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검신의 검은 우주를 가르고-119화 (120/448)

5권-19화

잠시 뒤 가면인의 입에서 끓어오르는 듯한 목소리가 흘러나왔다.

[···알았다. 이번 일은 어떻게든 내 손에서 수습해 보겠다.]

“뭘 어떻게?”

[필요하다면 내 목숨을 걸고서라도 해 보이지.]

결연하기까지 한 말이었지만, 흑의복면인은 냉소에 찬 목소리로 대꾸해줬다.

“목숨을 걸어? 주제넘은 소리 하지 마. 지금 사태는 네 녀석 목숨 하나로 어떻게 해볼 수 있는 문제가 아니란 말이야.”

[그럼 어쩌란 거냐? 내가 책임질 수 있는 방법은 그 뿐인데······. 지금이라도 우리가 동원할 수 있는 최대의 전력으로 인피니티 킹덤을 치는 건 어떨까? 놈들만 없앤다면 이번 일이 알려지는 것을 막을 수 있을지도 몰라.]

가면인은 나름대로 괜찮은 방법이라며 과격한 제안을 내놓았지만, 그것은 흑의복면인에게 가볍게 묵살 당했다.

“다 쓸데없는 짓이야. 이미 정보는 관리국 안으로 흘러들어갔어. 지금쯤 관리국장이 그 사실을 확인하고 있겠지. 그리고 인피니티 킹덤의 전력이 생각보다 강하더군. 우리가 공격한다 하더라도 호락호락 당해줄 것 같지도 않아.”

[······.]

“그러니 쓸데없는 짓 말고 잠자코 근신이나 하고 있어라. 이번 일은 이미 네 손을 진즉 떠났다. 감히 우리 선에서 해결할 수 있는 문제가 아니란 말이야.”

흑의복면인은 가면인을 다그치듯 내뱉었다. 하지만 가면인은 근신이란 말에 반응하기보다는 그 안에 담긴 다른 의미를 읽어내고는 당황해했다.

[내 손을 떠나? 우리 선에서 해결할 문제가 아니라고? 혹시 그 뜻은···?]

“그래, 네가 짐작한 대로다. 상부에서 이미 연락이 왔었다. 이번 문제는 알아서 처리할 테니, 우리더러 조용히 기다리고 있으라더군.”

[뭐!? 가만히 앉아 기다리라니, 대체 무슨 일이 벌어지려는 거지? 계획대로라면 지금은···. ]

“그래, 차근차근 제물을 준비하면서 은밀히 기반을 닦을 시기였지. 하지만 우리 때문에 계획이 대폭 수정되었다.”

[···정말이지, 그분을 뵐 면목이 없군.]

가면인이 참담하다는 듯 내뱉었다. 자신의 실수 하나로 모든 계획이 전면 수정되었다는 사실에 죄책감을 느낀 것이다.

그런 동료를 내려다보면서 흑의복면인은 계속해서 말을 이어나갔다.

“조만간 큰 소동이 벌어질 거다. 우주를 떠들썩하게 만들 정도로 큰 사건이.”

[어떤 방식인지는 대충 알 것 같군. 그걸로 우리가 저지른 실수를 덮겠다는 건가.]

“그래, 아이틀란에서 들통 난 것 정도는 따위로 취급할 수 있을 만큼 큰일이지. 아마 연합과 관리국에서도 한동안은 신경 쓸 겨를조차 없을 거다.”

큰 이슈를 그보다 더 큰 이슈로 덮는 것은 누구나 생각할 수 있지만, 이만한 이슈를 덮으려면 대체 얼마나 큰 이슈를 터뜨려야 가능할까?

심지어 수천수만의 성계를 아우르는 연합의 관리국이 정신없을 정도로 흔들려면 보통 일은 아닐 것이다.

[그런 큰일을 진행하는데도 정작 우리만 나설 수 없다는 사실이 너무 안타깝군.]

“그거야 어쩔 수 없는 일이지. 이번 일로 우린 너무 노출된 상태다. 괜히 움직여서 추적할 단서를 만들어주는 것보다는 이대로 조용히 있는 게 나아.”

흑의복면인의 그 말에 가면인도 공감한다는 듯 말없이 고개를 끄덕였다. 마음 같아선 조금이라도 보탬이 되고 싶었지만, 이 상황에서 자신들이 나서봐야 오히려 민폐만 끼칠 뿐이다.

[다음에는 절대 이렇게 손 놓고 구경만 하는 일은 없을 거다. 절대로···.]

그렇게 다짐하던 그때, 가면인의 움직임이 마치 정지한 사진처럼 덜컥 멈춰 섰다. 그리곤 가볍게 경련을 일으키더니, 괴로운 신음을 토해내기 시작했다.

[커윽! 커어어···.]

“또 시작인가?”

