6권-04화
이진운이 고개를 갸웃거리며 긴가민가하고 있을 때, 그가 온 것을 알아챈 관리국장이 먼저 입을 열었다.
“아, 이제야 왔군. 어서 오게. 마침 잘 왔어.”
“무슨 일로 부르신 겁니까? 내일이 바로 출정인데 말입니다.”
안 그래도 바빠 죽겠는데 무슨 일로 불렀냐는 불만 어린 말투였다. 그런 이진운의 반응을 본 베네트가 미안하다며 말했다.
“아, 그 점에 대해서는 사과하지. 출정 준비하느라 바쁠 텐데 말이야. 하지만 꼭 부탁할 일이 있어서 어쩔 수가 없었네.”
부탁이라는 말에 이진운도 표정을 누그러뜨렸다. 상대가 먼저 굽히고 나오니 더 뭐라 할 수도 없었다.
“관리국장님께서 하는 부탁이라니··· 부담스럽군요.”
그냥 하는 말이 아니라 정말로 부담스러웠다. 관리국장은 말 그대로 무소불위의 권력을 휘두를 수 있는 자였다. 그런 그가 자신에게 부탁이라니··· 대체 뭘 부탁한다는 말일까?
“그렇게 대단한 부탁은 아닐세. 단지 이 아이를 자네 함대에 일원으로 받아줬으면 좋겠어.”
“그 아이를 말입니까?”
“그래, 자네도 전에 한번 봤었을 텐데. 인피니티 킹덤의 첫 출정식 때 말이야.”
“출정식 때 말입니까?”
생각지도 못했던 출정식에 대한 언급에 이진운은 즉시 자신의 기억을 더듬어 봤다. 하지만 생각보다 잘 떠오르지 않았다. 소년의 얼굴이 조금 낯익다는 느낌은 있었지만, 어디서 봤던 것인지 도무지 기억을 할 수가 없었다.
그러자 베네트가 입을 열었다.
“바이우드 가문의 가주인 바이첸 바이우드의 자식이지.”
“아, 그때!”
그 말을 듣고서야 간신히 떠올릴 수 있었다.
당시 출정식에 참석했던 바이첸 바이우드는 워낙 거물이라서 잊을 수가 없었다. 그리고 그 옆에 있던 저 소년에 대해서도 이제야 기억이 났다.
그 때 옆에 있던 바이첸 바이우드의 자식에 대해서는 스쳐지나가듯 본 게 전부인 터라 쉽게 기억을 떠올리지 못했던 것이다.
“레이첸 바이우드라고 하네. 올해로 15세가 되지.”
“······.”
이진운은 레이첸 바이우드의 얼굴을 조용히 바라보았다. 아직 앳된 기가 남아 있는, 얼핏 봤을 땐 소녀라고 해도 믿을 만큼 아주 곱상하게 생긴 소년이었다. 하지만 그 얼굴에는 불만의 감정이 가득해 보였다.
“제게 그 아이를 맡기는 이유가 뭡니까? 바이우드 가문의 장자라면서요. 그런 아이가 왜?”
바이우드 가문은 우주적으로 상당한 영향력을 행사하고 있는 가문 중 하나다. 그런 가문의 장자가 타 함대에 의탁한다는 게 납득이 가질 않았다.
“아, 거기에는 나름대로 사정이 있거든.”
“사정이요?”
“인베이더와 접전을 벌이고 있는 지역은 라인트라가 전부가 아니네. 물론 전쟁 규모는 현재 라인트라 정도로 크게 심화되진 않았지만, 그렇다고 해서 막지 않으면 안 될 그런 전선지역들이 꽤 있지. 바이우드 가문의 함대는 죄다 그곳으로 출정한 상태라네. 지금 합류하긴 너무 늦었지.”
“뭐, 그건 그렇다 치고, 바이우드 가문은 이 아이를 왜 놔두고 간 겁니까? 무슨 이유라도 있었던 모양이지요?”
“이 아이의 폐관수련 때문일세. 몇 달 전부터 시작했었는데, 하필 끝나는 시기가 맞질 않아서 가문의 함대에 미처 합류를 못했지. 아마 전쟁이 격화될 줄 미리 알았더라면 폐관수련 마무리를 조금은 앞당겼을 텐데, 그러질 못했어.”
“그렇군요.”
이제 어떻게 됐는지 사정은 대충 알 것 같았다. 하지만 아직도 풀리지 않는 의문은 남아 있었다.
“근데 왜 하필 접니까?”
“응? 그게 무슨 소린가. 왜냐니?”
“저보다 믿음직한 사람들 많잖습니까? 천외오천도 있고, 저보다 강한 자들은 아직 여럿 있을 텐데요. 물론 그들 중 일부는 출정한 상태지만, 곧 출정할 자들도 있는 걸로 압니다만?”
