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검신의 검은 우주를 가르고-154화 (155/448)

7권-04화

‘이건!?’

복잡하면서도 장대하기 짝이 없는 오묘한 흐름이었다. 레이첸은 자신의 몸 안에 흐르는 이것이 바로 이진운이 가진 영력의 운용법 중 하나라는 걸 깨달았다.

그리고 지금 자신의 체내에 흐르는 이 방식이 기존의 운용법들과는 상궤를 달리하는 아주 독특한 것이라는 사실도 알 수 있었다.

‘이런 식의 운용법이 다 있다니··· 내 짐작이 맞다면 이건 절대 발현에 목적을 둔 운용법이 아니야.’

대부분의 영력 운용법은 특정 효과를 보다 더 효율적이고 강력하게 발현하는 데에 그 목적이 있었다. 그것은 마법이든, 정령술이든, 그리고 그 밖에 다양한 영능과 초상능력들도 크게 다르지 않았다.

하지만 지금 이 운용법은 그 목적부터가 전혀 달랐다. 이건 어떤 효과를 외부로 발현하거나, 어떤 힘을 강력하게 증폭하기 위해서가 아니라 무언가를 보호하기 위한 특성을 갖고 있다는 것을 어렴풋이 느낄 수 있었다.

하지만 그 보호의 특성이 무엇을 위한 것인지는 구체적으로 알기 어려웠다.

“부동심결이라는 것이다.”

그때 이진운이 불쑥 입을 열었다. 레이첸의 몸 안에 불어넣은 진기를 운용하고 있는 중이면서도 그는 평소와 다름없는 목소리로 그렇게 말하고 있었다.

“아주 오랜 옛적에 존재했던 각자가 기나긴 고련 끝에 얻은 정신적 깨달음을 고스란히 담아낸 운용법이라고 하지. 너도 느꼈겠지만, 여기엔 공격적인 수법 따윈 전혀 들어있지 않아. 단지 자신의 영혼과 자아를 보호하고, 굳건한 부동심을 갖출 수 있게 해 주는 게 이 운용법이 전부지.”

레이첸은 그 말에 조용히 고개를 끄덕였다. 영력이 체내를 돌고 있는 중이라 함부로 입을 열기 어려워서였다.

“너라면 그 운용법이 어떤 가치를 가졌는지 잘 알 수 있을 거다. 특히 카르테인이라는 존재로부터 힘을 빌려 쓰면서 정신과 영혼을 침식당하는 너와 네 가문의 사람이라면 더더욱 그렇겠지.”

그 말을 듣는 순간, 레이첸의 두 눈이 크게 떠졌다. 그게 사실이라면 이 부동심결이라는 운용법은 바이우드 가문에게 있어 세상 그 무엇과도 바꿀 수 없는 가치를 갖고 있었다.

“하지만 처음부터 너무 기대하진 마라. 네가 배운 이건 어디까지나 기초 수준이고, 좀 더 깊게 배워야 보다 확실한 효과가 나올 테니까.”

그렇게 말하면서 이진운은 레이첸의 등 뒤에서 손을 뗐다. 진기의 흐름을 몸에 각인시키는 것만으로도 부동심결의 기초적인 운용법을 숙지했기 때문이었다.

‘역시··· 예상했던 대로 빨리도 익히는군.’

이미 어려서부터 십 수 년 간 카르테인의 존재감에 의해 정신과 영혼이 짓눌린 채로 왔던 레이첸이였다. 그런 경험이 없던 아리엔들은 이진운이 직접 기세로 압박하는 과정이 필요했지만, 그에게는 그럴 필요가 없었던 것이다.

“···아저씨, 그럼 이걸 제대로 다 익히면 우리 가문의 이 업보를 벗어날 수 있다는 거지?”

운용법의 전수가 끝났음을 깨달은 레이첸이 뒤를 돌아보았다. 그리곤 이진운의 두 눈을 응시하면서 그렇게 물었다.

“내려오는 전설에 의하면 부동심결을 창안한 각자는 정신적 깨달음을 통해 초월자로 승화했다고 하지. 그 깨달음을 고스란히 담아낸 게 바로 이 운용법이고.”

“그거 정말이야?”

“아마도. 나도 이쪽 계통이 전문은 아니라서 부동심결의 성취는 고작 해봐야 절반 수준이지만, 지금까지 정신과 영혼에 작용하는 그 어떤 수법도 날 어쩌지 못했다. 그러니 제대로만 익힌다면 충분히 가능성이 있을 거라고 보는데.”

“······.”

레이첸의 얼굴 위로 만감이 교차했다.

자신의 안목이 잘못된 게 아니라면, 지금까지 본 이진운은 결코 허튼 소리를 할 사람이 아니었다.

