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검신의 검은 우주를 가르고-155화 (156/448)

7권-05화

전엔 세상사 온갖 고민은 다 끌어안고 사는 듯 행동하더니, 이제야 좀 제 나이대로 보였다. 하지만 너무 들뜨기 전에 해 둬야 할 말이 있었다.

“그건 그렇고, 한 가지 더 말해둘 게 있는데. 네가 지금 배운 부동심결은 부작용을 완전히 해결해주진 못할 가능성이 높다.”

“뭐?”

“정확히 말하자면, 부동심결은 익힐수록 성장하는 운용법이다. 고작 초입 수준에 머문다면 부작용을 조금 덜어내는 수준에 그치겠지.”

레이첸이 깜짝 놀란 표정으로 이진운을 쳐다보았다. 이제 익힌 것만으로도 자신의 정신과 영혼을 침식해오던 그 고통이 크게 경감되었는데, 결과가 고작 그 정도뿐이라고?

하지만 생각해보면 이진운이 한 말은 정론이었다. 세상사 모든 공부가 그러하듯, 고작 입문한 것만으로는 큰 도움이 되지는 않는다.

지금 자신이 익힌 부동심결도 그럴 가능성이 컸다.

“그러니까 아저씨. 지금보다 더 효과를 보려면 죽어라 익혀라 이거지?”

레이첸이 진중하게 묻자, 이진운은 고개를 끄덕이며 말했다.

“내 예상대로라면 적어도 중반 수준까지는 익혀야 침식의 후유증을 두려워하지 않을 수 있을 거다.”

“중반이라고 했지? 알았어. 다른 건 다 제쳐두고라도 최대한 빨리 그 수준까지 익혀두겠어.”

주먹을 불끈 쥐며 각오를 다지는 그 모습에, 이진운은 피식 웃으며 손사래를 쳤다.

“최대한 빨리? 아서라. 부동심결은 익히기에 따라선 무려 초월자가 될 수도 있는 운용법이다. 그걸 일정 수준까지 익히는 게 그렇게 쉬울 것 같아? 조급한 마음으로 시도하면 될 것도 안 될 거다.”

“그럼 얼마나 걸리는데?”

“지금부터 쓸 만한 수준까지 익히려면 멀어도 한참 멀었어. 지금은 단명할 뻔했던 네 목숨을 조금 연장한 정도로 만족하는 게 좋을 거다.”

조금 실망한 기색을 보이는 레이첸에게 이진운은 계속해서 말을 이어나갔다.

“부동심결의 연공은 마음과 정신의 공부인 만큼 좀 더 시간을 두고 차분하게 갈고닦을 필요가 있어. 성취가 늘어날수록 네 수명도 그만큼 연장될 테니, 조금은 느긋하게 마음먹고 수련하는 게 더 도움이 될 거다.”

부동심결의 성취가 늘어나는 만큼 좀먹은 수명도 늘어난다면 충분히 가능성은 있었다. 납득했다는 듯 고개를 주억거린 레이첸이 알겠다는 듯 말했다.

“그렇다면 어쩔 수 없지. 이제부터 최대한 노력해볼게. 그러면 어떻게든 되겠지.”

“흐음··· 뜻밖인데?

이진운이 의아하다는 듯 바라보자, 레이첸이 힐끗 시선을 던져왔다.

“뭐가 뜻밖이란 건데?”

“네 녀석 답지 않게 낙관적인 말이라서 말이야.”

“이 저주가 완전히 해결된 건 아니지만, 그래도 앞으로 내 노력 여하에 따라 얼마든지 극복할 수 있게 되었잖아. 전엔 이런 가능성마저도 전혀 보이지 않았어. 지금은 나름대로 희망이 보이니 하다보면 어떻게든 되겠지.”

그 말 속에서 얼마나 마음고생이 심했는지를 알 수 있었다. 이진운은 그런 레이첸이 딱했지만, 별다른 말은 하지 않았다.

나름대로 자존심이 강한 녀석이었다. 괜한 위로는 오히려 녀석의 자존심을 상하게 할 것이다.

그래서 다른 방향으로 말을 돌렸다.

“레이첸. 앞으로 매일 이 시간이 되면 날 찾아와라.”

“이 시간에? 왜?”

“부동심결은 영력을 운용하는 경로와 흐름만 안다고 끝나는 게 아니다. 그에 관련된 구결과 그 의미를 깨달아야 제대로 된 입문이 가능하지. 지금 네가 배운 건 기초 중에 기초일 뿐이야. 제대로 익히고 싶다면 내게 가르침을 받는 게 좋을 걸?”

“역시··· 쉬운 게 없나.”

이진운의 그 말에 레이첸은 작게 투덜거렸다. 앞으로 그냥 꾸준히 갈고 닦기만 하면 될 줄 알았더니, 생각보다 익히는 방식이 복잡한 모양이었다.

