6권-08화
지금까지 벌써 10차례나 맞서 싸워봤지만, 이긴 적은 단 한 번도 없었다. 경지에서부터 시작해서 임기응변과 실전경험까지 모든 방면에서 상대에게 압도당했다.
객관적으로 봤을 때 눈앞의 사내는 S랭크에 준하는 강자. 하지만 실제로 보이는 무위는 그 이상이었다.
소리비도(小莉飛刀) 기소천(箕小天)
그것이 이진운이 알려준 저 사내의 정체였다. 아무런 영능도 존재하지 않던 지구 출신인 그가 어떻게 이런 강자들을 환상으로 구현해낼 수 있는지에 대해선 의문이 들었지만, 그보다 중요한 것은 자신들로서는 이 자를 어찌할 수가 없다는 사실이었다.
휘리릭!
대기를 가르는 흐릿한 파공성! 그것을 듣는 순간 오한이 등골을 타고 올랐다. 지금까지 이 소리가 들릴 때마다 날아든 예측불허의 공격이 그들을 낭패시켰기 때문이었다.
심지어 이 소리가 들린 방향조차 의심해야 했다. 기소천은 자신의 무기에서 일어난 파공성조차 인위적으로 반향(反響)시켜 상대를 속이는 놀라운 기교의 보유자였으니까.
그렇기에 아리엔들은 모든 감각을 총 동원해야 했다. 단순히 시각이나 청각에만 의지하다가 어디서 날아왔는지도 모를 공격에 당했던 게 한두 번이 아니었다.
바로 지금처럼!
“윽!”
목덜미를 스쳐 지나가는 한 줄기 예기가 느껴졌다. 상대의 수법이 얼마나 은밀한지, 비도가 지나간 다음에야 그 존재를 인지할 수 있었다.
솔직히 아리엔이 이걸 피해낸 것은 운에 가까웠다. 워낙 예측불허의 수법에 당하다보니 뭔가 느낌이 좋지 않을 땐 일단 피하고 본 것이다.
그건 클레브나 엘레나도 마찬가지인지, 새하얗게 질린 얼굴을 하고 있었다.
그러자 기소천이 피식 웃으며 말했다.
“제법 잘 피하는군. 이 정도는 이제 감당이 된다 이건가?”
“······.”
칭찬하는 그 말에 더욱 긴장하는 세 사람.
아니나 다를까. 기소천의 입에서는 청천벽력같은 소리가 흘러나왔다.
“그렇다면 강도를 올려야겠군.”
“역시나······.”
아리엔은 저도 모르게 탄식을 터뜨렸다.
이와 같은 경우는 이번이 처음이 아니었다. 기소천을 다섯 번 정도 상대했을 때에도 이렇게 말하고는 훨씬 더 강하게 몰아쳐 왔었으니까.
하지만 지금 이상으로 공격해 온다면 과연 몇 수나 받아낼 수 있을 지 의문이었다.
“자, 그럼 간다. 각오들 하도록!”
그 순간, 기소천의 오른손 쪽 장포가 미세하게 흔들렸다. 그것이 시작이었다.
어디선가 날아온 비도가 그들의 명치를 관통할 듯 날아왔다. 이미 수십 수백 번도 더 경험했던 어기회선술(御氣回旋術)이었다.
키킹! 킹!
아리엔들은 이에 즉각 반응했다. 이미 마음에 대비를 하고 있던 터라 검으로 쳐내는 건 그리 어렵지 않았다.
하지만 어기회선술의 진짜 무서움은 이제부터였다.
검에 의해 튕겨진 줄 알았던 비도들이 순간 다시 허공에서 방향을 틀더니 다시 세 사람의 급소를 노리고 날아들었다. 마치 먹잇감을 노리는 뱀처럼 불규칙한 곡선을 그리며 날아드는 수십 자루의 비도의 모습은 무시무시할 지경이었다.
그래도 여기까진 이전의 패턴과 크게 다르지 않았다. 그렇다면 기소천이 좀 더 실력을 드러내는 건 이제부터일 것이다.
아니나 다를까, 이번엔 기소천의 왼쪽 장포가 흔들렸다. 그 순간, 무려 수십 가닥의 선이 그곳에서부터 빗살처럼 터져 나왔다.
천무비도(天霧飛刀)
천망회회(天網恢恢)의 장
제 1식. 사살무광(絲殺無光)
그것은 무수한 선들의 향연이었다. 눈앞을 가득 채우는 화려하고도 변화무쌍한 궤적 앞에, 아리엔들의 저항은 완전히 무력화 되었다.
가장 먼저 당한 것은 클레브였다. 삼절검의 섬진쾌로 자신의 급소로 날아드는 몇 가닥 선을 걷어내려 했지만, 그것들은 오히려 검의 궤적을 따라 거슬러 올라오더니 클레브의 허리어림과 가슴팍을 사정없이 절단하고 지나가 버렸다.
