6권-07화
* * *
레이첸은 카멜롯 내의 어떤 곳으로 들어가 문을 걸어 잠갔다. 그곳은 이진운이 그에게 따로 배정해준 개인 숙소였다.
가문에서 사용하던 자신의 방처럼 화려하거나 고급스럽진 않지만, 그래도 필요한 것은 다 갖춰져 있어 당분간 지내기엔 그리 나쁘지 않아 보였다. 하긴 폐관수련 할 때는 이보다 더한 환경에서 1년 이상을 보냈으니, 조금 누추한 곳에서 지낸다 해서 불만이 있을 리 없었다.
레이첸은 조용히 침상에 누웠다. 방안은 바늘 떨어지는 소리조차 들릴 만큼 고요했지만 현재 그의 머릿속은 이루 말할 수 없이 복잡한 상태였다.
특히 아버지가 자신을 이런 함대에게 떠맡기듯 놔두고 간 것이 마음에 걸렸다.
‘이것도 저것도··· 하나같이 마음에 드는 게 없어.’
단순히 치기 어린 마음에서 나온 불만이 아니었다. 현재 가문 내에서 자신의 입장이나 처지가 그만큼 불안했기 때문이었다.
‘역시··· 폐관수련에 들어가는 게 아니었어.’
가문에서는 폐관수련을 마치는 시기와 맞지 않아서 자신만 두고 갔다고 했지만, 그게 진짜 이유는 아닐 것이다.
아마도 바이우드 가문의 장자인 자신 대신 [그 녀석]을 차기 후계자로 세우기 위해 수작을 부린 것이겠지. 그래서 일부러 폐관수련이란 핑계로 자신을 놔두고 간 것이 틀림없었다.
더 기가 막힌 것은, 자신의 편을 들어줘야 할 아버지마저 거기에 찬동하고 있다는 사실이었다. 그래서 더욱더 큰 배신감을 느꼈다.
‘어째서지? 가문의 어른들은··· 아버지는 장자로 태어난 나를 제쳐두고, 왜 그런 녀석을 가주로 삼으려 하는 거야? 대체 이유가 뭔데?’
이런 생각을 떠올릴 때마다 억울해서 잠이 오질 않았다.
태어나면서부터 자신은 바이우드 가문의 가주의 자식이었다. 주변으로부터 가주가 될 거란 말을 들으며 자라왔고, 자신도 가문의 대표가 될 정당한 자격을 갖고 있다고 여겨
왔다.
그래서 어느 정도 사리 분간할 수 있을 때부터 피나는 노력을 했었다. 단순히 가주의 핏줄을 이었기 때문에 차기 가주로 낙점되기보다는, 자신에게 그만한 능력이 있다는 것을 입증해서 정당하게 그 자리를 차지하기 위해서였다.
하지만 그 노력은 결국 보답 받지 못했다. 다음 대 가주가 될 거라던 많은 사람들의 기대와 달리, 엉뚱한 자가 나타나 그 자리를 차지했기 때문이었다.
그 이름은 [레슬라 바이우드].
바이우드 가문의 방계 출신의 젊은 사내였다. 그는 레이첸보다도 무려 5살이나 더 많았고, 그만큼 역량도 출중했다.
하지만 그렇다고 해서 역량이 그에 뒤쳐진다고는 생각하지 않았다. 솔직히 지금 맞붙어 싸운다고 해도 지지 않을 자신이 있었다.
그렇지만 아버지도, 가문의 어른들도 그런 노력을 봐주지 않았다. 대체 레슬라에게서 무엇을 본 건지, 그분들은 모두 레슬라를 차기 가주로 낙점한 상태였다.
물론 이에 대한 반발이 없진 않았다. 그동안 자신을 차기 가주로 지지해준 사람들이었다.
그래서 현재 바이우드 가문은 둘로 분열된 거나 다름없었는데, 하필이면 이때에 이런 일이 벌어졌다.
‘날 완전히 가주 후계에서 배제할 셈인 거야.’
폐관수련을 마치는 시기와 맞지 않는다는 이유 하나만으로, 아버지는 가문의 함대 대신 이런 엉뚱한 함대에 자신을 배정해 버렸다.
그것은 결국 자신이 큰 공을 세워서 차기 가주로 합당한 자격을 획득하는 것을 막겠다는 뜻이나 다름없었다.
“하지만 그렇게 쉽게는 안 될 겁니다. 나도 만만한 녀석은 아니니까요.”
레이첸은 그렇게 짓씹듯 중얼거리면서 자리에서 일어났다.
그렇지만 현재 자신이 처한 현실을 보면 그저 한숨만 나왔다. 이제 겨우 출정 경험이 한번 뿐인 신생 함대에서 무슨 공을 세우길 기대할 수 있겠는가.
