6권-13화
쩌저정!
주변의 대기가 순식간에 얼어붙었다. 단지 기세를 풀어낸 것만으로도 이 일대에 이만한 영향을 끼친 것이다.
끼에엑!
B+랭크인 진멸 급 인베이더 철갑조들이 찢어지는 비명을 내질렀다. 넓게 퍼져나가던 푸른 기운이 얼어붙으면서 놈들의 날개까지 굳어지게 만든 것이었다.
하지만 금속성 외골격으로 튼튼하기로 유명한 철갑조들은 이 정도로 무너지진 않았다. 얼어붙어버린 기운에 비행에 조금 지장을 받았을 뿐, 실질적인 데미지는 크지 않았던 것이다.
그렇지만 이건 어디까지나 맛보기에 불과했다. 레이첸의 진짜 공격은 이제부터 시작이었으니까.
고오오오!
“죽어버려!”
눈부신 푸른 광류가 온 사방으로 내달렸다. 그것은 피할 수도 막을 수도 없는, 청광의 폭풍이었다.
카이드 앗슈<청마열광파靑魔烈光派>
수많은 빛줄기들이 철갑조들을 관통하고 지나갔다. 그것은 놈들에게 어떠한 상처도 남기지 않고 그대로 투과해 지나갔지만, 그게 전부일 리 없었다.
카륵!
카으으!
푸른 광류에 투과당한 철갑조들이 일제히 추락하기 시작했다. 그리고 그것으로 끝이었다. 단발마의 비명을 지르며 떨어지는 철갑조들에게선 더 이상 생명의 기운 따윈 존재하지 않았다.
‘그렇군. 물리적인 데미지가 아니라, 생명 그 자체에 작용하는 형태의 공격이라 이거지?’
이진운은 그 광경을 유심히 눈여겨보았다. 꽤 강력한 수법이었다. 상처 하나 없이 목숨만 끊어내는 수법이라니, 마치 심검과 같지 않은가.
하지만 드레이크들은 예외였다. 놈들은 레이첸의 푸른 기운 공격에 관통당하고도 즉사하지 않고 무사히 버텨냈다. 잠시 움찔하는 걸 보니 어느 정도 타격은 있어 보였지만, 죽음에 이를 정도는 아닌 듯 보였다.
-그우우우!
-쿠오오!
드레이크들이 크게 포효하며 성난 기세를 드러냈다. 방금 전의 공격으로 자극을 받은 모양이었다.
고오오오!
놈들의 주둥이로 강대한 힘이 응집되기 시작했다. 용종 타입이 보편적으로 갖고 있는 공격 수단 중 하나인 브레스 웨폰이었다.
등급도 무려 A+랭크 정도 되다 보니, 응집되는 에너지 크기도 꽤 상당했다.
투하학!
입이 크게 벌어지는 순간, 드레이크들의 입에서 시뻘건 광채가 일직선으로 뻗어 날아왔다. 어지간한 소형 전함의 주포와 거의 비견되는 위력이었다.
그렇지만 제아무리 강력한 공격이라 해도 맞지 않으면 소용없는 법이다. 이미 이를 예상하고 있던 레이첸은 플로트 윙을 제어해서 공격 궤도에서 빠르게 벗어났다.
그러자 레이첸을 빗겨나가나 브레스 웨폰이 저 너머에 있는 높은 산 중턱을 강타했다.
콰르르릉!
엄청난 폭발과 함께 대규모 산사태가 발생하였다. 작은 도시 정도는 순식간에 매몰당하고도 남는 규모의 산사태였다. 그나마 다행이라면 저 산 아래엔 사람의 흔적이 전혀 보이지 않는다는 정도일 것이다.
무너지는 산을 흘깃 바라본 레이첸이 눈썹을 꿈틀거렸다.
“진짜 귀찮게 하네. 빨리 끝내지 않으면 주변이 엉망이 되겠어.”
물론 인적이 없는 곳인 만큼 주변이 파괴되어도 별 문제는 없겠지만, 그래도 무분별한 자연파괴는 사양하고 싶은 레이첸이었다.
속전속결로 끝내기로 마음먹은 그 순간, 그의 주변에 영롱한 푸른빛들이 생겨났다.
그것은 작은 반딧불처럼 미약했지만, 그 수는 수백, 수천 아니 그 이상이었다. 이 주변을 온통 가득 채울 만큼 늘어난 작은 빛들이 드레이크들을 둘러쌌다.
-그우우!
드레이크들은 주변에 가득 찬 빛 덩어리들의 모습에 조금 경계하는 기색을 보였지만, 그것도 잠시 뿐이었다.
아무런 공격성도 드러내지 않는 이 빛들이 별 의미가 없다고 판단하고는 다시 브레스 웨폰을 차징하기 시작했다. 아니, 좀 전보다 더 많은 에너지가 집중되는 것으로 보아 전보다 더 강력해 보였다.
