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검신의 검은 우주를 가르고-123화 (124/448)

5권-23화

라인트라에서 벌어진 참사는 관리국은 물론 연합 전체를 뒤흔들었다. 무려 십여 년 만에 벌어진 인베이더의 대규모 공세였다.

절대방어선 안에서 평화롭게 살아가던 사람들은 충격과 공포에 빠져들었다.

그도 그럴 것이 고드렉서 함대를 비롯해서 며칠 사이에 소멸된 함대만 무려 다섯이나 되었다. 전함의 숫자만 친다 하더라도 거의 천 기에 달하는 막대한 전력이 불과 며칠 사이에 날아간 것이다.

전멸한 함대들이 마지막으로 보내온 영상 데이터를 살펴본 이진운은 혀를 내둘렀다.

“무시무시한 녀석이군.”

스스로 루클라라고 정체를 드러낸 신화 급으로 추정되는 인베이더. 놈은 가히 압도적인 힘으로 연합의 함대를 쓸어버렸다.

물론 놈이 이끄는 전력도 만만찮은 편이긴 했지만, 다수의 연합 함대를 상대로 별 피해 없이 전멸시킬 수 있었던 것은 믿기지 않는 실력 때문이라고 봐야 했다.

“정말로 ···엄청나네요. 신화 급도 이런데, 그 위에 존재한다는 초월 급이나 신좌 급 인베이더들은 대체 얼마나 더 강하다는 거지?”

아리엔이 질린다는 듯 내뱉었다. 옆에 있던 클레브도 마찬가지의 심정이었다.

“제 수준에선 감히 상상이 안 갑니다. 이런 게 진짜 괴물이군요.”

하긴 그들로서는 상상할 수 없는 광경일 것이다. 일개 개인이 준대형 급 전함이 포함된 함대를 상대해 전멸시킬 수 있다는 것은 상식을 한참 벗어난 일일 테니까.

어린 엘레나도 입을 벌린 채 할 말을 잃었다.

그들과 달리 나름대로 침착함을 유지하고 있던 아르페인이 물었다.

“이렇게 영상 데이터를 가지고 오신 걸 보면··· 저희의 다음 상대가 저 괴물입니까?”

“아마도 그렇게 되겠지. 직접 마주하게 될지 어떨지는 모르겠지만, 우리도 라인트라 방면으로 가게 되었거든.”

“뭐라고요!?”

이진운의 그 말에, 아리엔들의 얼굴이 창백하게 변했다. 그럴 수밖에 없었다. 지금까지 만말 뿐인 최전선이라 불렸던 라인트라는 말 그대로 생사가 오가는 전장으로 변했다. 심지어 신화 급까지 등장한 지금은 죽음의 구역이나 다름없었다.

“벌써부터 너무 걱정하는 거 아니야? 라인트라는 무척이나 넓어. 우리가 저 루클라라는 신화 급 인베이더와 단독으로 마주칠 가능성은 사실 0.1%도 되지 않는데 뭘 그렇게 걱정들을 해?”

그러자 아리엔이 볼멘 목소리로 항변했다.

“만약이란 게 있잖아요. 게다가 우린 지금까지 운이 그리 좋은 편도 아니었고요. 첫 실습 때만 해도 그랬잖아요. 지난번 아이틀란에서 겪었던 몇 번의 전투도 보통의 경우라면 그렇게까지 어렵진 않다고요. 첫 출격에서 성멸 급 둘에, 해적까지 덮쳐오다니. 그런 우리 함대가 0.1%에 걸리지 않는다는 보장이 어디 있어요?”

논리 정연한 그녀의 반박에, 이진운도 뭐라 대답해줄 말이 궁했다. 남들은 쉽게 넘어갈 전투를 꽤 어렵고 힘들게 치른 것은 사실이기 때문이었다.

“그렇게 말한다면 나도 할 말 없지. 하지만 이미 정해진 일이야. 안 갈수는 없다고.”

이진운의 인피니티 킹덤이 라이선스를 보유하긴 했지만, 그렇다고 해서 전장을 선택할 권한까지 가진 것은 아니었다. 라이선스는 말 그대로 어떤 작전에 대해 어떤 역할을 맡을지 스스로 정할 수 있다는 의미의 권한이지, 그것이 전투에서 마음대로 도망칠 권리는 아닌 것이다.

“그럼 결론 났군요. 라인트라 전투에서 살아남을 수 있도록 철저히 준비하는 수밖에요.”

아르페인은 꽤 담담한 얼굴로 중얼거렸다. 다가올 미래를 두려워하기보다는, 그에 대해 철저히 대비를 하는 것이 더 효율적이라고 생각하는 부류인 듯했다.

