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검신의 검은 우주를 가르고-121화 (122/448)

5권-21화

엘프가 대체적으로 선할 거란 선입견을 부숴준 베네트는 다시 화제를 되돌렸다.

“어쨌든 현재로선 놈들이 왜 제이나를 노렸는지는 미지수인 상황이네. 앞으로도 그녀를 노릴지 어떨지는 모르겠지만, 가능성이 높은 것만은 사실이지. 놈들의 목적인 인체실험이라면 더더욱 그럴 것이고.”

“그렇겠지요.”

이진운도 고개를 끄덕였다.

현재는 그냥 짐작일 뿐이지만, 베네트의 말처럼 놈들의 목적이 인체실험이라 한다면, 하이엘프인 제이나를 납치한 것도 납득이 간다.

하이엘프는 타 종족들에 비해 막대한 생명력과 월등한 영격을 타고나는 개체였다. 인체실험을 한다면 그들만큼 희귀하면서도 질 좋은 실험체는 찾아보기 어려울 것이다.

“그러니 무슨 일이 생기면 자네가 철저히 지켜내야 해.”

“국장님의 말이 아니더라도 그럴 생각입니다. 저도 한 입으로 두말하는 성격은 아니라서요.”

신신당부하는 베네트의 모습에, 이진운은 담담한 목소리로 대답했다.

“그건 그렇고, 하필이면 그놈들의 단서가 연방공화국으로 이어져 있다니···. 손쓰기가 애매해지는군.”

베네트는 저도 모르게 이맛살을 찌푸리고 말았다. 하필 이진운이 가져온 단서가 꽤 성가신 곳과 연관되어 있었기 때문이었다.

“국장님이라 해도 그건 어려운가 보군요.”

“연방공화국과 우린 동맹 관계긴 해도 그렇게 가까운 편은 아니야. 게다가 내부 문제에 대해선 서로 간섭할 수 없다는 불가침 입장을 고수하고 있어서 더욱 그렇지. 괜히 섣불리 건드렸다가 잘못되기라도 하면 전면전까진 아니더라도 여러모로 골치 아픈 일이 벌어질 수 있어.”

그렇게 말한 베네트는 작게 한숨을 내쉬었다.

“그나마 말이 통하는 건 이사트 그 자 뿐인데, 문제는 그가 쥐고 있는 실권이 거의 없다는 거지. 오죽하면 식물수상이라고 불리겠나.”

“그러면 어쩌실 생각입니까? 암중에서 그런 짓을 꾸미는 자들을 그냥 놔둘 수도 없는 일 아닙니까?”

“일단 조사는 공화국의 신경을 건들지 않는 선에서 조심스럽게 진행하기로 하지. 시간은 좀 걸릴 거야. 그 점은 자네도 염두에 두도록 하게.”

‘결국 이렇게 되는 건가?’

어느 정도 이런 결과를 예상하고 있던 이진운은 이쯤에서 그만두기로 했다. 관리국장조차 곤란해 하는 조사인데, 여기서 더 강조해봐야 의미가 없었다.

‘어쩔 수 없지. 하지만 이렇게 끝낼 생각은 추호도 없어.’

일단은 훗날을 기약하기로 했다. 지금보다 훨씬 더 강해져서, 그리고 그 누구라도 무시할 수 없을 만큼 큰 명성과 영향력을 갖게 된 이후에 놈들의 뒤를 캘 생각이었다.

용무를 다 마친 이진운이 국장실을 나서려던 그때, 갑자기 한 사람이 안으로 들이닥쳤다. 베네트의 부관인 필리스였다.

다급해 보이는 표정의 그가 다짜고짜 소리부터 질렀다.

“국장님 긴급사항입니다!”

“긴급사항? 무슨 일인데? 좀 진정하고 말해.”

국장 자리에 있으면서 온갖 일을 다 경험해 본 베네트였다. 그는 침착하게 물었다.

“인베이더들이 갑자기 엄청난 규모로 공습을 감행해 왔습니다. 지금 라인트라 전선 상황이 풍전등화나 다름없다고···.”

