6권-03화
아리엔들은 현실과 다름없는 환상 속에서 피가 마르는 시간을 보내야 했다.
쉴 틈 없이 이어지는 전투의 연속!
이진운은 가차 없이 제자들을 몰아붙였다. 제아무리 현실과 같은 환상이라 해도 이건 모든 게 거짓이었다.
이곳에서는 다쳐도 현실의 육체에는 아무런 피해도 입지 않는다. 그리고 죽는다 할지라도 이진운이 마음만 먹으면 언제든 다시 되살아날 수 있었다. 심지어 이 안에서는 먹고 마실 필요조차 없으니, 수련 환경으로는 최고였다.
다만 문제는 정신적으로 얼마나 버틸 수 있냐였다. 쉬지 않고 싸우는 것은 그만큼 심력 소모가 클뿐더러, 고통이 동반되는 부상이나 죽음을 경험하는 건 그만큼 정신적인 충격으로 이어지게 된다.
그래서 그걸 감안해서 전수한 게 바로 부동심결이었다. 이진운은 처음부터 철저하게 그
점까지 고려해서 이 수련계획을 짰던 것이다.
그 결과, 지옥 같은 풍경이 펼쳐졌다. 그들이 배경으로 삼고 있는 점창파의 연무장은 산속에 자리하고 있어 꽤 고즈넉한 분위기였는데, 이곳과 전혀 어울리지 않는 혈투가 한창 진행되고 있었다.
분명 싸움은 삼대 일의 상황. 하지만 이진운 혼자서 세 명을 압도하고 있었다.
아리엔들은 말 그대로 숨이 턱까지 차올랐다. 이곳이 환상이라 해도 너무 무리하면 지치고 힘든 것까지 현실과 다를 게 없었다.
‘도저히 이길 수가 없어.’
‘우리 수준에 맞췄다는데도 이 정도로 차이가 나?’
‘이제 어떻게 해야 하지?’
수단방법 가리지 않고 대적해 봤지만, 이진운은 옷자락 하나 상하지 않았다. 마치 그들의 공격 자체를 보지도 않고 읽어내는 듯한 느낌이었다.
그리고 슬슬 지쳐가기 시작하자, 이진운의 검이 그들의 몸을 베는 숫자도 점점 늘어났다. 아직은 치명상이랄 만한 게 없었지만, 그것도 한계에 이르렀다.
“윽!”
이진운의 검을 받아쳐내던 클레브가 돌연 신음을 터뜨렸다. 너무 지친 나머지 다리가 풀려서 비틀거리고 있었다.
그리고 그 순간을 이진운은 놓치지 않았다. 굽이치는 파도처럼 밀려나간 검세가 어느새
클레브의 목덜미를 파고들어오고 있었던 것이다.
“커···.”
클레브는 제대로 된 비명조차 이어가질 못하고 답답한 숨소리만 터뜨렸다. 단숨에 목이 잘려나가면서 사망했기 때문이었다.
그리고 아리엔과 엘레나도 그리 오래 버티지 못했다. 차례대로 심장을 꿰뚫리고 상체가 절단나면서 처참한 결과를 맞고 말았다.
자신이 만들어낸 그런 처참한 광경을 앞두고도 이진운은 별다른 표정 없이 중얼거렸다.
“흠, 그래도 처음보단 많이 나아졌군. 버티는 시간이 길어졌는데?”
그 말이 끝나기 무섭게 죽은 세 사람의 시체가 돌연 사라졌다. 그리고 그 자리에는 세 사람이 다시 멀쩡한 모습으로 다시 나타나 있었다.
“으··· 또 죽었어. 속이 메스꺼울 지경이야.”
“목을 베이는 기분은 정말 최악이군.”
“아윽··· 아직도 가슴이 아파.”
그들은 환통을 호소하며 진저리쳤다.
제아무리 멀쩡한 몸으로 되살아났다고 해도, 방금 전 치명상을 입었던 기억까지 다 사라지는 건 아니었다. 그때 겪었던 고통의 여운이 기억에 남아 환통으로 작용하고 있었던 것이다.
물론 그것도 조금 시간이 지나면 사라지게 되지만, 그래도 정신적으로 그다지 좋은 경험은 아니다.
헌데 더 환장할만한 일은, 이렇게 힘들고 고통스러워도 정신은 오히려 더 또렷해진다는 사실이었다. 이게 다 부동심결의 공능 때문이었다.
미치려야 미칠 수도 없는 상황에, 세 사람은 그야말로 울고 싶어졌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이진운은 아직도 부족하다는 듯 그들을 다그쳤다.
