6권-22화
“성공했군.”
아르페인은 깊게 숨을 내쉬었다. 홀로그램 스크린 위로 인피니티 킹덤 대신 인베이더 함대와 피 터지게 포격을 주고받고 있는 바이트 함대의 모습이 비치고 있었다.
솔직히 이 정도로 성공적일 줄은 몰랐다. 기껏해야 바이트 함대의 모함과 핵심 전력이 되는 전함들을 해킹해 조종할 생각이었는데, 설마 함대 전체를 장악하는 게 가능할 줄이야.
그는 카산드라의 성능에 새삼 감탄하면서 이 시스템을 구축해준 사람의 모습을 머릿속에 떠올렸다.
‘이름 높은 프론사이드 가문의 두 천재 중 한 명이라더니··· 역시 명불허전이었어.’
카산드라는 그냥 평범한 인공지능이 아니었다. 바로 리스티가 만들어낸 인공영혼이 바로 그 정체였던 것이다.
인공 영혼의 존재는 바로 그녀가 개발한 출력공유 시스템의 핵심이었고, 평소에는 카멜롯의 모든 것을 제어하는 주 제어 시스템으로서 기능을 다해왔다.
하지만 리스티는 이것을 아르페인의 능력에 맞게 재조정해 주었다. 전자전을 서포트 해 줄 수 있는 프로그램을 그녀에게 부탁했더니, 카산드라의 기능 중 일부를 불과 몇 시간 사이에 개량해준 것이다.
덕분에 그는 평소와 비교도 안 되는 전자전 능력을 선보일 수 있었다. 아니, 어쩌면 카산드라의 서포트를 받을 경우, 관리국 중앙의 시스템조차 해킹이 가능할지도 몰랐다.
“뭐 어쨌든··· 우리 사령관님이 무사히 나올 때까지는 잘 좀 버텨줬으면 좋겠는데.”
점점 피해가 급증하고 있는 바이트 함대의 모습을 지켜보면서 아르페인은 그렇게 중얼거렸다.
* * *
콰아앙!
카룬다임의 공격이 무시무시한 기세로 단지 주먹을 뻗었을 뿐인데도 대기를 관통하는 힘이 수평선 저 너머까지 미치고 있었다.
만약 눈앞에 바다나 산이 있었다면, 그마저도 가르거나 꿰뚫고 지나갔을 것이다.
“이 괴물 같은!?”
신좌 급 괴물이 선보인 막강한 힘 앞에 레이첸이 이를 악물었다. 그도 마이스터 급의 강자였지만, 그래도 신좌 급 괴물과 비교하자면 한없이 미약한 존재일 뿐이었다.
물론 지금 여기 있는 카룬다임은 일개 정신 단말에 불과했지만, 그래도 그 힘의 한계를 측량하기가 어려울 정도다.
그나마 불행 중 다행이라면, 힘의 크기는 압도적으로 커도 그것을 피하는 건 생각만큼 어렵지 않았다는 것이다.
그렇지만 위기감이 들었다. 이대로 놔둔다면 도저히 저 괴물을 감당할 수 없을 것 같다는··· 그런 직감이었다.
“하압!”
레이첸의 손이 앞을 가리켰다. 그러자 무시무시한 푸른 섬광이 수백 수천 가닥의 형태로 나타나더니 카룬다임이 존재하던 공간을 찢어발기는 것이 아닌가!
하지만 카룬다임은 그 공격을 보고서도 피하지 않았다. 오히려 한발 더 앞으로 나서더니, 어느 누구도 생각지도 않은 한 수를 보여주었다.
쿠웅!
올바른 형태의 진각과 회전! 그리고 그 힘을 허리를 거쳐 상체와 어깨 순으로 유도한 뒤 온전히 주먹에 실어냈다.
콰아앙!
단 한번의 주먹질에 공간이 진탕되면서 모든 것이 박살나 흩어졌다. 그것은 레이첸의 공격도 마찬가지였다.
그 광경을 지켜보던 이진운이 깊게 가라앉은 눈으로 작게 읊조렸다.
“···흠 잡을 것 하나 없는 제대로 된 정권이라니.”
솔직히 말해 조금 놀라운 심정이었다. 무려 신좌 급이나 되는 존재가 제대로 된 무예를 사용하다니.
심지어 놈이 보여준 한수는 진정한 정권이 어떤 것인지 정석을 보는 것 같았다. 아마 무예를 닦는 자들 중에서도 이 정도까지 단순한 정권 하나에 높은 이치를 담아낼 줄 아는 자는 극히 드물 것이다.
