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검신의 검은 우주를 가르고-131화 (132/448)

6권-06화

“자부심이라니? 갑자기 무슨 헛소리를······.”

얼토당토 않는 소리에 기가 차서 몇 마디 되돌려주려 했던 아리엔은 일순 하던 말을 멈추고 말았다.

그럴 수밖에 없었다. 레이첸에게서 갑자기 묵직한 기세가 흘러나오기 시작했으니까.

그것은 일순간적인 감정을 통제 못해서 흘러나온 기세가 아니었다. 오로지 아리엔 한 사람만을 향해 쏟아진 걸 보면, 아주 작정하고 드러냈다는 걸 알 수 있었다.

“너 지금······!”

아리엔의 얼굴도 그만큼 차가워졌다. 자신을 상대로 이렇듯 대놓고 기세를 내뿜는다는 건, 아예 이 자리에서 싸우자는 거나 다름없었다.

그녀의 손끝이 허리에 매인 검 자루로 향했다. 저 쪽에서 먼저 걸어온 싸움이었다.

이렇게 영문도 모르고 일방적으로 매도당하기까지 했는데, 여기서 물러선다는 건 자신의 자존심이 허락하지 않았다.

쿠구구구!

레이첸과 아리엔, 양측의 기세가 서로 팽팽한 형태로 맞서기 시작했다. 검술을 위주로 수련해온 아리엔의 기세가 칼날처럼 예리하다면, 레이첸의 기세는 모든 것을 태우는 불꽃처럼 사납고 격렬하기 그지없었다.

“말하다가 갑자기 이게 뭔 일이야?”

“왜들 싸우려는 거야?”

클레브와 엘레나가 다급히 진기를 끌어올려 기세에 저항했다. 이런 기세의 격돌에 아무 방비 없이 휘말리면 내상을 입게 되기 때문이었다.

“아아, 그래. 썩어도 준치라고··· 최소한 이 정도는 한다 이거지?”

자신의 기세에 맞서 대항하는 아리엔의 모습을 눈여겨본 레이첸이 한층 더 날카로운 눈빛을 드러냈다. 그렇지만 그 목소리에는 긴장감 따윈 찾아볼 수 없었다.

“하지만 이게 전부라면 별 볼일 없네. 웰라우드 가가 왜 그 지경이 됐는지 이제야 알겠어.”

웰라우드 가를 비하하는 그 말에 아리엔이 발끈하려던 순간, 갑자기 폭증된 기세가 밀려왔다. 방금 전과는 비교도 할 수 없는 수준의 기세였다.

쿠오오오!

“윽··· 이런!?”

기세를 칼날처럼 가다듬어서 레이첸에게서 밀려오는 기세의 폭풍을 베어내기 시작했다. 하지만 워낙 격렬하고 사나워서 오히려 그녀의 기세가 위태롭게 흔들리고 있었다.

‘나보다도 아직 어려 보이는데 어떻게 이런 힘을!?’

자신을 몰아붙이고 있는 기세를 직접 경험하면서도 실감이 가지 않았다. 그동안 정말 많이 성장했다고 자부하는 자신을 기세만으로 이렇게 밀어붙이다니!

이 정도면 B랭크는 훨씬 상회하는 수준이었다. 아니 A랭크 중에서도 최상위, 어쩌면 S랭크에 발을 걸친 수준일지도 몰랐다.

심지어 이런 기세를 발휘하면서도 레이첸은 여유로웠다. 그렇다면 아직도 전력을 다하지 않았다는 말이 된다.

‘저 애도 분명 나와 같은 5대 가문인데도 이렇게 차이가 날 줄이야.’

아리엔은 저도 모르게 입술을 깨물었다. 이진운에게 사사하면서 자신의 실력은 비약이라 말할 만큼 성장한 상황이었다. 지금이라면 다른 5대 가문의 직계 계승자라 하더라도 크게 밀리지 않을 거라 생각했는데, 그것은 그녀의 오산이었던 것이다.

