 기체로 나가 싸우다가 뒤지라는 거냐!?”

“그걸 모를 것 같아! 순서를 기다려! 다들 바쁜 것 안 보여! 때 되면 알아서 해 줄 테니까, 그때까지 좀 가만히 있으라고!”

다들 분주하게 움직였다. 그럴 수밖에 없었다. 일주일간의 정비만 끝나면 인피니티 킹덤은 곧바로 라인트라의 최전방 전선에 합류하게 된다.

그곳에서 어떻게든 살아남으려면 할 수 있는 한 준비를 갖춰놓을 필요가 있었다.

그것은 아리엔들도 크게 다르지 않았다. 뭔가를 정비하거나 준비한답시고 뛰어다니진 않았지만, 그들은 그들 나름대로 해야 할 게 있었다.

바로 수련이었다.

이진운은 그들에게 휴식을 취하라고 말했지만, 그 말에 따르려 해도 도저히 그럴 수가 없었다.

이제 거대한 전쟁을 불과 며칠 앞둔 상황이었다. 이런 때에 속편하게 가만히 휴식을 취할 수 있을 리 없지 않은가.

게다가 카룬다임과의 싸움에서 그들은 또 한 번 실력의 부족함을 절감하고 말았다. 환상 속에서 겪었던 고련 덕분에 전보다 더 강해지긴 했지만, 이 정도론 아직도 멀었다는 사실만 깨달은 것이다.

그래서 며칠 남은 기간 동안 더 필사적으로 실력을 갈고 닦기로 했다. 그건 세 사람 모두 공통된 생각이었다.

아리엔들이 다시 수련장에 틀어박힌 사이, 레이첸도 자신의 숙소에서 두문불출했다. 이진운이 전수해준 부동심결을 연성하느라 정신이 없어서였다.

현재 그의 수준은 간신히 체득한 입문 수준. 이럴 때 조금이라도 수준을 높여 놔야 더 많은 힘을 끌어올려도 감당할 수 있을 거라고 판단한 것이다.

‘라인트라 최전선에서의 전투는 상상 이상으로 힘들 게 분명해. 지금 내 실력으론 목숨 하나 부지하는 것도 힘들지도 모르지.’

이미 마이스터 급에 올라선 레이첸이었지만 그는 자기 자신을 절대 과신하지 않았다. 특히 카룬다임과의 전투를 경험하면서 그 생각은 더욱 공고해졌다.

‘솔직히 말해 내 실력을 냉정하게 평가한다면 고작 해봐야 마이스터 급도 될까 말까 한 수준이지.’

물론 실제 발휘할 수 있는 그의 실력은 그보다 더 상위였지만, 문제는 그 후유증을 감당할 수 없다는 게 문제였다.

그런 식으로 수명을 단축하다보면 이번 전쟁에서 싸우다가 단명하게 될지도 모른다. 그래서 레이첸이 이토록 필사적으로 부동심결에 매달리고 있는 것이다.

‘당장 수명 단축의 후유증만 줄일 수 있어도 내 실력은 지금보다 급증할 수 있어! 마이스터 중에서도 중간 수준까지 단숨에 치고 올라갈 수 있을지도 모르지.’

그렇기에 그는 다시 자신의 내면 안으로 침잠해 들어갔다.

부동심결의 핵심은 자신의 자아와 영혼, 마음을 수양하여 보다 높은 격을 향해 다가서는 것. 그렇기에 자기 자신의 내면을 들여다 볼 필요가 있었다.

그러자 심연 깊은 곳에서 무거운 울림이 들려왔다.

[꽤 재미난 걸 얻었구나. 그걸로 내 존재감에 짓눌려 죽어가던 너의 정신과 영혼을 되살릴 셈이더냐?]

레이첸은 그 울림의 정체를 바로 알아챘다. 저 존재는 바로 바이우드 가문의 시조와 계약을 맺었던 초월자, 카르테인이 분명했다.

조소하는 듯한 그 목소리에 레이첸은 이를 악물며 화답했다.

‘당연하지! 이대로 죽을 순 없잖아!’

[뭐 그것도 좋겠지. 하지만 너의 그 발버둥이 어디까지 갈 수 있을까! 부동심결이란 수련법의 성취가 높아진다면 자아와 영혼을 확고하게 만들 수 있을 테지만, 그것은 너무도 지난한 일이야. 작은 바늘귀에 우주전함이 들어가는 것과 비슷한 난이도지. 그래도 그 실낱같은 희망에 목을 맬 것이냐?]

