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검신의 검은 우주를 가르고-114화 (115/448)

5권-14화

아리엔은 즉시 검식을 중단하고 소리가 난 곳을 향해 달려갔다. 그곳에는 좀 전까지만 해도 보이지 않던 큰 입구가 자리하고 있었다. 마치 생긴 건 하수도 입구를 생각나게 했지만, 하이브 인근에 숨겨진 입구가 그냥 평범한 하수도 입구일 리는 없었다.

“일단은 열어 볼까?”

가볍게 손으로 건드려봤지만 열리지 않았다. 입구 자체도 두터운 금속으로 된 데다, 어떤 잠금장치가 문을 고정하고 있는 건지 아무리 힘을 써도 열릴 기미조차 없었다.

결국 손으로 여는 걸 포기한 그녀가 검을 들어올렸다.

“그냥은 열 방법이 없네. 검기로 벨 수밖에······.”

검기는 거의 대부분의 물질을 베어낼 수 있는 내기의 집약체였다. 고층건물은 물론 전함의 견고한 외부장갑마저 검기에 베어지는 판국인데, 이런 금속제 입구 따윈 금세 도려낼 수 있을 것이다.

하지만 결과는 생각처럼 이루어지지 않았다.

치익 치이이익!

마치 뭔가가 녹는 듯한 소리가 울렸다. 검기가 직접 닿아 있는 금속에서 나는 소리였다.

계속 용을 쓰던 아리엔은 결국 한 발짝 물러서고 말았다.

“이게 대체 어떻게 된 금속이지?”

있는 힘을 다해도 도무지 베이질 않았다. 검기에 베이고도 표면에 작은 검흔이 남은 게 전부였다.

“쯧쯧, 미련하기는······.”

그때 등 뒤에서 누군가의 목소리가 들렸다. 아리엔이 깜짝 놀라 돌아보자, 거기에는 어느새 다가온 건지 모를 리스티가 서 있었다.

“언제 온 거야?”

“방금, 소식 듣고 왔어. 하이브 근처에서 수상한 입구가 발견됐다는 이야길 들었지. 그런데 그걸 혼자 억지로 열고 있었어?”

한심하다는 듯 혀를 차는 리스티. 그 눈빛에 잠시 울컥한 아리엔이 퉁명스럽게 대꾸했다.

“검기로는 베일 줄 알았지.”

“그걸로 베어질 리가 있겠어? 이거 어지간한 전함 주포로 갈겨도 견딜 수 있는 레벨의 문이야. 그냥은 못 열어. 평범한 금속문이 아니라 무슨 무속성 영력을 압축해서 지속적으로 문에 배리어를 형성하고 있어. 이래선 검기로도 쉽지 않지.”

“뭐? 전함의 주포까지 견뎌? 대체 이게 뭐길래 그렇게 단단한 거야?”

놀라는 아리엔에게 리스티는 대수롭지 않다는 듯 자신의 추론을

“내가 보기에는 일종의 방공호 같아. 여기서 함대전이 벌어져도 어느 정도 버틸 수 있도록 만들어진 것 같은데 말이야. 아마도 중요한 걸 숨기려고 만들었겠지?”

그 말에 아리엔도 고개를 끄덕였다. 인베이더들이 이곳을 지키려고 했던 것도 그렇고, 이렇게까지 단단한 문으로 봉인해둔 것만 봐도 이곳에 매우 중요한 것들이 숨겨져 있음은 틀림이 없었다.

“그럼 어떻게 열지? 지금이라도 스승님을 부를까? 검강이라면 이 문도 충분히 벨 수 있을 것 같은데.”

고민하던 아리엔이 대안이랍시고 이진운을 언급했지만, 리스티는 고개부터 가로저었다.

“됐어. 아저씨 지금 매우 바빠. 인베이더 놈들 소탕하느라고. 아직도 남은 진멸 급이 몇 있나 보더라.”

“그럼 어쩌지? 전투가 끝난 다음에 열어야 하나?”

“내가 왔으니 간단해. 정해진 절차대로 인증을 거쳐서 열리도록 하면 돼. 간단하지?”

“그게 가능해? 그냥 시설도 아니고 이건 인베이더 건데?”

“이 정도 해킹쯤은 간단하거든. 나한텐 인베이더 거라도 마찬가지야.”

“······.”

대수롭지 않다는 듯 말하는 리스티의 모습에, 아리엔은 잠시 할말을 잃었다.

아르탈 행성연합하고 전혀 다른 인베이더의 보안시스템도 리스티의 손에서는 별것 아닌 것으로 전락해 버릴 줄이야. 아마도 보안 전문가들이 이 광경을 보았다면, 자신이 헛것을 보았나 싶어 두 눈을 열심히 비비고 있었을지도 모른다.