“그럼 전 가보겠습니다. 출정이 고작 이틀 후라니, 지금부터 준비할 게 한두 가지가 아니군요. 서둘러야겠습니다.”

아르페인은 그렇게 말하고는 곧바로 이진운의 숙소를 나섰다. 인피니티 킹덤의 지휘와 실무는 현재 그가 대부분 도맡아 하고 있었다. 출정날짜까지 정해진 이상, 여기서 가장 바쁜 사람은 그가 될 것이다.

홀연히 떠난 그 뒷모습에 아리엔들은 어안이 벙벙한 표정이 되었다.

이틀 뒤에 사지나 다름없는 전장으로 가게 됐는데도, 저렇게 동요 한 점 없이 사무적일 수가 있다니! 그들로서는 납득이 가지 않았던 것이다.

이진운이 그런 제자들을 달래듯 말했다.

“너무 걱정들 하지 마. 라인트라에 가는 건 우리 함대만 그런 게 아니니까. 관리국의 함대 중 상당수가 그곳으로 향하기로 했지. 천외오천 중 몇 명도 그 방면으로 출정했다니 생각만큼 위험하진 않을 거다.”

“그나마 불행 중 다행이네요.”

천외오천이란 말에 금세 동요를 누그러뜨리는 제자들. 이진운은 그 모습에 조금 자존심이 상했다.

그의 입가가 묘하게 뒤틀렸다.

“호오, 그러니까 나보다는 천외오천이 더 안심이 된다 이거군.”

“예?”

“아니, 전 그런 뜻에서 한 말이 아니라······.”

그제야 이진운의 심사가 뒤틀렸다는 것을 깨달은 그들이 당황한 표정이 되었다. 바로 옆에 스승이 있는데도, 그보다 천외오천이 더 안심된다는 듯 말했으니 큰 실수를 저지른 셈이다.

“뭐, 그건 아무래도 좋아. 하지만 전장을 앞두고서 그렇게 두려워하는 건 다 자기 실력에 자신이 없어서 그런 법이지. 그럼 제자들의 실력을 보다 더 갈고 닦아주는 게 스승의 도리겠지?”

제자들을 바라보는 그의 눈빛이 날카롭게 번뜩였다. 그것은 마치 눈앞의 사냥감을 노려보는 맹수와도 같았다.

아리엔들도 그 시선 속에 담긴 의미를 깨닫고는 몸서리를 쳤다.

“지금부터 라인트라에 도착할 때까지 특훈에 들어가기로 한다. 너희들의 실력을 철저히 갈고 닦아서 지금보다 한층 발전하게 해 주지. 아마 앞으로 다가올 전쟁 따윈 더 이상 두렵지 않게 될 거다.”

“예에?”

“특훈이라니요. 지금 이 상황에서요?”

특훈이라는 단어조차 불길하게 들렸다. 이건 분명 특훈을 빙자한 얼차려나 다름없을 게 뻔했기 때문이었다.

설령 그게 정말로 특훈이라고 해도 그랬다. 전장을 앞둔 지금 컨디션 조절이 무엇보다 필요한 판국에 특훈이라니.

이건 도저히 받아들일 수 없는 일이었다.

“뭘 걱정하는지는 다 안다. 전쟁 전에 몸 상태를 최상으로 만들어야 한다, 그거겠지?”

“그··· 그렇죠. 컨디션 조절이 중요하잖아요. 한끝 차이로 생사가 갈리는 정쟁에서는 더욱더 그렇고요.”

“흐음, 그것도 틀린 말은 아니지.”

이진운이 아리엔의 설득에 납득하는 표정을 짓자, 다들 안도하는 표정이 되었다.

“그럼 특훈 안하는 거죠?”

하지만 그들의 기대와 달리, 이진운은 곧 충격적인 반전을 내놓았다.

“아니, 특훈은 반드시 한다. 나도 그런 문제들을 다 고려해서 하는 말이고. 먹고 자는 시간을 제외하고는 전부 특훈에 투자할 거니까 다들 그런 줄 알아.”

“아니, 어떻게 이야기가 그렇게 되는데요.”

“더 이상의 반론은 받지 않겠어. 라인트라에 도착하기 전까지 최상의 컨디션으로 전쟁에 임할 수 있도록 해줄 테니 너희들은 걱정 말고 특훈을 받으면 된다, 알았지?”

단호한 그 말에, 아리엔들은 더 이상 설득이 먹히지 않을 거란 사실을 깨달았다. 그가 한번 결단을 내리면 어떠한 말도 먹히지 않는다는 걸 여러 차례의 경험으로 깨우쳤기 때문이었다.

