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검신의 검은 우주를 가르고-124화 (125/448)

5권-24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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인피니티 킹덤의 모함 카멜롯에는 다양한 편의시설이 있었다.

우주에서 장기간 항행해야 하는 전함의 특성상 인간이 필요로 하는 편의시설들은 반드시 갖춰야 하는 필수요소였지만, 카멜롯은 그런 수준을 넘어섰다. 지상의 편의, 여가 시설과 비교해도 부족함이 없을 정도였다.

그리고 그 중에는 어지간한 체육관보다도 더 큰 수련실도 다수 존재했다. 승무원이나 전투요원들을 위해 마련된 곳이었다.

이진운과 멀린은 그 중에서도 가장 끝에 자리한 수련실로 향했다. 그곳은 바로 이진운 개인에게만 특별히 할당된 수련시설이었다.

안으로 들어서자마자 안에서 대기하고 있던 아리엔들의 모습이 보였다. 하지만 멀린은 그들보다는 수련실 내부에 더 관심을 드러냈다.

“흠, 만드는 데에 꽤 비싼 값이 들었겠는데요. 이 정도로 단단한 수련실은 보기 드문데··· 여기만 해도 어지간한 전함 한 채 값은 나왔겠네.”

“평범한 수련실로는 내 기운을 버티지 못해서 말이야. 그래서 좀 특별하게 만들었지.”

지상에 있을 때라면 모르겠지만, 우주를 항행하고 있을 땐 마땅히 수련할 만한 장소가 없어서 고민이었다. 어느 정도 경지를 넘어선 이진운은 살짝 기운을 일으키는 것만으로 상당히 파괴적인 위력을 발휘 하는 것이 가능했으니까.

물론 기운을 절제해서 내부로 갈무리한다면 수련장도 망가지지 않을 테지만, 그래선 수련하는 의미가 없었다. 무공은 내공의 운영 없이, 형(形)만 닦는다고 해서 완성되는 게 아니기 때문이었다.

그래서 기운과 형을 고루 수련할 수 있도록, 특수한 수련실을 만들었다. 물론 직접 만든 건 아니고, 리스티에게 부탁한 거였지만 그녀는 자신의 기대에 확실히 부응해 주었다.

그도 그럴 수밖에 없는 것이··· 이 시설 하나를 보호하는 데에 어지간한 전함의 것과 맞먹는 제네레이터가 따로 할당되었을 정도니까.

덕분에 이곳에서만큼은 안심하고 수련할 수 있었다.

“뭐, 사정은 대충 알겠군요. 다른 천외오천들도 비슷한 이유로 개인용 수련시설을 보유하고 있으니까요.”

어깨를 으쓱해 보인 멀린은 수련장 바닥을 자신의 석장 끝으로 살짝 두들기면서 말했다.

“이 정도면 환술을 걸어도 지장은 없을 것 같군요.”

그 말을 끝으로 그가 석장을 들어올렸다. 그러자 석장 끝에 달린 둥근 구슬에서 푸른 빛이 맺히기 시작했다.

그 순간, 무엇을 느낀 건지 이진운이 조금 놀란 표정이 되었다.

우우웅!

분명 기운은 크게 강렬하지 않았다. 하지만 읽을 수가 없었다.

이건 마법이 아니었다. 그렇다고 해서 어떤 특성을 가진 영능력이라고 하기도 그러했다. 지금까지 느껴본 수많은 이능 중 이것과 일치하는 것은 단 하나도 없었다.

‘마법이나 주술도 아니고, 이능도 아니라고? 그럼 대체 이 녀석이 다룬다는 환술의 정체는 뭐지?’

허나 놀라운 일은 그게 전부가 아니었다.

석장으로 잠시 빛을 일으켰던 그가 다시 그것을 내려놓으면서 기운을 거둬들였다.

“다 됐습니다.”

“뭐?”

뜬금없는 그 말에 이진운이 황당하다는 듯 되물었다.

“그걸로 끝?”

“예, 아주 간단하죠?”

천연덕스런 그 반응에 이진운은 더 황당해졌다. 자신이 한 게 뭔지 모를 리 없을 텐데도 이런 대답이라니!

“간단하다는 말로 끝낼 만한 일이 아니야. 정말로 제대로 된 것 맞아?”

“예, 환술은 확실하게 걸렸죠. 정 의심스러우면 한번 확인시켜드릴까요?”

그 말과 함께 멀린이 석장을 들었다가 바닥을 내리쳤다. 석장 끝으로 살짝 바닥을 두들기는 동작이었지만, 그것을 기점으로 시야에 보이던 모든 것이 완전히 다른 무언가로 대체되었다.

그것은 거대한 도시의 풍경이었다.

과학이 극도로 발달된 아르탈 행성 연합의 도시들과는 구조나 형태부터가 전혀 달랐다. 아니, 그게 아니더라도 문화적인 뿌리부터가 달라 보인다고 해야 맞을 것이다.