그녀가 호언장담한 것처럼 굳게 닫혀 있던 문은 곧 저절로 열렸다. 얼마나 자연스럽게 열리던지, 문을 연답시고 검기를 열심히 뿌려댔던 아리엔이 무안해할 정도였다.

“자, 그럼 들어가자. 주의 잘 살피고. 뭐가 있을지 모르니 말이야.”

“···그래.”

허탈한 나머지 조용히 고개를 끄덕거린 아리엔은 리스티의 뒤를 따라 그 안으로 발을 들였다.

계단으로 시작된 내부는 무척이나 어두컴컴했다. 어지간해서는 안을 분간하기 어려울 정도였다. 리스티가 라이트 마법으로 주변을 밝히고 나서야 안을 확인할 수 있었다.

계단 끝에 도달하자 커다란 시설의 모습이 보였다. 그것을 본 아리엔이 이해할 수 없다는 듯 중얼거렸다.

“이거··· 인베이더의 시설이 맞아? 상상했던 것하고는 전혀 다른데?”

그녀가 그런 말을 하는 것도 이상하지 않았다. 인베이더는 인간과 전혀 다른 괴물들이었다.

그런데 이곳 내부는 어떤가? 이건 마치 인간이나 인간형 지성체들이 머물기 위한 시설 같지 않은가.

먹고 마시기 위한 것들이 구비되어 있었으며, 살아 있는 지성체들에게 필요한 것들이 대부분 갖춰져 있는 것이 확인되었다. 굳이 없는 걸 찾자면 즐거움과 스트레스 해소를 위한 여가시설 정도라고 해야 할 것이다.

리스티도 조금 이해하기 어렵다는 듯 고개를 갸웃거렸다.

“네 말처럼 진짜 이상하네. 이건 인베이더라기보다는 인간이나 지성체들을 위한 설비 같은데 말이야. 이런 게 하이브 인근에 숨겨져 있었다고? 대체 왜? 무슨 이유에서?”

제아무리 천재인 그녀라 해도 주어진 단서가 없는 상황에서는 정확한 답을 낼 수 있을 리 없었다.

그러니 지금은 어떻게든 판단할만한 근거가 될 단서를 확보하는 게 중요했다.

“일단은 안을 철저히 수색해보자. 그러면 뭔가 단서가 될 만한 게 나오겠지.”

“그래, 그러는 게 좋겠다. 하지만 조심해야 해. 혹시 위험할지도 모르니까.”

“알았어.”

아리엔의 충고에 듣는 둥 마는 둥 대꾸한 리스티는 갖가지 탐색 마법을 전개했다. 이 내부에도 방범 시스템이 적용되고 있는지, 그녀의 탐색 마법을 방해하고 있었지만, 그것을 역으로 파훼해 분석하면 되었다.

그 결과, 그녀의 탐색마법 안에 뭔가가 걸려들었다.

“역시 뭔가 있었어.”

“뭔데?”

“인기척이야. 생명체의 반응을 찾았어.”

아리엔의 물음에 그렇게 대답한 리스티는 생명반응이 느껴진 곳으로 향하는 경로를 분석했다. 미로처럼 조금 꼬여 있긴 했지만, 시설 내부 대부분을 파악한 지금은 원하는 지점을 찾아가는 게 그리 어려운 일도 아니었다.

하지만 리스티와 아리엔은 생명체의 반응이 느껴졌던 지점에 도착하기 직전에 방해를 받게 되었다. 생각지도 않은 인베이더와 맞닥뜨리게 되어서였다.

그것은 머리 없는 괴물이었다.

리스티가 태연스럽게 중얼거렸다.

“듀라한이잖아? 왜 이런 게 버티고 있는 거야?”

인베이더들 중에서 언데드 타입에 속하는 진멸 급 괴물의 명칭이었다. 랭크는 B-였지만, 어지간한 실력자들이라 해도 쉬이 상대하기 어려웠다.

근접전 능력이 특출한데다가, 급소를 노려도 죽지 않는 언데드라는 점 때문이었다.

“이건 내게 맡겨줘!”

아리엔이 리스티를 제치고 앞으로 나섰다. 마법사인 그녀보다는 자신이 이런 근접전에서는 더 유리하기 때문이었다.

“그래, 잠시만 시간을 벌어줘. 해볼 게 있으니까.”

‘해 볼게 있다고?’

리스티의 그 말에 아리엔은 그게 무슨 의미인가 묻고 싶었지만, 지금은 눈앞의 듀라한을 상대해야 했다. 놈에게서 피어오르는 검은 기운이 불길하게 번져 나오고 있었다.

그녀의 검에서 피어오른 검기와 듀라한의 검은 오라가 어지럽게 뒤엉키기 시작했다.

킹! 키키키킹!

촤촤촤착!

‘이런 고위 인베이더가 여기 숨어 있을 줄이야.’

짧은 순간에 몇 합을 격돌했지만 생각보다 상대하는 게 쉽지 않았다. 아니 정확히 말하자면 듀라한의 방어가 너무 견고했다.

