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검신의 검은 우주를 가르고-125화 (126/448)

5권-25화

일단 원리를 알고 나자, 이런 환술을 아무렇지도 않게 다루는 멀린의 존재가 터무니없게만 느껴졌다. 이건 원리를 안다고 해도 도저히 따라 할 수 없는 능력이었다.

“그래서 술식이 필요 없다고 한 거였군. 넌 단지 집단무의식에서 필요한 인식부분만을 간섭해 맘대로 사용할 뿐이니까.”

“뭐 그런 셈이지요. 그래서 더 강력한 거고요. 설령 신적 존재라 해도 쉬이 파훼할 수 없는 게 바로 제 환술입니다.”

“뭐? 이 환술이 그 정도였다고?”

깜짝 놀라 묻는 그 말에, 멀린이 대수롭지 않다는 듯 말했다.

“그렇게 놀랄 것도 없죠. 집단무의식이라는 건 필멸자 뿐만 아니라, 신적 존재들까지 포함하고 있으니까요. 지성을 가진 한 격이 높든 낮든 그 범주를 벗어날 수 없습니다.”

“너무 황당해서 믿기지가 않는군. 네 환술이 그 정도라면 왜 이때까지 인베이더놈들을 다 쓸어버리지 못했던 거지? 그 말이 사실이라면 신좌 급에게도 네 환술은 충분히 통할 텐데 말이야.”

당연히 품을 수 있는 의문이었다. 신에게도 통하는 환술이라면, 멀린은 왜 지금까지 신좌급 인베이더들을 그냥 놔두고 있었던 걸까?

하지만 돌아온 대답은 뻔했다. 멀린은 그답지 않게 쓴웃음을 지으며 답했다.

“만일 제 환술이 그 정도였으면, 이미 신격을 얻어 신이 됐을 겁니다. 하지만 그렇지 못하니까 여기에 있는 거죠. 만능인 것 같은 제 환술에도 다 일장일단이 있지요.”

“하긴 그렇겠군.”

“가장 큰 약점은 신에게 타격을 전혀 주지 못한다는 점이겠군요. 집단무의식을 활용하는 만큼 신을 속일 수는 있지만, 그게 전부입니다. 심지어 환상으로 속일 수 있는 시간도 그리 길지 않은 편이고요. 이미 완성된 격을 가진 존재에게 단순한 인식 개변 정도로 할 수 있는 일은 그 정도가 한계니까요.”

하지만 들어보면 그다지 약점이라 할 만한 것도 아니었다. 실제로 신적 존재에게 타격을 줄 수 있을만한 능력자가 얼마나 된단 말인가?

신을 일순간이나마 속일 수 있다는 것만으로도 멀린의 환술은 충분히 대단한 능력이라 해야 할 것이다.

이진운이 퉁명스럽게 내뱉었다.

“그 정도만 해도 충분히 사기지. 그 이상 더 바라면 도둑놈 심보고.”

“아하하··· 그런가요?”

실없이 웃는 멀린을 살짝 째려본 이진운은 다시 말을 이어나갔다. 조금은 멋쩍은 듯한 목소리였다.

“아무튼 멀린, 당신한테는 이번에 신세 많이 졌어. 다음에 기회가 되면 보답하기로 하지.”

“어이쿠! 제게 차갑게 굴던 이진운 씨에게 이런 말을 다 듣게 되다니. 제가 다 감격스러운데요?”

“쓸데없는 말은 집어치워!”

이진운이 발끈하자, 멀린이 장난스럽게 웃으면서 멀찌감치 물러섰다.

“그럼 전 돌아갑니다. 그럼 다음 기회에 뵙기로 하죠.”

그는 곧 작별인사와 함께 신형이 흐릿하게 변하며 사라지기 시작했다. 환술과 몇 가지 술수를 이용한 이동법이었다.

그 모습을 본 이진운이 조금 당황해 외쳤다.

“이봐, 사용법은 안 가르쳐줬잖아.”

그러자 완전히 사라지기 전 이진운의 머릿속으로 작은 메시지가 전달되었다.

[간단합니다. 머릿속으로 떠올리세요. 그거면 됩니다.]

“뭐? 떠올려?”

그렇게 되물었지만, 대답은 없었다. 녀석은 벌써 이 장소에서 멀어진 것이다.

“환상을 발동시키는 의념과 관계가 있는 모양인데··· 지금 그 말이 거짓말이 아니라면 뭐 해보면 알겠지.”

그러고도 정 안되면 다시 멀린을 찾아가보면 될 일이다.

마침, 아리엔과 제자들이 그의 옆으로 다가왔다. 멀린이 있을 때는 방해될까봐 멀리서 지켜보기만 했었는데, 그가 가고나자 이렇게 다가온 것이리라.

아리엔이 먼저 말을 꺼냈다.