한 차례 한숨을 내쉰 녀석은 곧 고개를 끄덕였다.

“알았어. 아저씨! 앞으로 매일 이 시간에 찾아올게.”

하지만 아직 이진운의 말은 끝나지 않았다.

“그리고 내가 특별히 너희 가문 사람들에게는 부동심결을 전수하는 것도 허락해주지. 물론 대가도 필요 없어.”

“정말이야?”

레이첸이 깜짝 놀라 외쳤다. 이런 비전은 제아무리 많은 돈을 준다 해도 절대 살 수 없었다. 그런데 그것을 대가도 받지 않겠다니!

“천 년 전부터 지금까지 사람들을 위해 인베이더와 싸우며 희생해온 온 바이우드 가문에 대한 경의를 표하는 뜻에서 내린 결정이다. 그 외에 다른 뜻은 없으니 대가에 대해선 염려하지 않아도 돼.”

“···아저씨.”

그 말에 일순 가슴이 울컥해졌다. 그동안 자신의 기문이 희생해온 것들이 헛되지 않다는 것을 새삼 절감하게 되어서였다.

하지만 그걸로 끝난 게 아니었다. 그 뒤에 이진운의 차가운 경고가 이어졌다.

“대신 외부인에게는 절대 알려주지 마라. 기껏 호의로 전수해준 비전이 외부에 함부로 나돌아 다니면 많이 불쾌할 것 같거든.”

그 순간, 레이첸은 목덜미를 스쳐 지나가는 듯한 섬뜩함을 느꼈다. 이건 그냥 하는 말이 아니었다.

정말로 바이우드 가문 사람이라 해도 그 약속을 어기기라도 하면 직접 목을 치겠다는 거나 다름없었다.

“내 경고를 가볍게 듣지 않는 게 좋을 거다. 너희 가문 사람 외에 다른 사람에게 전수할 경우, 전수받은 사람과 전수해준 사람 모두 내가 직접 처단할 테니까. 그건 너희 바이우드 가문 사람이라 해도 마찬가지야. 너도 느꼈겠지만 난 그랜드 급을 바로 코앞에 둔 상태고 가진 비전을 사용하면 지금 현재만으로도 그랜드 급 인물들과 얼마든지 대등하게 맞붙을만한 실력이 있지. 그러니 이 경고를 명심하는 게 좋을 거다. 내 말을 허튼 소리로 듣는다면 너희 가문이라 해도 큰 대가를 치러야 할 테니까.”

목소리는 나직했지만, 그 안에는 레이첸조차 등골이 오싹하게 할 만한 살기가 담겨져 있었다.

‘역시 보통 아저씨가 아니야.’

이진운은 무려 카룬다임을 상대로 싸워서 승리를 쟁취한 강자였다. 그게 비록 단말이라 해도, 그 성과가 빛 바래는 건 절대 아닌 만큼 바이우드 가문이라 해도 무시하기 어려울 것이다.

그는 마른침을 삼키며 고개를 끄덕였다.

“···비전이라 이거지? 알았어. 그 말, 반드시 지킬 게.”

애당초 이진운의 비전을 함부로 취급할 생각도 없었다. 이런 비전이 얼마나 귀한 지는 레이첸 본인이 더 잘 알았다.

절대 외부로 유출될 일은 없을 것이다.

“그렇다면 됐다. 그동안 많이 힘들었을 텐데 편히 쉬어.”

그렇게 말한 뒤 이진운은 방을 나섰다. 그가 나간 뒤에야 레이첸은 그제야 압박에서 벗어날 수 있었다.

“휴우··· 역시 보통 아저씨가 아니야.”

이 정도 기세를 받아본 경우는 바이우드 가문 내에서도 극히 드물었다. 굳이 헤아려본다면 자신의 아버지인 바이첸 바이우드와 몇몇 손꼽는 강자들 정도였다.

“분명 아버지보다는 약한 것 같은데··· 언뜻언뜻 드러나는 존재감은 왜 이렇게 압도적인 거지? 이럴 땐 아버지보다 더하잖아.”

도무지 이해가 가지 않는 현상이었다. 마이스터 급에 올라선 자신을 꼼짝 못하게 하는 압박감이라니.

역시 자신이 알지 못하는 비밀이 꽤 많아 보이는 이진운이었다. 그래도 그가 가진 비밀을 억지로 캐고 싶은 마음은 없었던 만큼 묻어두기로 했다.

‘아버지는 이런 사실을 아시고 계셨던 건가?’

그렇지 않고선 자신을 굳이 이진운에게 맡긴 이유를 달리 짐작하기 어려웠다.