이진운이 상식 밖의 강함을 발휘한다곤 하지만, 천외오천이나 그런 그랜드 급 강자들을 뛰어넘을 정도는 아니었다. 그런 쟁쟁한 강자들을 제쳐두고 그에게 이 아이를 맡긴다는 것도 상식적으로 뭔가 맞지 않았다.
“물론 당장 자네와 강함만 견준다면 그럴지도 모르지. 하지만 바이첸 바이우드가 그렇게 부탁했네. 꼭 자네에게 맡겨달라고 말이야.”
“바이첸 가주가 제게 말입니까?”
“그래. 신신당부를 하더군.”
베네트 국장의 말에 이진운은 더더욱 이해할 수 없다는 표정이 되었다. 그와 바이첸 가주와는 별다른 친분도 없었다. 그저 몇 마디 말을 나눈 게 전부였을 뿐이었다.
‘그러고 보니 그때 좀 의미심장한 말을 했었지.’
당시 인피니티 킹덤의 첫 출정식 날, 그는 엘레나를 두고 이렇게 말을 했었다. 되도록 강신의 힘을 사용하지 말라고! 바이우드 가문도 그와 비슷한 업을 타고났기에 그로 인한 고통이 어떤지 잘 알고 있다고 했었다.
‘그래서 그때의 인연 때문에 내게 이 아이를 맡기려 한 건가?’
이진운은 새삼스런 눈으로 레이첸 바이우드라는 이름의 소년을 바라보았다.
하지만 녀석은 상대의 선택에 따라 자신의 신변이 좌우되는 이 상황이 영 마음에 안 들던지, 퉁명스럽게 내뱉었다.
“내키지 않으면 거절해도 상관없거든요. 나도 괜히 모르는 사람에게 짐짝처럼 떠맡겨지는 건 딱 질색이니까.”
“허 참.”
꽤 당돌하기 그지없는 반응에, 이진운이 헛웃음을 짓고 말았다. 아리엔이나 엘레나처럼 말 잘 듣던 녀석들만 보다가, 이렇게 톡톡 쏘는 모습을 보이는 녀석과 마주하니 꽤 색다른 기분이었다.
“뭘 그렇게 빤히 봅니까? 사람 얼굴 처음 봐요?”
말하는 것마다 꽤 까칠했다. 보는 사람마다 다 그렇게 대하는 건지, 아니면 이진운에게만 유독 그러는 건지는 모르겠지만, 앞으로 제대로 협조하기는 글러 보였다.
그래도 일단은 말을 걸어보기로 했다.
“사람 얼굴을 처음 보는 건 아니지만, 네 얼굴은 좀 낯설어서 말이야. 그런데 앞으로 나와 한동안 함께 지내야 할 텐데, 그렇게 퉁명스럽게 나오면 좀 불편하지 않을까?”
“아, 제가 당신한테 고분고분하지 않아서 기분 나쁘다 그거죠? 함대에 소속되는 만큼 명령에는 따르죠. 어차피 전쟁터로 가는 마당이니. 하지만 인간적인 관계를 기대하진 말아요. 나도 그쪽하고 괜히 친해지고 싶은 마음은 없으니까.”
반응이 아주 적대적이었다. 처음에는 사춘기 소년의 엇나간 감정 정도로 생각했는데, 그게 아닌 것 같았다.
자신에게 뭔가 무슨 불만이라도 있는 모양이었다.
‘바이첸 가주가 자길 나한테 맡긴 게 기분 나쁘다 이건가?’
그렇게 따지자면 기분 나쁜 건 오히려 이진운이어야 할 것이다. 난데없이 웬 아이 하나 졸지에 떠맡게 생겼으니까.
슬며시 골치가 아파 왔다. 그래도 바이우드 가문의 가주와 관리국장의 부탁인데 거절하기도 그랬다.
그는 베네트를 향해 입을 열었다.
“알겠습니다. 제가 이 아이를 맡도록 하죠.”
“오, 고맙네. 자네라면 믿을 수 있지.”
“글쎄요. 저 아이 반응을 보니 쉽지 않을 것 같은데요.”
“그거야 함께 지내다 보면 조금씩 친해질 수 있는 문제 아닌가.”
이진운은 그 말에 아무런 대꾸도 하지 않았지만, 솔직히 쉽게 친해질 것 같지 않았다. 녀석이 자신을 싫어하는 기색이 역력한데, 그것이 어떤 이유인지조차 모르고 있으니까.
그래서 조금 복잡한 심경이 되었다.
잠시 뒤, 베네트 국장은 레이첸 바이우드를 국장실 바깥으로 내보냈다. 이제 이 안에 남아 있는 사람은 단 둘 뿐이었다.
베네트 국장은 조용한 목소리로 말해왔다.
“얼마 전에 연락이 왔었네. 전에 자네가 말했던 그 브로커에 대해서지.”
“아, 조사가 끝났나 보군요. 어떻게 됐습니까?”
이진운이 반색하며 물었다. 그렇지만 돌아온 답변은 기대했던 것과 전혀 달랐다.
“안타깝지만 이번 조사는 실패했네.”
