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검신의 검은 우주를 가르고-134화 (135/448)

6권-09화

* * *

모든 수련이 끝난 뒤, 환상에서 벗어난 아리엔들은 기진맥진한 표정으로 수련실 바닥에 늘어졌다.

환상 속에서 수련하는 만큼 실제로 몸이 고단한 건 아니었다. 하지만 그들의 심력과 정신은 이미 쓰러지기 직전이었다.

환상을 이용한 수련은 24시간 중 거의 15시간 정도를 차지했다. 그 중 나머지 시간들은 수면과 식사 등 간단한 휴식에 필요한 시간이었다.

제아무리 환상이 완벽하다 해도 현실의 육체가 멀쩡히 유지되려면 그만한 영양 섭취와 휴식은 필요했기 때문이다.

“자, 오늘 수련은 이걸로 마친다. 다들 돌아가서 편히 쉬어. 내일도 또 오늘처럼 달려야 하니까.”

“히익···!”

엘레나의 입에서 비명 같은 소리가 흘러나왔다. 내일도 같은 수련이 계속될 거라는 건 알고 있었지만, 이렇게 이진운의 입에서 듣게 되니 더 끔찍했던 것이다.

“얼마나 좋았으면 비명을 다 지르는구나. 그래, 내일도 기대하마.”

아리엔들의 심정을 잘 알면서도 그렇게 악랄한 농담을 건네 오는 이진운. 하지만 아리엔들은 거기에 뭐라 대꾸할 힘조차도 없었다.

비척비척 자리에서 일어난 세 사람은 수련장 바깥으로 향했다. 이제 가서 때늦은 저녁 식사를 마친 뒤, 간단히 씻고 잠들 시간이었다.

마침 그때, 복도를 지나던 한 사람이 보였다. 그는 바로 레이첸이었다.

옆을 걸어가던 그의 시선이 문득 아리엔들을 향했다.

‘뭐지? 저 꼬락서니는······.’

레이첸이 의아하다는 얼굴로 그들을 바라보았다. 대체 어디서 뭘 했길래 얼굴이 저리 수척하단 말인가. 며칠 전에 봤을 때만 하더라도 저 정도는 아니었다.

‘무슨 수련이라도 하고 있나?’

하지만 수련을 했다고 보기엔 차림새가 너무나도 깔끔했다. 그렇다면 뭘 했길래 반쯤 정신이 나간 것처럼 지쳐 보인단 말인가?

궁금해진 그가 그들을 향해 지나가는 투로 운을 띄워보았다.

“안색이 말이 아니군. 요즘 무슨 특훈이라도 하고 있는 거 아니야?”

그 말에 아리엔이 반응을 보였다. 지금까지 지치고 힘든 모습은 어디로 갔는지, 아주 또렷한 눈빛으로 레이첸을 바라보고 있었다.

“그래, 특훈을 하고 있어. 아주 처절하고 괴로운 특훈을 말이야.”

그리곤 주먹을 불끈 쥐어 보였다.

“조금만 더 기다려. 널 곧 따라잡아 줄 테니까.”

“하아?”

알 수 없는 말만 남기고 그 자리를 떠난 아리엔과 일행들. 그곳에 남겨진 레이첸은 황당하다는 표정으로 헛웃음을 흘렸다.

“뭐라는 거야, 대체······. 그냥 자기 하고 싶은 말만 하고 가버렸잖아.”

* * *

그로부터 약 이주일 뒤. 인피니티 킹덤은 드디어 라인트라 지역에 당도했다.

물론 라인트라라고 해서 전부 인베이더와 치열하게 맞붙고 있는 최전선인 건 아니었다. 그 중에는 아직 전투와 거리가 먼 후방 지역이라 불리는 곳도 있었다.

인피니티 킹덤은 라인트라에서도 가장 변두리 지역인, 도이벤 성계에 진입하게 되었다. 그리고 마찬가지로 이곳에 당도한 관리국의 또 다른 함대와 합류할 수 있었다.

하지만 전혀 반갑지가 않았다. 그들은 바로 아이틀란 성계에서 한번 만난 적 있던 바이트 함대였다.

자기 보신주의로 유명한 인사인 오콜로스 함대사령관은 이진운과 만나자 마자, 그 속내를 드러내기 시작했다.

“그러니까 저희에게 선두를 양보하시겠다 이겁니까?”

“그렇지. 이제 겨우 출범한 신생 함대인 자네들에게는 공을 세울 기회가 아닌가. 그래서 선선히 양보하겠다는 것일세.”

“······.”

이진운은 일순 기가 차 말이 나오지 않았다. 아주 대놓고 이쪽을 총알받이를 시키겠다고 수작을 부리다니······.

