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검신의 검은 우주를 가르고-120화 (121/448)

5권-20화

잠시 입술을 닫은 채 상고하던 베네트가 곧 씁쓸한 표정으로 답했다.

“확실히··· 그 말은 부정하기 어렵군. 기밀이 유출되면서 자네에게 피해를 끼친 건 사실이니 말이야.”

그런 베네트를 이진운이 뜻밖이라는 듯 쳐다보았다.

“왜 그런 눈으로 날 보나?”

이진운의 시선을 알아챈 베네트가 묻자, 그는 대수롭지 않다는 듯 말했다.

“별 거 아닙니다. 너무 순순히 인정하시니 조금 뜻밖이라······.”

“인정할 건 인정해야지. 이쪽에서 생긴 문제로 자네가 죽을 고생을 했는데······. 뭔가 보상이 필요하다면 말하게. 내 선에서 가능한 일이라면 얼마든지 들어주지.”

이진운은 그 배포에 조금 놀라고 말았다. 설마 기밀 누설로 입은 피해에 대한 대가를 이런 식으로 제시할 줄은 몰랐기 때문이었다.

‘이거 생각보다 크게 나오는데···?’

상대는 평범한 인물도 아니고 무려 연합의 3대 세력 중 하나인 관리국장이었다. 그의 힘과 권력이라면 어지간한 걸 요구한다 해도 들어줄 수 있을 것이다.

물론 지나친 부탁을 요구할 경우, 오히려 베네트의 불쾌감을 살 수 있으므로 신중한 선택이 필요했다.

하지만 이진운은 그렇게 거창한 걸 바라지 않았다.

“그렇다면 제이나를 저희 함대 소속으로 해 주셨으면 합니다.

“제이나? 그게 누군가?”

“이번에 저희가 구출하게 된 엘프 여성분의 이름입니다.”

“아, 그랬지.”

그제야 생각이 났다는 듯 고개를 주억거리는 베네트. 그가 곧 이유를 물어왔다.

“그런데 어째서 그녀를 함대에 넣어 달라는 건가?”

“잠시 실례하겠습니다.”

이진운은 그렇게 말한 뒤 주변에 기막(氣膜)을 펼쳤다. 기운이 유동하면서 생겨난 변화를 읽어낸 베네트가 약간 호기심을 드러냈다.

그것은 베네트와 이진운의 주변만을 완전히 격리하고 있었다.

“흐음, 신기한 수법이군. 영력으로 주변을 둘러서 내구성은 별로 대단하지 않지만 소리는 확실히 차단할 수 있겠어. 아니 통신 같은 것도 차단되는 방식인가.”

“본래 그런 용도로 쓰이는 수법입니다. 혹시 모를 도감청을 방지하기 위해서라고나 할까요?”

“아무튼 재밌는 수법이군. 마법하고는 완전히 달라.”

잠시 흥미를 보였던 베네트가 단도직입적으로 물었다.

“도감청을 언급하는 걸 보면, 중요한 이야기인 모양이지?”

“예, 지금부터 제가 하는 말을 잘 들어주셨으면 좋겠습니다. 전에 올렸던 보고에는 넣지 못했던 내용들이죠.”

보고에서 누락한 내용이 있다는 그 말에, 베네트의 두 눈이 가늘어졌다.

“그 말은···기밀 유출 때문에 보고에 올리지 못한 사실들이다 이거군.”

“예.”

“음, 거짓말은 아닌 것 같군.”

이진운의 담담한 태도에, 잠시 그의 눈동자를 응시하던 베니트가 곧 고개를 주억거렸다.

“뭐, 보고를 누락한 건 조금 괘씸하지만, 이유는 납득했다. 충분히 그럴 수밖에 없었다는 걸 말이야. 하긴 기밀 유출이 짐작되는 상황에서 모든 사실을 보고로 올리기엔 좀 꺼림칙했겠지.”

생각보다 관대하게 넘어가주는 베네트의 태도에 이진운은 묘한 얼굴이 되었다. 이때를 위해 몇 가지 변명거리를 더 생각해 두었는데, 그 고민이 쓸데없는 일이 되어서였다.

하지만 이렇게 넘어가준다면 오히려 고마울 뿐이다. 제아무리 많은 변명거릴 만들어냈다 해도, 급조한 변명에는 허점이 있기 마련이기 때문이었다.

“그럼 말해 보게. 보고에서 누락한 내용이 무엇인지 말이야.”

이진운은 그때부터 자신이 알아낸 사실들 대부분을 털어놓았다.

이야기의 핵심은 가면인을 시작으로 인베이더와 손잡은 것으로 추정되는 의문의 세력에 대해서였다. 로일라 해적들도 그들이 불러들였으며, 아이틀란 행성에서 그들이 꾸민 흉계와, 비밀 시설에 대해서도 언급했다.

