6권-23화
하지만 방법이 있다 해도 그것이 과연 눈앞의 카룬다임에게 얼마나 통할 지는 이진운도 장담하기 어려웠다.
머릿속으로 떠오른 몇 가지 수를 내심 고려하던 그때, 쪼개졌던 몸을 다시 멀쩡히 이어붙인 카룬다임이 그에게 찬사를 보내왔다.
[아무튼 네게는 진심으로 감탄했다. 얼치기로 익힌 무공으로는 도저히 상대가 안 되더군. 무공에서 말하는 일대종사라는 것이 바로 너 같은 자를 말하는 모양이지?]
“종사 운운하는 걸 보니 무공에 대해 안다는 말이 마냥 허튼 소리는 아닌 모양이군.”
이진운은 그저 쓰게 웃고 말았다. 설마 이런 낯설고 먼 곳에서 전혀 뜻하지 않은 상대의 입을 통해 일대종사란 익숙한 단어를 듣게 될 줄은 정말 몰랐다.
“진정한 일대종사는 이 정도가 아니야. 그에 비한다면 지금의 나는 사실 얼치기 수준도 못 되지. 적어도 단말에 불과한 당신 정도는 일검에 베어 없앨 수 있어야 종사란 말을 들을 수 있을 거다.”
[호오, 그 정도인가?]
호기심 섞인 투로 묻는 그 말에, 이진운은 고개를 끄덕거렸다.
“내가 한두 단계 더 위였다면 그럭저럭 비슷한 무위를 보여줬겠지만, 지금은 그럴 수 없다는 게 아쉬울 정도야.”
[그건 좀 안타깝군. 무공의 진수라는 게 어떤지 좀 더 제대로 견식해보고 싶었는데, 때가 아니었나. 그렇다면 더 이상 적당히 할 필요도 없겠군.]
이진운의 역량이 그 정도가 아니라면 더 이상 용무가 없다는 걸까?
그렇게 말을 내뱉는 카룬다임에게서 전에 없던 살기가 묻어나오기 시작했다. 방금 전의 싸움은 어디까지나 이진운의 역량을 확인하기 위한 탐색전이었을 뿐, 그 이상도 그 이하도 아니었던 것이다.
[오래간만에 흥미로운 만남이었지만, 이번 여흥은 이쯤 해두기로 하지. 너도 그렇겠지만, 내게도 입장이란 게 있으니 말이다.]
마치 이진운의 목숨을 자신의 주머니에 든 물건처럼 운운하는 태도에 이진운의 눈빛도 더욱 날카로워졌다.
“글쎄, 당신이 날 너무 쉽게 생각하는 것 같은데··· 길고 짧은 건 대봐야 하지 않을까?”
그렇게 말하면서 이진운은 다시금 검 끝을 겨누었다. 그 기세는 마치 잔잔한 물결처럼 고요했지만, 일단 공격이 시작되면 그것은 걷잡을 수 없는 풍랑처럼 상대를 사정없이 몰아칠 것이다.
그것을 눈치 챈 카룬다임이 비웃듯 말을 이어나간다.
[그래, 이 몸도 잘 알고 있다. 네가 전력을 다하지 않았다는 걸. 하지만···]
그가 거체를 일으켰다. 이제 완전히 회복된 육체는 완전무결 그 자체였다.
[···그게 과연 필멸자와 초월자 사이에 존재하는 간격을 얼마나 좁혀줄 수 있을까?]
쿠구구구!
무시무시한 기운이 끓어올랐다. 온 사방에 존재하는 기운들이 전부 카룬다임의 의지에 동조하는 듯한 느낌이었다.
압도적인 그 힘과 존재감 앞에 일행이 질린 듯 뒤로 물러섰다. 아직 절대지경조차 올라서지 못한 그들로서는 도저히 감당할 수 없는 기세였다.
아마 이진운이 일부러 기세의 일부를 차단해 주지 않았더라면 다리가 풀려 주저앉았을지도 모른다.
그들 중에서 그나마 이 기세를 버티며 싸울 수 있는 사람이 있다면··· 고작해야 레이첸 정도일 것이다.
‘이런 게 바로 초월자라 이건가?’
단지 기질을 바꾼 것만으로도 주변에 이만한 영향을 끼치다니! 고작 정신의 분체 주제에 너무도 강력하지 않은가.
그렇지만 승산이 없진 않았다. 놈이 본신이 아닌 만큼, 권능 같은 강력한 능력은 사역하지 못할 터.
단순히 치고 박고 싸울 따름이라면 지지 않을 자신이 있었다.
고오오오!
이진운의 진기가 폭발적으로 증대되었다. 지금까지 아껴두었던 만유합원신기와 역기충혈대법이 전개된 것이다.