물론 가문의 비전을 복원한 게 불과 얼마 되지 않았다지만, 그건 변명에 지나지 않는다. 현재 자신이 체화시킨 것은 가문의 비전보다는 이진운이 가르쳐준 점창의 절학이었으니까.

그런데도 자신보다 어린 녀석에게 이렇게 밀릴 수밖에 없다는 건 더없는 굴욕이었다.

“난 바이우드의 장자야. 내가 어떤 고난을 겪어가면서 이 힘을 얻었는지 알아?”

이어지는 목소리. 분노에 찬 레이첸의 목소리는 의외로 차분하게 들렸다.

하지만 아리엔은 알 수 있었다. 녀석이 얼마나 분노하고 있는지를. 목소리에서 묻어나오는 은은한 살기만 봐도 알 수 있었다.

“물론 네 입장도 나름대로 이해는 하고 있어. 가문의 비전을 잃어버린 사정도 알고 있고.

하지만 너무 안일했어. 고작 생각한다는 게 저 밑바닥부터 시작해서 강해지는 거였다니. 그런 걸로 강해질 수 있을 리가 없잖아. 차라리 아직 남아 있는 가문의 영향력으로 이용할 수 있는 건 최대한 이용해서 강해져야 했어. 그랬다면 지금처럼 그 수준에 머물고 있진 않았겠지.”

레이첸의 말도 아주 틀린 건 아니었다. 웰라우드 가가 몰락했다곤 하지만, 그래도 수백 년 동안 쌓아온 인맥과 힘이 다 사라진 건 아니었으니까.

그것을 이용했다면 연합 내에서 나름대로 요직에 올라서, 과거의 비전이 아니더라도 나름대로 강해질 길을 찾을 수 있었을지도 모른다.

하지만 아리엔은 가문의 비전을 포기할 수 없었다. 그래서 일부러 가문의 힘에 의존하지 않고 밑바닥부터 시작했던 것이다.

“그래서, 지금까지 나름대로 필사적으로 노력해온 내가 한심하단 거야? 멀쩡한 가문에서 아무 염려 없이, 강해져온 네가?”

반박하는 그 말에 레이첸은 피식 웃어보였다. 그것은 냉담하기까지 한 조소였다.

“글쎄, 네가 걸어온 그 길이 과연 필사적이었는지는 모르겠네. 수단 방법 다 가리면서 뭐가 필사적이고 최선이었다는 거지? 그러니까 그 꼴 그 모양이지.”

쿠우우우!

그 순간, 레이첸의 기세가 한층 더 강화되었다. 이젠 단순히 기세라고 말하기 보다는, 공간을 집어삼키는 영력의 해일이라고 보는 게 옳을 것이다.

만일 이 자리에 누가 있었더라면 기세에 휘말려 죽어도 이상하지 않을 지경이었다. 클레브와 엘레나만 하더라도 기세의 여파에 대항하기 위해 진기를 최대한 끌어올려가면서 겨우 버티는 것만 봐도 알 수 있었다.

아리엔의 기세는 이제 위태로운 촛불마냥 흔들렸다. 그것만 봐도 알 수 있었다. 레이첸이 작정한다면 언제든 짓눌러 버릴 수 있다는 것을.

그렇지만 녀석은 거기서 더 이상 기세를 키우지 않았다. 아리엔을 궁지로 몰아넣는 선에서 멈추고 만 것이다.

레이첸은 다시 입을 열었다.

“그리고 내가 5대 가문의 장자라고 해서 편하게 먹고 마시면서 뭐든지 쉽게 얻었을 거라 생각하지 마. 난 목숨을 걸고 이 힘을 얻었어. 아니, 앞으로의 내 미래, 아니 인생 자체를 걸었지. 넌 그런 각오를 하고 있었어?”

“······그건.”

