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검신의 검은 우주를 가르고-130화 (131/448)

6권-05화

이진운이 관리국장을 만나러 간 사이 아리엔들은 간만에 휴식을 만끽하고 있었다. 현실에서 하루는 환상에서 무려 1년이나 되는 시간.

그 긴 시간동안 거의 쉬지도 않고 싸우기만 했으니, 그들이 겪은 정신적 스트레스는 말로 다 할 수 없을 지경이었다.

아마 부동심결의 공능이 아니었다면 진작 미쳤을지도 모른다.

하지만 숙소에서 편히 쉬면서도 아리엔의 머릿속에는 한 가지 기억이 계속 머리에서 맴돌았다.

“그때 봤던 그건 대체 뭐였던 걸까?”

너무도 높고 맑았던 푸른 하늘과, 그것을 향해 검을 내질렀던 자신의 모습을 도저히 떨쳐 버릴 수가 없었다.

그리고 들려왔던 만상개화 의검천추.

지금까지 한 번도 사용할 수 없었던, 아니 사용 방법조차 알 수 없었던 그녀만의 고유스킬 명이었다.

혹시나 싶어 이진운에게 물어보기도 했었지만, 그도 별다른 대답은 해주지 못했다. 의검천추라는 단어가 들어가 있는 만큼, 일단 무예와 직간접적으로 연관이 있는 스킬일 거라 예측하고 있긴 했지만 아직 확실한 건 하나도 없었다.

‘그런데 왜 이제 와서 그런 걸 내게 보여주는 거지?’

문의 부흥을 위해서 강해지려 할 때는 전혀 기미도 안 보였던 고유스킬이 하필 지금에 와서 반응을 보인 걸까?

아리엔은 결국 쓴웃음을 짓고 말았다. 이미 그에 대한 미련을 다 흘려버렸다고 생각했는데, 이렇게 마음이 심란한 것을 보면 그렇지도 않은 모양이었다.

“그만 포기하자. 내가 고민한다고 해서 될 일도 아니고.”

지금까지 수많은 방법을 동원해 봤어도 발동법을 찾지 못했던 고유스킬이었다. 조금 묘한 일을 경험했다고 해서 뭔가 크게 달라질 거라곤 생각하지 않았다.

차라리 이렇게 고민할 시간에 편히 쉬고, 다시 무공 수련에 전념하는 게 나을 것이다.

그녀는 침상에서 일어나 복장을 가다듬었다. 처음엔 휴식을 취한다는 게 마냥 좋았는데, 누워 뒹구는 시간이 반나절 되자 이젠 좀이 쑤실 지경이었다.

“수련할 땐 너무 힘들어서 진저리쳐졌는데, 어느새 나도 중독된 걸까?”

푸념 섞인 말을 내뱉은 그녀는 숙소를 나섰다. 이제 슬슬 점심 식사를 해야 할 시간이었다.

그녀는 카멜롯 내에 있는 구내식당으로 향했다. 바깥에서 식사를 하는 것도 나쁘지 않았지만, 카멜롯의 구내식당 식사도 상당히 훌륭한 편이었다. 그리고 승무원들에게는 무료라는 점이 더 마음에 들었다.

식당에 도착한 아리엔은 마침 식사를 하러 나온 엘레나와 클레브를 발견할 수 있었다. 최근 클레브는 엘레나를 자주 데리고 다녔는데, 그 모습이 마치 삼촌과 조카 관계 같았다.

환상 속에서 치른 수련에 대해 이런저런 이야기를 나누면서 식사를 배식 받으러 갔을 때, 그들 세 사람은 뜻밖의 인물을 만나게 되었다.

“어? 제이나 씨? 여기서 뭐하세요?”

조리모와 흰색 앞치마를 두른 그녀의 모습에 아리엔과 일행이 조금 당황한 얼굴이 되었다. 하지만 제이나는 빙긋 웃으며 말했다.

“아, 배식 중이에요. 요즘 여기서 일하고 있거든요?”

“제이나 씨가요?”

“아무 일도 하지 않고 신세만 지는 것도 그렇잖아요. 뭐라도 해야죠. 그래서 이 일도 제가 자청해서 하게 되었어요. 일도 생각보다 나쁘지 않고요.”

그녀는 그렇게 말하면서 세 사람의 식판에 식사를 퍼서 담아 주었다. 그것을 멍한 표정으로 받아든 그들은 식당의 한쪽 테이블에 모여 앉았다.

먼저 입을 연 것은 아리엔이었다.

“하이 엘프가 직접 배식하는 모습을 보게 되다니. 이건 진짜 역사에 길이 남을 일이네.”

하이 엘프는 언제나 고귀한 취급을 받는 존재였다. 희귀 종족이라 불리는 엘프들 중에서도 왕족이나 다름없으니 더 말할 것도 없었다.

그런 하이엘프가 배식하는 광경은 희귀하다 못해 전례에도 없던 일일 것이다.