“뭐? 라인트라 전선에서!?”

이어진 필리스의 보고에, 언제나 침착했던 베네트의 얼굴도 금세 당혹으로 일그러지고 말았다.

* * *

인류와 인베이더가 서로 영역을 다투고 있는 최전방 전선 라인트라. 이곳에서는 수백 년에 걸친 전쟁이 아직도 현재진행형 상태로 계속되고 있었다.

물론 수백 년이란 시간동안 두 세력 간의 총력전이 지속되어 온 건 아니었다. 하지만 그들의 대치는 끊이지 않고 계속되어 왔었고, 지금도 소규모 접전 정도는 거의 일상이나 마찬가지일 정도로 빈번하게 일어나고 있었다.

그래서일까? 대규모 전투 없이 소규모 접전만 계속되는 상황에서 연합의 함대들은 시간이 갈수록 처음의 경각심을 잃어가기 시작했다.

크게 위험하지도 않은 전투만 십여 년 이상 계속 반복되고 있으니, 경계심을 잃어버려도 그리 이상한 일은 아니었다.

대략 9개월 전에 이곳 라인트라로 파견된 최전선 함대 [고드렉서] 사정은 크게 다르지 않았다. 거의 매일같이 벌어지는 소규모 접전에 승무원과 전투요원들도 긴장감을 잃어가고 있었다.

“에이, 이놈의 인베이더 놈들. 오늘도 귀찮게 하는군. 아주 지긋지긋해.”

“오늘도 또 간만 적당히 보다 도망가더군. 아주 진저리가 나. 이럴 거면 차라리 화끈하게 한판 붙는 게 더 낫겠어.”

출동했다가 돌아온 오버러와 전투요원들이 투덜거리면서 해치를 통해 함 안으로 들어섰다. 다들 전투 시늉만 하는 소규모 접전이 시답잖다는 반응이었다.

그도 그럴 것이, 이런 소규모 접전에 나서는 인베이더라고 해 봐야 양산형들이 대다수였다. D랭크 이상의 오버러라면 양산형 정도는 손쉽게 잡을 수 있는 상대에 불과했다.

그들 중 누군가가 자신이 베어온 인베이더의 수급을 들고 자랑하기 시작했다.

“그래도 난 오늘 제법 한몫 했지. 자 봐, 나간 김에 침공 급 몇 놈 멱을 따서 왔잖아. 이번 성과급은 내 차지라고.”

“허··· 이 녀석, 공돈 벌었네.”

“침공 급은 눈을 씻어도 안 보이더만 그게 다 네놈한테 갔구나. 어젯밤에 무슨 좋은 꿈이라도 꾼 거냐?”

“돈도 벌었는데, 오늘 저녁은 네가 사는 거지?”

부러움과 질투가 뒤섞인 동료들의 목소리에 사내는 더 의기양양해졌다. 이런 소규모 접전만 계속 되는 상황에서 침공 급을 벨 기회란 생각보다 많지 않았다.

그건 즉 제대로 된 전공을 쌓을 기회가 없다는 말이나 다름없었다. 그래서 다들 전공에 목말라했다. 그래서 질투하는 자들도 적지 않았다.

“흥, 어디서 침공 급 따윌 내밀어? 적어도 진멸 급은 되어야 자랑할 만하지.”

“허, 저놈 질투하는 것 좀 봐라. 어디 진멸 급을 볼 수나 있으면 그렇지. 여기서 진멸 급 찾기가 얼마나 하늘의 별 따긴데.”

“그러게 말이야. 진멸 급? 그게 내 앞에 있었으면 내 플레임 슈터 앞에 한순간에 통닭이 됐을 거다.”

다들 그렇게 시시덕거리며 자신만만해 했지만, 사실 이곳에 있는 오버러들 중 정말로 진멸 급을 상대할만한 실력을 가진 자는 없었다. 침공급만 하더라도 그들이 전력을 다해야 잡을 수 있을까 말까한 적인데, 진멸 급이야 더 말할 것도 없었다.

