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검신의 검은 우주를 가르고-116화 (117/448)

5권-16화

비밀시설에서 구출된 제이나는 곧바로 카멜롯으로 옮겨졌다. 어차피 전투도 거의 막바지였다. 남은 것은 인베이더 잔당을 소탕하는 정도 뿐. 놈들의 핵심 전력은 이미 일소된 지 오래였다. 그 정도는 행성방위군에게 맡겨도 충분하고도 넘친다.

덕분에 약간의 시간적 여유를 확보한 이진운은 제이나를 상대로 심문을 시작하였다. 물론 심문이라고 해서 강압적이거나 폭력을 동원한 것은 아니었다.

단지 듣고 싶은 것들을 조목조목 상세하게 짚어서 캐물었을 뿐이다.

그 결과, 한 가지 사실만 확실히 알 수 있었다.

제이나는 정말로 아무 것도 기억하지 못했다. 고향도, 가족도, 자신이 무얼 하던 자인지조차도 전혀 아는 바가 없었다.

그녀가 유일하게 기억하고 있는 건 자신의 이름 하나뿐. 그 외엔 모든 것이 그녀의 머릿속에서 깨끗하게 지워져 있었다.

그나마 의사소통하는 데에 별 무리가 없다는 것이 다행이었다. 만일 언어까지 잊어버렸으면 보통 난감한 일이 아니었을 것이다.

하지만 그 대신 다른 것이 문제가 되었다. 제이나가 일반상식조차 상당부분 잊어버린 탓에 자꾸 엉뚱한 실수를 저지른다는 것이었다.

예를 든다면 화장실을 갈 때 남녀 구분 못하고 남자 화장실에 무심코 들어간다든지, 또는 밥을 먹을 때 수저와 포크를 쓸 줄 몰라 맨손으로 먹는다든지 하는 실수였다.

그런 일을 몇 차례 겪으면서 뒤치다꺼리하느라 고생했던 리스티는 한숨을 내쉬며 이렇게 말했다.

‘이 언니, 만일 숨 쉬는 법까지 잊어먹었으면 정말 큰일 날 뻔했네요.’

그냥 푸념처럼 흘린 말이었지만, 제이나가 번번이 저지르는 실수들을 생각하면 결코 농담처럼 들리지 않았다.

그렇지만 그런 그녀를 바라보는 이진운의 시선은 여전히 날카로웠다. 그는 제이나를 완전히 믿고 있는 게 아니었다. 여러 차례 벌어진 실수들조차 의도된 것이 아닌지 의심하고 있었다.

혹시나 싶어 심층정밀검사까지 시행했다. 정말로 기억을 잃은 건지, 아니면 일부러 연기를 하는 건지 확실히 확인해볼 필요가 있다고 판단해서였다.

그 결과, 제이나는 기억을 잃은 게 확실했다. 몇 번의 반복검사 끝에 리스티는 그 흔적을 찾아내고 말았다.

“인위적인 기억삭제의 흔적이 있었어요. 너무 은밀해서 술식의 흔적이 아주 조금 남아 있네요.”

그녀는 뇌의 입체촬영 영상을 띄운 채 한 지점을 가리키며 설명했다. 그곳에는 알아보기 쉽도록 술식의 잔흔이 그래픽 형태로 표시되어 있었다.

“상당히 고도화된 술식이에요. 기억삭제를 처음부터 고려하고 찾지 않았으면 저도 못 찾았을지도 모를 정도로 은밀하네요.”

리스티도 찾기 힘들었다는 그 말에 이진운이 잠시 고개를 갸웃거렸다.

“그럼 이걸 만든 자는 너보다 천재라는 소리?”

“그럴 리 없잖아요. 지금까지 살아오면서 저보다 천재인 사람은 저희 오빠 밖에 못 봤어요. 이런 술식은 아무것도 아니라고요.”

말도 안 된다며 단호히 자르듯 내뱉는 리스티. 자신이 천재라는 자부심만큼은 부정당하고 싶지 않은 모양이었다.

“다만 이 술식을 다수의 전문가가 긴 시간동안 연구한 것 같아요. 그렇지 않고선 이런 완성도가 나올 리 없어요. 게다가 술식 구조 자체도 여러 사람이 손 쓴 흔적이 보이고요. 개발자들의 특성이 제각각 묻어나는 걸 보니 틀림없어요.”

“그렇군.”

말을 듣고 보니 그럴 듯 했다. 술식의 구조나 형태가 다수가 손을 댄 흔적들이 조금씩 보이고 있었다. 그게 잘 드러나지 않은 건 오랫동안 손을 봐왔기 때문일 것이다.

그리고 그것이 의미하는 바는 명확했다.

“그렇다면 그 말은······.”