아리엔은 자신에게 던져진 그 물음에 쉽게 답하지 못했다. 자신이 할 수 있는 한도 내에서 필사적으로 노력했느냐고 묻는다면, 얼마든지 대답할 수 있었지만··· 레이첸이 말한 것처럼 자신의 목숨과 미래까지 저당 잡힐 각오까지 했냐고 한다면 도저히 고개를 끄덕일 수가 없어서였다.

“그래, 힘이란 그런 거야. 그만한 각오와 희생 없이는 강해질 수 없는 법이지. 하지만 그걸 알면서도 실제 그렇게 할 수 있는 사람은 많지 않지. 너도 그런 흔한 부류 중 하나일 테고.”

힘을 얻기 위해선 각오와 희생이 필요하다고 입에 담는 레이첸. 아리엔은 그 말이 그냥 지나가는 식으로 내뱉은 허언으로 들리지 않았다. 직접 겪지 않고선 저만한 무게와 감정이 말에 선명하게 실릴 리가 없었다.

‘···대체 이 애는 강해지기 위해서 뭘 각오하고 희생을 한 거지?’

그런 의문이 들었지만, 직접 말해주지 않는 한 알 길이 없었다. 다만 한 가지만큼은 분명했다. 어린 나이에 저만한 힘을 얻기 위해서는 결코 정상적인 방법으론 안 된다는 것을.

뭔가 소중한 것을 지불하지 않고서는 절대 가질 수 없는 강함이었다.

허나 그때, 이진운이 드디어 앞으로 나섰다. 지금까지는 일부러 잠자코 지켜봤지만, 더 이상 기세다툼을 하는 건 더 참을 수 없었다.

쿵!

그의 오른발이 가볍게 바닥을 쳤다. 그러자, 기세가 둥근 동심원처럼 퍼져나가더니 아리엔과 레이첸 두 사람의 기세를 깨끗이 집어삼켰다.

“어?”

“이건!?”

아리엔과 레이첸은 당황한 듯 물러섰다. 자신들의 기세가 마치 지우개로 지운 듯 지워지고 있는 것이 아닌가!

‘대체 어떻게 이런 게 가능한 거지?’

특히 놀란 것은 레이첸이었다. 그가 아는 건 아버지가 자신을 이 자에게 맡겼다는 정도일 뿐. 이진운이 어떤 인물인지는 자세히 알지 못했다.

‘처음엔 아버지가 왜 날 이 작자에게 맡겼나 했는데··· 역시 나름대로 한 수가 있다 이거지?’

처음엔 우습게 여기던 상대였는데, 상상 이상으로 강했다. 자신과 아리엔의 기세를 동시에 깨끗하게 지워낼 정도라면 마이스터 급 초입은 훌쩍 넘어설지도 모른다.

그런 레이첸에게 이진운이 사납게 웃으며 경고했다.

“처음에는 아이들의 재롱 정도로 넘어갔지만, 그것도 정도가 있는 법이지. 더 싸우고 싶다면 내게 얼마든지 말해 봐. 나도 공포로 위계질서를 확립하는 방식도 그리 싫어하지 않거든.”

더 이상 다툰다면 자신의 손으로 응징하겠다는 말이었다.

레이첸도 이쯤에서 물러서기로 했다. 상대가 자신보다 엄연히 우위로 보이는데, 괜히 불리한 싸움을 걸 필요는 없었다.

“뭐, 실망스럽네. 앞으로 되도록 얼굴 보지 않았으면 해. 보면 화가 치밀어오를 것 같으니까.”

마지막으로 그 말을 아리엔에게 건넨 레이첸은 응접실을 나섰다. 그 말엔 조소도 경멸도 없었다. 이젠 정말로 아리엔에게 아무런 감정조차 없다는 느낌이었다.

그리고 그가 나간 뒤 자동으로 닫히는 문을, 아리엔은 멍하니 지켜보았다.

“언니······.”

엘레나가 걱정스러운 듯 불렀지만, 아리엔은 힘없이 웃으며 괜찮다고 했다.