“저 분은 또 무슨 일로 다 찾아오셨대요?”

“너희들 수련에 도움을 주려고 내가 특별히 데려왔지. 그리고 방금 내가 요구한 걸 들어주고 돌아간 거고.”

“수련이요?”

“그래, 라인트라에 도착할 때까지 시간이 불과 2주 조금 더 걸릴 텐데, 평범한 수련 가지고는 짧은 시간 안에 성과를 보기 어렵잖아. 그래서 멀린 녀석에게 특별히 부탁을 한 거다.”

“뭘 어떻게 하신다는 건지 짐작도 안 가네요.”

아리엔은 물론 클레브나 엘레나도 고개를 갸웃거렸다. 하지만 그들의 의문을 풀어주기 전에 준비했던 것부터 전달했다.

그것은 데이터 화 된 문서였다. 이진운은 그것을 그들 셋의 모듈밴더로 전송해 주었다.

“일단은 이것부터 배우자. 자, 구결을 알려줄 테니까 지금 바로 암기해.”

그러자 클레브가 침음성을 흘렸다. 홀로그램 창 위에 뜬 문서에는 글자들이 빼곡하게 적혀 있었다.

“으음, 외우는 건 영 익숙하지 않은데······.”

“그래, 넌 딱 봐도 뇌까지 근육으로 만들어진 것처럼 보인다. 그래도 확실히 외워둬라. 글자 수도 그렇게 많지 않으니까, 네 암기력이 떨어진다 해도 충분히 외울 수 있을 거다. 만일 다 못 외우면 오늘 수련 강도는 2배로 늘려주지.”

이진운이 엄포를 놓자, 클레브의 안색이 귀신을 본 것 마냥 창백해졌다. 지금까지 경험해 본 바로는, 이진운은 결코 허언을 하는 사람이 아니었다. 그가 2배라고 한 이상, 다 외우지 못할 경우 수련 강도는 2배로 뛰어오를 게 분명했다.

“그러니까 필사적으로 외워. 지옥수련을 2배로 겪고 싶지 않으면 말이야.”

“···예.”

기어들어가는 목소리로 대답한 클레브는 구결을 외우기 위해 죽을 힘을 다했다. 지금까지 무예를 수련하느라 공부하고 담 쌓았던 그로서는 가히 피눈물 나는 노력이었다.

그 결과, 아리엔과 엘레나는 아주 손쉽게 이진운의 테스트를 통과했다. 둘 다 머리가 비상한 편이어서 구결을 외우는 것쯤은 그리 어려워하지도 않았다.

문제는 클레브였다. 어떻게든 외우긴 외웠는데, 종종 글자를 잘못 외우는 경우가 생겼다.

이진운은 답답하다는 듯 한숨을 내쉬었다.

“하아··· 머리 나쁜 녀석은 구제할 방법도 없다더니.”

그래도 노력이 헛되진 않았는지 클레브는 몇 번의 시행착오 끝에 완벽하게 외울 수 있었다. 얼마나 심력을 다 쏟았던지, 그의 얼굴은 외우는 것만으로도 수척해졌다.

아마 지금까지 살아오면서 이번처럼 필사적으로 머리를 쓴 경우는 처음인 것 같았다.

이진운은 그런 클레브를 시큰둥한 표정으로 응시하며 말했다.

“거 봐라. 노력하면 다 되잖아. 하지 않아서 안 되는 거지.”

“······.”

클레브는 쓴웃음만 짓고는 아무 대답도 하지 않았다.

이진운은 제자들이 암기를 끝내자마자 곧장 교육에 들어갔다. 최대한 시간을 아끼기 위해서였다.

“이제부터 지금 외운 구결대로 진기를 운용한다. 혹시라도 잘 안되거나 막히는 부분이 있다면 내게 말하고.”

“그런데 지금 배우는 게 뭔가요?”

그때, 손을 슬며시 들어 올린 엘레나가 질문을 던져왔다. 하긴 구결만 외우라고 달랑 던져줬으니 궁금해 할 만도 했다.

게다가 지금 외운 구결은 지금까지 배웠던 무공들과는 그 궤가 사뭇 달라서, 이게 무엇을 의미하는 건지조차 모르고 있었다.

이진운은 간단하게 설명해 주었다.

“지금 너희들이 외운 구결은 부동심결이라는 것이다.”

“부동심결?”

“정확히 말하자면, 정신을 보호해주는 수법이다. 너희들이 배웠던 것들과는 좀 다른 방식의 무예지.”

“이게 무예라고요?”

아리엔이 어리둥절한 얼굴로 되물었다. 정신을 보호하는 무예라는 사실이 너무 낯설게 느껴져서였다.

