6권-02화
아리엔들이 부동심결의 정심부동을 체득한 그 순간부터 다음 수련이 시작되었다. 아니 정확히 말하자면, 그들이 부동심결을 배우게 된 이유가 바로 이 수련을 위해서였다.
화아악!
갑자기 시야가 이지러진다 싶은 그 순간, 방금 전까지 보고 있던 수련장이 다른 무언가로 탈바꿈되었다.
그것은 마도과학의 첨단을 달리는 아르탈 행성에서는 전혀 볼 수 없는, 너무나도 고풍스런 풍경이었다.
높은 산 중턱에 존재하는 거대한 도관. 아리엔들이야 눈앞의 광경이 무엇인지 알 리 없겠지만, 그것은 이진운의 기억 속에 남아 있는 점창파의 정경이었다.
당황하는 아리엔들에게 이진운이 말했다.
“놀랄 것 없다. 너희가 지금 보고 있는 것은 전부 환상이니까. 내 기억 속에 있던 풍경을 그대로 옮겼지.”
“아, 그래서 좀 전에 멀린 씨가 왔다 간 거였군요.”
그제야 알겠다는 듯 고개를 주억거리는 아리엔. 이진운이 설명을 이어나갔다.
“그래, 내가 부탁을 좀 했지. 그 작자한테 신세 지는 건 마음에 들지 않았지만, 너희가 단기간에 성취를 보려면 이 방법밖에 없더군. 그리고 그 결과가 바로 이거고.”
“저희의 성취라면··· 설마 이것도 저희 수련을 위해서인가요?”
“그렇지 않으면 내가 괜히 아쉬운 소리까지 해가면서 환상을 이 수련실에게 부여했을까? 애당초 부동심결을 너희에게 가르쳐준 것도 바로 이것 때문이었지.”
“환상 안에서 수련이라니··· 어떻게 보면 가상현실 시뮬레이션하고 비슷한 방법이군요.”
그와 유사한 방법은 관리국 내에서도 많이 사용되고 있었다. 가상현실을 통한 배틀 시뮬레이션 시스템이 바로 그 예였다.
하지만 부상 우려가 있는 대련을 치를 때 사용되는 경우는 종종 있어도, 이처럼 수련의 용도로 사용되는 경우는 극히 드물었다. 왜냐면 가상현실은 배틀 센스에 대한 경험은 쌓을 수 있어도, 실제 수련에는 하등 도움이 되지 않기 때문이었다.
모든 영능력자의 실력 기반은 영력을 어떻게 잘 다루느냐에 달렸는데, 가상현실 시뮬레이션 안에서는 영력 제어에 대한 숙련도를 쌓을 수 없으니 당연한 일이다.
그래서일까? 클레브가 우려의 말을 꺼냈다.
“스승님, 이게 가상현실과 비슷하다면, 이 안에서 열심히 수련해도 실제 현실에서는 별로 얻는 게 없지 않을까 싶은데요? 저도 한때 가상현실에서 수련을 좀 해 봤지만, 실제로 얻은 건 아무것도 없었습니다.”
“호오, 전에 해봤었다고?”
“예, 아무리 발버둥 쳐도 실력이 늘질 않아서 어떻게든 돌파구를 찾아볼까 싶어 시도해 본 적이 있었지요. 하지만 전혀 효과가 없었습니다. 가상현실은 어디까지나 가상현실. 실제 현실과는 전혀 다르죠. 전투 상황에서의 판단능력을 향상시키는 데엔 좀 도움이 될지 모르겠지만, 영능의 숙련도를 높이는 데엔 부적합한 방법이었습니다.”
옛적의 기억을 떠올리면서 클레브는 저도 모르게 쓴웃음을 흘렸다. 자신의 미천한 재능과 상관없이, 어떻게든 실력을 쌓아보겠다고 발버둥 치던 옛 일 중 하나였기 때문이었다. 결국 다 헛고생으로 끝났지만······.
이진운도 가상현실에 대해서만큼은 클레브와 같은 생각이었다.
“뭐, 그럴 수도 있겠지. 가상현실이 재현해낼 수 있는 건 어디까지나 형(形)을 실전에서 응용하는 전투 감각 쪽에만 치중되어 있으니까. 영력을 다루는 깊고 오묘한 부분까지는 아직 세세한 체험이 불가능할 수밖에 없지.”
그렇지만 이 환상이 가상현실과 같다면 굳이 껄끄러운 상대였던 멀린을 이곳까지 일부러 데려오지도 않았을 것이다.
“하지만 이건 달라. 영력을 다루는 부분까지 현실과 전혀 다를 게 없지. 그리고 효율도 가상현실과 비교할 수 없을 정도로 높을 거고. 내 장담하지. 그만큼 더 힘들기도 할 테지만 견딜 수만 있다면 그 효과는 확실할 거야.”
