6권-15화
그 말이 무섭게 들끓어 오르는 투기. 살기와는 사뭇 다른 기세에 레이첸이 조금 뜻밖이라는 표정이 되었다.
“그래, 조금 나아지긴 했군. 아주 허튼 소리는 아니었나 봐.”
“그 말은 우리가 이번작전에 참여하는 문제에 대해 인정 하겠다는 소리지?”
“아니. 그건 또 별개지.”
결과를 확인했음에도 불구하고 여전히 인정하지 않는 레이첸 말에, 아리엔이 날카로운 시선을 던졌다. 한 입으로 두말하겠냐는 표정이었다.
“나아졌다면서? 너도 네 입으로 방금 말했었잖아.”
그렇지만 레이첸의 생각은 여전히 변함없었다. 며칠 전보다 조금 늘었다고 해서, 생존확률이 비약적으로 높아졌다 보긴 어려웠으니까.
“그래봐야 눈곱만큼의 차이야. 지금보다 더 압도적으로 강해지지 않는 이상 별 의미 없는 수준이지.”
“고작 눈곱 만큼이라니.”
“적어도 한 단계 정도의 벽을 넘은 게 아니라면 무의미하니까.”
“······.”
그 말에 아리엔들이 굳어진 표정을 지었다.
아리엔에게 다음 단계는 바로 초절정의 경지였다. 이번 수련을 통해 겨우 실마리를 잡아가고 있었지만, 아직도 갈 길이 멀다고 느끼고 있는 상황.
벽을 넘었다는 말을 들을 정도가 되려면 적어도 그 경지에 발을 디뎌야 가능할 것이다.
그건 클레브와 엘레나도 마찬가지였다. 아리엔보다 성취가 더딘 클레브는 이제 절정의 단계를 밟아가고 있었고, 앞서 둘에 비해 입문이 늦은 엘레나는 일류 수준에서도 고수 급에 도달했다.
엘레나는 보유하고 있는 고유스킬 덕분에 실질적인 전투력에서는 절정 급을 넘어서고 있는 만큼, 경지가 전투력의 전부가 아님을 알 수 있었지만, 그런 점들을 감안한다 하더라도 레이첸이 생각하고 있는 최소 기준을 넘을 수 있는 사람은 아무도 없었다.
결국은 터무니없는 소리라고 결론을 낸 아리엔이 딱딱한 목소리로 말했다.
“그런 말로 우릴 포기시키겠다고? 어림없어. 우린 이번 작전에 참여해서 함께 싸울 거야!”
“그래, 그걸 결정하는 건 네 자유겠지. 하지만 다시 한 번 심사숙고해 보는 게 좋을 거야. 허무하게 죽고 싶지 않다면 말이야.”
그 말이 끝나기 무섭게 레이첸의 전신에서 기이한 기세가 일렁이기 시작했다. 그것은 뜨거우면서도 차가웠고, 음유하면서도 강맹했다.
넘실거리면서 피어오르는 푸른 불길! 그것이 바로 레이첸이 가진 힘의 형태였다.
그가 갑자기 힘을 끌어올리자, 아리엔이 깜짝 놀라 외쳤다. 그것은 클레브와 엘리나도 마찬가지였다.
“지금 이런 곳에서 싸우자는 거야? 우리하고!”
그들 셋이 경계하면서 물러서자, 레이첸은 오히려 그들을 향해 한발 다가서며 말했다.
“아니, 내 말을 너희들이 납득하질 못하는 것 같아서. 그렇다면 조금 강압적인긴 해도 내 손으로 직접 납득시켜줄 수밖에······.”
“그런 억지를······!”
하지만 더 말을 이어갈 새가 없었다. 레이첸의 오른손이 어느새 그들을 가리켰으니까.
그것이 시작이었다. 들끓는 듯한 푸른 염화가 응접실 내부를 태우며 밀려왔다.
콰아아아!
테이블을 비롯한 가재도구들이 순식간에 재가 되어 흩어졌다. 그리고 다가드는 열기는 어지간한 힘으로는 받아낼 수 없을 지경이었다.
아리엔은 즉시 검을 빼들었다. 그리고는 저 무지막지한 열기에 맞서 그에 합당한 절기를 꺼내들었다.
검신 위에 어린 기운이 그 무엇보다 차갑게 물드는 순간, 그것은 곧 서늘한 기세로 전면을 향해 관통해 나갔다.
양의검(兩儀劍)
빙정파멸력(氷晶破滅靂)
대기를 얼어붙게 만드는 냉기가 곧 얼음 기둥이 되어 뻗어나갔다. 그녀가 시전한 양의검은 점창에서도 음양의 기운을 다루는 희대의 절학 중 하나.
그렇기에 보통의 수단으로는 막을 수조차 없었다.
콰아앙!
