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검신의 검은 우주를 가르고-141화 (142/448)

6권-16화

휘리릭!

그 무엇보다 꼿꼿해 보이던 검기가 돌연 꺾이듯 휘어지면서 파동의 힘이 미치는 영역을 종잇장 하나의 차이로 살짝 비껴 지나간다. 믿기지 않을 만큼 유연하면서 기이한 그 움직임에는 레이첸조차 일순 놀랄 정도였다.

허나 검기의 변화는 이것으로 그치지 않았다. 기이한 형태로 휘어지면서 방어의 작은 틈새로 파고들어온 그것을 막으려 한 순간, 한 가닥의 검기가 돌연 수십 개로 분열되었다.

레이첸의 두 눈이 크게 뜨였다.

‘착시? 아니야! 단순한 착시가 아니야, 이건!’

섬전분광(閃電分光)!

분광십팔수검의 절초 가운데 하나였다. 하지만 이건 기존의 섬전분광과 사뭇 달랐다. 섬전분광이 극쾌의 묘리에 환검의 이치를 담아낸 수법이라면, 이것은 시야를 뒤덮는 모든 것이 다 실체였던 것이다.

그때부터 레이첸의 두 손이 바쁘게 움직이기 시작했다. 수십 수백 개로 분열된 아리엔의 검기가 마치 하늘에서 쏟아지는 폭우와 같았다면, 레이첸의 방어는 철벽이었다. 그의 손이 움직일 때마다, 거센 파동이 일어나 넓은 면적의 공간을 짓눌러 압도하였다.

제아무리 수백 가닥의 검기라 하더라도, 일단 힘에서 밀리면 의미가 없었던 것이다.

하지만 아리엔이라 해서 결과가 이렇게 될 거라는 사실을 예상 못했던 건 아니었다. 아니, 오히려 그녀가 바랐던 상황이기도 했다.

더욱 가열차게 퍼부어지는 검기의 폭우, 그것이 계속될수록 방어하는 레이첸의 동작에도 조금씩 허점이 드러나고 있었다.

일순간적으로 드러나는 바늘귀보다도 더 작은 틈새!

그것은 사실 허점이라고 할 수도 없는, 공방 중에 자연스럽게 생겼다가 사라지는 너무도 작은 틈새였지만 아리엔은 그것을 노리고 있었던 것이다.

공격을 퍼부으면서도 레이첸의 대응을 뚫어질 듯 주시하던 그녀는 곧 그 순간을 목도할 수 있었다.

‘지금이야!’

허점을 발견한 즉시 체내의 진기가 폭발적인 기세로 회전하기 시작했다.

그것은 곧 검 끝으로 이어졌고, 폭우처럼 몰아치던 검기의 흐름에도 급작스런 변화가 생겼다. 무수한 폭우와 같은 검기 속에서 유독 한 가닥의 검기가 일직선으로 길고 빠르게 뻗어나간 것이다.

분광추혼(分光追魂)

무수한 검광 속에서 숨어 있는 한 가닥 검기가 상대의 미간을 기척도 없이 파고든다는 분광십팔수검의 절초 중 하나였다.

그것은 일순간 드러난 방어의 허점을 파고들어가, 레이첸의 미간을 정확히 노렸다.

‘윽!’

레이첸도 뒤늦게야 그것을 발견하고는 당황한 표정을 지었다. 설마 이런 식으로 자신을 몰아붙여서 방어에 빈틈이 드러나도록 유도하다니!

게다가 그의 공방 중에 빈틈이 생긴 것은 불과 0.0001초도 못되는 아주 찰나의 순간이었다. 그 순간의 빈틈을 정확히 파고들 수 있다니!

이건 단순한 실력의 고하를 넘어서, 아리엔이 가진 영능의 운용력과 임기응변이 어느 지경에 이르렀는지를 엿볼 수 있는 부분이었다.

그렇지만 레이첸도 그렇게 쉽게 당하진 않았다. 그의 전신에 어린 푸른 기운이 더욱 격렬하게 타오르는 순간, 그 주변에 존재하는 흐름이 변화하기 시작한 것이다.

‘역류인(逆流引)!’

그가 다루는 것은 그냥 평범한 열과 냉기가 아니었다. 서로 상극이라 할 수 있는 모든 성질과 속성의 대치점을 다루는 것이 바로 그가 가진 힘의 정체였던 것이다.

그 중에서도 가장 흔하면서도 잘 사용되는 것이 열과 냉기였을 뿐, 그는 모든 플러스와 바이너스, 그리고 개념적인 상반된 형태의 대치점을 다룰 수 있었다.

키이잉!

그의 미간까지 파고들어올 뻔 했던 검기의 벼락같던 움직임이 바로 지척에 이른 순간부터 급격히 둔화되기 시작했다. 주변에 작용하는 흐름이 역으로 작용하면서, 검기를 뻗어내던 힘의 흐름까지 뒤틀어졌기 때문이었다.