비밀 시설에 대해서는 사전에 올렸던 보고를 통해서도 언급은 했었다. 단지 이것이 가면인의 배후 세력과 연관이 있다는 내용을 누락시켰을 뿐이다.

야이기를 다 듣고 난 베네트는 무겁게 침음성을 흘렸다. 설마 자신이 모르는 곳에서 이런 일들이 벌어지고 있을 줄은 상상도 못했기 때문이었다.

“흐음, 단순히 불법적인 인체실험을 위한 비밀시설인 줄 알았는데 그게 인베이더와 손잡은 놈들과 연관이 있었다니······. 그리고 거기서 제이나란 하이 엘프로 짐작되는 여인을 구출했다?”

“예.”

“그리고 기억을 잃은 그녀는 다시 돌아가길 거부하고 있고?”

“예, 오히려 더 위험할 거라면서 굳이 저희 함대에 남길 원하더군요.”

이진운이 덧붙여 말하자, 베네트도 제이나란 엘프가 왜 그런 요구를 했는지 납득된다는 반응을 보였다.

“하긴 그럴 만도 하지. 자기 집에서도 납치를 당했는데, 굳이 돌아가고 싶을까? 차라리 자네 전함에 남는 게 더 나을지도 모르겠군. 돌아가봐야 또 같은 꼴을 당할 수도 있으니 말이야.”

“그럼 허락 하시는 겁니까?”

“허락은 어렵지 않네. 어차피 이진운 자네의 함대는 독립 라이선스를 보유하고 있지 않나? 승무원을 고르는 정도는 자네 재량에 달린 문제니, 내가 굳이 터치할 이유가 없지.”

너무 흔쾌한 그 말에 이진운은 조금 얼떨떨했다. 독립 라이선스를 보유했다고 해서 자신의 재량대로 하라니. 베네트가 이 문제에 대해 너무 방임하는 게 아닌가 싶어 다시 넌지시 운을 띄웠다.

“솔직히 말하자면 그녀의 위치가 하이 엘프인 만큼 엘프일족이나, 연방공화국과 외교적 마찰이 생길까봐 걱정했습니다.”

“그 점에 대해선 걱정할 필요 없네. 그녀는 한번 납치당했고, 그들은 지켜내야 할 것을 지키지 못했지. 심지어 본인이 자네 함대에 남길 원하고 있는데, 그들이 무슨 상관이 있겠나. 그녀의 신변 문제는 걱정할 것 없네. 물론 인간들 관점에서 본다면 말도 안 되는 소리지만, 엘프들은 꽤 논리적인 일족이야. 이렇게 말하면 충분히 넘어갈 수 있네. 그래도 염려된다는 표정인데, 뭐가 그렇게 걱정인가?”

“혹시라도 그쪽에서 우리가 강압적인 수단을 썼다고 억지를 부리지 않을까 염려 되서 그렇습니다.”

그래도 우려된다는 듯 말하는 이진운의 모습에, 베네트가 말도 안 된다면서 피식 웃어보였다.

“걱정도 팔자군. 강압적인 수단? 자네는 소환된 지 얼마 안 되서 그런지 아직 잘 모르는군. 하이엘프 쯤 되면 고문을 가한다 해도 원하는 대답을 들을 수 없다는 걸 말이야.”

“그렇습니까?”

“하이 엘프의 영격은 아주 높은 수준에 위치해 있네. 그 자의식을 꺾는다는 건 신이 아닌 이상 어려워. 설령 물리적인 고통을 가하고, 정신계 마법으로 세뇌한다고 해도 힘들지. 물론 이번 경우처럼 기억이 지워진 건 다른 문제지만, 그녀가 강압적인 수단으로 굴복해서 상대의 부정한 뜻에 따를 일은 절대 없을 걸세.”

“처음 듣는 이야기군요.”

“하긴 잘 모를 만도 해. 하이 엘프를 본 사람은 극히 드무니까. 엘프 거주구역에서 한 발짝도 안 나오는 지지리 궁상들을 볼 일이 있어야 알려지든가 말든가 하지. 오죽 하면 하이 엘프들을 두고 [고고한 방구석 폐인]이라고 하겠나. 누가 붙인 건진 몰라도 아주 잘 붙였어.”

“풋!”

이진운도 그 순간만큼은 웃음을 참을 수가 없었다. 고고한 방구석 폐인이라니. 하이엘프에게 붙었다는 별명이 참으로 기가 막혔다.

“그건 그렇고··· 하이 엘프로 짐작되는 격을 가진 제이나란 이름의 여인이라··· 어디서 분명 들어본 이름인데 말이야.”

베네트가 제이나란 이름을 두고 고민하는 듯 되뇌었다. 그 이름을 듣고 나니 뭔가 떠오를 듯 해서였다.

몇 번이고 그 이름을 중얼거리던 베네트가 곧 탄성을 터뜨렸다.