푸른 염화의 기운과 빙정이 충돌하면서 무시무시한 여파가 응접실을 엉망으로 만들었다. 그나마 그 둘이 주변에 여파를 최소화하기 위해 힘을 제어했기에 망정이지, 그대로 무절제하게 발산했더라면 이 응접실뿐만 아니라 함내의 상당수가 큰 피해를 입었을 것이다.
자신의 공격을 막아낸 광경을 본 레이첸이 작게 감탄사를 입에 담았다.
“신기한데? 검으로 냉기를 다룬다고? 그건 초상능력도 아니잖아!”
“스승님에게 배운 검에는 한계가 없어. 냉기라고 해서 못 다룰 이유가 없잖아.”
아리엔은 레이첸에게 검을 겨눈 채로 차갑게 받아쳤다. 저쪽에서 먼저 다짜고짜 공격을 해온 상황인 만큼 방심할 수가 없었다.
“하긴, 내가 세상의 영능학을 다 아는 건 아니니 그럴 수도 있겠지. 하지만 나도 화염만 다루는 게 아니야.”
그 말과 동시에 그의 전신에서 피어오르던 푸른 화염은 곧 차가운 냉기가 되었다. 그 광경을 목도한 아리엔의 두 눈 위로 짙은 긴장감이 감돌았다.
‘저게 그 바이우드 가문의······!’
그녀도 오래 전에 들은 바가 있었다. 웨라우드 가가 몰락했다곤 하지만, 한때 우주를 주름잡는 가문이었고 그때 수집한 정보와 기록들은 여전히 남아 있었다.
그 중에는 같은 5대 가문 중 하나인 바이우드 가문에 대한 기록도 있었다.
[바이우드의 가문이 다루는 힘은 상식을 벗어난 아주 기괴한 것이다. 열과 냉기를 자유자재로 다루며, 힘의 전환도 자유롭다. 즉, 언제든 냉기를 열기로, 열기를 냉기로 바꾸는 게 가능한 것이다. 그리고 더 놀라운 점은 그렇게 힘의 속성과 성질을 변환시키는 과정에서도 어떠한 에너지 손실이 발생하지 않는 다는 사실이었다······중략······.
하지만 그들이 실질적으로 다루는 능력의 실제 카테고리는 겉으로 드러난 것과 전혀 다르다. 그 본질은 어디까지나 초월적 존재와 연결에서 비롯된 것이며, 그들의 혈통은 그것과 이어짐으로서 그 힘을 각성하게 된다. 그렇기에 유전에 의해 결정되는 영능의 전승 형태와 달리 아주 이례적이라고 해야 할 것이다.]
그 외에도 여러 가지 내용이 있었지만, 확실한 것은 딱 두 가지다. 바이우드 가문 사람은 열과 냉기를 다루는 데 아무런 제한이 없으며, 그 힘은 정체를 알 수 없는 초월적 존재에게 근간을 두고 있기 때문에 다함이 없다는 사실이었다.
물론 사용자의 체력이나 심력에 따라 힘을 사용하는 데에 한도가 있겠지만, 그것만 뒷받침해준다면 가히 무한한 힘을 다룰 수 있다는 의미이기도 했다.
‘결국 영력의 소모를 부추겨 제 풀에 나가떨어지게 하는 방법은 먹히지 않는다는 건데······.’
눈 깜빡하는 것보다 짧은 순간이었지만, 그 사이 고민을 끝낸 아리엔이 결단을 내렸다.
‘그렇다면 이 승부, 단 일초로 판가름 낼 수밖에!’
결심이 서자, 그녀에게서 풍기는 기세도 판이하게 변했다. 그녀 자체가 마치 한 자루 검이 된 듯한 광경이었다.
아마 경지에 이르지 못해 제대로 된 분별력을 갖지 못한 자라면, 그녀보다는 그녀가 쥔 검만 보이는 듯한 착시에 빠지게 될 것이다.
그만큼 지금 그녀의 기세는 완벽했다.
‘심상치 않은 모습이야. 이전과는 확실히 달라졌어.’
레이첸조차 그런 아리엔을 경시하지 못했다. 물론 힘의 크기나 격으로만 따진다면 아리엔은 그에게 크게 못 미쳤다.
조금 더 발전하긴 했어도 그것은 변함없는 현실이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피부를 에일 듯 와 닿는 이 섬뜩한 느낌은 대체 뭐란 말인가. 지금까지 영력을 운용하면서 기세를 발산하는 오버러들은 숫하게 봐왔지만, 이렇듯 한 자루 검처럼 정련된 형태의 기세를 내뿜는 것은 처음 경험하는 일이었다.
‘그래봐야 달라질 것 없어. 나는 레이첸 바이우드야! 저런 하위의 오버러를 상대로 긴장할 이유가 없어.’
그렇게 내심 중얼거리면서 기운을 집중시켰다. 그의 손길에 맺힌 힘은 이전과 달랐다.
지금까지는 열기와 냉기를 따로 다루고 있었다면, 지금 그것은 열기와 냉기가 완벽하게 공존하고 있는 그런 형태였다.
