5권-18화
하지만 지금 중요한 문제는 채식 따위가 아니었다.
‘이 여자를 어떻게 해야 할지 모르겠군.’
이진운은 리스티들과 다시 이야기꽃을 피우고 있는 제이나를 응시하면서 고민에 휩싸였다.
일단 제이나는 하이엘프로 추정하고 있지만, 아직 신원확인도 제대로 이루어지지 않은 외부인일 뿐이다. 그런 제이나를 전장을 떠돌아다녀야 하는 인피니티 킹덤에 계속 태울 순 없는 노릇이었다.
아직은 예상일뿐이지만, 그녀의 신변은 아르탈 행성에 도착하고 나면 관리국으로 인도될 가능성이 높았다. 그리고 그 다음에는 그녀에 대한 조사를 거친 뒤 연방공화국 내에 있는 엘프 자치행정지역으로 되돌려 보내지겠지.
그렇지만 문제는 정작 당사자인 제이나가 그것을 강하게 거부하고 있다는 점이었다.
이진운은 바로 어제 나눴던 그녀와의 대화를 떠올리면서 깊게 한숨을 내쉬었다.
“절대 가고 싶지 않아요.”
강하게 잘라 말하는 그녀의 태도에 이진운이 조금 당황한 듯 되물었다.
“어째서입니까? 그곳은 당신이 태어나고 자란 고향일 텐데요.”
“예, 저도 그건 알고 있어요. 기억은 잃었지만, 그동안 여러 가질 배웠거든요. 그리고 두근대는 제 가슴도 그곳이 고향이라고 말하고 있고요.”
“그럼 왜···?”
“아직은 돌아갈 수 없어요. 아니, 돌아가선 안돼요.”
그 말에서 이진운은 미묘한 뉘양스가 실려 있음을 깨달았다.
지금 그녀는 돌아가기 싫다는 게 아니었다. 아니 오히려 고향을 언급했을 때 희미하게나마 그리움의 감정이 묻어나오는 걸 보면 돌아가고 싶어 하는 게 분명했다.
하지만 그럼에도 불구하고 자신의 감정을 억눌러가면서까지 돌아갈 수 없다고 단호히 말하고 있었다.
제이나가 다시 입을 열었다.
“그곳이 더 위험하거든요. 제 직감이 그렇게 말하고 있어요.”
“위험하다니··· 뭔가를 알고 있는 겁니까?”
막연한 것도 아니고 이렇게 확실하게 위험을 논하다니···. 혹시라도 그녀를 납치했던 가면인의 세력에 대해 기억이 일부 남아 있는 건가 했지만, 제이나는 그렇지 않다며 고개를 가로저었다.
“그런 건 아니에요. 과거에 대한 기억은 정말로 없으니까요.”
“그렇다면 돌아가길 거부하는 이유를 들어봐도 됩니까?”
이쯤 되니 제이나도 더 이상 대답을 회피할 수 없었다. 그녀는 무겁게 한숨을 내쉰 뒤 다시 입을 열었다.
“이진운 사령관님은 제가 하이 엘프라고 하셨죠?”
“음, 확실치는 않지만 당신이 가진 영적 격이나 막대한 생명력은 평범한 엘프가 가질 수 있는 게 아닙니다. 하이 엘프를 직접 본적은 없어서 저도 확답할 순 없지만, 아마도 높은 확률로 그럴 겁니다.”
이진운의 그런 대답에 제이나는 계속해서 말을 이어나갔다.
“하이 엘프는 엘프들 중에서 거의 왕족 취급을 받는다고 들었어요. 그리고 하이엘프들은 안전을 위해서 항상 강력한 호위 병력들에 의해 철통처럼 보호받는다는 사실도 알았죠. 헌데 그 자들은 그런 호위를 받고 있던 절 소리도 없이 납치했어요. 과연 그게 상식적으로 가능할까요?”
“으음, 그건······.”
이진운도 들어서 알고 있었다. 하이 엘프를 보호하는 자들은 대부분 대단한 실력자들을 엄선해 선출한다고 했다. 가장 최하 기준이 B랭크고, 그 중에서도 호위대를 맡는 호위대장은 무려 S+랭크의 강자라고 하니 그 구성원들의 실력이 얼마나 높은지를 알 수 있었다.
그런 호위를 뚫고 하이 엘프를 납치한다? 이건 어지간해서는 불가능한 일이었다.
만약 이진운이 그와 비슷하게 시도한다 해도 그렇게 은밀하게 납치한다는 건 쉽지 않을 것이다.
“아마도 높은 확률로 내통하는 자가 있을 거라 생각해요. 엘프들 중에서도 배신자가 있는 거겠죠. 그런 상황에서 전 돌아가고 싶지 않아요. 오히려 위험을 자초하는 길이니까요.”
“그렇군요.”