“예, 상당히 뿌리 깊은 세력이란 말이겠죠. 이 정도 완성도 있는 술식을 독자적으로 만들어내려면 그만한 인력과 자금, 그리고 많은 노하우와 긴 시간이 필요하니까요. 하루아침에 될 일이 아니에요. 적게 잡아도 수십 년 정도는 걸렸을 거라고 전 생각해요.”

“그건 내 생각하고 일치하는구나.”

그 말에 동의한다며 고개를 끄덕인 이진운은 가면인이 속한 음모의 세력이 획책하고 있는 목표가 무엇일지 추측해 보았다.

놈들은 분명 인베이더와 서로 협력을 주고받는 관계였다. 처음엔 인베이더의 첩보 세력이 연합이나 공화국 등에 은밀하게 흘러들어온 것이 아닌가 의심했지만, 그렇다고 보기엔 여러 가지로 의문점이 많았다.

인베이더의 실질적인 목적이 지성체의 멸망인데, 거기에 진심으로 공감하고 따를 인간이나 지성체가 몇이나 되겠는가.

지금 현재 가면인의 세력에 속하거나 협력 관계로 의심되는 인물들 중 가장 유력한 자들은 랜들 코우버와 크잔트였는데, 출세와 욕심으로 가득 차 보였던 그들이 진정으로 지성체의 멸망을 바란다고는 생각되지 않았다.

적당히 협력하면서 겸사겸사 개인적인 이득을 취한다면 모를까, 인베이더의 목적을 향해 목숨을 바칠 위인들은 절대 아니었다.

‘하긴 글랙스 같은 경우도 있으니 그럴 가능성이 아주 없다고 보긴 어려우려나.’

물론 씻을 수 없는 원한이 뼛속 깊이 새겨진 자들이라면 이야기가 다르지만, 그런 인물들은 말 그대로 극소수일 뿐이다.

구성원 전부가 그런 자들일 리는 없으니, 가면인의 세력을 인베이더와 별개의 것으로 볼 수밖에.

* * *

하이브를 소멸시키고 그 주변의 인베이더들까지 일소한 이후, 발터 크레뮬러는 아이틀란 행성 내에서 일약 영웅으로 떠올랐다.

물론 이번 전과 중 상당수는 인피니티 킹덤이 세웠다 할 수 있었다. 하이브를 소멸시킬 수 있었던 건 카멜롯의 주포 덕분이었고, 강력한 고위 인베이더들을 상대한 것도 이진운과 기간트 파일럿들이었으니까.

그렇지만 행성방위군이 세운 전공도 적지만은 않았다. 인피니티 킹덤이 견제 받지 않도록 시간을 끌어준 것은 그들이었고, 마지막까지 남아 인베이더 잔당을 소탕한 것도 행성방위군의 전과였으니까.

사람들은 그런 전공을 높이 샀다. 인피니티 킹덤에게 고마워하는 마음이 없진 않았지만, 그들은 어차피 떠나갈 외지인일 뿐이다.

그에 반해 발터 대장은 그 누구도 부정하지 않는 아이틀란의 시민이자 군인이었다. 옛 말에 팔은 안으로 굽는 법이라고, 그와 행성방위군이 세운 전공이 인피니티 킹덤에 비해 낮다 하더라도 아이틀란 시민들은 당연히 그들을 추앙할 수밖에 없었다.

하이브를 소멸시킨 그날로부터 며칠 뒤에 열린 전승행사에 참석한 이진운과 일행은 자신들이 곁다리나 다름없다는 사실을 깨닫고는 쓰게 웃고 말았다. 이번 행사에서 언급된 대부분의 공치사는 발터와 그의 휘하 병력들의 차지였다.

인피니티 킹덤의 공에 대해서도 언급은 있었지만, 말 그대로 형식적일 뿐이다.

아리엔이 작게 한숨을 내쉬며 아쉬움을 표했다.

“누가 알아주길 기대한 건 아니지만 사람들 반응이 이러니 좀 씁쓸한 기분이네요.”

“그렇게 아쉬워 할 것 없다. 아무리 밉상이어도 자기 아이가 더 예뻐 보인다는 것처럼, 여긴 저들의 홈그라운드지. 그러니 이 정도는 당연한 일이라고 생각하고 받아들여라. 앞으로도 비슷한 일은 많이 경험하게 될 테니까.”

“예.”

아리엔도 그 말이 옳다고 여겼는지 고개를 끄덕이며 이진운의 충고를 받아들였다.

그렇지만 발터 대장이 시민들에게 영웅으로 받들어지는 것도 사실 이진운 입장에서는 그리 나쁜 일이 아니었다.

그가 아는 한 행성방위군의 장성들 중 그나마 제정신 박힌 인물은 발터 대장이 유일했다. 시민들의 인기를 등에 업은 그가 마음만 먹는다면 오래전부터 부패할 대로 부패해버린 군부를 새롭게 개편하는 것도 가능해질 것이다.

