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검신의 검은 우주를 가르고-145화 (146/448)

6권-20화

경지는 아직 전생에 크게 못 미칠지라도, 이진운이 이룬 영혼의 격은 여전히 유지되고 있었다. 그런데 그의 영적 감각은 눈앞의 거인이 초월자란 사실을 전혀 인지하지 못했다.

“초월자라고? 믿을 수가 없군. 당신에게선 그만한 격이 안 느껴지는데.”

[아아, 지금 이건 그냥 껍데기지. 내가 잠시 정신만 외유할 때마다 사용하는 일회용 육체에 불과해. 내 본체는 이곳에서 아주 먼 수십만 광년 떨어진 곳에 있으니 네 녀석들이 못 느낄 수밖에.]

‘···거짓은 아니군.’

충분히 가능한 이야기였다. 그렇다면 지금 눈앞의 거인에게서 초월자에 걸맞는 신격이 왜 느껴지지 않는 것인지, 그 이유도 납득이 간다.

하지만 아직 상대의 정체조차 알지 못했다. 이진운은 눈앞의 거인을 조용히 노려보며 물었다.

“그렇다면 당신은 누구지?”

그러자 거인이 곧바로 화답하였다.

[나는 무생의 좌, 카룬다임. 아무것도 없던 무에서 홀로 태어나 오롯이 완성된 신위에 도달한 자다.]

그러자 그의 뒤에 서 있던 일행에게서 숨을 삼키는 소리가 귓전으로 들려왔다. 너무 놀란 나머지 다들 당황한 기색을 숨기지 못하고 있었다.

“카룬다임이라니··· 그런 터무니없는 거물이 어째서 이런 곳에······.”

평소 꽤 당돌한 태도로 일관하던 레이첸조차 이 순간만큼은 안색이 변한 채 제대로 말을 잇지 못했다.

그만큼 거인의 정체는 놀라웠다. 인베이더와 천년 이상 싸워 온 연합의 사람이라면 그 이름을 모를 리 없었다.

인베이더의 근원이라 할 수 있는 9대 신좌 중 하나인 무생의 좌 카룬다임이 직접 나섰을 줄이야.

비록 이곳에 있는 것은 그 자의 정신뿐이라고는 하지만, 이 상황 자체가 위급사태인 것만은 변함이 없었다.

그래도 이진운은 침착함을 유지했다. 한때 극고한 경지에 도달했던 그의 정신과 영혼은 그 정도로 흔들리기에는 너무도 굳건했으니까.

“그래, 당신이 카룬다임이란 건 분명한 것 같군.”

[호오, 재밌는 말을 하는군. 어떻게 확신하는 거지? 내가 거짓말을 한 것일 수도 있을 텐데.]

확신하는 어조로 말하는 이진운의 모습에 흥미를 보이는 카룬다임. 이진운은 그를 똑똑히 응시하며 당연하다는 듯 말했다.

“신성이나 존재감은 감춰도, 말 속에서 드러나는 무게와 위압감은 감출 수 없는 법이니까.”

그것은 한 제국을 다스리는 황제가 제아무리 무지렁이와 같은 행색을 하더라도 그 존재감을 다 감출 수 없는 것과 마찬가지였다.

눈앞에 있는 카룬다임 또한 그러했다. 그가 가진 정신 중 극히 일부에 지나지 않는 단말이라 할지라도, 엄연히 초월에 다다른 존재.

그가 내뱉는 한 마디마다 말로 형언할 수 없는 기이한 무게감이 느껴졌다.

이진운은 그것을 언급했다.

“게다가 나는 한번 경험해 본 적이 있다. 초월의 격이 어떤 건지도 어렴풋이 느껴 보았었지.”

초월자는 한낱 필멸자와는 차원이 다르다. 그들은 인과를 읽고 조작하며, 하는 말과 행동은 저 하늘의 섭리와 닿는 영향력을 발휘할 수 있었다.

그런 자들이 내뱉는 말들이 어찌 평범할 수가 있을까.

그래서일까? 이진운의 그 말을 들은 카룬다임의 눈이 일순 기이하게 빛났다.

[그렇군. 네 녀석은 한번 그 경계를 엿봤던 것이로구나. 헌데 현재 경지는 그 정도에 머물러 있다니··· 기이한 일이로군.]

“역시··· 알아보았나?”

이진운은 무겁게 중얼거렸다. 어느 정도 예상했던 일이었다. 초월자 정도 되는 자가, 겉으로 드러난 육체의 성능 따위에 현혹될 리 없는 것이다.

그들이 보는 것은 대상의 내면, 아니 정확히 말하자면 그 영혼을 직시한다고 보면 옳았다.

하지만 모든 것을 볼 수는 없었던 모양인지, 카룬다임이 성가시다는 듯 툴툴거렸다.