레이첸이 손을 휘두르자, 그와 함께 튕겨진 검기는 엉뚱한 바닥을 관통하고는 소실되고 말았다.

본래 그가 평소에 다루는 역류인이었다면 검기를 다시 아리엔에게 되돌려 줘야 했겠지만, 너무 창졸지간에 펼친 터라 이렇게 튕겨내는 것이 전부였던 것이다.

‘아주 순간이긴 했지만 섬뜩했어. 아주 창졸지간에 드러난 빈틈을 그렇게 파고들다니······.’

사실 아리엔의 검기에 실린 영력의 양은 그리 대단한 편은 아니었다. 하지만 그것을 어떻게 어떤 방식으로 가공했는지, 그 날카로움이 예상을 훨씬 넘어섰다.

자신이라 해도 그걸 무방비한 상태로 맞는다면 목숨이 위험할지도 몰랐다.

“아, 그걸 막아내다니···. 내 비장의 한수였는데.”

검기가 튕겨나가는 모습을 본 아리엔이 안타깝다는 듯 외쳤다.

기존과 다른 방식으로 사용된 섬전분광과 레이첸의 허를 찌르는 분광추혼은 얼마 전 환상 속에서 상대했던 기소천의 절학 천무비도의 수법을 조금 응용한 것이었다.

그는 사검을 자유자재로 다룰뿐만 아니라, 강기를 채찍처럼 길게 뽑아낸 뒤 방금 아리엔이 선보인 검기처럼 영활하고 기민하게 다루기도 했다.

그때 보고 경험한 것을 검기에 적용하지 않았었다면, 지금처럼 레이천의 허를 찔러보지도 못했을 것이다.

“······.”

레이첸은 잠시 말없이 아리엔을 바라보았다. 성공할 줄 알았던 공격이 실패했다는 사실에 살짝 풀이 죽은 기색이었다.

하지만 그 공격을 막아낸 레이첸의 얼굴도 그리 좋아 보이진 않았다. 그가 문득 질문을 던졌다.

“방금 네가 사용한 검술이 무공이라고 했었지?”

“그래. 스승님에게 배운 무예들을 통틀어서 무공이라고 불러.”

무공. 전에도 몇 번 들었던 말이었다.

이미 웰라우드 가를 통해 무공이란 형태의 영능이 널리 전파되고 있었다는 소식은 바이우드 가에도 전해졌으니까.

그때는 그냥 무심코 듣고 넘겼지만, 지금은 그럴 수가 없었다. 무공이란 영능의 가능성을 자신이 직접 체험했기 때문이었다.

“지금까지 전례에 없던, 새로운 타입의 영능학이라는 건가.”

물론 웰라우드 가문의 비전도 무예이긴 했지만, 이건 그런 개념을 훌쩍 넘어섰다. 그것을 더욱 다양하고 깊게 심화시킨 새로운 형태의 카테고리라고 해야 옳을 것이다.

아리엔은 사실 그와 비교한다면 무려 몇 단계나 아래에 위치하는 오버러였다. 냉정하게 따진다면 비교하는 것조차 우스울 만큼 격 자체가 차원이 다르다고 해야 할 것이다.

그런 그녀가 오늘 레이첸의 허를 제대로 찔렀다.

물론 레이첸이 장소 문제로 전력을 다하지 않았다곤 하지만, 그래도 그의 인지와 판단력은 전력을 다할 때와 크게 다르지 않았었다. 그럼에도 빈틈을 만들어내고 그 허를 정확히 찌른다는 건 말처럼 쉬운 게 아니었다.

‘심지어 방심하지도 않았었지.’

그랬다. 레이첸은 아리엔을 상대하면서도 방심하지 않았다. 그런데도 그런 경우를 당한 것이다.

절대 이길 수 없는 상대를 앞두고 보인, 허를 찌르는 방식. 그리고 약자가 강자를 상대하는 기교!

아니 좀 더 정확히 말하자면 단순히 기교나 임기응변의 차원을 넘어선 무언가가 느껴졌다.

‘그렇군. 이런 걸 바로 업(業)이라고 하던가?’

그렇게밖에 표현할 수가 없었다. 자신보다 비교할 수 없이 월등한, 이길 수 없는 강자의 허를 찌르기 위해 심화된 이치.

물론 기존에도 그런 개념이 없었던 건 아니지만, 무공이란 영능학에선 그것들과 상이한 이치와 법이 존재하는 것 같았다.

“무공이란 것에 대해 조금 더 알아봐야겠어.”

남들에게 들리지 않을 만큼 작게 중얼거린 레이첸은 그대로 등을 돌렸다. 아리엔의 실력을 확인한 이상 더 있을 이유가 없었다.