뭐라 쏘아붙여줄까 했지만, 어차피 말해봐야 소용없는 일이었다. 평생을 그렇게 살아온 작자에게 뭐라 말할 것인가?

어차피 누가 앞장서든 서야 할 일이었다.

관리국에서는 인피니티 킹덤과 바이트 함대가 같이 행동하라고 지침을 내린 상태. 함대 한 대만 단독으로 움직이는 건 최전선인 라인트라에서 너무 위험하다고 판단을 내렸기 때문이다.

물론 이쪽에는 라이선스가 있으므로 어느 쪽이 주도권을 쥘 수는 없겠지만, 그래도 함께 행동해야 한다는 사실에는 변함이 없었다.

“뭐 좋습니다. 그러도록 하지요. 그럼 오콜로스 사령관님은 저희 뒤에서 받쳐주시면 좋겠군요.”

“안 그래도 그럴 걸세. 지원포격은 확실하게 해주지.”

과연 그럴까, 하는 말이 당장이라도 입밖으로 나올 것 같았지만, 이진운은 애써 참아냈다.

어차피 같이 움직여봐야 하등 도움도 안 될 인간이었다. 그렇다면 차라리 멀리 떨어져서 행동하는 게 더 나았다.

‘지원 포격? 웃기고 있군. 무슨 일이 벌어지면 먼저 도망가지나 않으면 다행이겠지.’

그렇게 간단한 이야기를 나눈 뒤 이진운은 오콜로스와 헤어졌다. 각자 자신의 모함으로 돌아온 그때, 아리엔들과 함께 그의 옆에 있던 레이첸이 눈살을 찌푸리며 말했다.

“꽤 거슬리는 작자군요.”

“오콜로스라고 하는데, 아는 자들 사이에서는 꽤 유명하다고 하더군.”

“들어는 봤지요. 불사신 오콜로스라고 하는 그 같잖은 이명까지 붙어 있다는 것도 말이죠.”

“거기까지 들었다면 어지간한 건 다 알겠군.”

뜻밖에도 레이첸은 오콜로스가 누군지도 잘 알고 있었다.

오콜로스는 한 함대의 사령관이긴 했지만, 사실 연합에서 명성을 떨치고 있는 바이우드 가문에서 볼 때는 한낱 보잘 것 없는 존재에 불과했다. 저런 하찮은 작자에 대해서까지 파악하고 있다는 것이 더 신기해 보였다.

잠시 곰곰이 생각하던 레이첸이 입을 열었다.

“일단 저 자 앞에선 제 출신에 대해선 좀 비밀로 해주세요.”

“정체를 숨기려고? 저런 자는 강자 앞에선 비굴한 편이어서, 오히려 출신을 밝히면 여러모로 편할 텐데.”

이진운이 뜻밖이라는 듯 말하자, 레이첸은 미간을 찌푸리며 말했다.

“그래도 저런 작자와 가까이 지내고 싶진 않아요. 오히려 가까이 해봐야 저희 가문에 먹칠만 하는 격이지. 그러니까 웬만하면 제 정체는 숨겨주셨으면 해요.”

“뭐, 네가 정 원한다면 그러도록 하지.”

이진운도 레이첸이 신분을 드러내든 말든 아무 상관없기에 그냥 받아들였다. 어차피 함께 움직인다 해도 행동은 따로 하게 될 테니, 굳이 오콜로스 따윌 신경 쓸 필요는 없다고 생각했으니까.

‘그래도 기특한 면은 있군. 가문의 명성에 기대진 않겠다는 건가?’

그것이 과연 어린 애의 치기인지, 아니면 자존심인지는 모르겠지만, 이진운은 그게 나쁘진 않다고 느꼈다. 아직은 그래도 순수한 면이 남아 있다는 의미일 테니까.

그러는 동안에도 인피니티 킹덤은 바이트 함대와 함께 도이벤 행성에 점점 다가서고 있었다.

도이벤 행성. 이곳은 라인트라에서도 가장 최전선에서 싸우는 함대들을 지원하기 위한 군수행성이었다.

그래서 전쟁에서 사용되는 온갖 병기나 소모품들이 이곳에서 생산되고 있으며, 전방에서 치열하게 싸운 함대가 잠시간 휴식을 취하러 오는 장소이기도 했다.

하지만 전혀 뜻하지 않은 위험이 이곳에 닥쳐오고 있었다.

“뭐지?”

행성 주변을 탐지하는 레이더를 지켜보고 있던 오퍼레이터 중 하나가 이상하다는 듯 중얼거렸다. 스크린 위로 어떤 반응이 일시적으로 떠올랐었기 때문이었다.

옆에 있던 동료가 물었다.

“왜 그래?”