[그놈의 오로라 시스템의 프로텍트 때문에 더 자세한 건 알 수 없지만, 그래도 네가 평범하지 않다는 건 알겠다. 역시··· 그동안 우리의 계획을 방해할 수 있었던 것엔 다 그만한 이유가 있었던 모양이군.]

그나마 불행 중 다행이었다. 놈은 모든 것을 내다보는 것 같아도, 나름대로 제약이 있어 보였다. 시스템이란 것에 그런 효과까지 있었는지는 이진운도 미처 몰랐다.

“그런데 내가 당신들 계획을 방해했다니. 세계수 때부터 역시 뭔가 꾸미고 있긴 한 모양이지?”

[그것까지 내가 말해 줄 순 없지. 하지만 여러모로 너에 대한 이야기가 올라오더군. 그래서 이 껍데기에 깃들게 된 거다. 네놈이 어떤 녀석인지 한번 내 눈으로 직접 보기 위해서.]

“이런, 나 하나 때문에 무려 신좌 급 존재가 이렇게 직접 납실 줄이야. 영광이라고 해야 하나.”

이진운이 빈정거리듯 말했지만, 카룬다임은 그것을 능청스럽게 받아쳤다.

[글쎄, 내 입으로 영광이라고 말하긴 어렵군. 내 손으로 죽여야 하는 녀석을 앞에 두고 영광을 운운할 만큼 뻔뻔하진 못해서 말이다.]

“역시 날 죽이는 게 목적이라 이거군.”

[너는 우리에게 꽤 성가신 훼방꾼이다. 헌데 마침 지금같이 좋은 기회를 만났는데 절대 놓칠 수는 없지.]

“뭐, 결국 이렇게 되는군.”

이진운은 검을 고쳐 쥐며 가볍게 한숨을 내쉬었다.

애당초 카룬다임이 나타날 때부터 예상했던 결과였다. 자신이 그 입장이라도 그렇게 행동했을 것이다.

“치잇, 하필 라인트라에서의 초전이 이런 거물과의 싸움이라니··· 재수도 없지.”

레이첸은 현재의 상황에 대해 작게 투덜거리면서 전의를 다졌다. 아니 정확히 말하자면, 두려움을 느끼면서도 어떻게든 싸우겠다고 오기를 부리는 듯한 모습이었다.

그것은 아리엔들도 마찬가지. 부동심결 덕분에 어느 정도 마음의 동요는 가라앉힐 수 있었겠지만, 그래도 큰 부담감을 안게 되는 건 어쩔 수가 없었다.

그래서 이진운은 그들에게 전음을 보냈다.

[너무 필요 이상으로 두려워 할 것 없다. 녀석은 본신으로 이곳에 온 게 아니야. 화신이나 분신도 아니고, 아주 작은 정신적 단말이나 다름없지. 이 정도라면 발휘할 수 있는 힘은 극히 제한될 테니 너무 두려워할 필요는 없다.]

이진운이 보낸 전음에 그들이 잠시 흠칫 했지만, 이내 고개를 끄덕거렸다. 두려움이 한결 가신 표정을 보니 효과가 어느 정도는 있었던 모양이었다.

‘싸우기도 전에 굳어져 있으면 곤란하지. 이제야 싸워 볼 수 있겠군.’

하지만 이진운이 일행의 두려움을 진정시키기 위해 그냥 허튼 소리를 한 것도 아니었다.

카룬다임의 존재감은 그만큼 옅었다. 지금은 더 이상 숨길 생각조차 없는지, 그가 가진 힘의 크기와 존재감이 그대로 느껴졌다.

‘이 정도면 이기지 못할 상대도 아니지.’

이진운은 자신의 검을 굳게 움켜쥐었다. 전생의 힘을 되찾지 못했더라도, 지금이라면 가진 모든 것을 동원할 경우 어느 정도 싸워 볼만했다.

그들이 일으킨 전의에 자극이라도 받은 건지, 카룬다임이 차갑게 웃으며 거대한 몸을 일으켰다.

[그럼 시작해보지. 네놈들의 목적도 위상전환을 발생시키는 이 함을 파괴하는 것이겠지? 그럼 부딪쳐야 한다는 건 변함이 없지. 자, 오너라! 내가 너희를 죽음으로 인도하마.]

* * *

인피니티 킹덤과 교대한 바이트 함대는 생각보다 훌륭히 미끼 역할을 해주고 있었다. 오콜로스의 성격 상 금방 뒤꽁무니를 뺄 줄 알았는데, 생각보다 오래 버텨주었다.

이제 슬슬 교대할 때가 되었다. 정해진 시간이 되자마자 아르페인은 명령을 내렸다.

“자, 그럼 이번에는 이쪽이 나선다. 인베이더 놈들의 시선을 우리 쪽으로 붙잡아둬라.”