[그리 놀라울 일도 아니지. 필멸의 운명에서 벗어난 우리는 영겁의 세월을 살아간다. 그러니 무공이든 마법이든, 다 시간이 지나면 언젠가는 터득할 수 있는 지식에 지나지 않지. 전에 재미삼아 기초적인 것들을 익혀 놨었는데, 오늘 이렇게 쓰일 줄은 몰랐군.]
역시 신적 존재는 스케일부터가 차원이 달랐다. 필멸자들에게는 생의 전부를 걸어야 깊은 이치를 깨우칠 수 있는 영능학을, 그들은 지루할 때마다 재미 삼아 익힐 수 있는 여흥 정도로 취급하다니.
아리엔들은 초월자가 어떤 존재인지 새삼 실감할 수 있었다.
그때, 카룬다임의 시선이 레이첸을 향해 옮겨졌다.
[그건 그렇고 바이우드의 혈족이라··· 정말 오래간만에 보는구나. 카르테인의 계약자들, 인간을 증오하는 존재가 대체 무슨 생각으로 너희들과 계약을 맺었는지 모르겠구나.]
“······.”
레이첸은 그 말에 아무런 대꾸도 하지 않았다. 다만 더욱 굳어진 얼굴로 카룬다임을 노려볼 따름이었다.
[뭐, 상관은 없겠지. 네 녀석들과도 무려 1000년의 세월을 싸워 온 이상, 이제 와서 그 이유를 생각하는 것도 부질없는 짓일 터.]
그 순간, 여유로웠던 목소리에 살기가 맺혔다. 아니 정확히 말하자면 지금까지는 그저 대화를 했을 뿐, 이제야 비로소 일행을 제거할 마음을 먹은 것이다.
이진운이 일행에게 경고를 보냈다.
“이제 다들 조심해라! 온다!”
그 말이 끝나기 무섭게, 카룬다임이 쏘아진 화살처럼 함상을 박차며 공간을 가로질러왔다. 그런 거인의 몸으로 어떻게 이리 빨리 움직일 수 있는 것인지 믿어지지 않을 지경이었다.
다들 반응조차 할 수 없던 그때, 누군가가 그 앞을 가로막았다. 바로 이진운이었다. 그는 카룬다임이 움직이기 전부터 그 미세한 동작을 읽고는 다음 행동을 예측했던 것이다.
콰아앙!
그의 검이 허공에 원을 그린 순간, 카룬다임의 권압이 뒤틀리면서 저 상공으로 치솟아 날아갔다. 유능제강 이화접목의 정점이라는 태극검의 이치를 사용한 수법이었다.
그렇지만 그건 시작에 불과했다. 이번에는 카룬다임으로부터 무거운 권격이 날아들었다. 공간을 관통할만한 힘이 길게 뻗진 않았지만, 그 안에 위력은 그 이상이었다.
이진운의 두 눈이 가늘어졌다.
‘방어 째로 날 박살내겠다는 건가?’
카룬다임도 잘 알고 있었다. 유능제강의 무리가 강함을 제압하긴 하지만, 강함이 극에 이르면 오히려 부드러움을 끊어낸다는 사실을!
그래서 이번에는 중권(重拳)을 사용해 온 것이다.
‘네놈이 무겁고 강함으로 날 상대하겠다면, 나는 인식할 수 없는 빠름으로 상대해주지!’
대응을 결정한 순간, 그의 검 끝이 카룬다임을 향해 수평으로 겨누어졌다. 그것은 정확히 말하자면 검식이 아니었다. 검으로 펼치는 일종의 창식이었다.
검첨의 끝이 일순 섬광이 되어 내달리는 순간, 전면의 공간이 눈부신 궤적으로 가득 찼다.
관일창(貫日槍) 제 1식. 일광탄하섬(日光彈遐閃)
연식 맹렬광화섬(猛烈狂化閃)
광속에 버금가는 창격의 연속 출수! 그것은 눈으로 시인하는 것조차 어려운 공세였다. 심지어 레이첸 조차 이진운의 창격이 어떤 속도로 날아가는 건지 미처 보지 못했을 정도다.
게다가 이진운의 창격은 단지 빠름만이 전부가 아니었다. 아주 교묘한 변화까지 숨겨져 있었다.
검 끝에 치솟은 강기의 길이가 창격을 뻗을 때마다 달랐다. 강기의 길이를 매번 다르게 제어함으로서 상대가 간격과 변화를 읽기 힘들도록 만든 것이다.
[음!?]
카룬다임조차 이 놀라운 한 수 앞에 놀란 얼굴이 되었다. 그가 내뻗은 중권이 선두에 있던 창격 수십 번을 튕겨내긴 했지만, 그 뒤에 계속 이어지는 창격에는 미처 대응할 수가 없었다.
그 결과 전신이 창격에 사정없이 꿰뚫렸다. 강건하기 그지없는 거인의 몸이었지만, 그래도 이진운의 의념까지 더해진 의형검강의 힘을 버틸 정도는 아니었다.