클레브도 쓴웃음을 지으며 말했다.

“오늘따라 구내식당이 좀 벅적벅적하다 싶더니, 이래서였나?”

“확실히··· 오늘따라 사람이 많네요. 특히 남자들이요.”

조리모와 앞치마를 하고 있는 제이나의 모습은 확실히 매력적이었다. 안 그래도 비현실적으로 아름다운데, 여기에 앞치마가 더해지자 그것이 너무도 가정적이고 친근하게 다가온 것이다.

구내식당을 찾아온 남성들은 뭔가 홀린 듯 다가가 식사를 받아갔다. 그녀의 아름다움에 푹 빠진 얼굴들이었다. 그녀가 식사를 식판에 담아줄 때면, 그것이 감격스러워 어쩔 줄을 몰랐다.

식사를 받아온 이후에도 마찬가지였다. 그들은 식사를 무슨 예술 작품이라도 되는 양 아까워서 거의 먹지를 못했다. 제이나가 손수 담아준 거라서 그런 모양이었다.

그래도 그녀가 준 것을 잔반으로 버릴 수는 없었던지, 결국은 어찌어찌 전부 먹어치웠다. 얼마나 깔끔하게 먹어치웠던지 식판이 닦지 않아도 반들반들할 지경이었다.

식사를 하면서 주변을 살피던 아리엔은 기가 차서 혀를 내둘렀다.

“와, 저 정도면 거의 매료마법에 걸린 것 같은 수준이네. 하여간 남자들이란······.”

“······.”

아리엔의 시선이 자신을 향하고 있음을 깨달은 클레브는 못 들은 척 먹는 데에만 집중했다. 여기서 뭐라고 해 봐야 오히려 좋지 못한 소리를 들을 게 뻔해서였다.

그 와중에도 엘레나는 별 말 없이 먹기만 했다. 한창 성장기라서 그런지 너무 배가 고파서였다. 그녀의 몸집은 꽤나 작았지만, 먹는 양은 상당했다. 퍼온 식사량만 해도 남들의 거의 세 배나 퍼왔지만, 순식간에 깨끗이 먹어치웠다.

“세상에··· 그 음식이 다 어디로 들어간 거야?”

아리엔이 질린 듯 중얼거렸다. 자신은 그 반도 못 먹을 것 같은데, 엘레나는 그걸 다 먹고도 따로 챙겨온 간식을 꺼내먹고 있었다.

“그렇게 많이 먹으면 살 안 찌니?”

입안에 쿠키를 한가득 씹고 있던 엘레나는 아리엔의 그 물음에 대수롭지 않다는 듯 말했다.

“안 쪄, 전혀. 예전부터 이렇게 먹어왔는데도, 오히려 자꾸 마르더라고. 그래서 먹는 양을 더 늘렸어.”

“그건 좀 부럽네······.”

아무리 먹어도 찌지 않는 체질이라니, 여자에겐 가장 이상적인 체질이었다. 엘레나가 동생 같은 아이라서 그렇지, 만약 모르는 관계였다면 그 말만으로도 꽤나 분했을지도 모른다.

헌데 그때였다. 구내식당 옆을 지나가는 누군가가 언뜻 보였다. 낯익은 모습에 아리엔이 시선을 집중하자, 곧 이진운의 모습을 발견할 수 있었다.

“어, 스승님이잖아? 그런데 옆에 저 애는 또 누구지?”

아리엔이 아리송한 표정으로 되물었다. 하지만 클레브나 엘레나도 모르긴 마찬가지였다.

“글쎄요. 곧 알게 되겠지요. 직접 관리국에서 데려온 모양인데 보통 아이는 아닐 겁니다.”

“역시, 그렇겠죠?”

클레브의 말에 고개를 끄덕거린 아리엔은 이진운이 데려온 소년을 살폈다. 나이는 기껏 해봐야 엘레나와 동갑이거나 한두 살 정도 위로 보였다.

그리고 조금 뒤, 아리엔들은 이진운의 호출을 받아 이동하게 되었다.

응접실에 도착한 그들은 이진운에게 좀 전에 봤던 소년을 소개받을 수 있었다.

“앞으로 우리와 함께 할 레이첸 바이우드라고 한다. 그러니까 너희들도 이 녀석이 인피니티 킹덤에서 적응할 수 있도록 앞으로 많이 도와주도록 해.”

“예, 그럴게요.”

간단한 자초지종을 들은 만큼, 아리엔들도 레이첸 바이우드에 대해 큰 거부감은 없었다. 앞으로 얼마나 함께 하게 될지는 모르겠지만, 바이우드 가문의 장자인 이상 계속 인피니티 킹덤 소속에 속해 있진 않을 터.

그때까지만 함께 잘 지내면 될 것이다.

“난 아리엔 웰라우드야. 앞으로 잘 부탁해.”