그렇다면 이게 다 사실이라는 말인데··· 이걸 기뻐해야할지 슬퍼해야 할지 일순 아무 생각도 떠오르지 않았다.

잠시 뒤, 레이첸이 조금 잠긴 목소리로 탄식하고 말았다.

“정말이지 어처구니가 없네.”

“······.”

“아저씨 그거 알아? 지금까지 시조 이래로 우리 가문이 이 빌어먹을 후유증을 어떻게든 해결해 보려고 시도 안 해 본 게 없었어. 정신계 마법은 물론이고, 그와 관련된 계통의 능력이라면 전부 동원해봤지. 그런데 아무 성과도 없었어. 죄다 불가능하다는 말 뿐이더라고. 그래서 어느 순간부터는 완전히 포기하고 말았어. 내 대에 와서는 아예 극복한다는 생각조차 못했고. 이젠 다들 그러려니 한 거지. 그냥 이 힘을 얻게 된 업보인 셈 치고 살자고.”

레이첸의 넋두리처럼 이어지는 그 말을 이진운은 말없이 들어주었다. 이젠 녀석의 집안 사정도 어느 정도 알게 된 탓에 허탈해하는 그 심정이 조금은 납득이 갔기 때문이었다.

“그래서 우리 가문에는 가장 나이 많은 어른의 연세가 고작 60도 채 안 돼. 평범한 사람들의 평균 수명도 몸 관리만 잘 하면 200세는 너끈히 사는 시대인데, 고작 60이라니··· 단명도 보통 단명 아니잖아? 그나마 오래 산 분이 60세 정도지 대부분 50대 초중반이 고작이었어.”

60세가 최고령이라면 확실히 심각하긴 했다. 지구에서도 별다른 사고만 없다면 80세는 족히 사는 시대인데, 아르탈 행성 연합처럼 발달된 곳에서 사는 인간의 수명이 60세라면 엄청난 단명인 셈이다.

“그렇게 일찍 죽어나가는 분들을 보면서 커가는 우리는 무슨 생각을 했을까? 처음에는 두려웠고, 나중에는 억울했어. 이 따위 힘 때문에 왜 우리가 제 수명도 다 못 채우고 죽어가야 했는지, 시조님의 선택이 때론 원망스럽기도 했고.

하지만 결국 현실을 받아들이기로 마음먹었어. 아버지를 따라다니면서 봤거든. 인베이더에게 침공당해 죽어가는 사람들을.”

어느 날이었다. 실의에 빠져 있던 아들 레이첸을 바이첸은 말없이 어딘가로 데려갔다.

그렇게 반 강제적으로 끌려간 그곳은 전장이었다. 인베이더의 침공에 의해 폐기 직전까지 도달한 행성이었는데, 그곳에서 레이첸은 인베이더들에 의해 하루살이처럼 무더기로 죽어나가는 사람들의 광경을 사실 그대로 목도하게 되었다.

“우리 가문처럼 수명 문제가 아니더라도 일찍 죽어나가는 사람들은 너무도 많았어. 아무런 저항조차 하지 못하고 죽어가던 그 사람들은 무슨 생각을 했을까?”

그래서일까? 레이첸은 그때까지 했던 원망과 고민들이 다 부질없게 느껴졌다. 자신보다 어린 아이들조차 무참히 죽어나가는 모습에는 레이첸도 눈물을 흘리지 않을 수 없었다.

“그래서 더 이상 원망하지 않고 이 힘을 받아들였어. 시조의 선택이긴 했지만, 결국 이건 우리가문 모두에게 이어진 업이었으니까. 그리고 이 힘으로 우린 꽤 많은 사람들을 구할 수 있었지!”

그때부터 레이첸은 목적을 갖게 되었다. 저주 받은 힘일지언정, 이걸로 타인을 구할 수 있다면 얼마든지 사용해 주겠다고!

그때의 지옥 같은 광경은 더 이상 보고 싶지 않았다. 그래서 남들보다 더 노력했고, 수명이 주는 것을 마다하지 않고 필사적으로 가주가 되기 위해 활동해온 것이다.

“때론 남들 수명만큼도 못 산다는 사실에 조금 서글프기도 했지만, 이 힘으로 사람들을 구하고 인베이더 놈들을 엿 먹일 수 있다는 사실에 자부심을 갖고 지금까지 살아왔어.

그런데 그게 오늘 이런 식으로 결론이 날 줄이야. 아저씨 어떻게 생각해? 지긋지긋한 저주의 굴레를 절대, 영원히 벗어날 수 없을 거라고 단념해 왔는데··· 엉겁결에 알게 된 영력 운용법 하나로 이렇게 해결되다니. 그럼 우리 가문이 여태껏 수명을 바쳐가면서 소모해온 분들의 삶은 어떻게 되는 거지?”