“여긴 혹시··· 지구?”

어디선가 본 것 같아 혹시나 하는 심정에 그렇게 묻자, 멀린이 맞다며 고개를 끄덕거렸다.

“예, 지구의 모습입니다. 정확히 말하자면 영국의 런던이지요. 아주 그리운 풍경이군요.”

이진운은 눈앞에 펼쳐진 런던의 풍경을 다시 한 번 확인했다.

모든 것이 현실과 다르지 않았다.

피부로 와 닿는 공기의 흐름은 물론, 1년 중 비가 자주 온다는 도시답게 습한 내음까지 모든 게 다 현실이었다.

‘그런데 이게 다 환상이라고?’

물론 그것이 불가능하다고는 생각하지 않았다. 진법이나 주술도 수준에 따라서 현실과 다름없는 환상을 보여줄 수 있으니까.

단지 그가 이해할 수 없는 건 멀린이 사용한 수법이었다.

“이런 실제나 다름없는 환상을 구현한다면서 어떻게 이렇게 간단할 수 있는 거지?”

이진운은 멀린을 돌아보면서 그렇게 물었다.

그는 고작 석장으로 빛의 파동을 일으키는 동작 하나만으로 수련실에 환술의 기반을 완벽하게 안착시켰다.

지금 그가 석장 끝으로 바닥을 친 행동은 이미 수련실에 안착한 환상을 다시 끄집어낸 것에 지나지 않았다.

“그거야 하기 나름이지 않을까요?”

“하기 나름? 웃기고 있군. 지금 그건 마법과 같이 술식을 짜서 올리는 그런 종류의 것은 아니었어. 그렇다고 해서 초능력 같은 분야의 영능은 더더욱 아니었고.”

“역시 예리하시군요.”

멀린의 눈빛이 더욱 흥미로 물들었다. 아무도 알아채지 못했던 환술을 그나마 이 정도까지 파악한 것은 그가 처음이었다.

“이진운씨의 말씀처럼 제 환술은 어느 영역에도 속해 있지 않은 수법이지요. 독자적으로 쌓아올린 방식이거든요. 그러니 아무도 모를 수밖에요.”

“역시 그랬나?”

“이건 마법과 같은 술식이라기보다는 어떤 것과의 연결이라고 보는 게 맞을 겁니다.”

“연결?”

“그래요. 정확히 말하자면 제 사상과, 지성체들이 가진 집단무의식의 연결. 그것이 제 환술의 정체라고 해야겠군요. 예를 들어 설명하자면 이런 겁니다.”

그렇게 말한 멀린은 자신의 손 위로 작은 불을 피워 올렸다.

“이진운 씨는 이 불을 어떻게 생각하십니까?”

“불? 무언가를 태우면서 활성화되는 열에너지? 그런 의미를 묻는 건가?”

“뭐, 비슷합니다. 그럼 이건 어떤가요?”

멀린이 가볍게 손짓하자 이진운의 손 위로 불꽃이 피어올랐다. 하지만 열기는 전혀 느껴지지 않았다. 겉보기에는 실제의 불꽃과 같으면서도 무언가를 태울 수 없는 불이었다.

“환상이군. 전혀 뜨겁지 않아.”

“그럼 이것은요?”

그 즉시 불꽃의 환상이 사라졌다. 하지만 오히려 불꽃이 사라진 후에야 손바닥에서 열기가 느껴지는 것이 아닌가.

물론 이 정도 불꽃에 뜨거움을 느낄 이진운은 아니었다. 단지 열기가 느껴진다고 여겼을 뿐이다.

“눈에 보이지 않는 열기라. 모르겠군. 이 감각이 환상인지 뭔지 구분도 안 가. 그냥 감각을 속인 것 같기도 하고······.”

“그렇다면 환상과 현실을 구분하는 경계는 무엇일까요?”

다시 질문을 던져오는 멀린의 눈동자를 잠시 응시하던 이진운이 입을 열었다.

“이런 걸 보여주는 걸 보면, 실제하느냐 안하느냐를 묻는 건 아니겠지?”

“물론이지요.”

잠시 생각해보던 이진운이 곧 답을 내놓았다.

“그렇다면 네가 묻는 그 경계란 아마도 [인식]이겠지.”

“맞습니다. 바로 [인식]이지요. 그것이 환상의 가장 핵심적인 요소입니다.”

그냥 평범하게 현실과 같은 환상을 보여 줘서 상대를 속이는 것이 아니었다.

눈앞에 보이는 환상을 실체인 것처럼 대상을 인식하게 하는 것, 그것이 멀린의 환술의 정체였던 것이다.

멀린이 다시 말을 이어나갔다.