“스승님이 장담하시니 그렇게 믿어야지요.”
클레브는 납득했다는 듯 고개를 주억거렸지만, 그 옆에 있던 엘레나는 불안하다는 눈빛을 보였다.
“난 걱정되는데···”
“왜 그래, 엘레나? 어떤 게 걱정되는데?”
“그만큼 더 힘들다잖아요. 지금까지 우리가 경험한 수련이 정상적인 게 하나도 없었는데··· 거기서 더 힘들어지면······.”
“······.”
엘레나의 그 말에 아리엔은 저도 모르게 입을 다물고 말았다.
확실히 일리 있는 말이었다. 자신은 그냥 스쳐 들었을 뿐이지만, 엘레나는 그 말 속에서 꺼림칙한 느낌을 받았던 것이다.
그제야 아리엔과 클레브도 뭔가 미심쩍다는 표정으로 이진운을 바라보았다. 그러자 이진운이 어깨를 으쓱하며 말했다.
“몸이 힘들 일은 절대 없을 거다. 여긴 환상이니까. 너희의 몸은 그저 편안하게 쉬고 있지. 다만 정신만이 이 환상 속에서 수련하는 거지. 실제 체험하는 것과 다름없는 형태로 말이야.”
그렇지만 아리엔은 그 말에 속지 않았다. 좀 전부터 이상하게 생각했던 부분을 정확히 꼬집어 물었다.
“그런데 왜 부동심결이죠? 그걸 굳이 우리가 익혔어야 하는 이유가 뭐냐는 거예요.”
분명 이진운은 이 수련을 위해 부동심결을 익히게 했다고 했다. 그렇다면 그럴 만한 연유가 있다는 이야기였다.
물론 부동심결이 어떤 상황에서도 동요하지 않는 마음과 정신을 만들어준다곤 하지만, 육체가 상할 리 없는 이 환상 속에서 수련하기 위해 부동심결이 필요한 이유가 뭐란 말인가?
그러자 이진운도 더 이상 어쩔 수 없다는 듯 사실을 털어놓기 시작했다.
“좀 전에 말했듯이 이곳에서는 몸이 다칠 일은 없지. 하지만 정신과 마음은 다칠 수 있거든.”
“어째서죠?”
“그건 지금부터 직접 깨달아 봐라.”
피이잉!
그 말이 끝나기 무섭게 이진운이 매섭게 휘둘러왔다. 그것은 점창의 검술 중 하나인 삼절검의 섬진쾌였다.
대기를 가르며 날아드는 쾌검에, 아리엔들은 혼비백산한 표정으로 즉시 대응에 나섰다.
그나마 다행이라면 이진운이 그들의 수준에 맞춰줬다는 사실이었다.
그게 아니었다면 피하기는커녕, 섬진쾌의 일검을 제대로 인식조차 못하고 목이 달아났을 것이다.
키잉!
먼저 검을 빼들어 막은 것은 아리엔이었다. 처음부터 뭔가 심상치 않다 싶어 마음의 준비를 했는데, 역시나였다.
이어지는 검격을 받아내면서 아리엔은 이를 악물었다. 역시 이진운의 실력은 그녀가 닿을 수 없는 영역에 있었다.
대충대충 휘두르는 것 같은 검초도, 그녀는 사력을 다해야 간신히 막아내는 게 가능했다.
그렇게 몇 합을 받아낸 다음에야 뒤로 물러선 아리엔은 겨우 숨을 돌릴 수 있었다.
“처음부터 이럴 생각이셨나요?”
“그래. 이곳에서 무한 대련이지. 물론 너희가 나를 대적하는 형태겠지만.”
“그런데 이게 부동심결하고 무슨 상관이 있죠?”
“조금 더 해보면 알 거다.”
의미 모를 미소를 지으며 재차 검을 휘둘러오는 이진운. 이번에는 아리엔 뿐만 아니라 클레브와 엘레나도 함께 공격해왔다.
휘이잉!
한 자루 검에서 시작된 떨림이 천변만화하기 시작했다. 그것은 눈으로 읽을 수도 없는 무수한 검영의 해일이었다.
수천수만의 검세로 둘러싸인 세 사람은 말 그대로 젖먹던 힘까지 다해 필사적으로 방어에 몰두해야 했다.
하지만 그들의 방어는 완벽하지 않았다. 빈틈이 드러날 때마다 파고드는 검기가 여지없이 팔다리를 베고 지나가고 있었다.
“악!”
“큭!”
“아팟!”
상처에서 치밀어 오르는 격통에 세 사람은 일그러진 표정이 되었다. 하지만 아파도 멈출 수 없었다. 이진운의 공격은 계속되었으니까.
그렇지만 그들에 비해 여유가 넘치는 이진운은 맹공을 퍼부으면서도 입을 열었다.