“어? 그냥 가는 거야?”

“그 정도면 네 실력은 잘 봤어. 적어도 내일 방해는 안 되겠지. 그러니까 작전에 참가하든 말든 네 알아서 해.”

어리둥절해하는 아리엔에게 그렇게 내뱉은 레이첸은 빠르게 그 자리에서 벗어났다. 그리고 응접실에서 어느 정도 떨어진 순간, 우뚝 멈춰선 그의 전신이 격렬히 흔들리기 시작했다.

“크··· 또 시작인가!”

레이첸의 얼굴이 보기 안쓰러울 정도로 일그러졌다. 주먹을 쥔 손까지 경련이 일어난 것처럼 부들부들 떨리고 있었다.

그럴 수밖에 없었다. 지금 그의 전신을 잠식하고 있는 건 참을 수 없는 고통이었으니까.

단순히 육체에 작용하는 물리적인 고통이 아니었다. 육체와 영혼, 양 측면에 작용하는 일종의 부작용이었다.

하지만 이건 바이우드 가의 혈족이라면 어느 누구라 해도 벗어날 수 없는 굴레. 가주의 장자인 레이첸도 예외는 아니었다.

아니 가장 진한 피를 타고났기에, 더욱 심각했다.

‘그런데 오늘 따라 발작이 좀 길군. 최근 수련한답시고 너무 무리했던 건가?’

평소보다 거의 두 배 이상 길었다. 서서 버틴 지 벌써 20분이 훨씬 넘었는데도, 고통이 아직도 사라지지 않고 있었다.

바이우드 가의 혈족이 겪는 이 고통은, 세상 그 어떤 고통보다 더 심했다. 차라리 살을 저미고 뼈를 찧는 고문을 당한다 해도 이 정도는 아닐 것이다.

그리고 그런 고통을 아주 어린 시절부터 경험해 온 사람이 바로 레이첸이었다.

“간신히··· 멈췄군.”

대충 30분 정도 흐른 다음에야 고통이 진정되기 시작했다. 그 사이 레이첸은 식은땀이 범벅이 된 채 기진맥진한 상태가 되어 있었다.

그는 힘겹게 버티고 섰다. 당장이라도 다리가 풀릴 것 같았지만, 여기서 쓰러질 순 없는 일이었다. 남에게 자신의 약한 모습을 보이고 싶지 않았다.

“이제 돌아가야지. 가서 씻어야겠어.”

한숨을 내쉬며 발걸음을 힘겹게 내딛으려 던 그때, 그의 등 뒤에서 익숙한 목소리가 들려왔다.

“그런 부작용이 있었나?”

“당신, 대체 언제!?”

레이첸이 깜짝 놀라 뒤를 돌아보았다. 그러자 그곳에는 이진운이 서 있었다.

“설마··· 처음부터 다 지켜보고 있었던 거야?”

“그래, 아까 아리엔과 다툴 때부터 지켜보고 있었지. 애들끼리 치고받는데 어른이 끼어들기 뭣해서 몰래 구경만 했었고.”

단순히 그런 이유 때문만은 아니었다. 혹시라도 부상을 입을 만큼 싸움이 격렬해지면 직접 나서서 막기 위해서 몰래 지켜봤던 거였다.

그런데 싸움을 끝내고 돌아가던 레이첸에게서 어떤 이상이 발견되었다. 그 점이 염려되어 조용히 그 뒤를 따라왔던 것이다.

“그런데 그 상태를 보니 대충 알 것 같군.”

레이첸의 상태를 훑어본 이진운이 뜻 모를 소릴 내뱉었다.

“뭘 알겠다는 거지?”

“네 아버지, 바이첸 바이우드가 말했던 부작용. 강신에 가까운 형태로 힘을 사용하지만, 그 대가를 치를 수밖에 없는 힘이라고 했었지.”

“이미 다 알고 있었잖아. 아버지가 그런 얘기까지 했었어?”

레이첸은 이해되지 않는다는 표정을 지었다. 바이우드 혈족이 가진 힘의 부작용에 대해선 최대한 발설하지 않도록 되어 있었다. 그런 사실을 이진운과 같은 외부인에게 알려줬다는 것이 이해되지가 않았다.

그러자 이진운이 그 이유에 대해 간단히 설명해 주었다.

“그래, 엘레나 때문이지. 그 아이도 그와 비슷한 힘을 가지고 있거든. 그래서 부작용에 대해서 대충 알려주셨던 거지.”

“그랬군.”

레이첸은 고개를 끄덕이면서 엘레나를 떠올렸다. 뭔가 특이한 이능을 가졌다고만 들었는데, 그런 종류의 것일 줄은 미처 몰랐었다. 그렇다면 아버지가 바이우드 혈족의 부작용을 타인에게 언급한 것도 납득이 간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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