“그래, 너희들이 배운 내공심법과 일맥상통한다고 보면 된다. 단지 이건 내공을 활용해서 정신을 보호하고, 의식을 강화하는 방법이다. 어떤 일을 겪어도 자아가 무너지지 않도록 지탱해주지. 배워두면 쓸 만할 거다.”

“그런데 왜 이것을······?”

“오늘부터 너희들이 거칠 수련에 이 부동심결이 반드시 필요하니까. 그러니까 제대로 익혀두는 게 좋을 거다. 이게 다 너희를 위해서 하는 말이다.”

그 대답에 오히려 질문을 던졌던 아리엔이 불안하다는 표정이 되었다.

다른 것도 아니고, 정신을 보호해주는 무공이었다. 곧 있을 수련을 위해 부동심결을 익혀둬야 한다면··· 그것은 그만큼 수련이 혹독하다는 뜻이 아닌가.

‘대체 무슨 수련을 하려고 이러는 거야?’

하지만 이진운은 그들 세 사람의 불안과 의문을 해소해줄 마음이 없었다.

그는 제자들이 부동심결을 제대로 익혔는지 안 익혔는지 철저하게 확인했다. 자칫 제대로 익히지 못한 상태에서 수련에 돌입하면 위험할 수도 있기 때문이었다.

클레브는 몇 번이나 지적을 받았지만, 그래도 다섯 시간 만에 겨우 기초를 습득할 수 있었다.

이진운은 제자들이 부동심결을 습득하는 모습을 지켜보면서 생각했다.

‘역시 오성은 엘레나가 가장 높군. 아리엔은 그 다음이고. 클레브는 뭐······.’

클레브는 애초부터 가장 자질이 뒤떨어진 녀석이었다. 그나마 포기하지 않고 끝까지 노력하는 태도를 높이 사서 제자로 받았을 뿐이었다.

‘일단 이 정도면 수련에 들어가도 되겠군.’

사실 그가 제자들에게 가르쳐준 부동심결은 점창파의 무공이 아니었다. 정확히 말하자면 소림의 무공이라 해야 할 것이다.

그렇지만 이진운은 중원무림의 공동전인이었고, 소림의 절학인 부동심결도 배운 적이 있었다. 그것이 그의 손을 거쳐 제자들에게까지 이어진 것이다.

하지만 부동심결의 전부를 전수한 건 아니었다. 지금 제자들이 배운 건 기껏 해봐야 초반부에 지나지 않았다.

부동심결은 소림이 보유한 상고 절학 중 하나. 그 이치는 너무나도 깊고 깊어서 제대로 깨우치고자 한다면 이진운조차도 그 한계를 알기 어려울 정도다.

그런 절학을 깊게 가르쳐봐야 아직 햇병아리에 불과한 제자들에게는 오히려 혼동만 줄 뿐이니, 필요한 부분만 적당히 가르쳐 써먹는 게 나았다.

어느 정도 시간이 되자, 이진운이 말을 꺼냈다.

“자, 그럼 제대로 배웠는지 시험해 볼까?”

“어떻게요?”

엘레나가 조심스럽게 물었다. 정신에 작용하는 무공을 어떤 식으로 확인하겠다는 건지 의문이었다.

그러자 이진운이 별 거 아니라는 식으로 말했다.

“지금부터 내가 너희들에게 살기를 쏘아 보내겠다. 그걸 버텨내면 된다.”

“스승님의 살기를 버티라고요? 지금 저희더러 죽으란 거죠?”

그 말을 듣자마자 제자들의 안색이 보기 안쓰러울 정도로 사색이 되었다.

“지금 배운 부동심결을 제대로 습득만 했다면 아무렇지도 않게 버틸 수 있을 테니 너무 염려 안 해도 될 거다.”

“제대로 못 익혔다면요?”

“진기가 들끓어 올라서 내장이 꼬이고 사지가 토막 나는 고통을 맛보게 되겠지.”

일종의 주화입마 초입이라 할 수 있었다. 물론 그 정도는 지금의 이진운이라면 초기에 잡아낼 수 있으니 사실상 별 탈은 없을 것이다. 다만 그 와중에 겪는 고통은 제대로 습득 못한 체벌로 받아들여야겠지만······.

“으···.”

아리엔이 침음성을 흘렸다. 그것은 다른 두 명도 마찬가지였다.

언제나 그랬다. 이진운의 수련에는 중간이 없었다. 극단적인 고통을 맛보거나, 아니면 너무 간단하게 가르쳐줘서 혼자서 고민을 해야 풀어낼 수 있다거나.

하지만 어느 쪽이든 쉬운 게 없었다.

그들이 마음의 각오를 다지기도 전에 이진운이 먼저 시작을 알렸다.

“자, 그럼 시작한다.”

그 말이 끝나기 무섭게 그에게서 폭풍 같은 기세가 일어나기 시작했다. 그것은 모든 것을 집어삼킬 것 같은 살의 그 자체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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