“제자들이, 조금 더 분발하는 게 어떨까? 벌써 몇 번을 죽었는데. 내가 센 횟수만 해도 벌써 천 번이 넘었다. 그것도 너희 수준에 맞춰준 것도 모자라 적당히 봐줬는데도 이 정도야. 제대로 했으면 아마 10만 번도 넘었겠지. 뭐, 좀 더 죽어보다 보면 늘긴 하겠군.”
그 말이 아리엔들에게는 너무나도 얄밉게 느껴졌다. 그 덕분에 지금까지 몇 번이나 죽었는데, 그것도 많이 모자라다는 식으로 말한다는 게 기가 찰 일이었다.
제자들의 따가운 시선이 집중되자 이진운이 멋쩍게 웃으며 말했다.
“그래도 난 내 나름대로 최선을 다해 배려해줬다. 이제 너희도 알 텐데. 부동심결이 필요한 이유 말이야.”
“그래요. 인정은 해요. 부동심결 덕분에 제정신은 유지할 수 있었으니까.”
세 사람 중에 먼저 아리엔이 입을 열었다. 하지만 그녀 말 속에서 이진운에 대한 고마움에 대한 기색은 조금도 보이지 않았다.
“하지만 이렇게 끝없이 죽음을 반복하는 귀축 같은 수련을 위해 배운 부동심결을 과연 스승님의 배려라고 봐야 할지는 좀 의문이네요.”
말투는 정중했지만, 그것은 이진운에 대한 힐난이나 마찬가지였다. 그리고 클레브나 엘레나의 심정도 아리엔과 크게 다르지 않았다.
좀 머쓱해진 이진운이 뒷머리를 긁적거리며 둘러대기 시작했다.
“뭐 좀 지나친 면이 없지는 않아. 하지만 단기간에 실력을 끌어올리려면 이 방법이 최고라서 말이야.”
“실력이 늘긴 빨리 늘겠죠. 그래도 이렇게까지 과격할 필요가 있나요.”
“맞아요. 죽을 때마다 너무 무섭단 말이에요.”
“별로 좋은 경험은 아니죠.”
여전히 불퉁한 표정을 지우지 못하는 그들의 모습에 이진운은 어쩔 수 없다는 표정으로 이유를 설명하기 시작했다.
“너희들도 알겠지만 라인트라는 인베이더와 총력전이 벌어질 수도 있는 최전선이지. 내가 생각하기엔 그곳에서 살아남으려면 설령 마이스터 급이라 해도 부족해. 그런데 그 경지에도 턱없이 못 미치는 너희는 과연 어떨까?”
“······.”
“아마 생존 확률이 3할에도 못 미칠 거다. 그렇다고 전투가 벌어지는 상황마다 내가 너희를 완벽히 보호해줄 수 있다고 장담할 수 있는 것도 아니고. 전처럼 강적이 나타나면 내 한 몸 건사하는 것조차 힘들지 몰라. 그러니 너희 몸은 너희 스스로 지켜야 해. 그래서 이 수련을 시작한 거다.”
그 말에 아리엔들은 아무 말도 하지 못했다. 그들도 인정하고 있었기 때문이었다. 특히 앞장서서 고위 인베이더와 접전을 벌여야 하는 오버러들이 이번 전쟁에서 살아남을 확률은 더더욱 낮았다.
이 정도면 거의 죽으러 간다고 봐도 무방했다. 그래서 이진운이 특별히 생각해낸 게 지금의 수련 방식이었다.
“몇 번이나 죽음을 반복하는 게 힘겨울 수도 있겠지만, 그만큼 실전 응용력이나 위기 상황에서의 생존방법을 터득할 수 있지. 물론 실력도 그만큼 빨리 늘어나고 말이야.”
그러니 좀 더 견뎌보라며 말하는 이진운에게, 아리엔도 어쩔 수 없다는 표정이 되었다.
실제로 실력이 늘어난 것은 사실이었다. 평소 하던 수련보다 족히 몇 배의 속도로 실력이 느는 게 체감이 갔다.
이런 식으로 계속 된다면, 어쩌면 라인트라에 도착하기 전에 한 단계 너머의 벽을 넘게 될지도 모른다.
그렇지만 이런 장점이 있다면, 그에 상응할만한 단점도 있었다. 아리엔은 좀 전부터 염두에 두고 있던 문제점을 짚었다.
“하지만 너무 정형화 되는 느낌인데요. 스승님 한 사람만 계속 반복적으로 상대하다 보니 저희의 대응방식도 너무 뻔해지잖아요. 물론 스승님은 다양한 무공으로 저흴 상대한다지만, 그래도 아예 다른 상대를 여럿 경험하는 것보다는 못한 느낌이에요.”