[후읍!]
콰앙!
몸으로 창격을 받아내던 카룬다임이 크게 도약해 뒤로 물러섰다. 선기를 빼앗긴 상황에서 더 이상 버티고 있어봐야 맞추기 좋은 과녁 밖에는 되지 않는다는 사실을 알았기 때문이었다.
그렇지만 이진운은 이대로 놈에게 여유를 줄 생각이 없었다. 일단 한번 몰아친 이상 확실히 끝낼 생각이었던 것이다.
무수한 창격을 퍼붓던 그의 검 끝이 일순 기이한 형태로 궤적을 그리기 시작했다. 그것은 어떤 형상을 만들어내더니 온통 그것으로 가득 채워버렸다.
관일창(貫日槍) 제 3식. 관일섬뢰영(貫日閃雷影)
비의. 잔화만극(殘華滿戟)
그의 검이 그려내는 궤적을 따라 피어나는 기화(氣華)들이 카룬다임의 주변 공간을 둘러쌌다. 그것은 공간 자체를 꿰뚫고 난자하는 무자비한 기화로서, 창끝이 움직일 때마다 피어오르면서 목표물을 끝까지 뒤쫓는 비의였다.
일종의 어검에 가까운 수법 앞에, 카룬다임도 더 이상 피하지 못했다. 물러서봐야 방법이 없다는 것을 깨달은 놈이 드디어 정면대응에 나섰다.
[제법··· 성가시구나!]
놈의 손 위에 기이한 파동이 일어났다. 그것은 온 사방으로 퍼지면서 공간을 진탕시켰다.
그것은 믿기 어려울 만큼 강력한 공간진동이었다. 그 파장이 퍼져나갈 때마다 이진운의 기화가 이지러지면서 소멸하였다.
하지만 상대의 수법을 보고도 이진운은 당황하지 않았다. 공간을 다루는 수법은 이미 여러 차례 봐 왔었으니까.
그리고 그와 비슷한 수법은 그에게도 얼마든지 있었다.
어느새 일보섬영으로 지척으로 다가선 그가 검을 휘둘렀다. 마치 봉황이 울부짖는 듯한 검명과 함께, 무시무시한 진폭이 공간을 진동시켰다.
기봉검(起鳳劍)
단봉화명(担鳳和鳴)
기이이잉!
공간진동과 공간진동이 서로 맞부딪쳤다. 그리고 그 결과, 이진운의 검 끝이 조금씩 카룬다임의 방어를 허물며 파고들고 있었다.
[허? 이런!]
카룬다임이 깜짝 놀라 반응했지만, 이미 이진운의 검은 그보다 더 빨랐다. 그의 검 한자루에서 시작된 변화가 남은 공간진동마저 찢어발기는 눈부신 궤적을 그려내더니, 그 궤적들은 곧 서로 하나로 융합되면서 한 줄기의 막강한 궤적을 그려내고 있었다.
분광십팔수검
북광진암(北光鎭暗)
무수한 산검에서 시작해서 그 검격들의 힘을 종국에는 하나로 융합해 완성되는 비기!
어둠마저 찢어발기고 나아가는 극쾌의 검격 앞에 카룬다임의 거체가 그대로 노출되었다.
촤아악!
카룬다임의 거체가 양단되었다. 머리부터 시작해서 고간에 이르기까지 수직으로 잘려나간 것이다.
그 광경을 목도한 클레브가 중얼거렸다.
“이걸로 끝났나?”
“아니, 아직 아니야. 놈은 죽지 않았어.”
레이첸이 더욱 긴장한 표정으로 그렇게 외쳤다. 그의 감각에는 아직도 줄지 않은 카룬다임의 힘이 느껴지고 있었기 때문이었다.
아니나 다를까? 몸이 쪼개지고서도 입을 여는 카룬다임의 모습이 보였다.
[아아, 역시 적당히 시간 때우기로 익힌 걸로는 당해내질 못하는군. 이게 무공의 진수라는 건가?]
검을 거둔 채 물러난 이진운이 상대를 노려보며 물었다.
“··· 이 정도로는 안 죽는 건가?”
[뭐, 그렇지. 내 본체는 아주 먼 곳에 있으니까. 아, 내 단말을 끝장내고 싶다면 그럴 능력이 있어야 할 거다. 본질을 꿰뚫을 만한 혜안이 있다면 가능할 테지만, 너는 과연 어떨지 모르겠군.]
“본질이라. 그냥 죽이면 되는 게 아니었군.”
이진운은 조용히 상대를 응시했다. 그냥 죽이는 게 아니라 상대의 본질을 없애야 쓰러뜨릴 수 있다면, 방법은 하나뿐이었다.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