[예, 함대 고속 전진과 함께 포문 개방! 포화를 쏟아 붓겠습니다.]

콰콰콰콰!

인피니티 킹덤에서 쏟아진 화력이 인베이더 함대 위로 쏟아졌다. 그러자 한참 바이트 함대를 상대로 포격을 주고받던 인베이더의 함대가 다시 인피니티 킹덤을 향해 기수를 돌렸다.

기세가 꺾여 도망가는 행색을 보이는 바이트 함대보다는, 다시 적극적으로 공세를 퍼붓는 인피니티 킹덤 쪽이 더 신경 쓰인 모양이었다.

교전 상황을 홀로그램 스크린을 통해 주시하던 아르페인은 시선을 돌려서 인베이더 함대 중심에 존재하는 거대한 함을 응시했다. 그것이 바로 위상전환 현상을 일으키고 있는 코어 쉽이었다.

그가 걱정스럽다는 듯 중얼거렸다.

“사령관님이 위상전환 공간으로 진입하신 지 10분이 다 되어 가는데··· 아무쪼록 무사하셨으면 좋겠군.”

하지만 아직까지 아무 소식이 없었다. 언뜻 비치는 광경을 보니 그 안에서 교전이 벌어지고 있는 것 같은데, 위상공간 내부라 그런지 제대로 관측이 되질 않고 있었다.

“그래도 지금까지 전투가 벌어지고 있다는 건··· 아직까진 무사하시다는 거겠지.”

그렇다면 자신이 할 수 있는 일에 최선을 다하는 수밖에 없었다. 이진운과 일행이 무사히 돌아오길 빌면서, 인베이더 함대의 시선을 이쪽으로 최대한 끌어내는 수밖에.

그렇게 해서 대충 10여 분의 시간이 흘렀다. 이제 슬슬 뒤로 물러나고 다시 바이트 함대 쪽으로 바톤을 넘길 차례였다.

하지만 그때 이변이 벌어졌다.

오퍼레이터가 당황한 목소리로 외쳤다.

[바이트 함대 연락 두절! 아니, 그쪽에서 일방적으로 통신을 차단했습니다.]

그뿐만이 아니었다. 본래 미끼 역할을 교대할 차례였던 바이트 함대는 더 이상 앞으로 나설 생각을 하지 않았다. 오히려 뒤로 계속해서 물러나고 있었다;.

아르페인은 상황을 확인하자마자 심드렁하니 중얼거렸다.

“뭐, 이제야 본색을 드러냈나?”

이미 예상하고 있던 바였다. 비겁자 오콜로스라면 충분히 이러고도 남을 거라 판단했으니까.

지금까지 그가 생존확률이 낮은 전장에서 살아 돌아올 수 있었던 데엔 다 이러한 이유가 있었던 것이다.

하지만 전장을 무단으로 이탈한 작자가 지금까지 함대의 사령관 직을 유지할 수 있었던 건지에 대해서는 아직도 의문이었다.

‘저런 작자를 비호하는 자가 상부에 존재하고 있다는 거겠지.’

누군지는 모르겠지만, 지금은 그게 중요한 때가 아니었다. 교대해야 할 바이트 함대가 미끼 역할을 떠넘기고 그대로 도망가고 있으니, 이에 대한 대응책을 내놔야 했다.

“예측하고 미리 준비한다면, 제아무리 변수가 있다 해도 어려울 건 없지.”

그는 명령을 하는 대신, 자신의 앞에 놓인 홀로그램 창을 조작했다. 그러자 홀로그램 창 위로 낯선 무언가가 떠올랐다.

이건 본래 카멜롯에 존재하지 않던, 새로운 시스템이었다. 시스템이 먼저 인증을 요구해왔다.

[카산드라 시스템 작동! 등록된 사용자가 맞는지 인증하세요.]

그 말에 따라 자신 앞에 떠오른 홀로그램 화면 앞에 손바닥을 대자, 그 즉시 인증이 되었다. 그가 가진 고유의 영자 패턴을 확인한 것이다.

[확인되었습니다. 아르페인 님 반갑습니다.]

“그래, 카산드라. 이제부터 네 능력을 발휘할 때가 왔구나.”

[예, 본 함의 데이터를 통해 상황을 확인했습니다. 저 비겁자를 처단하는 일이겠죠?]

마치 사람인 것처럼 감정적인 목소리로 말을 건네 오는 카산드라. 아르페인은 고개를 끄덕이며 말했다.

“그래, 우릴 놔두고 꽁무니 빼려는 저놈들을 응징해야겠지. 그리고 눈앞의 인베이더 함대 문제도 같이 처리하고.”

[알겠습니다. 본 시스템은 지금부터 아르페인 님을 적극 서포트 하겠습니다.]

“그럼 시작하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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