물리법칙만 가지고 본다면 너무도 모순된 일이었지만, 그가 가진 능력은 그 비현실적인 일을 실제로 가능케 해주었다.
그의 심유한 눈동자가 아리엔을 향했다. 당장이라도 출수할 듯 검을 겨누고 있는 그녀의 모습을 눈에 담고는 힘을 더욱 끌어올렸다.
‘제법이긴 하지만 모든 것을 불태우고 얼리는 이 업(業) 앞에선 아무 의미가 없어.’
이걸로 그가 이끌어낼 수 있는 총량의 무려 6할이 넘는 수준에 이르렀다. 이 정도면 어지간한 A+랭크 오버러라 할지라도 단 한수에 끝장낼 수 있는 힘이다.
그런 막대한 힘이 휘둘러지려는 순간, 아리엔의 두 눈이 날카롭게 번뜩였다.
분광십팔수검(分光十八手劍)
섬뢰일정(閃雷一挺)
레이첸이 움직이기 시작한 찰나의 순간을 파악하자마자, 그녀의 검은 어느새 수유의 시간을 넘나드는 한 줄기 섬광이 되었다.
섬뢰일정은 분광십팔수검 중에서도 가장 기초이자 극쾌의 일수! 하지만 여기에 분광십팔수검의 정수가 담겨 있었다.
어떤 자세에서도 쾌검을 뿌릴 수 있으며, 특히 발검의 자세를 취할 경우 위력이 극대화 되는 초식.
그것이 검기상인의 경지에서 전개될 경우 더욱 무서운 형태로 나타나게 된다.
바로 지금처럼!
마치 공간을 뛰어넘는 듯한 궤적! 그것이 어느새 레이첸의 코앞까지 다가와 있었다. 자신에게 다가드는 검기의 형태를 목도한 그의 두 눈이 일순 부릅떠졌다.
‘단순히 빠른 게 아니야. 간격을 제 멋대로 바꿔버렸어!’
검기는 형태가 있으면서도 존재하지 않는 무형질의 것이다. 마음먹기에 따라선 얼마든지 변화할 수 있는 게 바로 검기였다.
아리엔은 검기를 뻗어낸 순간, 그 길이를 크게 확장함으로서 레이첸과 자신 사이에 존재하던 간격을 단숨에 줄여버렸던 것이다.
그렇지만 그 정도로 레이첸을 이기기란 어려웠다. 다른 사람들 눈에는 검기가 일순간 공간이동이라도 한 듯 보였겠지만, 의식을 엄청난 속도로 가속화 할 수 있는 레이첸의 눈에는 그 모든 변화가 똑똑히 보였으니까.
우웅!
차갑고도 뜨거운 파동이 그의 손길에서 일어났다. 음과 양, 플러스와 마이너스의 힘이 서로 공존-상생하면서 모든 것을 밀어내는 파동으로 화하고 있었다.
그것은 검기라 해도 예외는 아니다.
투우우!
허공을 강타하는 파공성과 함께 검기가 튕겨져 나갔다. 푸른 기운에서 비롯된 무형의 파동이 공간 자체를 뒤흔든 것이다.
‘조금 놀라게 해주긴 했지만, 이게 이 녀석의 전부였나. 그럼 끝내야겠네.’
레이첸은 별다른 감흥조차 없다는 듯 그렇게 중얼거리며 손을 뻗어갔다. 애당초 아리엔은 자신의 상대가 아니었다.
조금 달라진 모습이 놀랍긴 했지만, 역시 별다른 이변은 일어나지 않았다.
더 끌어봐야 결과가 달라질 것도 없는 만큼, 이 시시한 싸움을 서둘러 끝내기로 마음먹었다.
피잉!
헌데 그 순간, 이질적인 파공성이 울려퍼졌다. 그것은 초인적인 청력이 아니면 들을 수조차 없는 아주 희미한 소리였다.
그리고 그 소리는 레이첸의 귀에 포착되었다.
‘어!?’
소리가 들려온 곳을 향해 시선을 준 순간, 그는 보게 되었다. 자신을 향해 다가오고 있는 하나의 궤적을!
그것은 분명 검기라는 이름을 가진, 영력 그 자체가 날카롭게 응집된 일격이었다!
‘이게 어디서 나타난 거지?’
방금 자신이 튕겨낸 건 어떻고, 이건 또 어떻게 나타난 거란 말인가? 레이첸은 일순 혼란스러웠지만, 무엇을 해야 할지는 명백했다.
그는 다시 손을 뻗어냈다. 일단 자신을 위협하는 저 검기마저 튕겨내서 제압할 생각이었다.
하지만 이번에는 일이 뜻대로 이루어지지 않았다. 그의 손에서 일어난 파동이 공간을 강타하려는 순간, 다가들던 검기가 돌연 기이한 변화를 일으키고 있었다.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