“흠, 아리엔 네 말처럼 그런 문제도 아주 없진 않지.”
“그럼 어떻게 하실 건데요? 그래도 이 수련을 계속 하실 생각인가요?”
이진운이 그 문제에 대해 순순히 인정을 하자, 아리엔이 기대감 어린 표정으로 물었다. 이쯤에서 이 지옥 같은 수련을 그만두지 않을까 해서였다.
하지만 그 뒤에 이어진 이진운의 대답에, 제자들의 기대는 여지없이 무너졌다.
“아니, 여기서 그만둘 순 없지. 나도 그 문제에 대해 나름대로 생각해둔 방법이 있거든.”
“예? 생각해둔 방법이요?”
“그래, 보면 알 거다.”
되묻는 그들에게 이진운은 설명하지 않고 실제로 보여주었다. 그가 검지와 엄지를 튕기자, 그 옆에 갑자기 전에 없던 기척이 생겨났다.
그것은 분명 사람이었다. 하지만 지금까지 한 번도 본 적 없는 복색과 모습을 하고 있었다.
펑퍼짐한 무복에 검은 머리를 길게 늘어뜨린 사내의 모습은 너무도 낯설게 다가왔다.
“누··· 누구죠, 이 사람은?”
“혹시 우리 말고도 수련하러 온 사람이 있던가요?”
아리엔들이 당황해서 질문을 던지자, 이진운이 의미심장하게 웃으며 답해주었다.
“그래, 너희 수련을 위해 특별히 초빙했지. 아니 정확히 말하자면 내 기억 속에 있던 사람을 환상을 통해 구현해냈다고 해야 하나?”
“그럼 이 사람이, 실제 존재하는 게 아니라 스승님이 만들어낸 환상이란 말인가요?”
“그렇지.”
“세상에······.”
아리엔들은 질려버린 표정이 되었다. 계속 이진운만 반복적으로 상대하는 수련을 계속 이어나가는 건 별 의미 없다고 했더니, 이젠 환상으로 다른 상대를 만들어낼 줄이야.
이런 경우는 전혀 생각해보지 못했던 맹점이었다.
“이 사람 말고도 다른 녀석을 상대하고 싶다면 얼마든지 만들어주지.”
이진운이 다시 손가락을 튕기자, 그 옆에 또다른 자들이 나타났다. 하나같이 같은 모습을 한 자들이 없었다. 다들 각기 다른 사람이라는 의미였다.
게다가 그 중에는 사람만 있는 게 아니었다. 아르탈 행성에서 교육받던 시절, 전투영상을 통해 보았던 고위 인베이더들도 그 중에 끼어 있었다.
“자, 상대할 녀석들은 이 정도면 충분하겠지? 이 정도면 질리지 않고 싸울 수 있을 거다. 같은 녀석도 거의 반복되는 경우도 없고. 실전 경험 쌓기엔 이만한 환경도 없지.”
“···아하하.”
이쯤 되자 아예 넋이 나간 표정들을 하고 있었다. 아리엔의 입에서 흘러나오는 웃음소리가 거의 맥이 풀려 있는 것만 봐도 그랬다.
“자, 그럼 열심히 수련하자. 빡세게 수련해서 살아남아야지.”
해맑은 그 목소리에, 아리엔들은 그냥 죽고 싶다는 생각이 들었다. 차라리 그게 더 편할 것 같은 기분이었다.
* * *
그렇게 제자들과 수련장에서 하루를 꼬박 보낸 뒤, 이진운은 호출을 받았다. 놀랍게도 관리국장에게서 온 호출이었다.
“또 무슨 일이지? 바로 내일이 출전인데.”
이미 해야 할 이야기들은 전부 해둔 상황이었다. 이제 와서 자신을 부른다면, 대체 무슨 용무가 있다는 것일까?
이진운이 관리국장의 방으로 향하자, 그의 부관인 필리스가 그를 대신 맞이했다. 그의 안내를 따라 관리국장실로 들어선 이진운은 베네트 옆에 있는 낯선 인물을 발견할 수 있었다.
‘누구지? 이런 데에 올 정도면 평범한 애는 아닐 텐데.’
그랬다. 관리국장 옆에 서 있는 사람은 불과 열 서넛 정도 되어 보이는 사내아이였다.
물론 아이라고 해서 평범하진 않았다. 전신에서 풍겨 나오는 기운만 보더라도 족히 절정고수는 훨씬 웃도는 수준이었으니까.
다만 처음 보게 된 그 소년의 얼굴에서 조금은 익숙한 면모가 보였다.
‘근데 얼굴이 조금은 낯익은데? 어디서 봤더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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