아니, 군부의 개편은 이미 수면 아래에서 조용히 진행 중에 있었다.

물론 발터의 행사에 반발하는 자들도 적지 않았지만, 그들은 결국 자리를 내려놓고 물러나는 길을 택하고 말았다.

발터의 과감한 행보 뒤에 누가 있는지 알게 되었기 때문이었다.

‘이럴 때는 관리국의 이름값이 생각보다 쓸 만하단 말이야.’

그랬다. 발터의 뒤를 받쳐주고 있었던 사람이 바로 이진운이었다. 그가 관리국의 이름까지 내걸어가면서 발터를 적극 지원해 줌으로서 그가 군부를 손에 쥘 수 있게 해준 것이다.

이진운이 이렇게까지 해 가면서 발터를 지원해준 이유는 간단했다. 바로 조사를 위해서였다.

전승행사가 끝난 뒤 이진운은 발터와 따로 만남을 가졌다. 이젠 엄연히 군부의 최고 위치에 오르면서 아무나 만날 수 없는 인물이 되었지만, 이진운만큼은 예외였다. 발터는 이진운을 아주 반갑게 맞이해 주었다.

“어서 오십시오, 이진운 사령관.”

“갑자기 찾아온 불청객을 이렇게 반갑게 맞아주시니 너무도 고맙군요.”

“불청객이라니요. 이진운 사령관은 제게 은인 같은 분입니다. 이렇게 직접 찾아오셨는데 맨발로라도 뛰어나가야지요.”

그렇게 말을 주고받은 두 사람은 금세 본론으로 들어갔다. 먼저 이진운이 입을 열었다.

“그때 제가 부탁드린 건 어떻게 됐습니까.”

“으음, 아직 조사 중에 있습니다. 여러모로 의문점들이 많아서 말입니다. 정확한 결과가 나오려면 며칠 더 기다리셔야 할 것 같습니다.”

“그렇군요.”

이진운은 조금 아쉽다는 듯 고개를 끄덕거렸다.

그가 발터에게 부탁한 것은 바로 하이브 근처에 숨겨져 있던 비밀 수감시설에 대한 것이었다.

그런 대규모 시설을 세우려면 막대한 인력과 자재가 필요했을 터. 그 흔적과 경로를 추적해서 놈들의 근원을 찾아낼 생각이었던 것이다.

“그래도 아주 성과가 없진 않아서 최근 몇 가지 알아낸 게 있습니다.”

“그게 뭡니까?”

이진운이 반색하며 묻자, 발터가 조심스럽게 사실을 털어놓았다.

“제가 알아본 바에 의하면 그 시설은 최근 지어진 게 아닙니다. 꽤 오래 전에 지어졌지요.”

“오래 전에?”

“예, 조사한 바로는 한 20년 정도 됐습니다. 그 시설은 인베이더 놈들의 하이브가 세워지기 전부터 존재했다는 거지요.”

그 말을 듣는 순간, 이진운의 얼굴이 심각하게 굳어졌다. 그것이 의미하는 바는 너무도 명백했기 때문이었다.

“인베이더의 하이브가 그곳에 세워진 것도 이미 오래 전부터 철저히 계획된 일이었다는 거겠지요.”

“예, 그럴 가능성이 매우 높다고 봅니다. 그룬키, 아니 글랙스란 자가 알 수 없는 세력과 협력했던 것도 그렇고··· 여러모로 의심 가는 점이 많지요. 아무튼 인베이더와 협력하고 있는 배후 세력이 있는 것만은 확실합니다.”

인베이더와 협력하는 세력의 존재는 이미 알고 있는 사실이다. 하지만 하이브가 세워지기 전부터 이것을 예상하고 그곳에 비밀 수감시설을 지었다는 사실이 마음에 걸렸다.

그렇다면 놈들은 대체 그 수감시설에서 무엇을 기도한 것일까? 그리고 그 수감시설을 하이브가 세워질 예정인 지점에 지어야 했던 이유는 또 무엇이고?

‘뭔가 중요한 연관성이 있을 것 같은데··· 도무지 감이 잡히질 않는군. 판단을 내리기에는 지금 내 손에 쥔 단서가 너무 적어.’

더 고민해봐야 답이 나올 상황이 아니었다. 결국 이진운은 곧 자리에서 일어섰다.

“아무튼 조사 좀 더 부탁합니다. 매우 중요한 일이거든요.”

“예, 일의 중요성은 저도 알고 있습니다. 제 힘이 닿는 한 최선을 다하겠습니다.”

그 말에 이진운도 더 이상 강조하지 않았다. 발터도 인베이더의 위험성을 잘 아는 만큼, 조사를 등한시 할 리 없다는 걸 알기 때문이었다.

그리고 며칠 뒤, 기다렸던 조사 결과가 나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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