옆에서 그 모습을 목도한 흑의복면인이 한숨을 내쉬며 괴로워하는 동료를 부축했다. 가면으로 가려진 얼굴의 턱밑으로 상당한 양의 선혈이 흘러내리고 있었다.

어느 정도 토혈한 뒤에야 겨우 고통이 가라앉은 건지, 가면인은 간신히 숨을 가다듬기 시작했다. 그리곤 흑의복면인에게 고마움을 표했다.

[이번에도 신세를 지는군.]

“부축해주는 거야 별 것 아니지만··· 네 몸 아직도 그 상태 그대로인거지?”

그 물음에 가면인은 맥없이 고개를 끄덕여 보였다.

[그래, 그때의 부상이 좀처럼 낫질 않아. 조금 힘을 쓰면 오히려 더 악화될 때도 있지.]

흑의복면인은 그 즉시 가면인의 상세를 간단히 살폈다. 그리곤 심각한 목소리로 말했다.

“회복불가의 저주라니··· 역시 사상인가?”

[그래, 그것도 보통 수준이 아니야. 당한 건 내 분신이었는데, 본체인 내가 이렇게 큰 부상으로 고생하는 걸 보면 이진운 그 자는 사상을 깊은 수준까지 다루고 있는 게 분명해.]

“보통 문제가 아니군.”

[그래, 보통 문제가 아니지. 이제 겨우 마이스터 급에 발을 들인 자가 그랜드 급에 버금가는 수준의 사상을 다루고 있어. 그 자에게 시간을 주면 어디까지 성장할지는 아무도 모를 일이야.]

“이미 그 자에 대한 보고는 올려 둔 상태야. 그에 대한 답변은 오지 않았지만 위에서도 무슨 방도가 있겠지. 우린 그때가지 조용히 기다리는 수밖에 없어.”

지금 현재로선 자신들이 할 수 있는 게 아무것도 없었다. 그런 뼈아픈 현실을 절감한 가면인은 깊게 한숨을 내쉬며 말했다.

[상부에서 이진운 그 자를 가볍게 보지 않았으면 좋겠는데···.]

* * *

제이나와 대화를 나눈 그날로부터 며칠이 흐른 뒤, 이진운의 인피니티 킹덤은 드디어 아르탈 행성에 당도하게 되었다.

그런데 항구에 함대를 정박한 이후 그들이 보게 된 것은 상상을 불허하는 인파의 무리였다.

“뭐야, 이 엄청난 인파는?”

함내의 스크린을 통해 그 광경을 본 이진운도 깜작 놀랐다. 설마 자신들의 귀환으로 이렇게 많은 사람들이 몰려들 줄은 예상 못해서였다.

아르페인이 당연하다는 듯 말했다.

“이상할 것도 없지요. 이미 사령관님은 스타 아닙니까?”

“스타?”

“지금까지 세운 전공이 얼맙니까? 소환되자마자 B랭크 이상의 인베이더를 쓰러뜨리고, 세계수인가 뭔가를 없앴으며, 이번에는 성멸 급 둘을 혼자서 상대해 쓰러뜨리기까지 했지요. 그 정도면 충분히 지금의 유명세를 타고도 남습니다.”

그 설명을 듣고 난 이진운은 기가 막힌다는 듯한 표정이 되었다.

“그러니까··· 잘 싸우는 것만 가지고도 이렇듯 인기를 얻었다 이건가? 어처구니가 없군. 내가 무슨 격투기 선수도 아니고.”

“워낙 시대가 시대라서 말입니다. 잘 싸우고 인베이더 잘 때려잡으면 그게 대중의 인기로 이어지죠. 거기에다가 잘 생기기까지 하면 금상첨화고요.”

아주 한숨 나올 만한 설명이었다. 인성이야 어떻든 인베이더만 잘 때려잡으면 된다 이건가?

어차피 인지도가 생겨서 나쁠 건 없지만, 그래도 이정도로 과한 관심을 받게 되니 조금 부담스러운 건 어쩔 수가 없었다.

“그래도 이건 과한데? 지난번 실습 때보다 더 많은 것 같군.”

“그만큼 대단한 전공이란 뜻이죠. 성멸 급은 말 그대로 성계 하나를 끝장낼 수 있는 괴물들입니다. 그런 녀석을 무려 둘이나 한꺼번에 상대해 이겼으니 대중이 열광할 수밖에요. 제가 알기로 그만한 성과를 낸 신예 오버러는 지금까지 천외오천과 몇몇 외에는 없었습니다.”

그 정도면 대충 알 것 같았다. 그만큼 대중은 강력한 오버러의 탄생에 목말라 하고 있다는 의미였다.

‘아마 시민들도 피부로 느끼고 있는 거겠지. 인베이더의 위협이 점점 갈수록 커져가고 있다는 것을.’