아리엔이 먼저 인사를 건네자, 시큰둥한 표정을 고수하던 레이첸의 눈에 이채가 떠올랐다.

“아, 그 웰라우드 가의 차녀? 최근 비전을 복원했다고 들었는데, 이런 데에 다 있었네.”

“응? 날 알아?”

“알지. 꽤 유명하거든. 웰라우드도 한때는 우리 바이우드와 맞먹던 가문이었잖아. 지금이야 몰락했지만, 그래도 관심을 갖지 않을 순 없지.”

“그렇구나. 바이우드에서는 우리 가문에 관심 없을 줄 알았는데······.”

그건 좀 뜻밖이었다. 같은 5대 가문이라곤 하지만, 이미 오래 전에 몰락한 자신의 가문에까지 신경을 쓰고 있을 줄은······.

그래도 나쁘지 않은 기분이었다. 하지만 그것은 곧 들려온 레이첸의 말에 금세 깨져버리고 말았다.

“하지만 난 말이야. 같은 반열에 있던 가문이라고 해서 특별 취급할 생각은 없어. 특히 실력이 없다면 말이야. 앞으로 내 걸림돌이 되지 않았으면 좋겠어.”

“뭐?”

아리엔은 일순 너무 황당했던 나머지 뭐라 말이 나오지 않았다. 몰락한 가문 출신인 만큼 그녀가 남들에게 무시당한 경험이 없는 건 아니었지만, 이렇게 처음 보자마자 면전에서 이런 소릴 들은 경우는 단연코 이번이 처음이었다.

황당했던 감정은 곧 짜증과 분노가 되었다. 아리엔이 두 눈을 날카롭게 뜨며 되받아쳤다.

“이 건방진 꼬맹이가 지금 뭐라는 거야? 너는 그럼 내 실력을 가지고 걸림돌 운운할 수 있다는 거야?”

“그렇지. 지금 그 수준이면 별 거 아닌데?”

그런 아리엔을 힐끔 쳐다보면서 피식 웃는 레이첸. 하지만 녀석의 눈빛은 분명 웃고 있지 않았다. 오히려 차갑게 가라앉아 있었다.

분위기가 조금 험악해졌지만, 이진운은 아직 개입하지 않았다. 저들은 당분간 함께 해야 할 사이였다. 그래서 좀 더 두고 본 다음에 개입하기로 했다.

“정말 어처구니가 없네. 보자마자 시비라니. 대체 왜 이러는 건데? 나와 싸우고 싶어?”

차가운 표정으로 묻는 그 말에, 레이첸은 입매를 뒤틀었다.

“아니, 그냥 화가 나. 널 보니 말이야.”

“화가 난다고?”

워낙 뜬금없는 말인지라 아리엔은 치솟던 화마저 가라앉았다. 오늘 처음 만나서 자기소개를 건넸을 뿐인데 화가 난다니··· 하도 어이가 없어서였다.

“그래, 같은 5대 가문 출신이면서 이런 곳에서 최하위 오버러로 빌빌거리는 그 모습이 꼴사납단 말이야. 너도 5대 가문출신이면 거기에 맞게 사는 게 어때?”

한 마디로 말하자면··· 자신과 같은 이름 높은 가문 출신이 남 밑에서 활약하는 게, 녀석에게는 눈꼴시다는 뜻이었다.

“그건 네가 상관할 바가 아니야. 그리고 이곳이 어때서? 나는 스승님의 함대인 인피니티 킹덤에 소속됐다는 데에 나름대로 자부심을 갖고 있어. 그리고 그런 덕분에 지금처럼 강해졌고. 그걸 왜 네가 맘대로 평가하고 화내는 거야?”

짜증스런 표정으로 되받아친 아리엔의 모습에, 레이첸도 상당히 불쾌하다는 반응을 드러냈다.

“아, 그래. 다른 머저리들 같았으면 나도 신경 쓰진 않았겠지. 하지만 같은 5대 가문 출신이 이런 모습이라면 우리들의 얼굴에 먹칠하는 것 같잖아.”

“정말 어이가 없네. 난 그런 거 신경 안 써! 전 우주에 이름 높았던 허울 좋은 5대 가문? 그런 게 무슨 소용이야?”

물론 그녀도 지난 옛 가문의 명성에 대해 전혀 신경 쓰지 않는 건 아니었다. 그것을 다시 되살리기 위해 노력해 왔지 않던가. 하지만 그렇다고 해서 오래 전에 잃어버렸던 옛 명성만을 부여잡고 있을 수만은 없었다.

이상보다는 현실을 먼저 봐야 했다. 그래서 맨 밑부터 시작해 지금에 이르지 않았던가. 물론 이진운의 공이 컸지만, 그녀도 노력하지 않았더라면 지금의 결과는 결코 존재하지 않았을 것이다.

그렇지만 그것이 레이첸에게는 전혀 다르게 들렸다.

“그렇군. 넌 가문에 대한 자부심마저 버렸구나.”

#


0