“실패라고요? 제가 드린 정보에는 브로커들의 정체와 위치까지 나왔을 텐데요.”
“물론 자네가 준 정보가 너무 정확해서 알긴 쉬웠네. 하지만 문제는 거기서 꼬리가 잘렸더군. 우리가 조사하기도 전에 말이야.”
“그 말은··· 이미 제거가 됐다 이거군요.”
그 말의 뜻을 알아챈 이진운이 무겁게 중얼거렸다. 베네트도 고개를 끄덕이며 말을 이어나갔다.
“그래, 거기서 단서가 끊겼지. 더 조사를 해보려고 해도 방법이 없더군. 그곳이 우리 연합이라면 어찌어찌 해볼 방법이 있겠지만, 그곳은 연방공화국일세. 우리 조사단이 설치고 다닐 수 있는 곳이 아니야.”
“그래도 연방공화국 몰래 은밀히 조사를 진행해볼 수는 있을 텐데요.”
“그것도 쉽지 않은 일일세. 관리국의 모든 역량을 지금 현재 라인트라 쪽에 집중하고 있는 상황이라서 말이야.”
“그렇군요.”
결국은 조사는 불가능하다는 말이었다. 베네트 국장은 사정이 이러니 어쩔 수 없다고 말하고 있었지만, 이진운은 그것을 속으로 받아들이지 않았다.
‘너무 교묘하군. 조사에 들어갈 시기에 맞춰서 라인트라에서 큰 전쟁이 벌어지고 말이야. 마치 조사를 못하게 일부러 더 큰 일을 터뜨린 것 같은데···.’
물론 이건 어디까지나 증거 따윈 없는, 이진운 자신의 직감에 근거한 의심이었다. 그렇기에 그것을 베네트에게 입 밖으로 내진 않았다.
결국 조사는 불가능하다는 결론만 받은 이진운은 몇 마디 대화를 주고받은 뒤 국장실을 나서게 되었다.
하지만 머릿속은 더없이 복잡했다. 이건 우연이 겹쳤다고 생각하기엔 너무도 공교로운 상황이었다.
‘뭐, 아주 방법이 없는 건 아니지. 나름대로 중요한 패는 꺼내지도 않았고.’
관리국 내에 놈들과 내통하는 자들이 있다는 사실을 알 때부터, 이진운은 모든 패를 꺼내놓지 않았다. 그가 베네트에게 제공한 정보도 사실은 반쪽짜리였다.
그래도 혹시나 하는 심정에 정보를 제공했는데, 이런 식으로 조사가 막히다니······. 역시 자신의 판단이 옳았다는 결론만 나온다.
‘일단은 눈앞에 닥친 전쟁부터 치러야겠지.’
지금은 라인트라에서 벌어질 전쟁에 집중할 때였다. 나중에 전쟁이 다 끝나고, 놈들도 더 이상 그때의 일에 대해 경계하지 않고 방심했을 순간··· 숨겨두고 있던 패를 꺼내 놈들의 허점을 찌를 것이다.
이진운은 천천히 걸음을 옮겨갔다. 그런 그의 눈앞으로 바깥에서 기다리고 있던 레이첸의 시큰둥한 얼굴이 보였다.
“레이첸, 나를 따라 와라. 이제부터 넌 인피니티 킹덤 소속이다.”
“그러죠, 뭐. 그리 내키지는 않지만.”
퉁명스럽게 말을 받는 레이첸의 모습에, 이진운은 혀를 차고 말았다.
“거 사내 녀석이 말도 많고 불만도 많군.”
“저 혼자 제멋대로 떠드는 겁니다. 아이의 칭얼대는 불만 따윈 그냥 흘려들으시죠? 너그러운 어른답게요.”
어른을 우습게 여기는 주제에, 자신이 어리다는 입장을 아주 교묘하게 이용하는 녀석이었다. 이진운은 일순 기가 막혀 말을 하지 못했다.
‘앞으로 골치깨나 썩겠군.’
하지만 그렇다고 해서 녀석을 이대로 놔둘 생각도 없었다. 함대는 어디까지나 전투를 위한 곳이다. 위계질서가 흔들리면 모든 게 엉망이 될 터.
언젠가 날을 잡아서 레이첸에게 호된 맛을 제대로 보여주기로 다짐했다.
‘그리고 이 대가는 네 아버지한테 톡톡히 우려내도록 하지.’
그는 레이첸에 대한 훈육의 대가를 바이첸 가주에게 받아내기로 했다. 그도 자식에게 찾아온 사춘기의 엇나감을 바로잡아준다면 오히려 좋아할 것이다.
하지만 그런 그의 생각을 아는지 모르는지, 레이첸은 여전이 뚱한 얼굴로 그의 뒤를 천천히 따라오고 있었다.
녀석이 걷던 중 이상한 소리를 중얼거렸다.
“뭐지? 갑자기 한기가 드는데······. 이 근방의 기온 조절장치가 망가지기라도 한 건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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