“컥! 커······.”
비명조차 지르지 못하고 쓰러진 클레브. 이것으로 오늘만 벌써 스물일곱 번째 사망이었다.
그리고 이번에는 엘레나에게 그 차례가 돌아왔다. 그녀는 유운신법으로 재빠르게 이동하면서 자신에게 날아드는 선들을 떼어놓으려 했지만, 그것들은 집요하게 따라붙었다. 심지어 수십 갈래로 갈라지면서 움직일 공간까지 전부 점유해버리는 바람에 더 이상 경신보법으로 피할 수도 없었다.
결국 엘레나도 전신이 분시되는 형태로 죽음을 맞이했다.
그 광경을 목도한 아리엔이 아연한 표정이 되었다. 두 사람이 먼저 죽음을 맞이했는데도, 상대가 다루는 수법의 정체가 무엇인지 알아낼 수가 없어서였다.
‘대체 이게 무슨 수법이지? 이렇게나 날카로운 선이라니··· 이건 검기보다 더하잖아!’
그의 장포에서부터 시작된 무수한 선들이 움직일 때마다 그에 닿는 모든 것이 단숨에 절단되었다.
실처럼 유연하면서도 낭창거리는 주제에 이렇게나 날카롭고 위력적이라니, 대체 저 무기의 정체가 무엇이란 말인가!
하지만 기에 휩싸여 있어서 알아볼 수가 없었다. 지금 기소천이 휘두르는 저것은 마치 신이 휘두르는 하나의 채찍 같았다.
“이제 너 하나 남았군.”
“······.”
아무런 대꾸 없이 경각심을 드러내는 아리엔의 모습에 기소천은 픽 웃고 말았다. 그 모습이 마치 겁을 집어먹은 고양이가 일부러 사납게 보이려는 것 같아서였다.
허나 그렇다고 해서 아리엔을 무시하는 건 아니었다. 오히려 그 반대였다.
“개중에서 그나마 실력이 가장 낫더군. 그래서 너는 조금 특별 취급해주기로 했다.”
‘하필 특별 취급이라니··· 그런 건 바라지도 않는데······.’
그 말에 아리엔은 내심 울고 싶어졌다. 그 특별 취급이란 게 어떨지는 안 봐도 뻔했기 때문이었다.
그 말에 아리엔은 내심 울고 싶어졌다. 그 특별 취급이란 게 어떨지는 안 봐도 뻔했기 때문이었다.
그리고 그 우려는 곧 현실이 되었다. 그의 주변에서 넘실대는 선들이 변화를 보이고 있었다. 그것들은 분열에 분열을 거듭했다. 처음에는 수십가닥을 보였던 선들은 이제 눈으로 봐서는 셀 수 없을 지경에 이르러 있었다.
그것은 마치 빛으로 이루어진 파도가 온 사방에서 너울거리는 것 같은 광경이었다.
천무비도(天霧飛刀) 천망회회(天網恢恢)의 장.
제1식. 사살무광(絲殺無光) 비의. 휘란구첩(揮瀾九疊)!
공간을 장악한 무수한 선들이 뭉쳐지더니 곧 거센 해일이 되어 밀려들었다. 겹겹이 밀려가는 파도가 광포한 기세로 몰아쳐가는 광경은 그야말로 장관이었다.
그렇지만 그것을 감당해야 하는 아리엔은 머릿속까지 새하얗게 변했다. 마치 자연재해를 방불케 하는 이 공격을 대체 무슨 수로 막아야 한단 말인가!
그렇지만 그녀의 몸은 이성과 다르게 반응하고 있었다. 전신의 진기가 휘돌면서 응집도롤 높여나갔고, 그것은 검 끝에 이르러 장대한 길이의 검기의 형태로 완성되었다.
무려 십여 미터에 이르는 검기는 그녀가 내리긋는 궤적과 함께 전면으로 투사되었다.
삼절검(三絶劍) 제 2식. 낙인참(落刃斬)
연식(連式). 참공일섬(斬空一閃)
세상을 가를 듯 분출되는 검기의 궤적! 그것은 닿는 모든 것을 쪼개버렸다.
아리엔을 향해 다가오던 광포한 빛의 파도도 예외는 아니었다. 좌우 양 옆으로 갈라지는 그 모습에, 그녀는 자신이 모든 것을 내건 이 한수가 제대로 먹혀들었다고 생각했다.
하지만 그것은 오산이었다.
그녀의 참공일섬은 분명 파도를 가르긴 했지만, 기소천이 만들어낸 파도는 한번이 아니었다.
파도는 그 뒤에도 계속해서 밀려왔다. 그렇게 두 번, 세 번, 네 번··· 거듭 밀려오는 파도 앞에 그녀의 참공일섬은 어느새 씻은 듯 사라졌고, 이젠 눈앞의 모든 것이 파도로 가득차 버렸다.