제이나의 말에도 일리가 있었다. 배신자가 누군지도 모르는 상황에서 무작정 고향으로 돌아가는 것은 하책일 터.
또다시 같은 일이 반복되지 않으리란 법은 없었으니, 그녀의 선택에 대해서도 일정부분은 납득이 갔다.
그래도 아직 몇 가지에 의문은 여전히 남아 있었다. 이진운이 다시 물었다.
“그렇다면 제이나 당신은 왜 제 함대에 있겠다는 겁니까. 오히려 관리국이 더 안전할 텐데요. 우린 종족도 다른데다가 서로에 대해 잘 알지도 못하는 낯선 사이 아닙니까?”
“낯설기에 더 믿을 수 있죠. 저와 같은 일족도 배신하는 판국인데, 뭘 믿을 수 있을까요?”
같은 종족에 대해서도 불신감을 드러내는 그 말에, 이진운도 일순 뭐라 말 할 수가 없었다.
“오히려 절 구해주신 이진운 사령관님과 이곳에 있는 분들이라면 믿을 수 있을 것 같아요. 만일 이곳에도 절 납치한 세력과 뜻을 같이하는 자가 있었다면 전 지금쯤 무사하지 못했을 거예요.”
자신을 신뢰한다는 듯 바라보는 그녀의 눈빛에 이진운은 쓰게 웃고 말았다. 이래서 자신과 인피니티 킹덤은 믿을 수 있겠다는 그 말을 부정할 수가 없었다.
‘이래서는 관리국장에게 또 아쉬운 소릴 해야 하겠군.’
제이나는 그냥 평범한 엘프도 아니고 무려 하이 엘프였다. 심지어 의문의 세력에 의해 납치까지 당했던 당사자이자 증인인 그녀를 일개 함대가 담당한다는 게 쉬울 리 없었다.
그녀가 먼저 의탁하겠다고 손을 내밀지만 않았어도 고민하지 않았겠지만, 이렇게 된 이상 그냥 외면하기도 어려웠다.
“알겠습니다. 일단은 상부에 그렇게 전해 두지요. 하지만 결과가 어떻게 나올지 모르니 너무 큰 기대는 하지 않는 게 좋을 겁니다.”
“예, 어떤 결과가 나오든 원망하지 않겠어요.”
초연한 목소리로 말하는 제이나. 허나 그 태도가 오히려 이진운을 더 부담스럽게 만들었다.
이진운은 다시 말을 이어나갔다.
“제이나, 당신이 만일 제 함대에 몸담게 된다면 한 가지 알아둬야 할 것이 있습니다.”
“뭔가요?
“인피니티 킹덤은 전선을 돌아다녀야 하는 전투함대지요. 당신이 생각하는 것처럼 그렇게 안전한 곳이 아니라는 겁니다. 매일까진 아니더라도 거의 대부분 위험에 노출되어 있어요. 인베이더와의 전투라는 건 항상 그런 법이니까요.”
이진운은 그녀에게 일부러 위험성을 강조했다. 그럴 수밖에 없었다. 인피니티 킹덤은 전장을 돌아다녀야 하는 입장인데, 전투 상황에 돌입한 상황에서도 그녀의 안전만 지킬 순 없기 때문이었다.
그렇지만 제이나는 그 말을 이해한다는 듯 고개를 끄덕였다.
“예, 저도 잘 알고 있어요. 상황에 따라 위험할 가능성이 얼마든지 있다는 것을요. 하지만 저도 제 한 몸 지킬 최소한의 능력은 있어요. 그렇게 큰 짐이 되진 않을 거예요.”
그렇게 말하면서 제이나는 자신의 오른손을 들어올렸다. 그러자 작은 돌개바람이 손위에 머무는가 싶더니 반투명해 보이는 흐릿한 형상이 나타났다.
그것이 의미하는 바는 이진운도 잘 알고 있었다.
“정령?”
“예, 정령소환이에요.”
이진운의 놀란 외침에 고개를 끄덕여 보이는 제이나. 이진운이 당황스런 표정으로 물었다.
“기억을 잃은 당신이 어떻게?”
“기억은 잃었는데 정령은 소환이 가능하더라고요. 저도 모르게 무의식적으로 소환해 다룰 수 있었죠.”
기억을 잃기 전에 습득했던 정령술을 무의식중에 사용할 수 있게 되었다? 아주 불가능한 것은 아니지만, 그게 사실이라면 너무도 놀라운 일이다.
그 말은 기억을 잃기 전에는 더 대단한 실력을 가진 정령사였다는 말이 아닌가.
‘무의식적으로 다룬 정령이 무려 중급이라고? 내 생각보다 더 거물이었을지도 모르겠군.’
이진운은 제이나의 위치에 대해 좀 더 상향 조정하기로 했다. 기억을 잃기 전의 일부 실력만으로도 중급 정령을 소환할 정도라면, 그 전에는 더 엄청났다는 말이 된다.