듀라한은 무투계 쪽의 언데드였다. 지금까지 상대한 인베이더들은 그저 압도적인 힘과 속도만을 믿고 덤벼들었지만, 놈은 놀랍게도 무예의 합리적인 움직임에 따라 그녀의 공격을 방어하고 있었던 것이다.

그러니 상대하는 게 쉽지 않을 수밖에.

게다가 듀라한의 전신에서 피어오른 검은 색의 오라도 문제였다. 그것은 아리엔의 검기를 철저하게 견뎌내게 해 주었다.

이건 어디까지나 그녀의 짐작일 뿐이지만··· 저건 색이나 성질만 다를 뿐, 검기와 흡사한 방식의 기예인 것인 듯 보였다.

‘이런 식이라면 싸움이 좀 길어지겠는데······.’

하지만 장기전에선 아리엔이 불리했다. 상대는 지칠 줄 모르는 언데드지만, 아리엔은 체력의 한계가 있는 생명체였다. 게다가 좀 전까지 싸우면서 소진한 내공 문제도 있는 만큼 오래 끌어선 곤란했다.

쾅!

겉으론 가벼워 보이면서도 그 안에 무거움을 담고 있는 기봉검의 연환삼을 전개해 듀라한을 밀어낸 아리엔이 재빨리 뒤로 물러섰다. 그리고는 리스티에게 도움을 요청했다.

“상대하는 게 만만치 않아. 내가 저 녀석의 빈틈을 만들어낼 테니까, 리스티 너는 그때 공격을 해! 그럼 금방 끝낼 수 있어.”

자신의 계획대로 해준다면 싸움은 순식간에 종결될 것이다.

하지만 리스티의 입에서 나온 대답은 그녀의 예상과 전혀 달랐다. 아니 전혀 생각지도 못했던 것이었다.

“아니, 그럴 필요 없어. 아니 더 싸울 필요가 없다고 해야 하나?”

“뭐? 무슨 소리야?”

아리엔이 당황해 하던 그때, 리스티가 손가락으로 듀라한을 가리켰다.

“저길 봐.”

“어?”

리스티의 손가락을 따라 시선을 옮긴 아리엔은 두 눈을 휘둥그레 떴다. 방금 전까지 그녀와 팽팽한 접전을 벌였던 듀라한이 마치 석상이라도 된 듯 그대로 멈춰 섰기 때문이었다.

그리곤 더 이상 움직일 생각을 하지 않았다. 정말로 멈춰버린 것이다.

“이게 어떻게 된 거야.”

이게 대체 어떻게 된 영문인지 몰라 아리엔은 리스티를 돌아보았다. 그러자 리스티가 장난스럽게 웃으며 말했다.

“간단해. 저 듀라한, 이제 내 것이 됐거든.”

“뭐어?”

“특정 명령만 기계적으로 이행하는, 일종의 지박령에 가까운 상태였어. 이러면 제어권한을 강탈하는 거야 간단하지.”

“···그게 그렇게 쉬운 거였어?”

“흐음, 다른 사람은 몰라도 나한테는 쉬웠어. 별다른 명령이 없더라도 계속 지키도록 이 장소에 못 박아 둔 모양인데, 그래서야 제어권이 허술하지. 나는 그걸 건드려서 제어권을 획득한 거고.”

“정말이지 넌······.”

아리엔은 자신의 소꿉친구에게 새삼 감탄하고 말았다. 이럴 때마다 그 천재성의 한계가 어디까지인지 궁금할 지경이었다.

“아무튼 확인해보자. 듀라한을 여기에 박아놔야 할 만큼 이 안에 감춰둔 게 뭔지 말이야.”

“그래.”

리스티의 말에 고개를 끄덕인 아리엔은 듀라한이 지키고 있던 문턱을 넘어섰다. 그러자 그 안의 정경이 드러났다.

“여긴······?”

“감옥? 아니, 수감시설이라고 해야 하나?”

리스티의 말처럼 그냥 범죄자들을 가둬두기 위한 감옥과는 달랐다. 이곳은 사람이나 지성체가 살 수 있도록 꾸며놓은 꽤나 넓은 실내 공간이었다. 다만 도망치지 못하도록 주변을 쇠창살로 둘러놨다는 게 다를 뿐이다.

그런 공간이 이 안에 수백 곳이나 되었다.

그것을 본 아리엔의 눈동자가 혼란스럽게 변했다.

“대체 이런 대규모 수감시설이 왜 하이브 근처에 숨겨져 있었던 거야?”

“일단은 이 안을 살펴보자. 여기 수감된 사람이 누가 있는지부터 말이야. 그러면 대충이라도 결론이 나오겠지.”

“···그래.”

리스티의 말에 고개를 끄덕인 아리엔은 즉시 움직이기 시작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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