“그럼 준비 되는대로 훈련장으로 와. 이제부터 특훈에 들어갈 거니까.”

말을 마치자마자 이진운은 멍한 표정을 짓고 있는 제자들을 놔둔 채 자신의 숙소를 떠나갔다.

그때까지 잠자코 있던 엘레나가 억울하다는 듯 중얼거렸다.

“아저씨, 진짜 너무해. 난 아무 말도 안 했는데, 왜······.”

* * *

“아하, 그러니까 제 환술의 힘이 필요하시다 이거군요.”

“···그래. 제자 녀석들의 생존률을 높이기 위해선 반드시 필요해.”

이진운은 자신 앞에서 빙글빙글 웃는 눈앞의 상대를 바라보면서 마뜩치 않은 얼굴로 말했다.

그럴 수밖에 없었다. 되도록 만나고 싶지 않은 상대였으니까.

그도 그럴 것이, 눈앞의 인물의 정체는 멀린. 천외오천의 일인이었다. 그리고 환술의 달인이기도 했다.

그의 환술로 지금의 천외오천이 환상 속에서 닦은 고행으로 지금의 위치에 이르렀다는 걸 안 이상, 이걸 이용하지 않을 이유가 없었다.

그래서 이진운은 일부러 멀린을 찾아왔다. 되도록 가까이 하고 싶지 않은 상대였지만, 그 외에는 다른 방도가 없었다.

출정까지는 불과 이틀. 그리고 출정 이후 라인트라까지 도착할 때까지 걸릴 추정시간은 보름 남짓.

그동안 제자들의 실력을 최대한 더 끌어 올려야 했다. 그러자면 멀린의 환술 밖에는 없었다.

물론 진법을 통해서도 비슷한 효과를 볼 수 있지만, 그건 여러 모로 무리가 따른다. 환술처럼 짧은 시간을 아주 긴 시간처럼 체감시간을 늘릴 방법이 없었다.

‘내 실력이 지금보다 몇 단계 위였다면 방법이 없는 것도 아니지만··· 지금으로선 어렵지.’

그래서 멀린을 찾게 된 것이다.

다행히 멀린은 이진운과의 만남을 거절하지 않았다. 오히려 그가 자신에게 도움을 청한다는 사실에 호기심을 보이고 있었다.

“뭐, 좋아요. 들어드리죠. 이진운 씨와는 어차피 자주 봐야 하는데, 저도 가까운 사이가 되면 좋잖아요. 서로 도와주고 도움 받고 하는 사이 말입니다. 아, 저 게이 아니니까 걱정 마세요. 동성연애 따윈 관심 없으니까요.”

“···그런 걱정은 하지도 않았다.”

뜬금없이 게이 운운하는 멀린의 말에, 이진운은 기가 차 헛웃음을 흘렸다. 처음부터 이런 사내였다. 진지함이라곤 눈곱만큼도 없는데다, 속내를 알 수 없는 태도까지.

그래서 친분을 유지하고 있는 연정운과 달리 가깝게 지내지 않을 생각이었는데, 결국 어쩔 수 없이 먼저 아쉬운 소리를 하고 말았다.

반면 그런 이진운의 속내를 알면서도 멀린은 여전히 뜻 모를 미소를 짓고 있었다. 그는 먼저 환술의 문제점부터 짚고 넘어갔다.

“그런데 이진운씨도 이 수련법에 부작용이 있다는 건 아시고 있죠? 짧게는 수 년, 길게는 수백 년의 시간을 환상 속에서 보내는 겁니다. 그 부분에 대해선 전에 연정운씨에게 들어서 아실 텐데요.”

“아, 정신적 마모 말이군. 그거에 대해선 걱정할 것 없다. 나름대로 방법이 있으니까.”

“그러신가요? 그럼 됐습니다. 그 문제만 해결된다면 특별히 따로 해 드릴 말은 없겠군요.”

“그런데 그 환술을 수련장에 적용하는 데에 얼마나 걸리지? 바로 이틀 뒤에 출정이야. 너무 오래 걸리면 곤란한데.”

“그렇게 오래 걸리는 작업은 아니니까 지금 해드리지요.”

“뭐?”

이진운이 당황스런 표정을 지었다. 어지간한 수준의 진법조차도 구현하기까지 많은 준비와 시간이 필요한데, 현실과 다름없는 환술을 작동시킬 수 있는 설비를 무슨 식후 차 한 잔 마시는 것처럼 간단히 말한단 말인가?

“일단 가 보시면 압니다.”

멀린이 의미모를 미소를 지으며 앞장서 걸어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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