‘왕족 중에서도 거의 직계 수준일지도······.’
하지만 하이엘프에 대한 것들은 외부의 타 종족들에게 알려진 게 거의 없었다. 그녀의 신원을 확인할 길이 아직은 없다는 뜻이었다.
‘헌데 그런 거물을 납치하다니··· 가면인과 배후 놈들은 대체 무슨 생각을 한 거지?’
새삼 의문이 치솟았다. 하이 엘프 중에서도 직계 급을 납치하려면 그만큼 막대한 인력과 재화, 시간이 소모됐을 것인데··· 어째서 그런 선택을 했을까?
하지만 일단 그에 대한 의문은 접어두기로 했다.
“알겠습니다. 그럼 제이나 당신의 합류를 받아들이죠. 일단 판단은 상부에서 하겠지만, 저와 함대의 승무원들은 당신을 거부하지 않을 겁니다.”
“예, 받아들여주셔서 감사 드려요.”
진심으로 감사 인사를 건네 오는 제이나. 그때부터 제이나는 인피니티 킹덤의 손님이 아닌, 일원으로 대우받게 되었다.
그래서 지금은 리스티들과 많이 가까워진 상태였다. 같은 여자라는 공통점 때문이기도 했지만, 그동안 그녀들이 제이나에게 많은 상식들을 가르쳐 줬기에 친해질 수 있었다.
처음에는 갖가지 어처구니없는 실수들을 잇달아 저질렀던 제이나였지만, 지금은 무섭도록 일상상식을 흡수하고는 거의 정상인에 가까워졌다.
아니, 정상인 정도가 아니라 오히려 어지간한 고학력자들보다 더 현명한 모습을 보여주고 있었다.
고향에 돌아가면 위험하다고 판단하고는 인피니티 킹덤에 자신의 신변을 서슴없이 의탁한 것만 봐도 그러했다.
“저럴 때는 정말 기억을 잃은 것 같지가 않군.”
화기애애하게 대화를 나누는 제이나의 모습을 잠시 바라보던 이진운은 자리에서 일어섰다.
이제 아르탈 행성도 얼마 남지 않은 상황이었다. 관리국장을 설득시키기 위해 조금이라도 더 머리를 쥐어짜내야 할 것 같았다.
* * *
가면인은 경악성을 터드리고 말았다. 흑의복면인이 가져온 소식 때문이었다.
[뭐? 실패했다고?]
“그래, 아주 참혹한 실패더군. BT-12가 관리국의 함대에게 노출되었으니까. 이건 아주 치명적인 실수야.”
[그럴 리가 없다. 분명 기지는 자폭시키도록 안전장치를 해뒀었어.]
“문제는 그게 먹히지 않았다는 것이지. 놈들이 무슨 수를 썼는지 그 하이엘프 년까지 구해냈다. 그리고 기지 시설은 고스란히 노출되었지.”
빈정거리는 흑의복면인의 말에, 가면인은 욕지기를 터뜨렸다.
[이런, 빌어먹을!]
지금까지 자신이 꾸민 일들 중에서 이렇게까지 큰 실패는 처음이었다. 심지어 치명적이기까지 했다.
물론 비밀 기지 정도는 들킬 수도 있다. 그런 기지는 아이틀란 뿐만 아니라, 각 성계마다 널려 있으니까.
문제는 그곳에 남겨져 있던 하이 엘프였다. 대업을 위해 가장 중요한 파츠 중 하나인 그녀를 잃은 것이 너무도 치명적이었다.
“어쩌다 그리 된 거냐? 아깝긴 하지만 적어도 기지를 폐쇄할 생각이었다면 그 엘프는 깨끗이 정리를 했어야지. 그놈들에게 우릴 추적할 단서라도 남겨줄 생각이었나?”
[그럴 리가 없다. 기억 말소는 완벽했어. 우릴 찾아낼 단서 따윈 남아 있지 않아.]
“기억이 말소되었어도 그녀의 신분은 여전히 존재하고 있지. 그것을 거슬러 올라가다 보면 우리의 꼬리를 찾아내는 게 불가능 할 것 같나?”
[······.]
“게다가 그녀의 신분은 무려 하이 엘프 중에서도 가장 높은 직계에 위치해 있다. 납치되었던 그녀의 존재가 알려지기라도 하면 그것만으로도 우릴 추적할 단서들은 얼마든지 찾아낼 거다.”
흑의복면인이 내놓는 정론에, 가면인은 아무 대꾸도 하지 못했다. 제아무리 치밀하게 흔적을 지워 왔다 하더라도, 이렇게까지 일이 커지면 꼬리가 드러나는 건 어쩔 수 없었다.
하물며 납치했던 상대가 그 정도 거물이라면 흔적이 드러나는 건 당연했다. 완전범죄라는 건 있을 수 없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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