이진운은 아리엔만 남기고 엘레나와 클레브를 바깥으로 내보냈다.

단 둘이 남자, 그제야 아리엔이 입을 열었다.

“분해요.”

“왜? 저 녀석이 너한테 함부로 한 게 화가 난 거냐?”

이진운이 그렇게 묻자, 아리엔은 고개를 가로저었다. 그리고는 쓰게 웃으며 말했다.

“아니요. 저런 녀석 하나 못 이긴 나한테요.”

처음에는 자신의 노력을 비하했다는 사실에 화가 났다. 하지만 레이첸과 말을 주고받으면서 그 감정은 조금씩 바뀌었다.

그것은 의문이었다. 그 애는 뭔가를 희생하고 각오하면서 그만한 힘을 얻었는데, 자신은 가문이 몰락해가는 중에도 너무 안일하게 시간을 보냈던 것은 아닌가 하는 후회의 감정이었던 것이다.

물론 레이첸이 하는 말이 무조건 옳다고 할 수는 없었지만, 자신이 보내온 과거에 대해 회의감이 드는 것은 어쩔 수가 없었다.

그런 아리엔에게 이진운이 말했다.

“신경 쓸 것 없다. 각자 자신의 길이 있는 법이니까. 확실히 저 아이는 뭔가를 희생해서 힘을 얻은 모양이더군. 단순히 수련으로 쌓을 수 있는 힘이 아니야.”

“역시 그랬군요.”

“하지만 네 힘은 너 스스로 밑바닥부터 차근차근 쌓아올린 탑과 같다. 그건 결코 안일한 마음가짐으로 이룰 수 없는 것이지.”

“그래도 졌는걸요?”

힘없이 투덜거리는 아리엔의 그 모습에, 이진운이 의미심장한 말을 던졌다.

“졌다고? 과연 그럴까?”

“···지금 그 말은 무슨 뜻인가요?”

“한번 앞섰다고 해서 영원히 앞설 수 있는 건 아니란다.”

“하지만 저 애도 계속 멈춰 있지는 않겠죠. 제가 노력하는 만큼, 아니 그 이상으로 노력할 테고요. 그럼 차이는 여전하지 않을까요?”

여전히 자신감 없는 태도에, 이진운은 그동안 생각했던 바를 솔직히 말했다.

“그럴 수도 있겠지. 하지만 나는 네 노력을 높이 사고 있다. 사실 아무런 편법 없이, 우직하게 수련할 수 있는 사람은 그리 많지 않거든.”

“제가 그런가요?”

“그래. 넌 충분히 인정받을 자격이 있어.”

“스승님께 그 말을 들으니 조금 힘이 나네요.”

조금은 흐릿해 보이는 미소를 짓는 아리엔. 이진운의 위로가 효과가 있었던지, 완벽하지 않더라도 어떻게든 기운을 차린 듯했다.

“그럼 이제부터 그 녀석을 따라잡기로 하자.”

“어떻게요?”

레이첸을 따라잡게 해준다는 그 말에 아리엔의 두 눈이 휘둥그레졌다. 하지만 그 뒤에 나온 방법을 듣고는 그녀의 얼굴은 새하얗게 변했다.

“어제 치른 수련을 더 강도 높게 하는 거지.”

“그··· 걸요? 농담이시죠?”

단 하루의 시간을 무려 1년의 시간으로 늘려버렸던 지독간 지옥수련이었다. 그걸 한층 더 강도 높게 하겠다면 얼마나 굴리겠다는 건가?

“농담은 무슨? 난 수련에 대한 걸로 농담 같은 건 안한다. 적어도 그 정도는 해야 따라잡을 수 있지.”

아리엔은 그 순간 고민했다. 자신이 괜한 말로 지옥문을 자처해 연 것이 아닌가 싶어서였다. 그리고 그 짐작은 곧 현실이 되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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