여기에 회복력을 극대화해주는 태을단목신공이 육체의 과부하를 감당해 줌으로서 더 이상 부작용 없는 운용이 가능해졌다.
물론 그 대신 육체의 부담에 따른 고통은 지속적으로 느끼겠지만, 그 정도는 얼마든지 감수할 수 있었다.
이진운이 드러낸 기세에 카룬다임조차 조금 놀란 표정이 되었다.
[흐음. 상당하군. 이 정도였나? 숨겨둔 전력이.]
“글쎄, 이게 다일지, 아니면 더 있을지는 모르는 법이지.”
[후후··· 허세가 제법이군. 아무튼 다시 붙어보기로 하지.]
콰앙!
말이 끝나기 무섭게 카룬다임의 육체가 탄환처럼 쏘아져 왔다. 좀 전까지는 무공만 사용했다면, 이번에는 다양한 영능으로 속도를 가속화 하고 있었다.
그게 마법인지, 아니면 다른 초상능력이나 영능인지는 모르겠지만, 이진운은 그 점을 확연히 느꼈다.
하지만 제아무리 빠르다 해도 그의 감각을 피해갈 수 없었다. 이미 전투에 돌입한 시점부터 의식속도는 이미 극도로 가속화되기 시작했으니까.
쾅! 콰르르릉! 쿠오오!
카룬다임과 이진운이 맞붙는 전투는 단순히 전투라 하기 어려웠다. 이건 말 그대로 천재지변 그 자체였다.
검을 떨칠 때마다 공간을 수놓는 검강의 궤적들이 극대의 파괴를 재현했고, 그의 검이 가리킨 곳마다 검환이 쏘아지면서 공간을 이지러뜨렸다.
심지어 초월자라던 카룬다임조차 이진운의 공격을 받아내면서도 좀체 우세를 점하지 못할 정도였다.
물론 힘의 크기 자체만 본다면 이진운은 카룬다임에 비해 월등히 뒤떨어진다고 볼 수 있다. 하지만 힘의 효율적인 운용과 무공을 통한 정묘한 변화는 카룬다임을 훨씬 압도하고 있었다.
“세상에···!”
“스승님 실력이 이 정도였어?”
클레브와 아리엔은 새삼 놀라고 말았다. 매번 볼 때마다 느끼는 거지만, 이진운의 실력에는 한계가 없었다. 이 정도다 싶으면 어느새 그보다 훨씬 강해진 모습을 보여주고 있으니, 감히 실력을 짐작하기가 어려웠던 것이다.
지금 눈앞에서 보여주는 무위만 봐도 그랬다. 이 정도면 혹시 천외오천과 같은 그랜드 급과 버금가지 않을까 의심될 지경이었다.
그것은 레이첸도 마찬가지였다. 그의 눈동자 위로 경악감이 스쳐지나갔다.
‘역시, 저 아저씨 장난이 아니군. 천외오천도 아니면서 이만한 실력자가 또 있었다고?’
자신을 기세로 제압했을 때부터 상위의 강자라는 건 예상 했지만, 설마 이 정도일 줄은 몰랐다. 어쩌면 그는 이미 그랜드 급에 발을 걸친 수준일지도 몰랐다.
하지만 그의 드러난 실력을 보고도 레이첸의 얼굴은 펴질 줄 몰랐다. 단순히 드러난 전투의 상황은 이진운의 우세로 보였겠지만, 사실 그 내막을 들여다보면 그렇게 낙관적으로 바라볼 수 없었기 때문이었다.
‘이대로 가다간 결국 지고 말겠어. 우세한 것 같아도 저런 식이면 끝이 없으니까.’
이진운이 카룬다임을 상대로 우세한 것 같지만, 상대는 아무리 상처를 입어도 금세 회복되어버렸다. 게다가 아무리 많은 힘을 소진해도 계속 채워지는 건지, 끝을 모르고 강력한 공격을 연달아 퍼붓고 있었다.
이런 식으로 싸워나가다 보면 결국 이진운이 한계를 드러내게 될 것이다.
‘저 아저씨도 무슨 수단을 쓴 건지 제법 회복을 하고 있지만, 무한한 건 아니야. 점점 회복속도가 떨어지고 있어.’
레이첸의 판단은 정확했다.
이진운은 지금까지 만유합원신기와 태을단목신공으로 지금 상태를 계속 유지 중이었다. 만유합원신기로 외부의 기운을 끌어들여 진기를 회복하고, 태을단목신공의 회복력으로 신체를 유지해 왔지만, 그것도 결국 이진운의 정신력이 뒷받침 되어야 유지가 가능한 것들이다.
그의 심력이 소모될수록 결국 회복도 한계에 달할 터.