“아, 그래! 몇 년 전에 들은 적이 있었던 것 같군.”

“짚이는 게 있습니까?”

뭔가 알아낸 듯 싶어 이진운이 묻자, 베네트가 기억 속에 깊게 파묻혀 있었던 제이나의 이름을 언급했다.

“내 기억이 맞다면 풀네임이 아마 [제이나 프로일라 리멤스로인]이었지?”

“제이나 프로일라 리멤스로인?”

이진운이 그 이름을 듣자마자 즉시 모듈밴더의 홀로그램 창을 열었다. 오버러들에게 제공되는 관리국의 검색 기능을 통해 그녀의 정보를 찾아보기 위해서였다.

하지만 뒤져도 나오질 않았다.

그 모습을 힐끗 쳐다본 베네트가 고개를 가로저으며 자신의 모듈 밴더를 작동시켰다.

“그런 모듈밴더의 공용정보로는 열람할 수 없는 내용이지. 극비에 속한 정보 중 하나니 말이야.”

확실히 관리국장의 열람 권한은 이진운의 것과 차원이 달랐는지, 검색하자마자 제이나에 대한 기록이 떠올랐다.

이번엔 확실했다. 홀로그램 창 위에 떠오른 건 분명 제이나의 모습과 그에 대한 기록이었다. 그것을 찬찬히 읽어 내려가던 베네트가 그제야 알겠다는 듯 고개를 주억거렸다.

“흐음, 그렇군. 그래서 기억이 흐릿한 거였나? 어째 하이 엘프씩이나 되는 자의 이름을 내가 기억 못하고 있었나 했지.”

“그 말은··· 제이나에게 다른 하이엘프들과 다른 특이사항이 있는 겁니까?”

이진운이 궁금하다는 듯 묻자, 베네트가 입을 열어 대답해 주었다.

“특이사항이라면 특이사항이지. 하이엘프가 맞긴 맞는데··· 제이나는 그 중에서 방계에 속하더군.”

“방계 말입니까?”

“그래, 그 중에서도 피가 많이 흐려진 방계지. 이젠 거의 하이엘프 취급도 못 받는 수준인 모양이더군.”

하지만 방계란 그 사실을 이진운은 쉬이 납득하지 못했다. 자신이 직접 본 제이나는 결코 평범한 엘프가 아니었다.

“하지만 제가 본 제이나는 분명 영적 격이나 생명력이 대단했습니다. 그냥 일반 엘프라 보긴 어려웠는데······.”

“하지만 그녀는 예외였지. 격세유전으로 흐려졌던 하이엘프의 피가 진하게 발현되었다네. 일종의 돌연변이지.”

“그랬군요.”

격세유전에 의한 돌연변이. 그렇다면 납득이 갔다. 피가 흐려진 방계이면서도 유독 하이엘프에 버금가는 영적 격과 생명력을 가졌는지를.

그리고 왜 가면인과 그 세력이 제이나를 납치할 수 있었는지도 나름 짐작이 갔다.

‘그래서 제이나를 납치한 건가?’

하이엘프는 철저히 보호받지만, 제이나는 방계 출신인 몸이다, 그만큼 보호도 허술했을 것이다.

그런 이진운의 짐작을 확신시켜주듯, 베네트가 말을 이어나갔다.

“꽤나 불편한 삶을 살아온 모양이야. 제이나 그녀는 방계이면서 하이엘프의 피를 짙게 타고나는 바람에 다른 하이엘프들에게 여러모로 견제를 받아온 모양이더군. 엘프 사회가 워낙 폐쇄적이어서 직계의 정통을 중시하는 편이지. 존재감조차 없던 방계의 핏줄이 두각을 드러내니 당연한 결과라고나 할까?”

그 뒤에 이어진 이야기는 뻔했다. 일단 하이 엘프의 피가 발현된 만큼 제이나에게도 다른 하이엘프들처럼 여러 가지 권한이 부여되었고 그녀를 보호하기 위한 수호대도 창설되었다.

허나 그들의 보호는 직계와 비교한다면 꽤 허술한 편이었다고 했다. 아마도 가면인의 세력은 그 허점을 노린 것일 터였다.

“그렇지만 제아무리 보호가 허술하다 해도 이렇게 자기 앞마당에서 하이엘프가 쉽게 납치되는 건 납득이 안 가는 일이지. 아마도 내통한 자가 있을 게 확실하네.”

내통자의 존재를 확신하는 베네트의 말에, 이진운은 기존의 엘프들에 대한 인식을 달리 하게 되었다.

“엘프들도 듣던 것만큼 선한 종족은 아니군요.”

“보편적으로 보면 심성들이 선한 편이지만, 그들도 각자 개성이 있잖나. 좋은 엘프가 있으면 나쁜 엘프도 있는 법이지. 인간에 비한다면 그 비율은 훨씬 적을 테지만, 그래도 악인은 어디에나 있다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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