이진운과 인피니티 킹덤이 세운 전공은 말 그대로 수많은 언론사들에 의해 대서특필되었다.

소환된 지 불과 6개월 만에 마이스터 급(S랭크) 오버러가 되었으며, 지금까지 전례에 없던 독립 라이선스까지 획득한 이진운의 존재는 이제 거의 천외오천과 맞먹는 재능을 가진 오버러로 인식되고 있었다.

관리국장을 만나기 위해 관리국 안으로 들어선 이진운은 수많은 사람들의 시선을 받게 되었다.

“저 사람이 그 이진운?”

“아, 이번에 아이틀란에서 성멸 급 둘을 동시에 쓰러뜨렸다는 그 사람···?”

“괴물이네. 그 정도면 천외오천 급 아니야?”

여기저기서 웅성대는 소리가 들려왔다. 그 중에는 그를 경외와 감탄으로 보는 자들도 있었고, 질시의 감정을 드러내는 자들도 적지 않았다.

하지만 어쩔 수 없는 일이었다. 유명세를 탄 이상, 이 정도는 감수하는 수밖에······.

그는 곧 국장의 부관을 만날 수 있었다. 일찍이 여러 번 만나봤던 필리스 브란테인이었다. 그가 웃으며 이진운을 반겼다.

“이진운 씨. 소식은 진작부터 들었습니다. 아주 대단한 전과를 올리셨더군요. 덕분에 세상이 떠들썩합니다.”

“대단한 전과도 아닌데, 많은 분들이 너무 과찬들 해주시느라 그렇습니다. 몸 둘 바를 모르겠군요.”

가볍게 겸양하는 그 말에, 필리스는 아니라며 고개를 가로저었다.

“무슨 말씀을. 성멸 급 둘을 상대한 전과는 그렇게 폄하할만한 전공이 아닙니다. 그만한 전과를 세울 수 있는 오버러가 전체에서 얼마나 될 것 같습니까? 거의 없을 겁니다. 특히 소환된 지 불과 1년도 안된 분이라면 더더욱 그렇지요. 앞으로 얼마나 더 대단한 활약을 하실지 기대가 됩니다.”

자신의 얼굴에 금칠을 해주는 필리스의 말에 이진운은 낯이 뜨거워지는 것 같아 곧바로 화제를 돌렸다. 아니 정확히 말하자면 이곳에 온 용건을 단도직입적으로 꺼냈다고 보는 게 옳을 것이다.

“국장님을 만나 뵙고 싶습니다. 그것도 단독으로 말입니다.”

“단독으로··· 말입니까?”

“예, 긴히 해야 할 이야기가 있어서요. 아주 중요한 겁니다. 이번 아이틀란에서 알아낸 정보인데, 그분에게만 직접 말씀드리고 싶군요. 워낙 중요한 내용이라서······.”

“으음, 알겠습니다. 일단은 말씀드려 보지요.”

그로부터 잠시 뒤, 베네트의 허락이 떨어졌다.

이진운은 곧 그와 단독으로 대면할 수 있었다. 그는 베네트에게서 풍겨 나오는 존재감에 조용히 고개를 주억거렸다.

‘역시 아직은 내가 감당할 수 있는 상대가 아니야.’

지금도 강함이 어느 정도인지는 정확히 판별할 수 없지만 그는 최소한으로 잡는다 해도 그랜드 급을 넘어선 강자. 적어도 이진운이 현경을 넘어서야 맞상대가 가능할 것이다.

“날 보자고 한 것 같은데 무슨 일인가?”

“아이틀란에서 벌어진 일들 중 수상스런 것을 몇 가지 접하게 되어서 말입니다. 다른 건 몰라도 이건 국장님이 직접 들으셔야 할 일 같더군요.”

“전에 통신으로 보내온 보고 외에 다른 게 더 있었던 모양이군. 왜 보고하지 않았지? 혹시 통신으로 알려선 안 되는 정보들이었나?”

베네트의 예리한 시선이 이진운을 향했지만, 그는 아무렇지 않게 그것을 받아 흘리면서 말을 이어나갔다.

“예, 통신으로는 알릴 수 없는 정보들이지요. 특히 요즘 관리국에서 기밀이 자꾸 유출되는 것 같던데, 굳이 위험을 감수할 순 없었습니다.”

“흐음······.”

직설적인 그 말에 베네트가 불편한 신음을 흘렸다. 하지만 그 말을 부정할 수도 없었다. 기밀이 유출되는 것은 사실이었으니까.

“로일라 해적단의 문제도 그렇고, 앞으로 내부기밀에 대해 조금 더 신경을 쓰셔야 할 것 같습니다. 관리국의 허술한 보안 덕분에 저만 죽을 고생을 했지요. 로일라 해적보다 더 강한 녀석이 공격해 왔다면 아마 저희 함대라 해도 꽤 피해가 컸을 겁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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