“꽤 아프지만 그래도 움직일 만 할 거다. 치명적인 부분은 베지 않았으니까.”
그렇게 말을 하는 중에도 이진운의 검은 시시각각 다른 변화를 일으켰다. 조금 적응할만하다 싶으면 금세 다른 변화를 꺼내오니, 제대로 대응할 수가 없었다.
세 사람은 또다시 이곳저곳을 베이며 만신창이가 되었다. 보통 사람이라면 고통으로 까무러치거나 정신을 잃어도 이상하지 않을 부상이었다.
그렇지만 아리엔들은 까무러치지도 않았다. 아프긴 해도 정신을 잃을 정도는 아니었다.
거기서 한발 물러선 이진운이 공세를 멈췄다. 그리곤 히죽 웃으며 말했다.
“이제 좀 알겠지? 부동심결을 왜 내가 전수해 줬는지······.”
“···예, 이제 알 것 같네요.”
비틀거리는 몸을 간신히 추슬러 세운 아리엔이 이를 갈았다. 몇 번의 검상을 입고서의 이진운의 의도를 비로소 깨달을 수 있었다.
“어떤 고통을 당하더라도 정신이 무너지지 말라고 이걸 전수해 주신 거죠? 정말이지 이 환상 너무 현실 같네요.”
한숨을 내쉬는 그 말에 이진운은 고개를 끄덕엿다.
“그래 맞아. 앞으로 너희는 오늘부터 이 환상 속에서 실전과 같은 훈련을 겪게 될 거야. 그리고 죽음에 이르는 부상도 수시로 입게 되겠지. 그걸 견디기 위해서는 부동심결이 반드시 필요했어.”
“지독하군요. 그런 방식의 수련이라니······.”
타고난 재능이 없어 옛날부터 고된 수련만 해왔던 클레브조차 이 방법에는 혀를 내둘렀다. 어떠한 부상을 입어도 그 고통에 정신이 무너지거나 미치지 않도록, 일부러 부동심결을 전수했다는 말 아닌가.
“저희야 그렇다 쳐도 아직 어린 엘레나에게는 너무 심한 거 아닙니까?”
클레브가 그렇게 묻자, 이진운은 고개를 가로저었다.
“그걸 다 감안해서 부동심결을 전수한 거지. 게다가 어리다고 봐주는 세상이 아니야. 인베이더가 언제 어리다고 죽일 사람을 안 죽였나?”
“······.”
“어차피 저 아이도 오버러야. 전선에서 싸울 수밖에 없는 몸이지. 차라리 이렇게라도 단련해서 강해지는 게 저 아이에게도 이로워.”
클레브도 아리엔도 그 말을 부정하지 못했다. 지금과 같은 세상에선 아이라고 응석부리도록 배려해주는 것보다는 스스로 강해져서 싸워 나갈 수 있도록 옆에서 가르쳐 주는 것이 더 필요했다.
게다가 엘레나도 평범한 아이는 아니었다. 그녀는 어색하게 웃으며 말했다.
“전 괜찮아요. 언니나 클레브 아저씨처럼 얼마든지 견딜 수 있어요. 그러니까 같이 훈련 받을래요.”
그 말에 잠시 감정이 북받쳐 오른 아리엔이 엘레나의 머리를 쓰다듬었다. 한참 뛰놀아야 하는 나이에 이런 고된 수련을 받으며 의젓한 모습을 보이는 엘레나가 안쓰러워서였다.
하지만 이진운의 말은 아직 끝나지 않았다.
“그리고 내가 부동심결을 전수한 건 단순히 고통 때문만은 아니야. 바로 이곳에서 보낼 시간 때문이지.”
“시간이요?”
갑자기 시간을 운운하는 그 말에 세 사람이 어리둥절한 얼굴이 되었다. 하지만 곧 그들은 경악한 표정을 지을 수밖에 없었다.
“이곳에서의 하루는 무려 1년이다. 그럼 라인트라까지 도착할 때까지 너희가 보낼 수 있는 시간은 어느 정도일까?”
“······!?”
“그래, 이제 알겠지? 너희들은 앞으로 적어도 14년 이상. 최대로 잡는다면 20년 정도의 시간을 수련에 투자할 수 있다는 거지.”
부동심결 덕분에 강화된 상태로도 정신이 아찔한 기분이었다. 이진운이 설마 이런 말도 안 되는 수련을 준비했을 줄은 상상도 못했다.
물론 이곳이 환상이라고 했을 때부터, 수련 방식이 과격할 거라 짐작은 했지만, 하루의 시간을 1년으로 늘리는 방법이 될 거라 감히 누가 짐작이나 했을까.
“자, 앞으로 잘해 보자고. 제자들아.”
아연실색한 그들에게 이진운이 조용히 웃으며 말했다. 오늘따라 그 모습이 너무도 무섭게 느껴졌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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