“어쨌든 오늘 저 아저씨에게 너무나 큰 은혜를 입었어. 우리 가문이 갚기 어려운 은혜를 말이야. 어떻게든 두고두고 갚아야겠지.”

그렇게 중얼거리면서 레이첸은 눈을 감았다. 오늘따라 자신에게 매정해보였던 아버지의 모습이 더욱 선명하게 떠오르고 있었다.

* * *

레이첸에게 부동심결을 전수해준 뒤, 이진운은 따로 숙소로 돌아왔다. 그리고는 모듈밴더로 통신 회선을 열었다.

베네트가 예전에 알려준, 그와 직접 대화할 수 있는 핫라인이었다. 최근 관리국이나 연합의 기밀이 외부로 유출되는 것을 우려해 이런 비밀 회선을 따로 마련한 것이다.

연락을 취하자마자 베네트가 직접 연락을 받았다. 홀로그램 스크린 위로 떠오른 베네트의 얼굴에는 피곤함이 가득해 보였다.

[연락을 하다니 무슨 일인가, 이진운 사령관.]

“많이 피곤해 보이는군요.”

[아아, 벌써 7일 밤낮을 꼬박 새서 말이야. 잠을 못자니 몸이 말이 아니더군. 전쟁 때문에 정신이 없어.]

“그렇군요.”

그럴 만도 했다. 현재 라인트라에서는 인베이더와 연합의 병력이 격렬하게 맞붙고 있는 상황이었다.

특히 병력이나 오버러에 대한 절대적인 권한을 갖고 있는 베네트인 만큼, 그가 처리해야 할 업무는 그만큼 폭증했을 게 분명했다.

“전황은 어떻습니까?”

[별로 좋지 못하네. 조금 전에 젠다인 대장으로부터 올라온 보고를 받았지. 위상전환이라고? 아주 충격적이더군. 그런데 문제는 그 기술이 도이벤 행성을 공격한 놈들만 가지고 있는 게 아니라는 거였지.]

“설마 다른 인베이더 함대들도?”

[맞네. 상당수의 인베이더들이 그 기술을 들고 나왔지. 아주 골머리가 아파. 별다른 뾰족한 수도 없고.]

“그럼 지금 전황은?”

[열세네. 그렇다고 해서 압도적인 패배도 아니야. 그럭저럭 전선은 유지하고 있지만, 이런 식이라면 오래 버티기 힘들겠지.]

위상전환의 무서움은 이진운도 확실히 겪어봐서 알고 있었다. 이쪽의 공격은 전부 통하지 않는 절대적인 공간위상전환기술.

그건 전장에선 거의 사기나 다름없었다. 인드라의 그물조차 무시하고 들어왔던 그 영상을 떠올리면 지금도 말이 나오지 않을 정도다.

[그래도 너무 걱정 말게. 나름대로 대응책을 만들고 있으니까. 위상전환이 터무니없긴 해도, 절대적이진 않거든.]

“그렇습니까?”

[좀 커트라인이 높긴 해도, 사상기를 사용할 수 있는 강자라면 위상전환 자체를 무시하고 타격을 주는 게 가능하지. 그래서 사상기를 다룰 수 있는 그랜드 급이나 준 그랜드 급 강자들을 속속 라인트라로 배치하고 있는 상황이네.]

“사상기라······.”

이진운도 사상기가 무엇인지는 알고 있었다. 영능이 극치에 이른 자들만이 가능한, 자신의 삼상 안에 구체화 된 형상이나 현상을 현실로 끌어내는 기술이 바로 사상기였다.

그것은 무공으로 친다면 일종의 심검지도와도 어느 정도 일맥상통했다.

카룬다임과 싸운 이후 한층 더 발전한 지금이라면 이진운도 단순 기세지도가 아닌, 제대로 된 심검지도를 다룰 수 있을 터. 설령 위상전환이라 하더라도 이전처럼 리스티의 힘을 빌려야 타격을 줄 수 있는 상황이 되진 않을 것이다.

하지만 그건 지금에 와서 중요하지 않았다. 제아무리 연합이라 하더라도 위상전환 상태의 인베이더 함대의 물량을 감당할만한 그랜드 급의 실력자가 마구 널려 있진 않을 터.

위상전환에 대한 확실한 수단이 없는 이상 전황이 불리한 건 마찬가지였다.

그래서 잠시 곰곰이 생각해보던 이진운이 문득 입을 열었다.

“혹시 이 회선, 기밀 유지는 확실합니까?”

[뭔가 기밀을 유지해야 할 만큼 중요한 사안이라도 있나?]

그 말 속에서 뭔가를 느낀 베네트 국장. 깊게 가라앉은 눈으로 화면 너머를 응시하는 그에게 이진운이 냉정한 얼굴로 말했다.

“예, 잘만 하면 이 전쟁의 전국을 뒤엎을만한 패라고 할 수 있지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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