“혹시 이진운 씨께서는 한 번 들어보셨는지 모르겠군요. 원양어선에 탄 어떤 사람이 어느 날 실수로 생선 보관용 냉장고 안에 갇혀버린 이야기 말입니다.”

“나도 그 정도는 알아. 실제로 냉장고는 작동을 하지 않았고 말이지?”

그건 이진운도 언젠가 들어본 적 있는 이야기였다. 생각보다 꽤 유명한 일화였으니까.

“예. 냉장고가 작동하지 않았는데도, 그곳에 갇힌 사람은 자신이 얼어 죽을 거라고 공포에 떨었지요. 그리고 그 다음날, 그 사람은 실제로 얼어 죽었습니다. 냉장고 안의 온도는 상식적으로는 동사할 수도 없는 상온 15도였는데도 말입니다. 자신이 얼어 죽을 거란 공포에 휩싸인 나머지 그 사람의 몸도 그 망상을 따라 얼어 죽어간 거지요.”

얼어 죽을 환경이 아닌데도, 얼어 죽을 수 있다는 인식만으로 얼어 죽었다. 그것만으로도 멀린이 이야기하고자 하는 바는 충분히 알았다. 허상을 실제처럼 그렇게 인식하게 되면 육체도 자연스럽게 이를 따른다는 말이었다.

“사람이 어떻게 인식하느냐에 따라 이런 결과가 나온 것처럼, 제 환술의 원리도 그렇습니다. 제가 원하는 방향의 인식을 심어줘서 환상을 실제처럼 겪게 하는 것이지요.”

“하지만 그게 전부는 아닐 텐데. 평범한 사람이라면 그럴지도 모르겠지만, 나는 이미 경지에 이르렀지. 단순히 인식을 개변하는 정도가 다였다면 내가 이렇게까지 현실감을 느낄 리 없어.”

이진운의 감각이나 기감은 범인을 월등히 초월한 영역에 다다랐다. 평범한 이들이 보고 느끼지 못하는 부분까지 감지할 수 있는 만큼, 그를 속이려면 단순한 인식변화 정도만으론 불가능하다는 이야기였다.

멀린도 그 사실에 대해선 인정했다.

“뭐 틀린 말은 아닙니다. 단순히 개인의 인식 하나만을 개변하는 정도라면 이렇게까지 현실감 있진 않겠지요. 하지만 제가 건드리는 인식은 개인의 것만이 아니라는 거죠.”

“개인의 것이 아니다?”

“정확히 말하자면 제가 다루는 건 집합무의식(集合無意識)이란 겁니다.”

그 단어를 듣는 순간, 이진운의 머리에도 퍼뜩 떠오르는 것이 있었다.

“집합무의식? 혹시 아스트랄 사이드(정신세계)와 비슷한 개념인가?”

“예, 약간의 이론적인 견해 차이는 있지만 거의 동일한 겁니다. 모든 지성체들이 공감하고 공유하는 공통된 인식 요소들. 그것을 두고 집합무의식이라고 합니다. 어찌 보면 우리가 다루는 사상과도 비슷합니다만··· 사상은 개인의 심상에 뿌리내리고 있는 것이고, 이것은 모든 지성체가 가진 공통으로 가진 심상의 가장 깊은 곳, 심연에 자리 잡고 있는 근본이라 할 수 있겠지요.”

“그렇다면 네가 건드리는 건 바로 그쪽이겠군.”

“예, 개인의 인식을 건드려봐야 사소한 오류라도 발생하면 환술이 금방 깨지지요. 아니면 다른 이가 비슷한 방식으로 인식개변을 방해하면 통하지 않는 경우도 있고요. 하지만 이렇게 제 사상으로 집단무의식 속에서 제가 원하는 인식 자체를 대상과 연결시켜주면, 그것은 더할 수 없는 완벽한 환상이 됩니다.”

“으음, 어떤 원리인지는 대충 알겠어.”

그건 지구에서도 이론적으로만 존재하던 미완성의 가상현실 이론과 일치했다.

처음에는 가상현실을 구현하기 위해 사람의 뇌에 데이터를 집어넣어 그걸로 가상현실을 인식하게 하려 했지만, 그건 의미가 없다는 식으로 결론이 나왔다.

현실과 다름없는 가상세계를 구축하기 위해서는 인간의 뇌에 무리가 갈 만큼의 막대한 데이터를 주입해야 했기 때문이다.

그래서 착안된 것이 바로 인간의 인식을 이용한 방법이다. 사람은 사과란 단어만 들어도 사과의 형태와 맛, 색을 자연스럽게 연상할 수 있는 것처럼, 인간의 개인 인식을 이용해서 불필요한 데이터 주입을 최소화하는 방식이었다.

다만 멀린의 것은 개인이 가진 지식적인 인식 정도가 아니라, 집단무의식이라는 총체적인 근본에 간섭해서 더 완벽한 환상을 빚어낸다는 게 다를 뿐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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