그렇지만 그건 너무도 큰 실책이었다.
아무런 공격성도 보이지 않는 빛 덩어리들이야말로, 놈들의 목숨을 끊어낼 치명적인 올가미였으니까.
레이첸이 오른손의 검지와 엄지를 튕기자 준비되었던 이변이 시작되었다.
카이즌 프로아<청마광염부靑魔狂炎阜>
주변을 가득 채운 빛 덩어리들로부터 돌연 수많은 가시들이 치솟았다. 그것은 닿는 모든 것을 꿰뚫어 태우고 얼리는 파멸의 함정이었다.
철갑조 이상의 육체 내구성을 가진 드레이크들이었지만, 이런 공격 앞에선 무의미했다. 놈들의 비늘을 종잇장처럼 뚫고 들어온 수많은 가시들은 놈들을 그 자리에서 즉사시켰다.
어지간한 도시도 순식간에 불태울 수 있는 화력과 비행능력을 가진 진멸 급 인베이더 치고는 너무도 허무한 결말이었다.
“호오, 제법인데?”
“아저씨, 이 정도로 너무 감탄하지 마. 이게 내 실력의 전부는 아니니까.”
이진운의 감탄사에, 레이첸은 코웃음 치며 대꾸했다. 하지만 입술 끝이 살짝 끌어올려진 걸 보면 그의 감탄이 그리 기분 나쁘진 않은 모양이었다.
“더 이상의 적은 보이지 않는군. 하긴, 놈들도 전력에는 한계가 있으니 더 분산시키긴 어렵겠지.”
인베이더들도 아직 하이브를 완성하지 못한 시점이었다. 새로운 전력을 충당할 수 없는 상황에서, 놈들도 방금 보낸 드레이크와 철갑조 이상의 전력은 투사하기 어려울 것이다.
이진운과 레이첸은 다시 함대로 돌아왔다. 이제 도이벤의 남은 전력들이 항전하고 있는 기지에 가까워지고 있었다.
* * *
영상 데이터에 첨부된 내용에는 비밀 기지의 좌표만 있었던 게 아니었다. 그들과 연락할 수 있는 비상 연락망 코드까지 첨부되어 있었던 것이다.
단지 문제라면 말 그대로 비상 연락망 코드라서 꽤 가깝게 인접하지 않고선 연락이 닿지 않는다는 점이었다.
하지만 이미 좌표 근처까지 강하한 이상, 더 문제될 것은 없었다.
아르페인은 곧바로 비밀 기지를 향해 통신을 취했다. 그러자 젠다인 대장과 대화를 나눌 수 있었다.
[오, 자네였군. 아르페인. 정말로 반갑네. 무려 3년만이니 꽤 오래간만이지? 최근 독립했다는 말은 로베르타인 함장님에게 들었는데, 설마 자네가 이곳에 오게 될 줄이야.]
젠다인 대장과는 서로 안면이 있는 사이였다. 물론 직접적인 인연이 있다기보다는, 스승인 로베르타인 때문에 맺을 수 있었던 인맥 중 하나였다.
“예, 선배님. 저도 이런 상황만 아니면 정말 반가웠을 텐데 말입니다. 지금 상황이 어떻습니까?”
단도직입적으로 묻는 그 말에, 젠다인이 쓰게 웃으며 말했다.
[솔직히 말해 최악일세. 인드라의 그물은 철저하게 파괴되었고, 도이벤 행성의 전력 중 절반이 날아갔지. 그나마 사태를 빠르게 파악해서 후퇴했기에 망정이지, 조금이라도 늦었다면 이마저도 온전하지 못했을 거네.]
“그렇군요.”
[정말 말도 안 되는 기술이지. 위상전환이라니······. 이쪽의 공격은 전혀 통하지 않고, 놈들의 공격은 아무런 제한 없이 날아오더군.]
그때의 일을 떠올릴수록 끔찍했던지, 젠다인 대장은 말을 하면서도 치를 떨었다. 손가락이 부들부들 떨리고 있었다.
“이미 선배님이 남겨주신 데이터를 확인해서 알고 있습니다. 그리고 그에 대한 대응책도 있죠.”
아르페인이 대응책을 입에 담자, 젠다인 대장이 깜짝 놀라 되물었다.
[대응책이라니. 승산이 있는 건가?]
“예, 높진 않지만 어느 정도는 될 겁니다. 기대를 걸어보기엔 충분하겠지요. 그러자면 선배님의 도움도 필요할 겁니다.”
[다행이군. 이대로 고사하는가 싶었는데 말이야. 그런데 자네 함대 외에도 다른 함대가 보이는데 누군가?]