“방금 전에 뭔가가 레이더에 뜬 것 같은데 금세 사라졌단 말이야. 내가 뭘 잘못 봤나?”

고개를 갸웃거리는 오퍼레이터의 모습에 동료가 혹시나 하는 표정으로 물었다.

“어디서 날아온 데브리 아니야?”

“그런 것 같진 않아. 조금 질량이 있어 보였는데.”

“혹시 선발대인가? 오늘 내로 관리국의 함대가 도착하기로 했잖아.”

“그럴 지도 모르겠네.”

이미 도이벤 행성에도 인피니티 킹덤과 바이트 함대가 당도한다는 소식이 들어가 있었다. 그래서 그들이 요 며칠 째 레이더만 쳐다보고 있었던 것이다.

하지만 뭔가 느낌이 좋지 않았다. 정말로 선발대인가 확인하기 위해 레이더 기능을 더 세부적으로 제어하던 그때, 모니터에 수많은 반응이 떠올랐다.

그건 좀 전까지 보지 못했던 반응이었다. 셀 수 없이 많은 그 레이더 반응에 오퍼레이터가 깜짝 놀라 외쳤다.

“뭐야, 이것들은!?”

“설마, 관리국 함대가 벌써 도착한 거야? 아직 도착하려면 몇 시간 남았잖아.”

“그럴 리가 없잖아. 이 수를 봐!”

레이더 화면 위를 빼곡히 채우고 있는 표적들. 그것들은 아군의 함대가 아님을 증명하고 있었다.

그 즉시 경계령이 떨어졌다.

상대는 언노운. 정체가 드러나지 않은 놈들이었다.

하지만 도이벤 행성의 행성방위군은 확신했다. 인베이더의 공세가 결국 이곳까지 닿게 되었다는 사실을.

저들이 아군의 함대였다면 고유식별신호를 통해 금방 파악이 되었을 테니까.

도이벤 행성 전체가 전투 체계에 돌입했다. 아무리 군수행성이라 해도, 이곳은 최전선이라 불리는 라인트라였다.

중요한 곳인 만큼 처음부터 상당한 전력이 포진하고 있었던 것이다.

“인베이더 놈들이 결국 이곳까지 이르렀군.”

도이벤 행성을 담당하고 있는 행성사령관 젠다인 대장은 입술을 깨물었다.

언젠가 이런 날이 오게 될 거라 예상은 했지만, 이런 식으로 접근을 허용할 줄은 상상도 못했다.

‘놈들이 대체 무슨 수로 레이더를 속이고 이렇게 가까이 접근한 거지?’

심지어 오퍼레이터가 놈들을 발견할 수 있었던 것도, 놈들이 일부러 존재감을 드러냈기에 가능했었다.

“어째서 기습을 하지 않고 모습을 드러낸 건지는 모르겠지만, 우리도 만만치 않다는 걸 보여주마.”

행성 각지에는 수많은 화망 시스템이 깔려 있었다. 셀 수 없을 만큼의 제네레이터가 각지에 배치되어 있었고, 이것들을 통해 도이벤 행성은 조금도 빈틈을 허용하지 않는 막강한 포격이 가능했다.

“인드라의 그물을 사용해라! 우리 행성에 접근하기 전에 놈들을 철저히 분쇄한다.”

그가 말하는 [인드라의 그물]은 행성 각지에서 쏘아지는 수백만 단위의 그래비티 블래스트 시스템이었다.

물론 함대의 주포와 비교하다면 출력이 많이 떨어지기는 했지만, 그 수가 무려 수백만 단위라면 이야기가 달라진다. 그 어떤 적이라 해도 접근을 허용하지 않는 대행성방어 시스템인 것이다.

이것이 존재했기 때문에 도이벤 행성은 지금까지 군수행성으로 존재하고 있으면서도, 인베이더의 공격에 함락되지 않을 수 있었다.

그래서 아는 사람들은 도이벤 행성을 이렇게 불렀다. [칠흑의 성벽]이라고.

그 말을 입증이라도 하듯, 행성 전체에서 수많은 움직임이 일어났다. 지표면에 있던 위장막이 벗겨지고, 그 안에서 무수한 포신들이 모습을 드러낸 것이다.

우우우웅!

제네레이터에서 생산된 막대한 에너지들이 행성 각지를 흘러 돌아다녔다. 그것들은 저 하늘을 향해 고개를 든 포신으로 흘러들었고, 곧 검은 파장을 흩뿌렸다.

무려 수백만 단위에 이르는 중력파포, 그래비티 블래스트의 향연이었다. 푸르게 보였던 하늘이 순식간에 온통 밤하늘마냥 검은 궤적들로 가득 차 버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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