비이잉! 비이잉!

그때 함 내로 경보음이 울렸다. 여느 때와 다름없이 울어대는 경보음을 들은 오버러들의 얼굴이 팍 일그러졌다.

또 싸우러 출동하게 생겨서였다. 전투를 마친 지 불과 30분도 지나지 않은 시점이었던 것이다.

“또냐? 아, 진짜 쉬질 못하네.”

“오늘만 벌써 몇 번째냐? 인베이더 이것들이 무슨 우리를 똥개 훈련시키나?”

“감질나게 덤벼드니까 더 짜증만 난다. 차라리 하루치 몰아서 덤비면 안 되나?”

“용돈벌이든 뭐든 다 좋은데, 좀 사람답게 살고 싶다. 살기 위해 수당을 받는 거지, 이렇게 쉴 새 없이 들락거리면서 푼돈 벌고 싶진 않은데······.”

그들은 투덜거리며 벗어두었던 장비를 착용했다. 불만은 불만이고 싸움은 싸움이었다.

인베이더는 타협할 수 없는 모든 지성체들의 적. 무조건적인 격멸만이 해결책이었으니까.

오버러들은 해치를 열고 금세 모함에서 벗어났다. 그러자 소형함인 소리엔 급 전함 다섯 척이 그들 앞에 나타났다.

전장은 불과 50미터 남짓한 수준밖에 되지 않았지만, 양산형을 상대하기엔 이 정도만으로도 넘치고도 충분했다.

오버러들이 함체 위에 올라타자마자, 소리엔 급이 가속하기 시작했다. 하지만 오버러들 중 어느 누구도 동요하지 않았다. 가속 중인 함체 위에 탄 채로 전투를 벌이는 건 일상이나 다름없었기 때문이었다.

“저기 보이는군.”

“아, 진저리난다. 저것들 이젠 지겹지도 않나?”

그들의 시야로 드디어 인베이더 무리가 보였다. 우주 공간 속을 피라미처럼 유영하며 달려드는 인베이더들은 대다수가 양산형이었다.

“자, 학살 타임이다! 서둘러 끝내고 쉬자고. 조금 있으면 내가 즐겨 보는 프로가 시작된단 말이야!”

“나는 밥 먹다 나왔어! 식사 식기 전에 돌아가자!”

“오늘은 내가 1등이다!”

제각기 여유로운 소리들을 늘어놓으면서 인베이더들을 쓸어나가기 시작했다. 9개월 동안 수천 번에 이르는 전투를 경험하면서 우주전에 있어서는 상당한 경험을 쌓아온 그들이었다.

이제 맨몸으로 우주전을 벌이는 것도 꽤 능숙해졌다. 조금 과장되게 말한다면 양산형 정도는 눈감고도 상대할 만했다.

콰아앙!

쿠구구!

다수의 오버러들이 영능을 발휘하자, 어지간한 전함 이상의 위력으로 인베이더들을 쓸어버렸다. 오버러 개개인들의 힘은 전함에 비할 바 아니지만, 그들이 서로 연계하면 그 이상의 힘도 발휘할 수 있었다.

그리고 소리엔 급 전함들도 지원 포격을 시작했다. 그냥 놔둬도 오버러들이 다 쓸어버릴 수 있는 숫자였지만, 이런 전투가 하루에도 몇 번씩이나 반복적으로 벌어지고 있는 상황이었다. 오버러들의 기력을 조금이라도 아끼기 위해서라도 함포 사격으로 수를 최대한 줄일 필요가 있었다.

오버러들과 전함의 분전으로 양산형 인베이더 1300기가 순식간에 처리되었다. 그들은 숨을 헐떡이면서 진저리를 쳤다.

“제발 오늘도 이걸로 끝났으면 좋겠네.”

“진짜 이 짓도 더 못하겠다. 다음 함대와 교대할 때까지 앞으로 1개월 남았나?”

“아직도 깜깜하네. 이런 악조건에서 1개월이나 더 버텨야 한다니.”