승산이 있다는 말에 조금은 안도한 표정을 짓는 젠다인 대장이었다. 하지만 그는 곧 센서에 표시된 함대가 하나가 아님을 확인하고는 이상하다는 듯 되물었다.
“식별 코드를 보면 아실 텐데요.”
[지금 기지 기능이 온전하지 않아서, 파악이 조금 늦는군. 아 바이트 함대라고 나오는군. 그런데 바이트 함대!? 혹시 사령관이 그 비겁자 오콜로스 아닌가?]
“예, 꽤 유명하신 분이더군요. 좋지 못한 쪽으로 그렇지만요.”
그러자 젠다인 대장이 불쾌한 낯빛을 드러냈다.
[하필이면 그 녀석이라니······.]
“잘 아시는 분입니까?”
[이런 말 하긴 그렇지만, 그 녀석은 내 후배일세. 예전 사관학교에서 선후배 관계로 지냈었지.]
마뜩치 않다는 듯 대답하는 젠다인 대장. 그를 언급하는 것조차 기분 나쁘다는 투였다.
[그런데 하필 이 녀석이 올 줄이야. 이곳에 올 함대 중 하나가 바이트 함대라는 말은 들었지만, 사령관이 누군지까지는 신경을 안 써서 미처 몰랐네.]
그는 몇 가지를 확인하더니, 조심스럽게 입을 열었다.
[자네, 지금 바이트 함대하고 통신회선을 열어놓은 상태는 아니지?]
“예. 언제든 연결할 수는 있지만, 굳이 열어놓을 이유는 없으니 말입니다.”
필요할 때만 연결하면 되는 회선을 계속 열어놓을 이유가 없었다. 괜히 험담이라도 했다가 이쪽에서 하는 말이 들리기라도 하면 별로 좋을 일은 없었기 때문이었다.
그래서일까? 젠다인 대장은 좀 전과 달리 꽤 조심스럽게 말했다.
[내 이런 말 하면 남 험담하는 것 같아서 어지간해선 안하려 했지만, 로베르타인 함장님과의 인연도 있으니 자네에게는 좀 해줘야겠군.]
“예? 무슨 말을 하시려고······?”
[오콜로스를 조심하게. 놈은 언제나 아군의 뒤통수를 치는 작자라네.]
“그건 알고 있습니다. 자기 목숨을 우선시 한다는 말은 꽤 많이 들었었죠.”
아르페인도 몇 가지 정보 수집을 통해 오콜로스에 대한 내력은 파악하고 있었다. 하지만 젠다인 대장은 그 정도론 어림도 없다며 말을 이어나갔다.
[그런 수준이 아니야. 소문은 그야말로 빙산의 일각이지. 놈은 자기 목숨을 건질 수 있다면, 아니 자기만 무사할 수 있다면 하지 못하는 짓이 없어. 단순히 전선을 이탈하는 수준을 넘어, 심지어 인베이더와 내통한다는 소문까지 돌 정도였지.]
“그게··· 너무 과장된 소문 아닙니까?”
[아니, 그럴 리 없네. 지금까지 녀석이 살아 돌아온 전장들만 하더라도 그런 의혹을 사기엔 충분하더군. 거의 생존 확률이 없는 곳에서도 놈은 항상 무사히 살아 돌아왔네. 오죽하면 놈을 불사신이라고 부르겠나? 남들이 의혹을 보일 때는 다 그만한 이유가 있는 법일세. 그리고 예전부터 의뭉스러운 녀석이었어. 항상 그 속내를 알 수가 없었지. 그런 놈들일수록 더 위험한 법이니, 조심하는 게 좋을 게야. 특히 같이 작전을 펴야 하는 경우라면 더더욱.]
젠다인 대장은 평소 상대를 헐뜯거나 하는 조악한 성품을 가진 사람이 아니었다. 오히려 선후배들에게 찬사를 받을 만한 인격자였다. 그런 사람이 이렇게까지 우려하는 것을 보면, 마냥 근거가 없는 것도 아닌 모양이었다.
그래서 아르페인도 신중하게 대답했다.
“···알겠습니다. 그 자를 좀 더 경계하도록 하지요.”
그저 비겁자 정도로 생각했던 오콜로스에 대한 판단을 좀 더 미루기로 했다. 젠다인 대장이 이렇게까지 경고할 정도면, 그 자에게 뭔가 있다는 말이었으니까.
혹시라도 이번 작전에서 오콜로스가 이상한 짓을 벌이기라도 한다면, 인피니티 킹덤 뿐만 아니라 도이벤 사령부까지 함께 죽을 수밖에 없었다.
‘따로 조사를 해 봐야겠군. 그리고 이번 작전도 다시 생각해 봐야겠어.’
생각을 정리한 그의 두 눈이 일순 날카롭게 변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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