기껏 해봐야 다른 함대들이 싸우는 걸 보조하는 게 고작일 것이다. 물론 이진운의 역량이 짐작했던 것 이상으로 상당하다는 것은 오늘 직접 경험해 보긴 했지만, 그렇다고 해도 신생 함대의 한계는 어쩔 수 없을 터.
‘그래도 어떻게든 공을 세워야 해. 아버지든 가문의 어른들이든, 더 이상 날 가문의 후계에서 배제할 수 없을 만큼 큰 공을 말이야.’
그러기 위해선 더 강해지는 수밖에 없었다. 지금도 또래는 물론, 모든 오버러들을 통틀어도 충분히 상위 1% 안에 들고도 남을 만한 수준이었지만, 그걸로 만족할 수 있을 리 없었다.
바이우드 가문은 항상 최고의 오버러들을 보유한 곳이었고, 그곳에서 가주가 되려면 당연히 최고가 되어야 했다.
지금 실력으로 최고라고 말하기엔 여러 모로 미숙한 건 사실이었다.
“딱히 할 일도 없으니 수련이나 해야겠군.”
그는 침상 위에 자리를 잡고 앉았다. 그리고는 두 눈을 감고 자신의 내면을 들여다 보았다.
그러자 당장이라도 폭발할 것처럼 들끓는 힘이 느껴졌다.
모든 것을 빨아들일 것 같이 짙고 어두운 소용돌이! 이것이 바로 바이우드 가문의 혈족들이 가진 힘의 근원이었다.
하지만 그건 강력한 만큼 위험천만하기도 했다. 이 힘의 실제 근원은 마(魔)였고, 또는 악(惡)이라 할 수 있었다.
사람들 모두가 경원시할 수밖에 없는 종류의 힘을 오래 전부터 지금까지 다뤄온 것이 바로 바이우드 가문인 것이다.
“역시··· 아무리 강해져도 이 힘은 다루기가 힘들어. 조금이라도 방심하면 날 집어삼킬 것처럼 날뛴단 말이야.”
간단한 수련을 마친 레이첸은 숨을 몰아쉬었다. 수련할 때는 항상 마음을 놓을 수가 없었다. 조금이라도 빈틈을 보였다간, 이 힘은 끝내 자신마저 집어삼킬 테니까.
그렇게 해서 망가진 사례는 바이우드 가문 내에서 많이 볼 수 있었다. 힘에 삼켜진 자들은 언제나 재앙 같은 존재가 되었고, 그들은 같은 바이우드 가문의 사람에 의해 제거되었다.
이 사실은 결코 대외적으로는 밝힐 수 없는, 바이우드 가의 숨겨진 어둠이었다.
그래서 바이우드 가문의 사람은 자신들을 강하게 만들어 주는 이 힘을 다루면서도 항상 경계하는 마음으로 살아왔다. 그것이 바이우드 가문의 피를 이은 자들이 짊어지고 가야 할 업(業)이기 때문이었다.
그것은 레이첸도 마찬가지. 재능이 큰 만큼 더 강대한 힘을 다룰 수 있게 됐지만, 그만큼 위험성도 더 커졌다고 할 수 있었다.
그렇지만 그는 이 힘을 외면하지 않았다. 이 힘의 본질은 너무도 위험하지만, 이 힘이 있었기에 바이우드 가문이 지금까지 연합을 지켜올 수 있었으니까.
그렇기에 바이우드의 피를 이은 자들의 자부심은 매우 컸다. 그동안 이 힘으로 인해 수많은 희생이 따랐지만, 그로 인해 많은 이들을 지켜낼 수 있었기 때문이었다.
‘지금은 고작 가주직 하나 얻지 못해 이러고 있지만, 언젠가는 나도······.’
힘을 다룬 과부하로 인해 가늘게 떨리는 오른손을 굳게 거머쥐었다. 자신이 원하는 가주직도 결국은 하나의 목적을 위한 수단이었다.
그것을 위해서라면, 언제든 자신이 가진 모든 것을 내던질 각오가 되어 있었다.
“···계속해야지.”
레이첸은 다시 수련에 몰입하기 시작했다. 그를 중심으로 다시 폭풍같은 기운이 흐르기 시작했다.
* * *
다음날 아침. 인피니티 킹덤은 곧바로 라인트라 방면으로 향했다.
이번에는 전과 같은 성대한 출정식은 없었다. 그때는 함대 첫 출범과 함께 첫 출정하게 된 것을 축하하기 위해 특별히 마련된 행사였던 것이다.
게다가 이번에는 한가하게 행사나 즐기고 있을 시간이 없었다. 라인트라 방면은 지금도 인베이더들과 치열하게 맞붙고 있는 상황.