‘그래도 상관없어! 무려 천년 만에 손에 넣은 가능성이야! 절대 포기할 수 없어!’

절대 물러서지 않겠다는 듯 각오를 내보이는 그 모습에, 카르테인이 흥미를 보이며 말했다.

[그렇다면 나도 널 돕기로 하지.]

‘당신이 날 돕는다고?’

그 말에 믿을 수 없다는 반응을 보이는 레이첸.

당연했다. 저 존재는 바이우드 가의 혈족에게 계약대로 힘을 주고 있긴 하지만, 지금까지 일절 배려가 없었다. 바이우드 혈족이 죽든 말든 전혀 신경 쓰지 않았다.

심지어 그들 혈족이 망가지도록 일부러 유도하기까지 하는 존재를 어찌 믿을 수 있을까.

그가 의심스럽게 노려보자, 카르테인도 더는 숨기지 않고 제안에 대한 내용을 분명하게 말해주었다.

[물론 내 도움은 독을 품고 있지. 견딜 수 있다면 그만한 대가가 주어지지만, 견디지 못하면 파멸에 이르게 되니 말이야.]

‘역시··· 그러면 그렇지.’

예상했던 대로였다. 애당초 기대도 하지 않았지만, 카르테인의 제안은 먹지 못하는 독 사과나 다름없었다.

그렇지만 그게 전부가 아니라는 듯, 카르테인은 그 대가를 명확하게 제시했다.

[하지만 네겐 확실한 기회가 될 수도 있다. 내가 주는 시련을 견딜 수만 있다면··· 부동심결의 성취는 지금보다 한 단계 이상 올라갈 테니까.]

‘한 단계 이상···!?’

그 말에 일순 레이첸이 움찔 멈춰 섰다.

이미 경험하고 있긴 하지만 부동심결의 연성은 말처럼 쉬운 게 아니었다. 며칠 동안 매달렸음에도 불구하고 정말 진전이 되고 있는지조차 의심스러울 정도로 더뎠다.

이대로라면 10여년 이상을 혼자 면벽수란이라도 해야 그럭저럭 성과가 나올 수 있을까 싶을 지경이었다.

그런데 그런 부동심결의 성취를 한 단계 이상이라니······.

저 제안에 독이 들었다는 걸 알면서도 갈등할 수밖에 없었다.

‘젠장··· 이런 악마 같은 제안을 잘도 하네.’

레이첸은 쓴웃음을 짓고 말았다. 어지간한 거였으면 뿌리칠 생각이었는데, 카르테인이 이렇게까지 탐나는 미끼를 내걸며 흔드니 도저히 물지 않을 수가 없었다.

그런 결단을 읽은 듯, 카르테인이 다시 울림을 전해왔다.

[이미 결정은 내린 것 같군.]

‘당신 진짜 악마야! 진성 악마!’

[악마라니, 날 너무 낮게 보는구나. 네가 말하는 악마들조차 내 발밑에서 굴러다는데, 거기에 비유하는 건 전혀 맞지 않지.]

그 말에, 레이첸도 일순 말문이 막혔다. 그렇다면 카르테인은 그 악마들보다 더한 존재라는 말이 아닌가?

시조가 계약한 이 초월적 존재가 별로 좋지 않은 성향의 신이라는 건 익히 알고 있었지만, 설마 악마조차 발밑에 둘 정도로 사악한 존재일 줄은 몰랐다.

이건 가문의 사람들조차 알지 못하는 사실이었다.

카르테인이 다시 입을 열었다.

[그럼 시련을 시작하지. 네가 과연 이 시련을 견뎌낼지는 모르겠지만, 견디기만 한다면 그만한 과실을 얻게 될 것이다. 반대로 실패한다면 네 정신과 영혼은 나락으로 떨어질 테고. 참으로 기대가 돼.]

‘그 전에 한 가지 묻고 싶어.’

[뭐지?]

갑자기 던져진 그 말에, 순순히 질문을 허락하는 카르테인. 그러자 레이첸이 단도직입적으로 물었다.

‘당신이 이래서 얻는 게 뭐지? 단순히 흥밋거리인가? 아니면, 따로 목적이 있는 거야?’

예전부터 생각해 온 문제였다. 대체 자신의 혈족들과 계약한 이 존재는 무엇 때문에 이런 힘을 베푸는 걸까?

물론 그 부작용 때문에 단명할 수밖에 없다곤 하지만, 어쨌든 카르테인은 일방적으로 힘을 제공해주는 존재였다.