그때가 바로 이진운이 카룬다임에게 패하는 순간이 될 것이 뻔했다.
‘어쩔 수 없지. 내가 나설 수밖에···.’
레이첸은 이를 악물었다. 언젠가 이런 순간이 다가올 거라는 건 어려서부터 느끼고 있었다.
그건 바이우드 가문의 혈족에게 내려오는 피할 수 없는 숙명과 같은 것이었으니까.
다만 그 때가 이렇게 빨리 오게 될 줄은 미처 몰랐다.
‘그렇지만 이미 각오는 되어 있어. 조금 이르긴 하지만, 그렇다고 물러설 수도 없으니까.’
각오를 다진 그의 정신이 깊은 내면으로 침잠해 들어갔다. 그리고 그는 자신의 힘의 근원을 볼 수 있었다.
이것이 오래전 가문이 맺었던 계약의 형태였고, 그들 혈족에게 대대로 이어져 오고 있는··· 절대 떨쳐낼 수 없는 깊은 원(怨)에서 나오는 업(業)이었다.
지금까진 이것으로부터 흘러나오는 힘을 끌어내 사용했지만, 이번만큼은 달랐다. 직접 손을 뻗어 보다 큰 힘을 취할 생각이었다.
심연 깊은 곳에 자리한 그것을 조용히 응시하자, 그곳에 자리한 냉기와 열기를 담은 푸른 불길로부터 무언가가 느껴졌다.
그것은 어떤 시선이었다.
그곳으로부터 울림이 들려왔다. 그것은 레이첸의 영혼을 뒤흔들 만큼 압도적인 영언이었다.
[바이우드 가문의 자손아. 힘이 필요하더냐?]
너무도 거대한 존재감 앞에 두렵고 떨렸지만, 레이첸은 그 앞에서 의연하게 외쳤다.
[그래, 필요해! 당신과 계약을 맺었던 바이우드 가의 혈손인 나 레이첸의 이름으로 빙염의 힘을 원해!]
그러자 상대의 또 다른 영언이 울려왔다.
[하지만 이게 결국 너를 좀먹을 거란 건 잘 알고 있을 터. 너의 남은여생을 걸 만한 가치가 있다고 생각하느냐?]
그랬다. 이건 목숨을 거는 일이었다. 단순히 이 존재로부터 부여받은 빙염의 힘을 다루는 것만으로도 위험하기 짝이 없는데, 그 힘의 근원으로부터 한층 더 힘을 끌어올리겠다는 말은 남은 수명을 크게 단축하겠다는 말이나 다름없었다.
그 사실을 알면서도 레이첸은 결코 망설이지 않았다.
[가치? 그런 사소한 고민은 이미 오래 전에 끝내두었어. 오래 전부터 각오한 일에 뭘 더 주저하겠어?]
자신이 바이우드 가의 피를 이은 자라는 사실을 자각했던 때부터 이미 각오하고 있던 바였다.
이것은 가문의 오랜 사명이었고, 이 계약을 이어받은 혈족들 각자가 져야 할 지울 수 없는 업인 것이다.
지금으로부터 아주 까마득히 오래 전의 일이었다. 인베이더의 공격 앞에 모든 것을 잃은 사내가 있었다.
항상 같이 울고 웃었던 가까운 친인들도, 세상 그 무엇과 바꿀 수 없던 가족들도 그들의 공격 앞에 전부 죽어버렸다.
그런 비극을 겪고도 유일하게 살아남은 사내는 홀로 피눈물을 쏟으며 악의에 찬 결의를 다졌다.
“내 영혼을 걸고서라도, 아니 나 뿐만 아니라 내 후대의 모든 자손들의 영혼까지 걸고서라도 인베이더 네놈들을 반드시 없애고 말테다!”
그런 그의 울부짖음에 화답한 존재가 있었다. 사내는 그 존재와 계약을 맺었고, 그는 그 누구와도 비교할 수 없는 막강한 힘을 손에 넣었다.
그리고 그 힘으로 수많은 인베이더들을 쓰러뜨렸으며, 후에는 아르탈 행성 연합의 성립에도 큰 힘을 보탰다.
그 사내가 바로 바이우드 가의 시조였다.
그렇기에 바이우드 가의 혈족은 언제나 인베이더와의 싸움이 있는 곳이라면 앞장서서 싸웠다. 그것은 거의 본능에 각인된 거나 다름없는 오랜 증오였다.
그들의 시조가 남긴 증오는, 까마득한 후대로 이어지면서도 조금도 희석되지 않고 계속 이어져 왔던 것이다.
그리고 바로 지금, 그때의 오랜 증오가 다시 영혼을 불사르면서 더욱 거세게 타오르기 시작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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