그것으로 끝이었다. 아리엔은 어느새 자신이 그 파도에 휩쓸려 전신이 녹아버리고 있음을 깨달았다. 참공일섬의 한 수에 자신의 모든 것을 다 쏟아낸 탓에, 눈으로 보고서도 미처 막을 수조차 없었던 것이다.
앞서 두 사람과 마찬가지로 죽음의 경계를 넘어가던 그때, 그녀는 기소천이 다룬 선의 정체를 우연히 볼 수 있었다.
‘말도 안 돼······.’
그녀가 내뱉은 말은 미처 입 밖으로 나오지 못했다.
* * *
기소천에 의해 사망했던 세 사람은 얼마 지나지 않아 멀쩡한 모습으로 되살아났다. 그럴 때마다 이곳이 환상이란 것을 뼈저리게 실감할 수 있었다.
죽었다가 되살아난 괴리감에 잠시 숨을 몰아쉰 아리엔은, 죽기 전 마지막 순간에 보았던 그것을 떠올렸다.
“사검(絲劍)이라니···.”
믿기지 않지만, 기소천이 다룬 무기의 정체는 바로 사검이었다. 비수의 손잡이 끝에 고작 줄을 이었을 뿐인 무기로 이런 변화와 위력이 가능하다니!
아마 직접 경험해 보지 않았다면 믿지 않았을 것이다.
그때, 기소천이 되살아난 그들 앞으로 다가왔다. 그는 자신의 어깨를 한 손으로 두들기며 엄살을 부렸다.
“햇병아리들을 상대로 적당히 봐주는 것도 힘들군. 몸이 절로 쑤신단 말이야.”
그런 그에게 아리엔이 다가갔다. 방금 전까지 험악한 싸움을 생각하면 정말 겁 없는 행동이었다.
“그런데 방금 그 무기, 사검이었나요?”
자신 앞으로 다가와 진지하게 묻는 그 말에, 기소천이 살짝 놀란 듯 고개를 끄덕였다.
“호오, 그 짧은 순간에 잘도 봤군. 모를 줄 알았는데 말이야. 맞다, 방금 전에 사용한 내 무기는 바로 사검이었지.”
“정말로 사검이라니··· 믿기지가 않네요.”
“왜, 사검이 우습게 보였었나 보지?”
그 말이 사검을 깔보는 것처럼 들린 걸까? 조금 삐딱해 보이는 반문에, 아리엔은 고개를 가로저으며 말했다.
“우습게 보였다기보다는··· 사람들에게 그렇게 많이 쓰이는 무기는 아니잖아요.”
“뭐, 그렇긴 하군. 워낙 비주류의 무기라서 사람들의 인식도 별로 좋지 않은 건 사실이니까.”
쓴웃음을 짓는 기소천의 모습에 아리엔은 내심 안도했다. 그가 화를 냈다면 아까보다 더 한 참사가 벌어졌을지도 모르기 때문이었다.
이곳에서야 몇 번을 죽어도 상관없긴 했지만, 그럴 때마다 겪는 고통은 현실과 전혀 다를 게 없는 만큼 수련 외의 문제로 죽는 것만큼은 피하고 싶었다.
“하지만 사검이라고 해서 우습게 볼 건 아니지. 무기라는 종류를 떠나서 누가 어떻게 쓰냐에 따라 아주 무서운 무기가 될 수 있으니까. 주류이든 비주류든 그건 다 마찬가지지.”
그 말에는 아리엔과 다른 이들도 모두 고개를 끄덕였다. 많은 자들이 검을 주 무기로 사용한다지만, 그 수준이 천차만별인 것처럼 이것 또한 그와 다를 바 없었다.
사검도 진정으로 다룰 줄 아는 기소천 같은 사람이 쥐게 되면 세상 그 무엇보다 무서운 무기가 된다.
그들은 오늘, 아주 간단하면서 변치 않는 사실을 그렇게 죽음의 고통을 대가로 치르며 배웠다.
“자, 그럼 충분히 쉬었겠지? 이제부터 반복학습에 들어가기로 한다.”
“으윽······.”
다시 수련을 빙자한 혈전을 시작하겠다는 기소천의 선포에 세 사람의 얼굴이 눈에 띄게 일그러졌다.
“네놈들을 내게 맡긴 녀석을 원망해라. 나는 중간이란 게 없거든.”
이진운을 원망하라는 말 한마디만 남긴 채, 기소천은 다시 싸움을 재개했다. 이번에도 일방적인 건 마찬가지였다.
아니, 오히려 전보다 더 일방적인 형국으로 당했다.
그럴 수밖에 없었다. 이전까지 그가 사용하던 비도술에 이제 겨우 적응되려는 이때, 그가 사검이라는 새로운 무기와 수법을 꺼내들었다.
이에 적응하기 전까지, 그들의 고난은 이미 정해진 거나 다름없었다.
아리엔들은 오늘따라 이 고난의 원흉인 이진운이 더욱더 원망스러워졌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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