그렇다면 그럴만한 목적성이 있다고 봐야 할 것이다. 저만한 초월적 존재가 아무 이유 없이 힘을 줄 리는 없을 테니까.

그동안 가문 사람들도 이런 의문을 품어왔지만, 어느 누구도 알아내지 못했다. 카르테인과 이렇게 영적으로 깊게 연결된 자는 극히 드물었기 때문이었다.

어느 정도 교감에 성공한 경우는 있지만, 이 존재와 직접 대화를 나눈 경우는 시조 외엔 아무도 없었다. 이렇게 대화를 나눈 사람은 바아우드의 천년 역사 이래로 레이첸이 두 번째였던 것이다.

카르테인이 곧 대수롭지 않다는 듯 말해주었다.

[굳이 말하면 흥미가 대부분이지. 너희 인간이 시궁창에서 필사적으로 발버둥치는 광경은 너무도 황홀하니까. 사실 인간을 별로 좋아하지 않거든.]

‘정말 악취미군, 당신.’

기대했던 것 이하의 대답에, 레이첸은 실망했다는 듯 내뱉었다. 고작 그런 이유로 시조를 시작으로 가문의 혈족들이 무려 천년 동안 시달려왔다는 건가?

하지만 카르테인의 말은 아직 끝나지 않았다.

[하지만 그게 이유의 전부는 아니야. 너희들이 말하는 그 성좌라는 작자들이 마음에 들지 않아서라고 해야겠지.]

‘성좌들을?’

이제야 그 본심이 드러나는 건가 싶어 귀를 기울이는 레이첸.

카르테인은 인베이더의 성좌들을 향해 노골적으로 적대감을 내비쳤다.

[우주를 파멸로 이끌어 업을 쌓아올리려는 작자들. 온 우주를 다 들쑤시고 다니는 게 전부터 영 마음에 안 들었지. 그래서 너희 가문의 시조를 선택한 거다. 그들에게 가장 큰 원한을 품었던 비천한 존재. 그래서 그 목숨을 불태워가면서 결국 놈들의 발목을 잡았지. 그가 아니었다면 너희 아르탈 행성 연합은 그 시초부터 무너졌을 거다.]

‘그랬구나.’

[그건 나뿐만 아니다. 다수의 초월자들이 그자들에게 큰 불만을 품고 있지. 하지만 신적 초월자가 물질계에 간여할 수 없다는 섭리 때문에 너희와 계약 같은 번거로운 절차를 거치는 거다. 이런 식으로 해야 그나마 간접적으로나마 간여할 수 있으니까.]

‘그래서 우리가 선택된 거였군.’

오히려 마음이 후련해졌다. 아무 이유 없이 일방적으로 힘을 받는 게 아니었다. 이 카르테인이란 초월적 존재도 그런 목적이 자신의 일족과 일치했기에 힘을 빌려주는 것이었다.

물론 부작용이 많은 힘이긴 했지만, 그렇다고 포기할 순 없는 일!

‘어떻게든 부동심결의 성취를 끌어올려야겠어.’

이미 목적은 분명해졌다. 카르테인이란 초월자도, 자신도 그 목적은 인베이더의 격멸이었다. 그렇다면 그가 주는 시련을 마다할 이유가 없었다.

설령 그게 자신의 목숨이 위험해질 수도 있는 일이라 하더라도··· 절대 멈춰 설 수 없는 것이다.

[그럼, 시작하마. 이건 저주와도 같으니··· 견뎌낼 수만 있다면 너는 원하는 걸 손에 넣게 될 것이다.]

그 말이 끝나기 무섭게, 레이첸의 영혼과 자아를 극대의 저주가 뒤덮어버렸다. 그것은 평범한 저주가 아니었다.

세상에서 겪을 수 있는 모든 고통과 아픔, 그리고 정신적인 괴로움을 동반한 저주였다.

‘크읏! 크으으으!’

하루가 천년 같고, 일 분이 1년 같았다. 사람이라면 절대로 견딜 수 없는 그런 고통의 집합이었다.

하지만 레이첸은 필사적으로 버텨냈다. 지금 그를 지탱해주고 있는 것은, 이진운이 전수해준 부동심결의 구결뿐이었다.

그것을 끝없이 되뇌면서 자신의 정신을 겨우겨우 붙잡았다. 지금 겪고 있던 고통이 그저 외부의 자극일 뿐이라고 스스로 최면을 걸면서 억지로 버텨낸 것이다.

#


0