“돌아가기만 하면 최전선 쪽은 다시 쳐다보지도 않는다.”

그들은 지친 몸을 끌고 다시 소리엔 급 함체 위로 올라섰다. 다시 모함으로 귀환해야 할 때였다.

“겨우 끝냈는데, 또 금방 출동하는 건 아니겠지?”

“야, 말하지 마. 그 말이 금방 씨가 된다.”

오늘만 벌써 두 번째 전투다. 언제 세 번째 네 번째 전투가 벌어질지 아무도 예상할 수 없었다.

계속된 전투에 긴장될 법도 하지만, 이젠 만성이 되었다. 피해가 예상되는 위험한 전투도 아니고 기껏 해봐야 몸 풀기 적당한 전투만 반복되는데, 긴장감을 느낀다면 그게 더 이상한 일이다.

그때였다. 그들이 가진 모듈밴더을 통해 경보음이 울렸다. 또다시 인베이더의 무리가 출몰했음을 알려오는 경보음이었다.

이제 막 싸움을 끝낸 오버러들의 얼굴이 구겨진 종이마냥 찌푸려졌다.

“아, 진짜! 너 때문이잖아.”

“내가 뭘?”

“네가 방금 했던 말이 정말로 씨가 됐잖아! 인베이더 놈들이 이젠 숨 돌릴 틈도 안주네.”

투덜대는 그들에게, 오버러들의 리더로 보이는 이가 나서서 독려하기 시작했다.

“쓸데없는 소리 말고 싸울 준비나 해. 오늘 같은 일이 한두 번도 아니잖아. 좀 전의 전투로 지치거나 다친 녀석은 없지?”

“당연하지. 좀 전에 상대했던 녀석들의 두 배는 더 쓸어버릴 수 있어.”

“그럼 얼른 끝내고 돌아가자. 설마 이 다음에도 또 나오진 않겠지.”

“그래. 후딱 끝내자.”

불만을 수습한 리더는 모두를 데리고 모듈밴더에 표시된 지점으로 이동하기 시작했다.

그렇게 인베이더 출몰 지점에 도착한 그들은 그곳에서 난생 처음으로 목도할 수 있었다. 지금까지 상대해왔던 양산형과 달리, 차원이 다른 무서움을 간직한 존재를.

그것은 자신들로서는 무슨 짓을 해도 대적할 수 없는, 재앙 그 자체였다.

“이···이건 대체···!?”

리더의 목소리가 떨려왔다. 하긴 그럴 수밖에 없었다.

보는 순간 즉시 깨달았다. 저건 상상을 초월한 괴물이라고!

놈에게서는 분명 아무 기운도 흘러나오지 않았지만, 그들의 손발은 저절로 부들부들 떨려오고 있었다.

마치 늑대인간을 연상케 하는 생김새를 가진 인베이더가 오버러들을 내려다보며 빈정거렸다.

[하찮구나! 참으로 하찮아. 양산형들을 상대로 우쭐대더니 고작 이 정도 존재감도 못 버티는 버러지들일 줄이야.]

좀 전까지만 해도 고요하기만 했던 그에게서 타오르는 듯한 기세가 풀려나오기 시작했다. 얼마나 강대하던지 그가 기운을 해방한 것만으로도 이 일대의 주역이 수백 수천배의 중력에 의해 짓눌리는 듯한 느낌을 받았다.

천적을 앞에 둔 짐승처럼 얼어붙은 오버러들을 향해 그가 오만한 태도로 선언하였다.

[그래도 영광인 줄 알아라. 너희 같은 버러지들이 위대한 투쟁의 좌 오르쿤 님의 오른팔인 나 루클라 바이빌란의 손에 죽게 된 것을 말이다.]

그가 손을 뻗었다. 그러자 환한 광채와 함께 모든 것이 순식간에 지워져 나갔다. 그건 전함이라 해서 다를 리 없었다. 소리엔 급 전함은 그래봐야 소형 전함. 저와 같이 강력한 인베이더 앞에서는 종이비행기와 하등 다르지 않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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