이진운은 레이첸이 이토록 허탈해 하는 심정도 나름 납득이 되었다. 바이우드 가문이 지금까지 희생해온 것들이 있기에, 이렇게 부작용 문제가 간단하게 해결되었다는 사실에 대해 이런 감정을 품는 것도 이상한 일이 아니었다.

이진운은 그런 레이첸을 잠시 바라보다가 무겁게 말문을 던졌다.

“그러면 너는 지금까지 수명을 깎아가며 싸워 온 것을 후회하는 거냐?”

“후회?”

“그래, 네가 그 힘으로 사람들을 살린 일들을 후회하고 있냐는 거다.”

후회를 입에 담는 이진운의 모습에, 잠시 고민하던 레이첸은 곧 실소를 흘리며 답하고 말았다.

“그럴 리가···. 다시 그 때로 되돌아간다고 해도 나는 이 힘을 사용해 또 싸웠겠지. 내겐 힘이 있고, 그들을 보호할 수 있으니까. 그게 내 수명을 깎는 행위라 해도 변함없어. 그게 나와 우리 가문이 지금까지 살아오고 존재해온 목적이었으니까.”

“그럼 됐군.”

“됐다니? 아저씨, 무슨 말이야?”

레이첸의 두 눈이 일순 가늘어졌다. 이 문제를 그렇게 간단히 매듭짓는 이진운의 태도가 마음에 안 들어서였다.

하지만 이진운의 말은 아직 끝나지 않았다.

“레이첸, 네가 아직도 그런 마음을 갖고 있다면, 고작 이런 일로 허탈해하지도 말고 억울해하지도 마라. 너희 가문의 희생으로 근 천 년 간 죽었어야 할 수많은 사람들이 살 수 있었어. 그럴 때마다 너희 가문을 칭송했겠지. 그래서 연합의 5대 가문 중 하나가 된 것일 테고.”

“···그거야 그렇지.”

바이우드 가문이 지금과 같은 영향력을 갖게 된 것도 바로 그런 희생 덕분이었다. 그동안 앞장서서 싸우고, 수많은 사람들을 구했기에 지금의 위치에 올라설 수 있었던 것이다.

“너희 가문이 구가하고 있는 명성은 너희에게 구해진 셀 수 없이 많은 사람들로 인해 구축된 것이다. 너희 가문의 희생을 사람들이 여전히 잊지 않고 있다는 증거라 해야겠지.”

“······.”

레이첸도 그에 대해선 아무 말도 하지 못했다. 이진운이 말한 것처럼 5대 가문 중 현재 가장 명성이 높은 것은 바이우드 가문이었다.

언제나 앞장서서 싸워 왔기에, 그들에 대한 사람들의 신뢰와 믿음을 얻게 된 것이다. 다른 5대가문의 명성도 낮지는 않았지만, 바이우드 가문만큼 사람들에게 절대적인 신뢰를 받는 경우는 없었다.

“그러니 그간의 노력이 허망하다는 생각 따윈 버려라. 이 모든 건 다 너희 가문의 희생으로 얻어진 거니까. 그리고 오늘 배운 부동심결은 그동안 희생해온 대가를 받게 되었다고 생각하면 될 거다.”

솔직히 말하자면 이진운도 부동심결을 레이첸에게 전수할 땐 조금 망설여졌던 게 사실이었다.

부동심결은 상승의 정신무학. 함부로 타인에게 전수해줄만한 게 아니었다. 더군다나 그것이 점창도 아닌 타 문파의 무공인 이상 외부에 전수하는 것도 마뜩치 않았다.

하지만 녀석의 넋두리를 듣고 있자니, 역시 잘 선택한 일인 것 같았다.

“사실 그 운용법은 내 제자들 외에는 절대 전수하지 않으려고 했었다. 하지만 너와 네 가문이 희생한 것들을 알고 나니, 내가 잘 생각한 것 같아 다행이군.”

잠시 뒤, 레이첸이 조그맣게 입을 열었다.

“···고마워, 아저씨.”

평소의 그답지 않은 태도에 이진운이 조금 놀란 표정이 되었다.

“호오, 네가 그런 말도 할 줄 알았나.”

“고마운 일이 있을 땐 확실히 말하는 사람이야! 날 대체 어떻게 보는 거야?”

레이첸이 즉각 발끈해 나서자, 이진운이 피식 웃으며 말했다.

“말할 때마다 틱틱 대는 시건방진 꼬맹이?”

“아 진짜! 사람 뭘로 보는 거야!”

#


0