그곳에서는 한시라도 전력이 보충되길 기다리고 있는데, 이곳에서 한가하게 시간을 보내고 있을 틈이 없었다.
인피니티 킹덤은 아르탈 행성을 벗어나 곧바로 워프를 전개했다. 변동중력원에 의해 생성된 저 먼 시공까지 이어주는 웜 홀의 공간으로 함대 전체가 진입해 들어갔다.
그때부터는 전선에 도착할 때까지 당분간 휴식이었다. 워프에 돌입하자마자 아르페인도 함대 전체에 그렇게 명령을 해두었다.
“지금까지 출정 준비하느라 수고들 했어. 그러니까 이제부터 다들 편히 쉬고 있어. 물론 메인브릿지에서 모니터링 할 최소한의 인원은 있어야겠지만.”
[예.]
“앞으로 라인트라에 도착하게 되면 쉬지 못하고 연전하는 하루가 계속될 거다. 그러니 지금은 쉬더라도 최소한 마음에 각오들은 해 두도록 해. 그때는 이런 여유 따윈 사치일 테니까.”
[아무래도 그렇겠지요. 알겠습니다. 그때를 대비해 원 없이 쉬도록 하죠.]
[그동안 못잔 잠을 이번 기회에 몰아서 자고 싶네.]
[나도요. 철야만 벌써 며칠 째였는지. 피부가 다 상했다니까.]
능청스런 오퍼레이터들의 대화를 들으면서 아르페인은 픽 웃고 말았다. 그들의 고충을 모르는 바는 아니었지만, 그도 어쩔 수가 없었다. 워낙 갑작스럽게 정해진 출정이었으니까.
“근데 우리 사령관님은 하루도 쉬질 않으시는군.”
아르페인은 그렇게 중얼거리면서 수련실 쪽의 영상을 비치고 있는 홀로그램 스크린을 향했다. 내부에서 뭘 하는지는 알 수 없었지만, 제자들과 함께 아주 고된 수련을 하고 있는 것만은 분명해 보였다.
이틀 전부터 수척한 얼굴로 나오는 아리엔들의 얼굴을 봤기 때문이었다. 이진운에게 듣기로는 앞으로 도착할 때까지 계속 그렇게 한다고 하던데, 과연 아리엔들이 버텨낼 수 있을지가 의문이었다.
그래가지고는 라인트라에 도착한 뒤에 제대로 싸울 수 있을지 조금은 염려되었다.
“뭐 수련 쪽은 내가 아는 바가 없으니 뭐라 하기도 그렇군. 사령관님의 판단을 믿어야지.”
그렇게 그에 대한 우려를 접어둔 아르페인은 다시 자신의 일에 전념하기 시작했다. 승무원들 대다수는 오늘부터 편히 쉴 예정이지만, 이진운을 대신해 함대를 도맡고 있는 그는 도착할 때까지 쉬지 못할 운명이었으니까.
“···이놈의 워커홀릭 신세는 언제 벗어나려나.”
그는 자신의 신세를 한탄하며 다시 업무에 집중하기 시작했다.
* * *
출정하고 난 뒤에도 아리엔들의 수련은 변함이 없었다. 아니 갈수록 체감되는 수련의 강도는 점점 더 높아져만 갔다.
수련의 시간이 길어질수록 그만큼 실력도 많이 늘었지만, 수련강도도 그에 비례해 높여나갔기 때문이었다.
특히 이진운은 매번 환상으로 새로운 상대를 구현시켰는데, 이게 아주 골치아팠다.
지금까지 보지 못했던 상대들은 제각기 다양한 수법을 들고 나왔는데, 여기에 대응하는 것이 너무 어려웠기 때문이었다.
그들이 사용하는 수법이나 무기술은 너무도 다양했다. 맨손박투는 물론, 궁술이나 창술 같은 보편적인 무기들도 있었지만, 아리엔들이 난생 처음 보는 종류의 암기나 기문병기를 다루는 적들까지 튀어나왔다.
그래도 몇 번 상대하면 어느 정도 익숙해지면서 그럭저럭 대응할 수 있었지만, 문제는 그렇게 되기까지의 과정이었다.
언제나 그랬지만, 상대의 수법이나 무기에 익숙해지기 전까진 참혹하다 싶을 만큼 일방적으로 유린당해야 했다.
그것은 오늘도 변함이 없었다. 소리비도라고 했던가? 기이한 수법을 사용하는 상대는 지금까지 상대했던 적들 중에서도 난적이었다.
물론 강함 자체만으로는 이전에 상대했던 자들과 별다를 것 없었지만, 그가 다루는 기술이 문제였다.
예측할 수 없을 만큼 변화무쌍하면서도, 자신의 수법을 변칙적으로 활용하는 터라 번번이 속아서 치명상을 입기 일쑤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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